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10화비올라는 사실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었다.
하얀 벨라투를 지망하여 성장하고는 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무력 정도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천재적인 육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매우 큰 마이너스였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주인공이고 육체적 재능은 타고났어.’
그런데 그렇게 뛰어난 재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무술을 익히지 않는 게 훨씬 나았다.
익히지 않아서 못하는 것과 익혔는데 못하는 건 얘기가 많이 다르니까.
그래서 벨라투 검식은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
벨라투 검식은 대륙 최강의 검술로 평가받기는 하지만, 가족 일원들이 모두 익히는 검이기도 했다.
섣부르게 벨라투 검식을 배웠다가는 허점이 굉장히 많이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진짜 개같이 굴러서 인식을 이렇게 만들어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비올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이러했다.
검은 벨라투로서의 자질이 매우 충분하나 본인의 야망을 위하여 하얀 벨라투를 선택한 공녀.
그래서 비올라는 벨라투 검식을 익히고 싶어도 익힐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대륙의 무술들이 나한테 아주 딱이지.”
〈벨라투의 그림자>의 주 무대는 모나크 제국이 다스리는 중앙대륙이다.
동대륙의 사람들은 그렇게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개그 캐릭터인 셰일란처럼 말이다.
셰일란은 ‘초검(草劍)‘이라는 무술을 익히고 있으며, 풀을 사용하여 상대와 싸우는 기술이었다.
‘주변에 풀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인위적으로 만들지.’
마나를 사용해서 만들기도 하고, 또 주머니에 풀을 넣어 다니기도 했다.
‘내가 직접 안 찔러도 된다는 것과 기습에 특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벨라투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검술이라는 것!’
사실 이걸 ‘검술’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했으나 셰일란 본인이 검술이라 말하였으니 그냥 검술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라는 작가의 설정이 있었다.
‘언젠가 내가 검술을 익히게 된다면 동대륙의 검술을 익혀야 하고, 가능한 내가 직접 안 찔러도 되는 걸로 배워야지.’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벌써 2년 전이었다.
그리고 오늘, 동대륙의 암살자 셰일란을 만났다.
***
“주인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놓을게요.”
비올라가 대답했다.
“아냐. 됐어.”
비올라가 셰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손발이 모두 묶여 있으나 셰일란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모욕하지 말고 죽여라!”
비올라가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셰일란의 목을 콕콕 찔러봤다.
“여기 찌르면 3초 안에 죽어.”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비올라는 본인이 이렇게 웃으면 어떤 분위기가 새어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셰일란에겐 죽음의 사신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근데 감히 벨라투를 습격했잖아.
너무 편안한 죽음은 안 되겠지?”
비올라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일부러 입에 힘을 준 상태였다.
‘으. 경련 나겠네.”
안 웃기고 안 행복한데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기이하고 불길한 살인귀포스는 뿜뿜하고 있을 거야.”
비올라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고 있었다.
동대륙의 암살자인 셰일란은 제법 진중하게 등장하였으나 결국 개그캐가 되었다.
그중 가장 큰 특성은 겁쟁이라는 것이었다.
암살자 주제에 겁이 많으니 많은 일이 벌어졌고, 가진바 능력 대비가장 하찮은 암살자로 전락하고야 만다.
사실 능력은 뛰어났는데 말야.’
비웃음을 사게 된 작가가 급하게 설정을 바꾸는 바람에 여러모로 불쌍한 꼴을 당하게 되는 비운의 조연.
‘아무튼 얘는 암살자 중 제일 겁쟁이지.’
비올라의 손가락이 셰일란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어떻게 죽여줄까?”
셰일란의 몸이 움찔했다.
목덜미에 소름이 쭈욱-돋는 것이 보였다.
눈빛도 많이 누그러들었다.
“그냥 죽이는 건 재미없고, 마물들의 밥으로 던져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비올라가 뒤를 돌아봤다.
“제논. 근방에 식인 마물 군락이 있어? 이왕이면 곤충류로.”
“아마 있을 겁니다. 명령을 내려주시면 이틀 내로 찾겠습니다.”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걸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으아아악!
비올라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빙의 5년 차의 항마력에도 이런 말은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런데 비올라보다 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사, 살려죠.”
너무 무서워서 발음까지 새었다.
헤라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살려줘도 아니고 살려죠라니.
“동대륙의 암살자치고 너무 허술한데.”
동대륙에서는 뛰어난 암살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신비로운 힘을 많이 익히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 죽은 역대 황제의 수만 세어도 열 손가락이 부족했다.
그런데 동대륙 출신의 암살자가 이런 모습이라니.
이번에는 헤라가 물었다.
“오빠. 이 일은 처음이야?”
셰일란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셰일란은 왠지 처음이라 고백하면 용서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 그는 너무 겁이 나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특히 저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저 여자애가 제일 무서웠다.
번뜩이는 안광을 가진 저 소녀는 피에 미친 마녀 같았다.
“처음이래, 비올라. 벨라투를 습격하는데 이렇게 허술한 암살자를 보내는 정신 나간 녀석이 누굴까?”
“아까 얘가 말했잖아.”
“이 오빠가 말했어?”
“응. 마리앙투래.”
셰일란이 눈을 굉장히 크게 떴다.
마치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대단히 열정적으로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거봐. 맞대지?”
그제야 셰일란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이미 늦었지만.
“내, 내가 언제? 나는 밝힌 적이 없다!”
“아까 분명히 그랬잖아.”
“그런 적 없다!”
“있어.”
비올라가 확신에 찬 눈동자로 말하자 셰일란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내가 진짜 그랬나? 하고 헷갈렸다.
비올라는 또 피식 웃고 말았다.
〈벨라투의 그림자>의 말싸움 최약체 두 명.’
한 명은 비첸이고, 또 한 명은 셰일란이다.
둘 다 말싸움에는 쥐약이었다.
그나마 비첸은 벨라투 버프라도 있지, 셰일란은 개그캐라서 여기저기서 말로 뚜들겨 맞는 캐릭이었다.
“아까 보니 능력 자체는 뛰어났어.
제논이 손가락을 다시 붙여야 할 만큼.”
쉽게 제압한 것처럼 보였지만 제논도 마냥 쉽지 않았다.
에르사, 툰드라가 협공했기에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리앙투는 얘 능력만 보고 고용한 거야.”
“무인으로서의 능력은 보았으되 사람으로서의 능력은 보지 않았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응. 만약 마리앙투 공작처럼 잔뼈가 굵은 사람이면 이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면….”
“세나 공녀겠지.”
비올라가 두 손가락으로 셰일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세나 맞지?”
“모, 모른다.”
“사실대로 말하면 살려줄게.”
순간, 셰일란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깃들었다.
“사, 살려준다고?”
암살자인 나를?
그럴 리가 없는데 믿고 싶어졌다.
그는 죽음이 무서웠다.
게다가 저 마녀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세나가 맞지?”
“심부름꾼을 통해 의뢰를 받았어.”
“그 심부름꾼을 미행했을 거잖아.”
의뢰인을 몰래 파악했을 것이 분명했다.
셰일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마녀는 진성 마녀가 틀림없었다.
“좋아. 그럼 세나라고는 말 안 할 게백마 두 마리가 이끄는 쌍두마차에 타고 있었을 거고, 온몸에 휘황찬란한 장신구들을 감싸고 있는 십 대 중후반의 영애였을 거야. 갈색 머리카락에 비교적 하얀 피부.
눈이 꽤 큰 편인데 인상은 조금 사나워. 결정적으로 화려한 반지를 최소 5개 이상은 끼고 있었을 거야.
맞지?”
비올라가 허벅지춤에서 단도를 냈다.
“마지막 기회야. 거짓말하면 혀를 자를 거야.”
“으으으으!”
셰일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서슬 퍼런 예기를 보니 너무 겁이 났다.
‘모르겠다!’
암살자의 덕목이고 나발이고.
무서워 죽겠다.
“맞아. 다 맞아. 네 말이 다 맞아…….”
훌쩍거리며 말을 높였다.
“맞아요.”
***
힉슨은 헤론 공작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헤론은 서류 더미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는 힉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물었다.
“노크는?”
“이미 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노크는 무슨”
힉슨이 소파에 앉았다.
“야. 헤론.”
칼튼이 보았다면 ‘제발, 힉슨 경.
예의를 좀 지켜주시길!’ 하고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이 자리에 칼튼은 없었다.
그리고 헤론은 힉슨의 불경한 태도를 딱히 문제 삼지는 않았다.
“물망초에서 연설은 왜 한 거냐?”
“이유가 필요한가?”
헤론은 깃펜을 내려놓았다.
힉슨 쪽을 쳐다보았고, 힉슨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에스코트를 못 했으니 아쉬운 대로 연설이라도 해야겠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
힉슨은 확신했다.
헤론이 연사를 자처한 것은 비올라 때문이다.
“그리고 너 솔직히 말해라.”
“무엇을?”
“너 거기서 비올라 언급했다며.”
헤론은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랬지.”
“그냥 이름을 부르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렵게 사냐?”
힉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평소에 ‘나의 막내딸’이라 부르면 되잖아. 간단한 걸 왜 그렇게 돌아가냐고?”
“힉슨, 내가 너를 살려둔 것은 우리가 친구였기 때문이다.”
힉슨이 움찔했다.
“선을 넘지 않으면 좋겠군.”
힉슨이 정체되어 있던 그 순간에도 헤론은 발전했다.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들이닥치는 마물들과 매일같이 싸워 승리해 왔다.
“알았다, 알았어. 이러다 친구 죽이겠네.”
힉슨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지금의 헤론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헤론은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자애로운(?) 편이었으나, 일정 선을 넘는 순간 가차 없이 상대의 목을 베어버리는 냉혈한이기도 했다.
그 대상이 힉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할 말은 했다.
“포지션을 확실히 해. 좋은 아버지가 되어줄 건지.”
나처럼.
헤론의 귀에는 ‘나처럼’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처럼 들려 언짢아졌다.
“아니면 벨라투의 공작으로 남을 건지. 어정쩡한 태도는 오히려 비올라를 혼란스럽게 할 테니.”
비올라는 사실 착하고 여리단 말이야.
손잡아 달라고 칭얼대는 귀여운 아이라고!
아무도 안 믿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힉슨은 방에서 나갔다.
한편, 같은 시각.
비올라는 살기 가득한 안광을 번뜩이며 여유롭게 말했다.
“우리. 거래를 해볼까? 물론 선택은 둘 중 하나야.”
“뭐, 뭐지?”
“불개미의 먹이가 되어 초라한 삶을 마감하게 될지, 내 제안을 받아 들일지.”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안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