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03화본의 아니게 빙의자로서의 똑똑함을 드러냈다.
이것에 후회는 없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대참사가 일어났을 테니까.
제국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편이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을 잃는 편보다는 나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똑똑함을 뽐내야겠어.
작전을 좀 바꿨다.
‘내 잘남을 과신하여 조직의 협력과 화합에 방해가 되는 독불장군처럼 보이자!’
아무래도 지금은 그 포지션이 최고인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지금 황궁에 계셔야 할 시간으로 사료됩니다.”
이제 주도권은 비올라에게 넘어갔다.
모나크 제국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원칙이었다.
원칙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넬라크도 평생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
셀리나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황제 폐하는 모나크의 유일한 태양.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감히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비올라의 시선이 셀리나를 향했다.
“하지만 셀리나 대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넬라크의 유일한 약점인 셀리나를 언급하자 넬라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셀리나 대신께서는 황제 폐하께서 농땡이를 치고 여기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제논이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제논조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농땡이요?’
황제에게 누가 저런 표현을 쓴단 말인가.
비올라가 아니라 헤론이어도 저런 표현은 쓸 수 없다.
저 표현 자체가 중차대한 범죄라고 볼 수는 없지만 황제의 심기를 크게 거스를 수도 있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셔야 하는 셀리나 대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연인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실격이겠지요.”
“비올라 영애,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넬라크는 기분이 나쁜 것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셀리나를 걸 고넘어지는 것은 용서하기 힘들었다.
비올라의 몸이 달달 떨려왔다.
‘으. 무서워 죽겠네.”
그나마 다행인 건 난쟁이족의 명품인 이 연보라색 드레스가 모든 생리 현상을 숨겨주었다는 것이다.
몸이 달달 떨리는 것, 체온의 변화,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이 모든 것을 가려주었다.
말하자면 이 드레스는 성능 좋은 가면이었다.
그런데 셀리나가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비올라에게는 죽음의 사신이 내는 소리 같았다.
‘왜죠?’
왜 이 타이밍에 박수를 치는 거 죠?
박수 나올 타이밍이 아니라 ‘저 재수 없는 꼬맹이가 아주 지 잘난 맛에 떠들어대는군과 같은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요.
“비올라 영애. 지금 그대의 모습이사교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대신께서는 태양을 돕는 위치이며, 태양이 제자리에 떠 있을 수 있도록 도왔어야 했습니다.”
저는 조직생활에 이렇게 도움이 안돼요.
비록 바른 말이지만 상사한테 따박따박 말대꾸하며 팀워크를 해친다고요.
그러니 제발 저를 내쳐주세요!
“물론 맞는 말이지요. 하나만 물을 게요. 비올라 영애가 보는 저는 훌륭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나요?”
“네.”
슬슬 불안해졌다.
작중 천재 캐릭터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상황을 이끌어갔다.
왠지 오늘도 그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과연 오늘 ‘열풍’의 테러를 몰랐을까요?”
몰랐잖아!
비올라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외칠 수 없었다.
몰랐다고 말하면 여태껏 비올라가 말해온 모든 말에 모순이 생겨 버린다.
“그리고 열풍의 폭탄 테러를 누가 조용히 막아낼 수 있을까요?”
셀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의 꿈나무들이 상할 것이 저어되어 직접 오셔서 참사를 막아주신 거랍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셀리나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고 그에 따라 비올라는 더욱 불안해졌다.
“………예?”
예
“자신의 야망을 숨김없이 다 드러내면서, 굳이 그렇게까지 겸손한 척하지 않아도 돼요.”
…예?
제가 야망을 드러냈어요?
언제요?
비올라는 속이 점점 갑갑해졌다.
아니! 나 진짜 몰랐다고요, 언니!
“비올라 영애는 늘 똑똑했어요. 사교계 데뷔 이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철저히 계획하여 움직였죠.”
그런 적 없는데요.
저는 도망쳤는데요.
비올라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황제 폐하와 제가 기분 나쁠 만한 사실을 굳이 언급하며 제 대답을 촉구했어요.”
“………..”
“똑똑한 비올라 영애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아뇨!
그럴 리 있습니다.
왜 절 그렇게까지 좋게 보는 건가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노림수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셀리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개미지옥에 빠져서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노림수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분명히 터졌어야 할 폭탄 테러를 누가 막아낸 건지 확실하게 알고 싶었던 거겠지요. 황제 폐하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미 그대는 예상했을 거예요.”
넬라크는 잠자코 셀리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넬라크에게 있어 이 상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름답구나.’
넬라크의 눈에 셀리나는 우아했고 아름다웠다.
검에 미쳐 있던 넬라크는 이제 셀리나에 미쳐 있었다.
‘그저, 셀리나,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오.’
넬라크는 셀리나가 하는 말을 가로막지도 않았고 다른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한순간, 한순간, 셀리나의 모든 말을 귀에 담고 모든 행동을 눈에 담기만 했다.
그의 세계에는 셀리나 한 명만이 있는 것 같았다.
셀리나가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진지한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었어요. 꼭 확인하고 싶었을 거예요.”
셀리나는 자신에게 미쳐 있는 넬라 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폐하께서 폭발을 막아주신 것이 맞으시지요?”
“그렇소.”
“어떻게 막으셨나요?”
베었소.”
넬라크는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대답하여 셀리나의 모습을 눈에 담기 바빴다.
셀리나가 또 빙그레 웃었다.
“어때요? 그 호기심이 해결되었나요?”
네.”
뭔가 많이 잘못된 것 같지만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비올라 영애는 대성(大成)할 자질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네요.”
“제게 대성할 자질이…… 있나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자세. 미지를 참지 못하는 학구열, 저는 그러한 자세가 대성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라고 보거든요.”
셀리나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앞으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직접 물어봐도 좋아요. 오늘처럼 빙빙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비올라 영애의 훌륭한 자질과 모습은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 다음 좋은 기회에 따뜻한 인연으로 만나면 좋겠네요.”
그날 밤.
셀리나는 스카우트 대상 목록을 갱신했다.
원래는 1위부터 10위까지 적혀져 있었는데, 그 위로 0위가 생겼다.
셀리나 대신이 목록을 작성한 이래로 처음이었다.
[0위. 비올라 벨라투.]
*****
마차 안.
세이반 마르코스는 곁눈질로 눈앞의 미남자를 쳐다보았다.
‘역시 아름다우시단 말이야.’
그 평생 이토록 아름다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하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질 수는 없는 중독성 있는 남자.
그 남자는 바로 헤론 벨라투였다.
“제논으로부터 송신 보고가 들어왔는데, 제가 읽어드릴까요?”
헤론이 고개를 끄덕였고 세이반 마르코스가 보고 내용을 읽었다.
“……하여 비올라 영애가 참사를 막아냈으며 셀리나 대신이 상당한 호감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셀리나 대신과 서신을 나눌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 공작님?”
세이반 마르코스는 보고 내용을 보며 신기해하는 한편, 공작이 굉장히 뿌듯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보고의 내용은 놀라웠다.
12살의 벨라투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만 쏙쏙 골라 보여주고 있었다.
검제 넬라크와 대신 셀리나 앞에서 보여준 비올라의 모습은 벨라투 그 자체였다.
‘근데 왜 기분이 나빠 보이시지?”
세이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벨라투를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가?’
헤론 공작에게는 그런 방법이 있는 걸지도.
세이반 마르코스는 보고를 끝마치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마차 안에는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헤론이 말했다.
“세이반.”
“네, 공작님.”
“셀리나 대신에 대해 잘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아는 대로 얘기해봐.”
세이반은 셀리나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얘기하였다.
세이반은 셀리나 대신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여린 물망초 연회에서 만나 깊은 친분을 다졌었고, 지금도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그녀의 관심사는?”
“훗날 제국을 번영시킬 재목들을 발굴하는 것에 열정을 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비올라 영애가 그 눈에 든 것 같네요.”
“그녀가 매년 스카우트을 한다지?”
“그렇습니다. 매년 1월 1일. 공식으로 스카우트하게 되는데, 수많은 귀족 자제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헤론은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울성이 비올라를 담기에 부족한 그릇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비올라 영애가 성장하기에 비옥한 환경은 아니지요.”
“인간은 극한의 환경에서 더욱 높이 성장하는 법이다.”
그 말을 끝으로 헤론은 침묵했다.
세이반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공작님이 오늘 말이 많으시네.”
꼭 필요한 말 아니면 하지 않는 분인데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마치 스카우트를 싫어하시는 거 같은데?’
하얀 벨라투로 진로를 선택했다면 대신의 스카우트를 받는다는 것이 커다란 업적이 될 수 있다.
훌륭히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헤론은 그거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하네.’
이상해서 더 매력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분이셔.’
그는 헤론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냥 마음 편하게 매력으로 받아들였다.
***
하이릴스 후작가의 명예가 조금 실추되기는 했지만 물망초 연회는 큰 탈 없이 진행되었다.
비올라는 제르미를 열심히 피해 다녔고 물망초 연회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물망초 연회 6일 차.
세나 공녀는 끈덕지게 비올라를 쫓아다녔고, 결국 비올라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무리는 일곱으로 불어나 있었다.
“비올라 공녀!”
세나는 비올라를 훑었다.
‘또 똑같은 옷.
어떻게 5일 동안 똑같은 옷과 똑같은 장신구를 하고 있단 말인가.
‘다른 장신구들은 미묘하게 바꾸고 있다지만.’
그리고 화장법도 좀 바꾼 것 같았다.
기묘한 느낌이 났다.
누구에게 화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화장만큼은 인정해 줄 법했다.
‘화장술사의 능력이 뛰어나면 뭐 하겠어?’
그래도 사교계란 전쟁터에 필요한 것은 역시 아름다운 장신구와 빼어난 옷이다.
비올라는 그 기본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 머저리였다.
적어도 세나가 보기에는 그랬다.
‘특히!’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볼품없는 저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5일 내내 같은 반지를 차고 있다니.’
사교계에 대한 상식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벨라투가 가난하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야 뭐야.
세나는 속으로 비올라를 비웃었다.
“비올라 공녀께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녀가 보석함을 하나 내밀었다.
“제 마음을 담은 반지랍니다.”
말하자면 적선이었고, 하나의 반지를 계속해서 끼는 것을 비웃는 행위였다.
세나 공녀를 필두로 뒤에 선 여섯명의 남녀가 비올라를 바라보며 웃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