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02화셀리나 대신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만요, 폐하.”
비올라는 저 모습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셀리나가 애초에 황제의 말을 끊고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폐하이셔도 원칙은 지켜야지요.”
셀리나가 비올라 쪽을 쳐다보았다.
“비올라 영애는 필요에 따라 변호인단을 선임할 수 있어요. 지금 하는 모든 말은 비올라 영애에게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비올라 영애가 변호인단을 선임한다면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줄 수 있어요.”
비올라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
셀리나는 아주 따스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셀리나의 시험이었다.
‘셀리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는 캐릭터야.”
아무 근거 없이 믿지는 않는다.
셀리나는 당당한 태도와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신뢰를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통찰력과 안목이 뛰어 나니까.’
그래서 셀리나는 사람을 관찰하고 시험하는 것만으로도 그 진의를 금방 파악하는 캐릭터였다.
‘엉거주춤하면서 변호인단을 선임하는 것 자체가 나한테 불리하게 작용하겠지.’
뿐만 아니라 비올라는 벨라투다.
벨라투가 스스로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여 변호인단을 선임한다?
결코 좋지 못한 선택이다.
까짓거…!’
지난 5년 동안 해왔던 것이 이 짓이었다.
이 짓도 많이 익숙해졌고, 이제는 상대가 넬라크와 셀리나로 바뀌었을 뿐이다.
“변호인단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어째서죠?”
“저는 추궁을 당할 만한 그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황제 폐하께서 판단하실 문제인걸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셀리나 대신 님께서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해요.”
“비올라 영애가 알고 있는 것?”
“네. 몇 년 전부터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는 ‘열풍’이요.”
셀리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열풍에 대해 알고 있다고 소설에 적혀 있었다.
거기서 말하는 ‘아주 오래전’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언급된 적이 없었다.
‘제발 알고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첫 단추다.
눈치를 살펴봤지만 셀리나의 표정이나 눈빛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아냐. 모르고 있어도 상관없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셀리나 대신이 알고 있으면 좋겠지만, 몰라도 상관없도록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면 된다.
“저는 5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열풍에 대해서.”
다시 한번 셀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셀리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때 저는 일곱 살이었죠.”
다시 말해 일곱 살의 비올라가 알고 있던 사실을 대신(大臣) 셀리나가 모르고 있었냐는 뉘앙스였다.
비올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곱 살의 제가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셀리나 대신님께서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해요.”
은근한 신뢰를 드러냈다.
셀리나는 대답을 해야 했다.
“비올라 영애는 제게 대답을 강요하는군요. 제 대답이 ‘알고 있었다.
여야만 하도록.”
셀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정확한 답을 내려주지는 않았지만 비올라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비올라는 여유로이 웃으며-속으로는 심장이 덜덜 떨렸다-대답했다.
“강요보다는 확신과 기대라고 해주세요.”
“확신은 알겠고, 기대는 어떤 기대 죠?”
“제가 본 셀리나 대신님은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위대한 분이셨거든요. 황제 폐하께 골든 로드를 제안하실 만큼.”
이 말은 진심이었다.
셀리나는 정치적 힘이나 이권 다툼보다는 오로지 제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캐릭터였다.
한아린은 그러한 셀리나의 모습을 좋아했었다.
“저는 그런 셀리나 대신님의 모습을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연기에 더해 진심이 담겼다.
안목이 무척 뛰어난 셀리나는 그 진심을 읽어냈다.
“누군가로부터 그러한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죠. 좋아요. ‘열풍’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요. 비올라 영애가 듣고 싶은 말이었나요?”
“네.”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셀리나는 비상식이 가득한이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서 비교적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헤론 공작처럼 모든 것을 조심해야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는 헤론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저는 열풍에 대해 오랫동안 조사해 왔어요.”
“열풍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정말 적어요. 심지어 황제 폐하께도 보고 올리지 않았던 사항이에요. 열풍에 대해 어떻게 알았어요?”
“저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열풍과 관련이 있거든요.”
비올라는 차례대로 이름을 말했다.
“툰드라. 힉슨 경. 재칼 경. 그리고 에르사 집사까지.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어요.”
“툰드라는 비올라의 반려검이고 획슨 경은 헤론 공작님의 전우이자 전 직 흑경(黑鯨:검은 고래), 재칼경은 폭풍 검, 에르사 집사는……… 남방의 검귀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네.”
“그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툰드라는 납치를 당하던 중에 제가 구출해 냈어요. 나머지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납치됐었죠. 익슨 경과 에르사 집사는 딸을, 재칼경은 아들을.”
비올라는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툰드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납치를 당할 만큼 허술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납치를 당했고 비이성적인 행동까지 일삼았어요.”
힉슨은 폐인으로 지냈고 재칼은 갑자기 벨라투에 대적했으며 에르사는 검귀로 이름을 날렸다.
“그 정도 되는 무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도 이상한데, 거기에 똑같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상했어요. 그런 사람이 무려 세 명이나 된다는 사실도요. 이것들이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고 보면 크게 이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모두 연결해 놓고 보면 이상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짓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벌이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그 단체의 이름이 열풍이라는 사실도 알아냈어요.
제 주장을 뒷받침할 증인으로 힉슨경을 요청합니다.”
“열풍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한 모양이네요. 힉슨 경을 굳이 소환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열풍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비올라 영애는 인간을 매개체로 한 마법 폭탄이 터질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죠?”
비올라는 남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제게는 살성(殺星)이 있어요.”
넬라크 쪽을 힐끗 쳐다봤다.
“황제 폐하와 셀리나 대신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한번 보여 드릴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넬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라가 살기를 끌어올렸다.
소설 속 주인공 비올라의 신체는 비올라의 의지에 쉽게 반응해 주었다.
비올라의 눈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어마어마한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넬라크는 비올라의 눈을 쳐다보았다.
‘피부가 따끔따끔하군.’
열두 살에 저 정도 살기를 뿜어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살기만 놓고 보면 3급 기사, 그 이상이다.
근본적인 살기를 타고난 신체였다.
몇백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살성을 가진 아이가 분명했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비올라가 살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는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니까.
머리로 알던 것을 눈으로 확인했을 뿐이었다.
“저는 살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살기에 대해 그 누구보다 예민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살기를 끌어올리는 것보다, 그 살기를 없애 버리는 것이 훨씬 힘든 일이다.
원래는 그렇다.
그렇지만 이 신체는 조금 유별났다.
육체와 정신이 따로 놀다 보니, 집중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몸 속에 내 재된 살기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넬라크가 놀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살기를 순식간에 없애 버렸어?’
그야말로 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는 살성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어요.
비올라는 검의 황제 넬라크 앞에서 그것을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대대로 살성을 지니고 태어난 자는 지극히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비올라는 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한편 황제 앞에서 자신의 제어력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일절 흐트러짐이 없군.’
흐트러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이득을 다 취하고 있다.
과연 철혈 공녀다운 태도이고 자세였다.
“살기에 예민한 만큼, 저 소년의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었어요.”
사실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비올라의 앞선 말들과 당당한 태도 덕분에 셀리나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전에도 경험했어요. 제가 사랑하는 가게인 아줄레지아에서.”
이번에는 시선을 셀리나 쪽으로 향했다.
셀리나라면 그때 그 사건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워낙 큰 사건이었다.
겨울성에 방문했던 세알 자작가의 장남 젤톤이 참수된 사건이었으니까.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비올라 영애가 특사로 파견되었던 건이죠? 내막이 있을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네. 젤톤은 흑마법에 중독된 상태였고 그대로 두었다면 거대한 폭발이 있었을 확률이 높아요. 누군가가 젤톤 공자를 생체 폭탄으로 개조하려고 했었죠.”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셀리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셀리나 역시 조사를 끝낸 상황이었으니까.
자작 부인의 외도에 대해서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젤톤이 흑마법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셀리나도 알아낸 상태였다.
셀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열풍이라는 악한 단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뛰어난 무인들이 이성을 잃고 행동했던 걸 통해 흑마법의 일종에 당했다는 것을 파악하여 열풍이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뒤, 고인이 된 젤톤 공자를 통해 마나 폭발 등을 알아차렸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까요?”
“네. 거기에 제가 가진 살성의 힘으로 저 소년의 이상함을 눈치챘고, 열풍이 설계한 마나 폭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어요.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비올라가 의도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것을 결과가 말해주고 있었다.
비올라의 말에는 한 치의 틀림이 없었고, 그녀의 태도는 당당했다.
검의 황제마저 감탄할 만큼 말이다.
‘대단한 아이다.”
아무리 당당하더라도 넬라크와 셀리나 앞에서 이토록 말을 하는 영애는 처음 봤다.
그러나 사실 비올라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하는 게 맞기는 한데, 넬라크와 셀리나의 눈빛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날 너무 좋게 보지 말아줘요.’
제국으로 스카우트하겠어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비올라 입장에서 결코 이롭지 못했다.
최악을 면하고 차악을 맞이하는 셈이었다.
‘내 가늘고 길고 행복한 여생에 문제가 생기지만 않으면 좋겠다. 제발’아니. 안 되겠어.
혹시라도 나를 스카우트하지 않도록 연막을 뿌려야겠어.
비올라가 한마디를 더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