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07화비올라는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두야.’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그 숫자가 꽤 많았다.
그들은 두 사람이 결투를 치르는 장면을 구경 중이었다.
‘쟤네는 왜 싸워?’
미공자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 제르미는 폭풍검의 후계자다.
훗날 메데이아와 결전을 치르게 될 인물이기도 했다.
또래에서는 그의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툰드라가 제르미와 싸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들이 마나를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
나가서 말려야 하나.
‘그럼 또 엄청 이목이 집중되겠지?’
아마 저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대륙 유수의 소식지들이 이렇게 다룰지도 모른다.
<반려검과 미공자 사이에 낀 스캔들의 주역!)
〈사교계를 발칵 뒤흔든 비올라 벨라투의 두 남자!)
아찔해졌다.
‘안 돼.’
제르미의 악개들의 철천지원수로 재탄생하고 말 것이다.
비올라는 이 이상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이릴스 후작령이니까, 후작가의 직속 기사가 나와서 중재하겠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헤라가 물었다.
“왜 그래?”
“응, 아무것도 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햇살 받으면서 조금 쉬려고.
비올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창가에 걸터앉았다.
제르미와 툰드라는 서로 무언가 말을 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뭐라고 떠드는 거야?’
어차피 들릴 리는 없지만 궁금해져서 귀를 기울여보았다.
“…야!”
“….잖아!”
“…라고!”
‘엥? 들리네?’ 정확히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뉘앙스 정도는 느껴졌다.
가쁘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보다 입이 더 바쁜 것 같았다.
*****
제르미가 말했다.
“왜 비올라를 못 만나게 하는 거지?”
“공녀님께서 너를 좋아하시지 않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그냥 알아.”
제르미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냥 안다니.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결투였다.
둘 모두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혹시 비올라가 나 싫다고 말했냐?”
“그런 적은 없어.”
툰드라는 ‘그래, 그렇다’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비올라는 거짓말을 싫어하니까.
주인이 싫어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봐.”
“확실한 건, 주인님은 너를 불편하게 생각해.”
“그러니까 그게 왜 확실하냐고?”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둘의 거리가 멀어졌다.
“헉, 헉.”
“헉, 헉.”
원래 결투 시에는 가쁜 호흡을 숨긴다.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호흡마저도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은 호흡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그만큼 둘 다 지쳤다는 뜻이었다.
“그냥 확실해.”
“그게 말이냐 똥이냐?”
제르미는 납득할 수 없었다.
툰드라가 논리적인 설명을 했다면 그래도 이해하려고 했는데, 툰드라에게 그런 이성적인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너를 때려눕혀서라도 합당한 이유를 들어야겠어.”
“나의 존재가 합당한 이유지.”
“네 존재?”
“나는 주인님의 기분을 읽을 수 있거든.”
“대마도사 다니아크 경이 말했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알아.”
제르미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반려검이면 다냐?”
툰드라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후웅!
강맹한 기세가 일었다.
마나를 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꽤 강렬한 검풍(劍風)이 일었다.
제르미가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제르미의 앞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반려검이 아냐.”
그사이 하이릴스 후작가의 상급 기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툰드라도, 제르미도, 둘의 결투가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이상 결투를 이어가면 후작령백성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툰드라가 검을 갈무리했다.
“나는 반려견이다.”
안광이 번뜩였다.
비올라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제르미는 그 모습을 보며 미친개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저 모습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지하잖아?’
‘너무 진지해서 무서울 정도야.’
결투를 치르는 툰드라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저런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많은 이가 쑥덕거렸다.
‘아무튼 저 둘은 비올라 공녀를 두고 싸우는 건가?’
‘사랑싸움?’
‘대충 그래 보이지? 근데 비올라 공녀는 12살이라며?”
‘지금이 중요한 게 아냐. 괜히 물망초 연회가 12살부터 17살까지 참여하는지 몰라?’
‘몰라. 뭔데?’
‘귀족들은 미래의 반려자를 위해 헌신하는 법이지. 저들은 자신들의미래를 걸고 싸우는 거야.’
반려자로 약속된 이의 나이는 상관없었다.
훗날, 비올라 공녀를 반려자로 맞이하기 위한 두 남자의 결투…… 정도로 요약되었다.
실상은 그저 외부인을 경계하는 반려견과 친구가 되고 싶은 호기심쟁이의 다툼이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툰드라는 귀족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귀족처럼 각인되었다.)
그사이 후작령의 수호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툰드라 공자. 제르미 공자. 그만두십시오.”
툰드라는 이미 검을 갈무리한 상태였고 제르미도 검을 검집에 넣었다.
수호 기사가 크게 외쳤다.
“모두 해산!”
수호 기사의 외침에 구경꾼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제르미가 말했다.
“기사님의 성함은 어찌 되지요?”
“제 이름은 팔단. 하이릴스 후작가의 수호 기사이며 3급 기사입니다.”
“팔단 경,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지요?”
“제가 꼭 만나볼 귀인이 한 분 계신데, 이자가 자꾸 방해해서요.”
툰드라의 몸이 움찔했다.
지금의 제르미는 귀족 특유의 기품과 여유가 넘쳤다.
“그 귀인이 누구신지?”
“비올라 벨라투, 벨라투의 6공녀입니다. 수호 기사께서 판단하시기에는 어떤가요? 제가 비올라 공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이자에게 있습니까?”
수호 기사 팔단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 그런 권리는 없습니다.”
툰드라가 지지 않고 항변했다.
“개는 주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툰드라. 네 주인이 네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연약하다는 뜻이야?”
……
제르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오기 생기네.”
반려견이면 반려견이지.
죽자 살자 못 만나게 막는 건 또 뭐란 말인가.
힐끗, 위쪽을 쳐다봤다.
‘비올라가 이 소란을 모를 리도 없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올라는 내려오지 않았다.
‘정말로 나를 안 만나고 싶은 건가?’
고민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친구답게 비올라를 축하해 줬을 뿐이고, 비올라의 승리를 함께 기뻐해 줬을 뿐이었다.
그녀가 블루 다이아몬드를 얻을 것을 제 일처럼 기뻐해 줬다.
‘그것밖에 없는데. 그게 기분 나쁠일은 아니잖아?’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었다.
‘고민을 좀 해봐야겠어.’
혹시 내가 큰 결례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은 물러서기로 했다.
“됐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지.”
“오늘뿐만 아니라 매일 그만뒀으면 좋겠군.”
“내가 물러가는 건,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실수를 했을지 염려되어서야.”
“네 존재 자체가 실수다.
툰드라는 본능적으로 핵심을 짚었다.
사실 비올라가 제르미를 멀리하려는 건 제르미가 잘못을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제르미의 존재 자체가 비올라를 위협해서 그랬다.
“너 그거 자존감을 깎아 먹는 아주 못된 말이다?”
“넌 좀 더 깎여도 될 것 같군. 자존감 덩어리.”
제르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비올라한테 전해. 나는 비올라랑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
세나는 인형을 집어 던졌다.
너무 화가 나서 소리도 질러보고 유리컵도 깨봤지만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벨라투, 그 야만적인 것들!”
귀족의 품위라고는 발가락의 때만큼도 없는 것들.
아버지와 딸이 한통속이 되어서는 감히 마리앙투 공작가를 모욕했다.
“절대 용서 못 해!”
게다가 셀리나 대신은 또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마리앙투 공작가를 모욕한 벨라투공작가의 공녀에게, 어떻게 그렇게 귀한 선물을 내린단 말인가!!
이건 셀리나 대신도 마리앙투 공작가를 모욕한 것이었다.
세나에게는 그랬다.
그러던 차, 세나는 한 가지 소식을 접했다.
세나의 소꿉친구이자 지금은 사용 인으로서 시녀의 역할을 하고 있는 리나가 말했다.
“반려검 툰드라와 미공자 제르미경이 결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세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툰드라는 비올라의 수호 기사 같은 거지?”
“반려검이라고 하는데, 사실 정확한 역할은 잘 모르겠어요. 항간에는 장난감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에요.”
세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제르미 공자는 비올라에게 기분이 나빴던 거야.’
어제, 비올라는 대놓고 제르미를 모욕했다.
제르미가 그토록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데 비올라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귀족의 법도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행동이었다.
적어도 눈인사나 묵례 정도는 해주는 것이 예의일진대, 비올라는 그 사소한 예법조차 지키지 않았다.
‘우아한 제르미 공자는 조용히 항의하러 갔을 건데, 저 모자란 벨라 투일가는 우리 착한 제르미 공자를 문전박대했겠지.’
결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가자. 리나.”
“어, 어디를요?”
“가서 중재하고 벨라투의 못된 심보를 지적해야지.”
세나가 리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곧 수호 기사가 도착할 거다.
수호 기사는 결투를 멈추게 하고 중재를 하게 될 텐데, 그때 나서서 벨라투의 문제를 짚어주기로 했다.
마리앙투의 영애인 자신이 힘을 보태주면 제르미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사람들이 벨라투의 예의 없음을 비난하겠지.
‘그러면 제르미 공자도 내게 고마워할 거야.”
벨라투는 망신을 당할 것이고, 제 르미는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아무튼, 비올라한테 전해. 나는 비올라랑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
제르미의 말을 듣자 세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올라한테 항의하려는 게 아니었어?’
그토록 개무시당하고 나서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 많은 귀족 앞에서 대놓고 무시를 당했는데?
입술을 깨물었다.
‘걔가 뭔데!’
그㉮ 입양 딸이 뭔데.
‘왜 걔만 좋아하는 건데!’
벨라투의 직계도 아니면서.
순혈도 아니면서.
고귀한 혈통도 아닌 빈민가 출신의 버러지 주제에!
“리나. 돌아가자.”
세나는 곧바로 바로 짐을 싸서 마리앙투 공작가로 돌아갔다.
마차 안에서 그녀는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며 복수를 다짐했다.
같은 시각.
외부인을 쫓아내서 칭찬을 기대했던 툰드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