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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98화 (98/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98화셀리나는 황제의 무릎 위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오?”

중앙 대륙의 7할 이상을 다스리는 거대 제국 모나크.

그리고 그 모나크를 지배하는 검의 황제 넬라크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일평생 검과 함께 살아온 무인인 그는 오늘 같은 상황이 늘 낯설었다.

“귀여우셔.”

셀리나는 넬라크의 귀를 살짝 매만졌다.

그리고 귀까지 새빨개진 넬라크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가 폐하를 보며 검의 황제라고 생각하겠어요?”

“나는 검의 황제가 아니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던데요.”

“그거야 내가 황제니까 하는 말이지.”

넬라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에게 ‘검의 황제’라는 이름을 붙여야만 한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의 황제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자는 북방을 지키는 자.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최전선의 방패 헤론 공작일 것이다.

“어쨌든 귀여우셔요.”

“내 체면을 좀 생각해 주면 좋겠소.”

“귀여운 게 어때서요? 귀여운 게 제일이에요.”

넬라크는 크흠, 헛기침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셀리나였는데 요즘 유독 더 예쁘고 아름다워 보인다.

셀리나가 말했다.

“우리도 물망초 연회에서 처음 만났었죠? 당시 이름은 여린 물망초연회였어요.”

지금이야 열두 살이 되면 사교계에 입문한다지만 당시는 일곱 살에 사교계에 입문했다.

그것을 일컬어 예행 연습이라고 보통 표현했다.

일곱 살부터 열두 살까지 결혼하지 않은 소년과 소녀들의 사교 모임.

그것이 바로 여린 물망초 연회였다.

“거기서부터 저는 폐하를 점 찍었어요.”

셀리나와 넬라크는 동갑이었고 일곱 살의 ‘여린 물망초 연회’에서 처음 만났다.

“폐하는 검밖에 모르는 미련퉁이였지만요.”

넬라크가 셀리나를 여자로 보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넬라크는 일생에 검밖에 모르던 사내였다.

“오랜 시간 기다려 주어 늘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소.”

넬라크는 다정한 눈빛으로 셀리나를 바라보았다.

셀리나는 늘 한결같았고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다.

셀리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황제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 물망초 연회에서 굉장히 기대되는 아이가 있어요.”

“누구요?”

“비올라 벨라투, 겨울성의 입양 딸이요. 사교계 입문 전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아주 사방에 퍼뜨리더군요.”

“벨라투는 중앙 대륙에 진출하는 것을 꺼리오.”

“알아요. 그들은 그들의 사명에 살아가는 명예로운 분들이죠.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잖아요.”

“그렇다기보다는 같잖은 것들의 음해공작과 정치질이 귀찮을 뿐이겠지.”

넬라크는 헤론을 잘 알고 있다.

헤론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까지도.

넬라크는 가끔 헤론이 부러웠다.

‘그자는 지금 더 강해져 있겠지.’

끝없이 마물이 쏟아져 나오는 ‘눈이 부는 곳’에서 매일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살 떨리는 전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검을 휘두르고 있을 터.

그자는 그것이 즐거운 것이다.

역대 벨라투는 늘 그래 왔다.

북방의 지배자로서 그 자리에 고고히 서 있는 집단.

북방에서 잘 내려오지 않아 그 세력이 과소평가되어 있는 무인들의 집합체.

“그 벨라투가 중앙 대륙으로 진출하려고 한다면 어떠세요?”

“벨라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오.”

귀찮기도 귀찮거니와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강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는 법이다.

벨라투는 너무 강했고, 모든 세력의 견제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가장 강력한 방패는 가장 강력한 창이 되기도 하니까.

“방패로서 가장 든든한 이들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무기로서 가장 두려운 이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들은 겨울성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여태까지는 그래 왔지요. 그러나 제가 본 비올라 벨라투는 달라요.

남방의 폭풍 요새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쌓았고, 힉슨 경을 자신의 사람으로 삼았어요.”

“힉슨?”

“네. 대륙 여기저기에 발을 걸쳐놓은 그 힉슨이요.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루이바르텐가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혔다고 하네요.”

“루이바르텐가에게?”

확실히 벨라투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북방의 벨라투.

파르아의 루이바르텐.

둘은 접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 완전히 다른 장르의 두 가문이었으니까.

“무려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의 스승이 남겨준 선물까지 받아 왔다고 해요. 저는 이것들을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비올라는 열 살 환영 만찬회에서 벨라투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리고 ‘하얀 벨라투’를 선택하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알고 있는 거예요. 지금의 벨라투로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벨라투는 가장 강력한 가문이었지만 세계를 지배한 적은 없었다.

세계는 늘 벨라투보다 약한 자들이 지배해 왔다.

“그래서 그 아이는 벨라투를 완성하고 싶은 거예요. 완성된 벨라투.

대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반역이라도 꿈꾸고 있다는 소리요?”

“글쎄요. 저는 그것을 파악해 보고 싶어요. 그 아이의 꿈이 얼마나 원대한지.”

셀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원대한 꿈이 제국에 이득이 될지, 피해가 될지에 따라 그 아이의 운명이 달라지겠지요.”

셀리나는 모나크 제국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넬라크와 함께 성장시켜 왔다.

말하자면 모나크 제국은 셀리나의 분신이기도 했다.

“그 아이의 꿈이 아름답다면 저는 그 아이를 품어 제국을 더욱 번영시킬 것이고.”

반대로,

“그 아이의 꿈이 불결하다면 저는 다른 선택을 해야겠지요.”

넬라크의 몸이 움찔했다.

넬라크는 세상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셀리나만큼은 두려웠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셀리나였다.

“일단 지금은 우리의 시간에 집중해 볼까요?”

어린 시절부터 둘만 있을 때에는 남몰래 불러왔던 애칭을 넬라크의 귓가에 속삭였다.

“넬라.”

A

“귀빈 여러분께 한 가지를 제안하려 합니다.”

셀리나는 제국의 2인자였고, 혹자는 1인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든 셀리나의 제안을 거부하거나 거절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귀빈 중에는 특별한 소년 소녀들이 존재해요. 물론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특별하지만, 이번 자리를 더욱 귀히 빛내주실 분이 몇몇 숨어 있답니다.”

사람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주최 측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하는 경우.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여러분은 그분들을 찾아 짝을 이 뤄주시면 좋겠어요. 제한은 없어요.

소녀와 소녀가. 소년과 소년이. 소년과 소녀가.”

물망초 연회는 어린 자제들의 연회다.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 자제들의사교 모임.

“열두 살과 열일곱 살이.”

나이 차.

성별 차.

신분 차.

그 어떤 것도 관계없다고 하였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짝을 이루어주세요. 숫자도 상관없답니다. 특별한 분들만 포함되어 있으면 돼요.”

열 명이 짝을 이루어도 좋다고 했다.

그 안에 셀리나가 말한 ‘특별한 사람이 몇이나 포함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다.

“일곱째가 되는 날. 저는 좋은 짝을 만난 분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해드릴 참이랍니다.”

셀리나가 하나의 물건을 공개했다.

황궁 보물 창고에서 가져온 물건이었고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이걸 선물로 드리겠어요.”

수많은 자제의 눈이 번뜩였다.

블루 다이아몬드는 대륙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진귀한 보물이었다.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인데 크기가 어린아이의 주먹만 했다.

저 정도면 지방 중소 규모 이상의 영지를 사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자작 이상의 작위를 사는 것도 가능할터.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의 보물이었다.

다들 블루 다이아몬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만, 비올라만큼은 예외였다.

‘이상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

정말 이상했다.

왜 자꾸 셀리나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것 같지.

‘원작에 없었던 내용이 갑자기 튀어나온 건 내 탓일 거야.’

그러면 셀리나가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비올라 자신일 확률이 제일 높았다.

나 하나 때문에 이런 거창한 이벤트를 벌였을 리는 없는데.’

셀리나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셀리나는 굉장히 유능한 대신이었고, 그녀는 작품 속 천재로 묘사되었다.

‘안 되겠다. 더 몸 사려야겠다.

비올라는 직감했다.

이번 물망초 연회야말로 가장 숨죽이고 설설 기어야 하는 에피소드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망초 연회가 시작되었다.

교향악단의 연주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고, 수많은 자제가 사교 모임을 이어갔다.

여기저기서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한쪽 편에서는 남녀가 짝을 이루어 왈츠를 추었다.

“비올라. 셀리나 대신이 말씀하신 ‘특별한 사람’이란 누구일까? 감이 오는 게 있어?”

“아니. 없어.”

어떤 특별한 임무를 가진 소년과 소녀들을 숨겨놓은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비올라는 알고 싶지 않았다.

셀리나의 눈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바람이었다.

“너는 어느 쪽으로 가볼 예정이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소녀와 소년들은 벌써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망초 연회의 첫날은 서로 이름도 밝히지 않고 가문도 알리지 않는다.

그것이 불문율이었다.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서로 다 알고 있지만, 어쨌든 암묵적인 규칙은 그랬다.

벌써 짝을 이룬 사람들과 달리 헤라와 비올라는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벨라투는 인류를 지키는 방패로서는 위대했지만 사교계에서 딱히 환영받는 가문은 아니었으니까.

“글쎄. 일단은 언니랑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나랑?”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보니 확실히 알겠네.”

“뭘?”

“벨라투의 입지를.”

“벨라투의 입지가 어떤데?”

“북방에서 내려오는 벌레들을 퇴치하는 벌레잡이.”

“벌레잡이치고 너무 명예롭지 않니?”

“아무리 잘 포장해 줘도 벌레잡이는 벌레잡이야.”

“벨라투를 모욕하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본다고. 이곳에 모인 수많은 저 중앙 귀족 중 진짜 마물들을 경험해 본 자제가 몇이나 있겠어?”

저들은 마물을 모른다.

당연히 마물의 무서움도 모른다.

저들은 따뜻하고 밝은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등 따시고 안락한 곳에서 남이 해주는 밥 먹고 춤을 추는 애들이잖아. 저들에게 있어서 벨라투는 그냥 좀 무서운 벌레잡이 정도인 거야.

저들에게 있어서 마물을 사냥하는 건 위험하고 더럽고 천한 일이고.”

하물며 그 벌레잡이는 중앙 대륙으로 진출하지도 않는다.

천하고 더러운 일을 하는 외지인.

사교계에 모인 중앙 귀족 자제들 입장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가문이 바로 벨라투인 셈이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고 싶지가 않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말은 그냥 변명이고 핑계였다.

‘그냥 냅다 가만히 있자.

오늘은 시기가 너무 안 좋다.

셀리나 대신의 눈을 피해야 했다.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은 겨울성 입양 딸의 모습을 연기 중이었다.

‘혹시 또 세나가 시비 걸러 오면 대충 화 좀 내주고.’

그러면 조금 더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셀리나 앞에서는 그 정도가 딱 좋았다.

연회 둘째 날.

그날은 아예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헤라와 함께 ‘달 그림자’ 밖에 조성된 정원을 산책했다.

휠체어에 앉은 헤라가 말했다.

“의외네. 사교계에 열성적일 것처럼 굴더니.”

“아무래도 많은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마음에 걸려? 뭐가?”

다행히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제르미가 나타났고-제르미는 이미 첫째 날에 대스타가 되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 셀리나의 속을 알 수도 없었다.

“그냥 여러모로, 셀리나 대신의 제안도 이상하고.”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제안 중 어디가 그렇게 이상했나요?”

왜.

왜 당신이 여기서 나와!

주최자는 연회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지!

일부러 연회에서 도망쳤는데, 당신으로부터 멀어졌는데,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비올라는 속으로 기함했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될 물망초 연회의 ‘주최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따사로운 햇살보다 더 따사로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풍성한 금발이 물결처럼 흩날렸다.

“비올라 영애를 비롯한 많은 자제분께 즐거운 제안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블루 다이아몬드는 굉장한 보물인걸요.”

셀리나가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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