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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05화 (105/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05화물망초 연회는 귀족가의 어린 자제들의 사교모임이다.

그들을 위한 특별한 전통이 있었다.

바로 6일째 되는 날에 대륙의 영웅을 초빙하여 연설을 듣는 것이었다.

어린 자제들은 연사의 말을 들으며 꿈과 희망을 키웠다.

그런데 이번 연설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연사로 좀처럼 나서지 않는 사람이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며칠 전, 셀리나는 서신 한 통을 받았다.

“헤론 벨라투 공작이 서신을 보내 요청했어요. 스스로 연설하겠대요.”

“헤론 공작이?”

넬라크로서도 의외였다.

“그라면 자격이 충분하기는 하지만….”

“의외죠? 사교모임이라면 질색인 분일 텐데.”

“의외군. 그가 먼저 요청하다니.”

“아무튼. 헤론 공작님은 왜 갑자기 물망초 연사를 하겠다고 나섰을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사랑스러운 딸의 데뷔탕트를 두 눈에 담고 싶어서라든가?”

“그대에게 들은 농담 중 제일 황당한 농담이군.”

“역시 그렇죠?”

그럴 리 없다.

상대는 천살 공작 헤론 벨라투지 않은가.

“아무튼 재미있을 것 같아요. 헤론공작님이라면 자제들에게도 큰 도전이 될 거예요.”

셀리나는 헤론 공작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여전히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저 비올라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유추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셀리나는 헤론 공작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게 아니었어.’

사실 셀리나는 비올라와 세나 공녀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으나 마법력을 일으켜 그쪽의 상황을 주시하던 차였다.

‘세나 공녀에게는 저 정도 뛰어난 아티팩트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없겠지.’

그게 잘못은 아니다.

셀리나도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한 반지인 줄 알았으니까.

아직 어린 영애인 세나가 저 반지의 가치를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비올라에게 좋은 구실을 던져줬네.

셀리나는 벨라투와 마리앙투 사이의 깊은 갈등의 골을 알고 있다.

골든 로드 계획을 가장 극심하게 반대했던 가문도 마리앙투였다.

그러니까…… 비올라는 미끼를 던졌고, 세나 공녀는 그 미끼를 물었어.’

셀리나가 파악한 비올라는 허튼짓은 하지 않는 공녀였다.

그런 공녀가 굳이 세나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고, 저토록 유치한 싸움을 이어간다?

‘노리는 바가 분명히 있는 거야.’

비올라와 헤론 공작이 그리는 큰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헤론 공작님과 함께 무언가를 모의할 만큼, 벨라투 내에서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비올라 공녀는 이미 그만큼 성장한 거야.’

셀리나는 너무 똑똑한 나머지 비올라의 의중을 완전히 거꾸로 해석해 버렸다.

‘뭔가를 보여주겠네.”

기대해 보기로 했다.

***

천살 공작 헤론 벨라투의 등장에 주변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어찌나 조용해졌는지 그의 발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릴 정도였다.

헤론 공작의 연설은 간단했다.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 전진하라’ ’라는 메시지를 담은 그의 연설은 담백하고 깔끔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셀리나 대신이 말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많은 자제분 중 헤론 경께 질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까요?”

귀족들의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는 셀리나 대신이 자리하고 있다.

얼마나 유익하고 현명한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셀리나 대신의 눈에 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나 공녀가 손을 들었다.

“마리앙투 공작가의 세나라고 합니다. 위대한 북방의 지배자이자 인류를 지키는 최전선의 방패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비올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딸에게 반지를 선물하는 아버지조차 흔치 않은데, 심지어 그 사람이 천살 공작이라고?

마도명장이 제련해서 만들어줬다.

고?

‘순 개뻥!’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개망신을 당해보세요, 비올라.’

세나가 당당히 물었다.

“공작님께서는 공명정대하면서도 철두철미한 분이라 들었답니다. 후 계자들의 후계 경쟁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관장하고 조율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분께서 혹시 막내딸에게 특혜를 베풀어 귀중하고 소중한 반지를 선물하셨나요? 누군가는 그 반지가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반지라고 화를 내는데, 도무지 믿기가 어려워 질문해 봅니다.”

위대한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일삼은 한심한 입양 공녀.

비올라는 앞으로 그런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세나를 바라보며 헤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선물했다.”

순간, 세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헤론 공작이 선물해 주었다는 사실에도 충격이었지만, 이런 공식 석상에서 자신에게 대놓고 반말을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셀리나 대신조차도 존대했는데 말이다.

이건 엄연한 모욕이었다.

‘야만적인 가문 아니랄까 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헤론은 셀리나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기분 나쁜가?”

“공식 석상에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셀리나 대신께서도 그 자리에서는 존대하여 주셨거든요.”

“나는 셀리나 대신이 아니니까.”

세나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 세상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헤론은 자신의 기세를 일부러 내뿜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조절해 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분산되어 있던 헤론의 기세가 세나에게 닿자, 세나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셀리나 대신이 박수를 한 번 쳤다.

“친애하는 헤론 경. 그대는 지나치게 뛰어난 무인이고, 세나 공녀는 그대의 자연스러운 기세조차 제대로 받아낼 수 있는 몸이 아니랍니다.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기세를 갈무리하여 주시겠어요?”

헤론은 셀리나를 존중했다.

헤론이 보는 셀리나는 충분히 유능했고 대신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헤론이 기세를 갈무리하자 세나는 그제야 헉헉대며 숨을 쉬기 시작했다.

세나는 헤론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모욕하고 골탕 먹였다고 생각했다.

‘벨라투…!’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화를 내어봐야 자신의 처지만 우스워질 것이 분명했다.

또 솔직히 말하면 헤론 공작이 두렵기도 했다.

헤론이 입을 열었다.

“벨라투는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명예가 실추되었다 생각하는 이들은 언제든지 겨울성을 찾도록. 그게 벨라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세나에게 던지는 선전포고였다.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느끼면 결투로 해결하라는 의미였다.

용병을 고용하든, 가문의 뛰어난 기사를 보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어린 귀족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헤론 벨라투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이들 중 헤론 벨라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헤론을 눈앞에서 본 이들은 입술을 뗄 수조차 없었다.

.

그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비올라는 두려움보다는 혼란스러움이 더 컸다.

‘뭐 하는 거야? 저건 완전 선전포고인데?’

심지어 마리앙투 공작가에게만 전하는 선전포고가 아니었다.

분명히 ‘명예가 실추되었다 생각하는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이들 중 누군가가 벨라투에 결투를 신청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셀리나가 기분 나쁘면?’

그러면 검제(劍帝) 넬라크가 움직인다.

헤론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앞서 ‘도전’이라 표현했으니, ‘검제의 도전도 받아들이겠다’ 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그만큼 광오한 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으며, 그 누구도 헤론의 말이 오만 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담담히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막내딸이 명예를 걸고 결투에 임해줄 테니.”

저벅저벅.

헤론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헤론은 셀리나 대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셀리나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헤론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물망초 연회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비올라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

마차 안에서 대기하던 세이반 마르코스는 실실 웃었다.

그는 실을 뻗어 연회장 안쪽의 파장과 진동을 전달받아 모든 내용을 해석한 상태였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헤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론이 느끼기에 세이반은 너무 수다스러웠다.

세이반은 그런 헤론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비올라 공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러신 게 맞지요?”

“출발하지.”

세이반이 빙그레 웃었다.

마부에게 출발하라고 말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헤론의 얼굴을 감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마리앙투 공작가는 참을 수 없을 거야.’

참지 못하도록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참으면 꼴이 너무 우스워진다.

마리앙투는 세나 공녀의 명예를 위한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벨라투에서 나설 분은 12살의 비올라 공녀님.’

마리앙투는 고민이 많아질 것이다.

비올라와 결투를 하는데 정규 기사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비올라는 검은 벨라투도 아닌 하얀 벨라투였다.

그러니 적당한 수준을 맞추어 결투를 신청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 수준의 누가 오더라도 비올라 공녀님은 못 이겨. 그분은 우아한 살인귀니까.”

세이반이 미소 지었다.

‘따뜻하시네요, 공작님.”

공작이 일부러 비올라가 이길 수밖에 없는 판을 깔아준 셈이었다.

출발이 많이 느린 막내를 위해서 말이다.

세이반은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헤론을 실컷 감상했다.

그는 뛰어난 변장술사이자 화장술사였고, 안면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조차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눈꼬리와 입가가 아주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네요.’

세이반 마르코스는 확신했다.

‘아주 뿌듯해하고 계셔!”

아마도 자신이 딸에게 아주 좋은 선물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세이반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연설하실 때 목소리 파동이 평소보다 더 많이 떨리셨는데.”

세이반은 그 파동에 대해 알고 있다.

‘화가 나셨을 때만 저런 파동이 나오는데.’

세이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분명했다.

연회장에 진입한 직후, 헤론 공작은 화가 나 있었다.

‘왜 화가 나셨지?’

세이반은 알지 못했다.

그때가 마침 비올라와 세나가 말다 툼을 벌이고 있었던 때라는 사실을 말이다.

***

물망초 연회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제르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 주변을 수많은 영애가 둘러쌌다.

어제 제르미를 보지 못한 영애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꺅!

저 제르미 공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저와 눈이 마주쳤어요!

아!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셨을까!

비명 같은 환호성을 들으며 제르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쳇. 어제 연회장에 왔어야 했는데.’

계산 실수였다.

‘연회장에 안 올 줄 알고 숙소 앞에서 기다렸더니.’

그렇지만 비올라는 연회에 참여했고 세나 공녀와 한바탕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마리앙투 공작가에서 사람을 보내 비올라와 결투를 치를 것이라는 소문도 함께였다.

‘도대체 어디 있지?”

비올라와의 만남은 즐겁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자꾸 밀어내는데, 그 모습이 영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그러면서도 정령 계약에 큰 도움을 준 은인이기도 했다.

‘꼭 친해져야지.’

마지막 날이다.

비올라와 꼭 친해지고 싶었다.

비올라를 위해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마지막 날에 선물 교환식이 있지?’

오늘은 기필코 비올라를 만나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비올라를 찾아다녔다.

물망초 연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셀리나 대신이 말했다.

“제가 첫날에 제안한 것은 모두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무려 블루 다이아몬드가 걸린 제안이었다.

“결과를 발표하려고 해요.”

수많은 귀족 자제가 셀리나의 말에 집중했다.

과연 셀리나가 말한 ‘특별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누가 셀리나 대신의 의중을 잘 파악했고, 더 훌륭한 인맥을 쌓았을까?

“제가 블루 다이아몬드를 선물할 영애는.”

그 말에 소년들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영애’라 함은 일단 소년들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소녀들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모두가 셀리나의 입에 집중했다.

셀리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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