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12화비올라가 정신을 집중하자 가벼운 바람이 일며 풀들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살상력은 없었지만 풀들이 이리저리 춤을 추듯 움직였다.
비올라가 물었다.
“어때? 나 잘하고 있어?”
셰일란은 속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떡하지.
사실대로 말해줘야 하나.
당신이 하루 만에 해낸 그것은 내가 3년 동안 한 것입니다만,
‘저도 스승님한테는 꽤 빠른 성취라고 칭찬받았는데요.
불세출의 천재는 아니었지만 셰일란은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노력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초검의 매력에 푹 빠졌었고, 초검을 사랑했다.
누군가 그랬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수 없다고, 셰일란이 바로 즐기는 자였다.
‘내가 3년 만에 한 걸 하루 만에 해버렸네.’
믿기 어려운 정도를 벗어나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셰일란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처음에 너무 빠른 성취는 독이 될 수 있단다.”
‘왜 그런가요, 스승님?’
‘마음에 독이 자라나게 되기 때문이지. 그 독의 이름은 오만이라고도 하고 자만이라고도 한단다. 그러니 늘 겸손을 가슴에 품고 정진하거라.
셰일란은 경련하는 입술을 다잡으며 평온하게 말했다.
“예. 이 정도면 꽤 잘하시는 편입니다.”
“그렇구나.”
비올라는 그 정도 대답에 만족했다.
어차피 초검을 통해 대륙 제일의 검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호신 정도 하고, 하얀 벨라투치고 괜찮은 모습만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평균 이상은 하나 보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여주 비올라의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최소 평균보다는 잘하고 있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꽤 좋아졌다.
그렇게 3일이 흘렀다.
비올라가 만들어낸 풀 바람이 약간의 절삭력을 갖게 되었다.
사람의 피부에 미세한 상처를 낼수 있을 정도였다.
셰일란은 표정 관리를 열심히 하며 말했다.
“이로써 기본이 겨우 완성되었습니다.”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침을 꿀꺽 삼켰다.
‘괴물이다.
마치 어릴 적 그가 읽었던 영웅소설 속에 등장하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춘 주인공 같았다.
그래. 소설 속 주인공.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건 말도 안된다.
아무래도 이 세계는 저 공녀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본은 되었으니 이제 벨라투가로 복귀하시죠.”
셰일란은 빨리 벨라투 공작가에 들어가고 싶었다.
마리앙투 공작이 또 다른 암살자들을 보내오기 전에 말이다.
실력과는 별개의 얘기였다.
바퀴벌레가 사람을 해치지는 못하지만, 많은 사람이 바퀴벌레를 무서워한다.
암살자가 자신을 해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겁쟁이인 그는 암살자가 무서웠다.
“이제 겨우 기본을 하신 거니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비올라는 흩날리는 풀잎들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재미있네?’
비올라가 초검 익히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
저 멀리 겨울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성 외벽의 남문이 가까워졌다.
마차를 몰던 제논이 말했다.
마차 밖에서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공녀님, 누군가 배웅을 나오셨는데요? 혹시 모를 안전 사고를 대비하여 잠시 멈추겠습니다.
마차가 멈추었다.
비올라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았다.
‘뭐지?’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누군가 요란한 기세로 달려왔다.
‘비첸?’
비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원작과 같다면 칼을 들고 히히! 웃으면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흙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다.
“비! 올! 르아아아아아!”
다행히 비첸의 손에 칼은 들려 있지 않았다.
잠시 긴장했던 툰드라도 몸에서 힘을 풀었다.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비올라 기다렸지.”
“왜?”
비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는 없눈뎅?”
코를 슥슥 매만졌다.
얘기를 들어보니 헤라가 도착한 이후로 매일매일 남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나 뭐라나.
“그냥 비올라가 없으니까 심심했어.”
활짝 웃었다.
“연고 발라줄 사람도 없고.”
“연고는 또 왜?”
“며칠 전에 3공자 그 자식이랑 싸웠거든.”
비첸은 갑자기 소매를 걷어 팔을 보여주었다.
팔에 상처가 심각했다.
초인적인 회복력을 가진 비첸이 이렇게 되었을 정도면 아마 정말로 심각한 부상이었을 것이다.
3공자와의 결투를 떠올린 비첸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다. 5살만 더 많았어도 내가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살기에 예민한 비올라는 비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꼈다.
진짜 살기였다.
만약 기회가 되기만 한다면 비첸은 정말로 3공자를 찔러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비첸의 겉모습에 속아 살인귀라는 본질을 잊으면 안 됐다.
“그러니까, 연고 발라줄 사람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응.”
“그럴 거면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됐잖아.”
“음.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네?”
비첸은 인정이 빨랐다.
그리고 히히 웃었다.
“비첸은 바본가 봐. 맞다. 나 자랑할 거 있다?”
비첸이 활짝 웃으며 아공간을 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트롤의 목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으악!’
비올라는 비명을 꾹 참았다.
트롤의 머리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다.
“머리가 3개인 트롤을 발견했지 뭐야. 그래서 죽였어. 나머지 두 개는 아공간에 있어.”
안 그래도 상급 마물종인 트롤 중에서도 머리 3개인 트롤은 더욱 상위종 돌연변이로 분류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비첸은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갔다.
“이거 엄청 희귀한 녀석이래.”
비첸이 땅바닥에 떨어진 트롤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거. 너 줄게.”
비첸은 순수한 마음으로 비올라에게 선물을 건넸다.
비올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따위 선물 받고 싶지 않다.
‘저, 저, 끈적거리며 흘러내리는 녹색 피부터 어떻게 해보라고!’
트롤은 재생력이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마물이고, 목이 잘린 상태에서도 눈이 끔뻑끔뻑 움직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괴이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어. 별로야.”
비첸은 잠시 시무룩해졌다.
비올라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한 듯했다.
잠시 고민에 빠진 비첸은 손바닥을짝! 부딪쳤다.
“아! 알겠다.”
비올라가 이 선물을 받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역시 최소 트윈헤드 오우거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지?”
비첸이 트롤의 머리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헤헤 웃었다.
“난 걔 잡으러 갈게!”
폭풍같이 나타났던 비첸은 또 태풍처럼 멀어졌다.
비올라는 그런 비첸을 바라보며 황당해하는 한편, 고개를 갸웃했다.
‘쟤가…… 저 나이에 트윈헤드 오우거를 잡을 수 있었던가?’
원작보다 성장이 훨씬 빠른 느낌인데.
기분 탓이겠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목덜미가 싸했다.
***
비올라는 공작저 내로 들어갔다.
“셰일란에 대한 보고를 올려, 제 논.”
“알겠습니다.”
제논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를 정리해 주었다.
마나를 사용하여 혹시 모를 이물질과 먼지 등을 털어내고 이불을 들어올렸다.
“피곤하시지요?”
“응.”
“조금 쉬십시오. 일어나시는 시간에 맞추어 딸기 에이드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논은 유능하단 말이야.
괜히 작가가 유능하다고 여러 번 언급한 게 아니었다.
어쩜 저렇게 속마음을 척척 잘 알아주는 건지.
비올라는 이불 속에 몸을 맡겼고,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공녀님께서 잠시라도 편안히 쉬시면 좋겠어요.”
물망초 연회에서 너무나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들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력이 필요했겠는가.
제논이 품속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사일런트’ 마법이 걸려 있는 스크롤로, 주변의 소음을 차단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로써 제 한 달 월급이 날아갔군요.’
그리고 사치품의 대명사인 ‘테라 피’ 마법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자는 동안 몸의 회복을 도와주고 피부 결을 좋게 만들어주며, 근육의 뭉친 부분들을 풀어주는 효과를 가진 마법 스크롤이었다.
기분 좋게 잠들게 해주는 효능도 있었다.
가격에 비해 효과가 크지는 않았지만 귀족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마법스크롤이었다.
‘이로써 제 두 달 월급까지 날아갔네요.”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으며 잠든 비올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냐, 음냐, 잠꼬대도 했다.
깊게 잘 때면 꼭 저러고 잔다.
‘두 달 치 월급으로 공녀님의 따뜻한 잠을 획득할 수 있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거래인 것 같아요.
그는 문을 닫고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공작 대신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앉아 있었다.
“이사벨라 부인, 오랜만에 뵙네요.”
“제논이군요.”
이사벨라는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고서 차분히 말했다.
“제가 권한 대행 중이에요. 공작님께서는 눈이 부는 곳으로 원정을 가셨거든요.”
“원정이요? 출정 소식은 못 들었는데요.”
“혼자 가셨어요.”
“네?”
“대마물 중 하나가 생성될 징조가 보여서요. 혹한을 들고 가셨어요.”
“그렇군요.”
공작이 혹한을 들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강력한 대마물이 생성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혼란을 대비하여 소리 소문 없이 혼자 움직인 듯했다.
“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모든 보고는 제게 올리면 돼요. 물망초연회와 관련된 보고는 헤라가 모두 했으니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어요.
조만간 마리앙투에서 결투장이 날아올 것도 알고 있어요. 복귀하는 길에 동대륙의 암살자를 역으로 섭외했다는 것도 알아요. 그 외에 또 다른 보고 사항이 있나요?”
“역시 헤라 공녀님은 철두철미하시네요. 제가 하려던 보고를 모두 올리셨군요.”
제논이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제논 집사.”
이사벨라의 몸이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다가 제논의 바로 앞에 스르르피어올랐다.
그림자를 다루는 퀼튼가(家) 특유의 움직임이었다.
이사벨라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대로 돌아가려고?”
그녀의 손이 제논의 배에 닿아 있었다.
이사벨라의 손은 그 어떤 명검보다 더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지네요, 부인. 조금 떨어져 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아니라 공작님이 계셨다면, 어떤 보고를 올리려고 했지?”
“정말이지, 부인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솔직하게 말씀드릴 테니 위협을 멈춰주세요. 무섭답니다.”
제논은 전혀 무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고, 이사벨라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문에 등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말해봐요. 원래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