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00화물망초 연회 3일 차.
많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어느 정도 그룹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비올라는 물망초 연회에 참석하는 시늉은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건 오히려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연회에 참석해 보니 다들 셀리나의 제안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중에 특별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글쎄요. 루나 영애께서 저희와 함께하시니 적어도 한 분은 포함되었겠지요.”
“과찬이세요. 저보다는 토인스 공자께서 귀인 아니실까요?”
비올라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허-하고 웃고 말았다.
헤라가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그냥. 다들 귀여워서.”
“귀엽다고?”
“응.”
비올라의 눈으로 보기에는 다들 아가들이다.
12세에서 17세까지 소년, 소녀들의 모임.
‘끽해야 초딩에서 고딩.
심지어 고 3도 아니고 고 1이다.
그런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네가 최고네, 아니, 네가 최고네 하고 있으니 가소롭기도 하고 나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툰드라는 숙소에 내버려 둔 채, 비올라는 헤라와 둘이서 연회를 즐겼다.
“물망초 연회에서 네 원래 속셈이 뭐였어?”
“말했잖아. 세나에 대한 복수, 감히 내 언니를 건드렸으니……….”
뭐라고 말해야 헤라가 납득을 할까.
원작 속 비올라였다면 어떻게 말을 했을까.
이, 이렇게 말하면 되려나.
“혀를 뽑아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아.”
“그런 거 말고, 원래 물망초 연회에서 하려고 했던 게 있었을 거 아냐.”
“글쎄.”
원래 물망초 연회에서 비올라가 하려고 했던 것은 라이몬 남작가의 쌍 쌍둥이 자제와 친분을 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라이몬 쌍둥이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연회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하려고 했었다.
참고로 라이몬 남작가는 골든 로드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는 남작 가문으로서, 지금이야 별 볼 일 없지만 훗날 거대한 상단인 라이몬 상단을 일구게 된다.
‘라이몬 상단은 테라 상단과 연합하게 되고…….’
두 거대한 상단이 힘을 합치면서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상단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힘은 고스란히 비올라에게 칼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헤라가 물었다.
“말 안 해줄 거야?”
“응. 셀리나 대신 때문에 몇 가지 변수들이 생겼거든.”
“비올라라면 변수를 뚫고 자신의 목표를 관철하는 공녀라고 생각했는데.”
“뚫기에는 변수가 너무 강대해서.”
헤라는 킥, 하고 웃었다.
비올라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내 동생을 잘못 보고 있었네.”
하얀 벨라투라면 나아갈 때와 물러 설 때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비올라는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강행할 때와 강행하지 않을 때를 확실하게 구별하고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까.
“칭찬이지?”
“응, 칭찬.”
그러던 사이 저 멀리서 꺅! 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르미가 등장한 것이 분명했다.
‘피하자.’
제르미를 피해 다니기란 참 쉬웠다.
제르미가 나타나는 곳마다 영애들이 탄성과 비명을 자아냈고, 덕분에 비올라는 제르미의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비올라는 헤라의 휠체어를 밀면서 또 웃고 말았다.
‘여기도 주접이 넘쳐 나는구나. 세상 주접이란 주접은 다 떨고 있네.”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르미 공자는 사실 신관이 아닐까요? 대관절 무엇을 믿고 저렇게 아름다운 것인지요.”
라든가.
“안 되겠어요. 어서 빨리 아버지의지하 냉동 창고로 가야겠어요. 제르미 공자를 보니 제 심장이 녹아내리고 있답니다.”
라든가.
비올라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와. 신박하네.”
이 세계에서도 떨 주접은 다 떠는구나.
지하에 냉동 창고라는 사치스러운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재력을 과시하는 한편 주접까지 왕창 떠는 일거양득의 화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영애도 느껴지시나요? 제르미 공자에게서 향이 나요.”
“향수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아뇨. 제 취향이요.”
정작 제르미는 그런 말들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
‘방금 비올라를 본 것 같은데.’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비올라였다.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네.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수많은 영애가 제르미를 감쌌다.
제르미와 대화를 하고 싶어 말을 하는데, 그들을 모조리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발! 저리 좀 가줘!’
제르미는 오늘도 비올라와 만날 수 없었다.
***
세나는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헤라와 비올라를 발견했다.
제르미는 비올라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세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비올라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헤라 공녀. 비올라 공녀. 연회장에서 뵈니 감회가 새롭네요.”
세나의 눈이 비올라의 머리끝 부터 발끝을 훑었다.
머리에는 어떤 장신구를 하고 있는지, 귀걸이와 목걸이는 무엇인지.
반지와 팔찌는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
드레스는 어떤 가문의 어떤 디자이 너가 제작한 것인지.
구두의 디테일은 어떠한지.
마치 전쟁터에 나선 기사처럼 상대의 무장을 모조리 읽어냈다.
“벨라투의 자제들은 올곧고 강인하여 겉모습 치장에 크게 공을 들이지 않는다 들었어요. 저는 그러한 벨라 투의 모든 분께 경의와 찬사를 보낸답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야만적이어서 패션을 모르고, 꾸민 모습을 보아하니 너도 별 볼 일 없구나’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이해했는지 세나를 따르는 몇몇 자제가 은은하게 웃었다.
“호호호, 비올라 영애와 마주하니 기분이 무척 좋은걸요.”
우아한 척 부채를 들어 올렸다.
부채에는 루이바르텐가의 표식과 숫자 7이 새겨져 있었다.
루이바르텐가의 한정판 모델이라는 뜻이었다.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만든 반지를 무려 여섯 개나 끼고 있었는데, 화려함이 과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쳤다.
‘와. 진짜 과하다. 저걸 진짜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가?’
목걸이는 큼지막한 진주를 통으로 엮어 만들었는데, 그 알이 어찌나 크고 굵은지 목이 아플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마리앙투 공작가는 모상황과 환경에서 뛰어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들었어요.”
“물론이지요. 마리앙투 공작가는 품위와 품격을 중시한답니다.”
“그래서 돼지 목에도 진주 목걸이를 걸어준다지요?”
비올라의 시선이 세나 공녀의 목을 향했다.
세나 공녀를 비롯한 자제들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호호, 비올라 영애는 농담을 참 잘하시는군요.”
그러자 세나 공녀 뒤의 자제들도 따라 웃었다.
“벨라투에서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기도 하나 봐요?”
“그 무슨 사치스러운 말씀을. 벨라 투는 돼지 목을 자르죠.”
또 세나 공녀의 목을 쳐다봤다.
살성을 가진 비올라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세나는 순간 세상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커온 세나 공녀에게 비올라의 기세는 거의 살기와도 같았다.
“그렇군요. 역시 벨라투는 강인하네요. 부디 사교 모임에서는 강인함을 부드러운 미소 아래 숨기시길.”
너희 같은 야만적인 것들은 사교모임에는 어울리지 않는 종자들이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했다.
비올라는 웃고 말았다.
겁을 잔뜩 먹은 와중에도 할 말은다 하는 세나 공녀를 보니 참 귀여웠다.
세나는 끝까지 자존심을 부렸다.
“아참. 혹시 비올라 공녀께서는 제 르미 공자와 말씀을 나눈 적이 있나요?”
질문이 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별로 없어요.”
비올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명인 쿠룸쿠룸의 드레스는 그 식은땀을 순식간에 기화시켜 날려주었지만, 등골은 계속해서 오싹했다.
‘와. 이 시선 뭐야?’
흘러나오는 오페라의 선율도.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주변의 수많은 영애가 한꺼번에 비올라 자신의 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제르미야. 이 세계의 1세대 아이돌.’
제르미랑 엮이면 좋을 게 없다.
극성 팬과 주접 팬이 난무하는 이 세계 속에서 제르미와 친분을 과시했다가는 골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시군요. 저는 제르미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세나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승리자로서의 승리를 만끽하는 듯했다.
“나중에 저와 함께 식사 자리를 갖기로 하였답니다.”
시선이 쏟아졌다.
세나는 그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아. 그렇군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딱히 부럽지도 않고 축하할 일도 아니었다.
저 귀찮은 제르미와 식사하는 게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비올라는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세나도 세나지만, 제르미가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밀며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세나가 집요하게 붙잡았다.
“비올라 공녀. 저와 함께 스무디를 즐기지 않겠어요? 제가 제르미 공자를 소개해 드릴 수 있어요.”
야. 건들지 마.
나 제르미랑 만나기 싫다고.
제르미가 분명 환하게 웃으며 알은 척을 할 텐데, 그러면 일이 아주 피곤해진다.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세나는 비올라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비올라가 제르미를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혹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제르미 공자와 친한 것에 큰 질투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디 한번 망신을 당해보세요, 비올라. 나는 당신이 망신당하는 꼴을 기어이 봐야겠으니.’
비올라의 손을 잡았다.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저희 주방장이 직접 담근 청으로 만든 오렌지 에이드는 어떠세요?”
제르미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 비올라! 드디어 만났다! 보고 싶었어!
등의 망발을 하면 인생이 피곤해질 것이다.
비올라는 세나를 때려눕히고 도망쳐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주문이 들려왔다.
그 주문은 마치 노랫소리처럼 연회장 안에 계속 흘러나왔다.
“뜨거운 바람이 사막으로부터 불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