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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09화 (109/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09화아린은 소설 〈벨라투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몇 번인가 실소했던 적이 있다.

천살이니, 만살이니, 다소 오그라드는 표현이 나올 때도 비웃지 않았던 그녀조차 ‘초검(草劍)의 셰일란’ 이라는 캐릭터가 나올 때면 손가락이 한껏 구부러졌다.

훗날, 작가의 블로그에는 이런 해명이 올라오기도 했다.

[초반부에는 엄청 강해 보이지만 사실 셰일란은 개그캐입니다.]

[개그는 개그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찐독자 눈은 못 속이지.’

초검(草劍)의 셰일란은 동대륙 출신의 암살자 캐릭터였다.

항상 검은색 옷과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데, 등장 시 풀피리를 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원래 멋있어 보이려고 쓴 설정이야.”

아린은 확신했다.

아마 작가가 새벽 3시쯤 맥주 몇 잔을 먹고서 만들어낸 캐릭터일 것이다.

훗날 독자들이 하도 놀려대니 ‘사실은 개그캐였다’ 라고 변명했고, 착한 독자들은 겉으로 수긍하는 척을 해주었다.

아린도 그 독자 중 한 명이었다.

필릴리 -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감성과 함께 태어난 초검(草劍)의 셰일란.

그가 나타날 때면 늘 풀피리 소리와 함께 오소소-불길한 바람이 피어오른다고 했다.

‘아니. 뭔 놈의 암살자가 풀피리를 불면서 등장해?’

소리 없이 나타나 은밀하게 기습하고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아린은 벨라투의 그림자를 매우 좋아했지만 셰일란의 설정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거랑은 별개로…… 지금은 초반부니까, 엄청 강한 캐릭터로 나오겠지?’

설정은 꽤 웃겼지만 그 실력까지 웃긴 건 아니었다.

원래 작가가 강한 암살자로 만들려고 했던 캐릭터였고, 당연히 약할 수 없었다.

‘블루 다이아몬드를 노리고 온 건가?’

비올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툰드라가 싸운다면, 셰일란을 이길수 있을까?

‘잘 모르겠… 응?”

비올라는 순간 약간의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약간 소름도 돋았다.

‘아니, 아무리 개그캐여도. 근데 실력 좋은 암살자가 찾아왔는데, 나되게 한가로이 생각이나 하고 있네.’

빙의한 지 어언 5년 차.

이제 암살자 따위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인가.

아린은 이것이 다행인 한편, 또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이런 것도…… 익숙해지는구나.’

암살자가 나타난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어떤 항마력 높은 대사를 칠것인가가 두려울 정도니 말 다했다.

에효.

한숨을 삼켰다.

아무튼 셰일란은 자신의 등장을 풀피리 소리로 예고했고, 조만간 공격해 올 거다.

‘툰드라가 엄청나게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이기지는 못할 거야.’

그렇지만 크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곳에는 제논과 에르사가 함께 있으니까.

저들이 움직일 수 있는 명분만 쥐여 주면 그만이다.

“제논.”

“네, 공녀님.”

“의미 있는 순간이 온다면, 손가락을 다시 접합하겠다고 했었지?”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네.”

“네게 의미를 부여하려 해.”

“어떤 의미일까요?”

“나를 지켜줘.”

저만치 멀리 물가에 앉아 있던 헤라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올라가 저런 말을 하다니.

조금 전에 감히 벨라투를 습격한 머저리들을 혼자서 쓸어버렸으면서 갑자기 지켜달라니.

‘비올라답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굴하거나 구차하지 않았다.

헤라는 제논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보통 벨라투에게 저런 말을 들은 집사들은 실망하게 마련이다.

“물론이지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집사 제논은 비올라의 좋은 어른이 되어주기로 다짐했었으니까요.

어떻게 지켜드리면 될까요?”

“나는 툰드라에게 식인 물고기를 막으라고 명령했어. 그 이유를 알지?”

“네. 목욕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셔서 그런 거잖아요.”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논과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사실 셰일란이 무서워.

개그캐로 전락하기는 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암살자라고, 그러니까 네가 대신 싸워줘.

그 말은 이렇게 포장되었다.

“맞아. 나는 목욕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겠습니다.”

제논이 아공간에서 손가락을 꺼냈다.

진작에 접합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서를 구비해 놓았고, 마법서를 찢자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제논의 손을 덮었다.

제논의 손가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올라가 물었다.

“무기는?”

“공녀님의 목욕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요. 무기를 사용하면 소음이 나잖아요.”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치면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러나 쇠붙이와 손바닥이 부딪치면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제논이 저만치 멀리, 커다란 나무 위쪽을 응시했다.

“저희 공녀님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주시렵니까?”

제논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위에 은신한 셰일란에게 똑똑히 전달되었다.

음성에 마나를 실어 멀리 전달하는 음성 전달 기법이었다.

셰일란도 같은 방식으로 음성을 전달했다.

“초검(草劍)은 산천(山川)을 가르며 피어오르리.”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새벽 감성으로 태어나신 고귀한 셰일란은 늘 공격전에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소설 속 설정에 따르면 저 말을 ‘구결’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저걸 내뱉어야 마나의 흐름이 원활해지고 본인이 원하는 움직임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나 뭐라나.

소설 속으로 볼 때도 웃겼는데 실제로 보니 더 웃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사도 가볍게 웃었고, 헤라가 물었다.

“에르사. 넌 왜 웃어?”

“지금 암살자가 읊은 것은 구결입니다. 동대륙 출신의 무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마나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어주고 기운을 일정한 형태로 가공하는 작업이에요.”

“그런데?”

“지금 보니 상당히 강한 무인이 암살자로 나타난 것 같아요. 구결에 반응하여 생성된 기운이 만만치 않아요. 저기, 풀들이 휘날리는 게 보이시지요?”

“보여.”

“저 풀 한 조각, 한 조각이 모두 날카로운 절삭력을 가진 검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비올라 공녀님은 저 기운에서 느껴지는 난폭한 살기를 느끼고 계실거예요. 살성을 타고나셨으니 저나 제논 집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큰 체감으로 다가올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올라는 웃었다.

저 웃음은 진짜 웃음이었고, 암살자의 저 날카로운 살기가 비올라에게는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올라 공녀님은 지켜달라고 말씀하셨지만….”

헤라도 비올라 쪽을 쳐다봤다.

“사실은 보호가 전혀 필요 없어 보이는 태도네.”

“네. 그래서 전혀 비굴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비올라 공녀님은 참 신기한 분이세요.”

헤라는 괜스레 어깨를 폈다.

자신을 칭찬한 게 아닌데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 동생이야.”

***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손날을 휘둘렀다.

제논은 늘 그렇듯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고, 셰일란이 보기에는 하얀 검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셰일란은 직감했다.

‘강자다!’

벨라투의 집사들이 강하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호승심이 들끓어 올랐다.

나의 첫 임무를 반드시 성공으로 끝내주겠어.’

그의 임무는 벨라투의 4공녀와 6공녀를 모두 죽이는 것이었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6공녀를 죽여야 했다.

이는 중앙대륙으로 진출한 셰일란이 맡게 된 첫 임무였다.

의뢰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벨라투는 그들 스스로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고, 수호 기사를 두지 않아요. 암살하기 매우 적합한 상대일거예요. 그대가 조심해야 할 사람은 집사들뿐이죠.”

과연 집사들의 실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셰일란은 자신이 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평생 갈고 닦아온 ‘초검(草劍)‘이라면 벨라투의 어린 공녀들과 집사들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집사는 하나가 아닌 둘인데요.”

그리고 그 집사는 하필이면 검귀다.

에르사의 검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베었다.

에르사의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유연했다.

셰일란은 순간 당황했다.

‘이크. 당할 뻔했어.

벨라투는 자존심이 강한 족속들이라 협공은 하지 않는다 들었는데 그건 잘못된 정보인 듯했다.

“너희는 협공하지 않는다 들었는데.”

“그거야 결투를 할 때의 이야기지요. 지금은 제 소중한 공녀님의 목욕 시간을 지켜 드려야 해서요.”

제논과 에르사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사람들처럼 셰일란을 압박해 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올라의 다리가 달달 떨렸다.

‘미친 인간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나무에서 땅으로,

또 땅에서 나무 위로.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결투를 치르고 있는데, 뭘 했는지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무튼 괴물들이야.’

나는 피를 마저 씻어내야겠다.

무서우니까 저쪽은 안 봐야겠어.

제논이 다시 한번 손날을 휘둘렀다.

셰일란이 몸을 숙여 피하자, 에르사의 검이 셰일란의 옆구리 쪽을 파고들었다.

‘이놈들, 공격이 뭐가 이렇게 정교해!’

무슨 집사들 수준이 이렇단 말인가.

중앙대륙은 이런 괴물들만 모여 있는 곳이란 말인가.

그는 몰랐다.

제논과 에르사는 벨라투의 집사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로 강한 집사라는 사실을.

“으억!”

셰일란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툰드라, 좋은 공격이었어요.”

그리고 셰일란은 몰랐다.

툰드라는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 등장하는 최강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어리다고는 해도 툰드라는 툰드라였다.

제논이 아공간에서 얇은 줄을 꺼내 셰일란의 손목과 발목을 묶은 뒤, 마치 짐짝처럼 질질 끌었다.

제아무리 강한 암살자여도 삼 대일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제논은 일단 풀숲에 숨어 조금 기다렸다.

‘공녀님의 목욕이 아직 안 끝나셨으니 조금만 더 기다립시다.

툰드라도 적극적으로 동의했고, 그 바람에 에르사도 얼떨결에 풀숲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비올라가 피를 모두 씻어내고 물가로 나오자 제논이 셰일란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공녀님, 이자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산적을 토벌할 때 산적을 모두 죽이는 것이 원칙이듯, 암살자도 죽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제논은 궁금했다.

하얀 벨라투인 6공녀가 이 암살자를 어떻게 다룰지.

‘공녀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요?”

저는 공녀님의 어떤 명령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건 툰드라도 마찬가지였다.

“주인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놓을게요.”

비올라의 입장에서는 기함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제발, 그따위 대사를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치지 말아줘.

비올라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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