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17화
“위대한 퐁퐁 폐하의 등장이시다!”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 퐁퐁이는 커다란 물방울이 되어 비올라의 몸을 감쌌다.
보글보글.
비올라는 하마터면 허우적거릴 뻔했다.
‘어윽… 숨이 막…… 히지 않네?’
포근하고 따뜻했다.
‘이게 그 유명한 물의 장막이구나.’
하이디를 마지막까지 지켜주었던 물의 장막이 펼쳐졌다.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물의 장막보다는 못하겠지만, 퐁퐁이가 펼친 물의 장막은 셀빈의 모든 주먹을 막아냈다.
퐁! 퐁!
셀빈의 주먹이 닿은 모든 곳에서 퐁! 퐁! 소리가 나며 물보라가 일었다.
커다란 바위도 쪼갤 만큼 강력한 힘이 담긴 주먹이었다.
‘아무렇지도 않네?’
셀빈의 움직임은 9살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 호흡에 주먹이 여러 번 뻗어 나왔는데, 느껴지는 위력과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무술도 퐁퐁이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안 맞으면 그만이잖아.’
비올라는 물의 장막 속에서 셀빈을 관찰했다.
시간이 흐르자 여유가 생겼다.
셀빈의 그 어떤 공격도 퐁퐁이를 통과하지 못했다.
‘과연 세계관 최강의 방어 정령!’
비올라의 몸을 감싼 퐁퐁이가 말했다.
“위대한 퐁퐁 폐하의 기술이 어떠시냐?”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셀빈은 약이 바짝 올랐다.
함부로 폐하’를 입에 올리는 저 거만함이라니.
비올라는 머리가 살짝 아팠다.
아주 작게 말했다.
‘함부로 폐하라는 말 쓰지 마.
잘못하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다.
그랬다가는 행복하고 평온한 생활은 날아가겠지.
평생을 제국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
퐁퐁이의 질문이 들려왔다.
폐하가 뭔데?’
‘인간 세상의 황제를 높여 부르는 말이야. 함부로 쓰면 안 돼.’
‘나는 정령인데?’
그러니까 나는 인간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정령 세계에 속해 있는데 왜 쓰면 안 되냐는 말이었다.
폐하라는 말이 멋있고 좋단 말이야.’
그사이 마나를 두른 셀빈의 주먹이 또다시 비올라의 얼굴을 향했다.
퐁!
그 주먹은 퐁! 소리와 함께 충격이 흡수되어 버렸다.
‘아무튼 함부로 쓰면 안 돼. 계약자의 명령이야.
‘그럼 폐하 말고 더 멋있는 말 생각해줘.’
‘그럼 폐하 말고, 줄여서 퐁하라고 해. 그것도 멋있어.”
‘정말? 멋있어?’
‘어. 멋있어.’
물의 장막 속에 갇힌(?) 비올라는 퐁퐁이가 굉장히 설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멋지다는 말에 흡족한 것 같았다.
셀빈이 보법을 펼쳐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얏!”
…아.”
셀빈은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데, 저쪽은 한가로이 정령과 대화나 나누고 있다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선을 다해 싸우란 말이야.”
셀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화가 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능력이 부족해 지는 것은 괜찮지만 약해서 무시당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나를 모욕하지 말라고!”
셀빈의 몸에서 마나가 폭사되었다.
브란디아 공작가가 다루는 특유의 황금빛 마나가 뿜어져 나와 셀빈의 몸에 일렁거렸다.
‘큰일 났다.
저 마나는 브란디아 공작가의 마나로서, 세계관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한다.
사람들은 저 황금빛 마나를 운용하는 브란디아 공작가의 일원들을 야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너무 기분 나쁘게 만들면 안 돼.”
패배는 하면 안 되겠지만 셀빈을 모욕해서도 안 된다.
셀빈은 훗날 강한 무인으로 성장한다.
‘지나치게 자극하면 또 내 적이 되겠지.’
아군이 많은 것보다는 차라리 적군이 없는 게 낫다.
적어도 비올라의 가늘고 길고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비올라는 황급히, 그러나 겉으로는 여유롭게 말했다.
“셀빈 영애. 잠시만 결투를 멈춰주세요. 오해는 풀고 가야겠으니.”
“내가 바본 줄 알아요? 언니가 날 무시했잖아.”
“아뇨.”
비올라가 손짓했다.
풀들이 이리저리 날리기 시작했다.
“내가 익힌 무술은 벨라투의 검식이 아니에요. 느껴지겠지만 동대륙의 무술이에요. 초검이라는 검술이지요.”
셀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벨라투의 영애가 왜 벨라투 검식이 아니라 동대륙의 무술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알고 있겠지만 동대륙의 무술 중 일부는 구결을 바탕으로 운용돼요.
나는 셀빈 영애를 맞이하여 최선을 다하여 구결을 읊었어요.”
사실 퐁퐁이와 대화한 거지만 셀빈은 거기까진 몰랐다.
거칠게 피어오르던 황금빛 마나의 세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결을 읊었고,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방어술을 선보인 거예요.
이제 이해했어요?”
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비올라를 오해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제가 언니를 오해한 모양이에요. 미안해요.”
셀빈이 자세를 낮추며 무게중심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럼 다시 시작해도 되는 거죠?”
***
“초검(草劍)은 산천(山川)을 가르며 피어오르리.”
비올라의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이건 아무래도 부끄러웠다.
후웅~!
큰바람이 일며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풀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엥?’
생각보다 바람이 세게 일었다.
그리고 연습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풀들이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비올라 주변을 감싸 회전했다.
‘뭐, 뭐지?’
비올라 본인도 당황했다.
‘실전이라 다른 건가?’
연습할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초검이 펼쳐졌다.
그녀는 몰랐지만 그녀의 반지와 옷에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육안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마나를 읽을 수 있는 이들이라면 분명히 보이는 빛이었다.
뒤늦게 결투장에 도착한 힉슨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에엥?’
그는 볼 수 있었다.
비올라의 손에 끼워진 반지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반응하고 있는 것을.
둘은 평범한 반지와 드레스가 아닌 듯했다.
‘반지. 드레스, 정령. 그리고…….’
마지막 하나.
‘비올라의 살성.
이 네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엄청난 폭발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올라가 부끄러움을 참으며 초검의 구결을 읊었다.
최대한 작게 말했다.
“원수의 목전에 놓인 단단한 목석은 하릴없이 무너지네.”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은 하나하나의 초검(草劍)이 비올라 주변과 셀빈 주변을 덮었다.
멀리서 보면 초록빛 안개가 펼쳐진 것 같았고, 가까이서 보면 녹색 폭풍이 불어 닥치는 것 같았다.
‘으윽!’
셀빈은 강하게 부는 바람에 눈을 뜨기 힘들었다.
‘이게 뭐야…!
이 작은 풀들 하나하나가 모두 명 검이었다.
마나를 일으켜 피부를 보호했지만 초검이 몸에 닿을 때마다 마나가 베여나갔다.
셀빈은 눈을 겨우 뜨고서 강맹한 마나가 담긴 주먹을 내뻗었다.
초검과 비올라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야 했다.
온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셀빈은 몸을 숙이고 얼굴을 가린채 보법을 펼쳤다.
‘접근해야 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했다.
초검을 완벽히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피를 많이 흘리더라도, 어떻게든 비올라에게 접근해서 비올라를 멈춰야 했다.
‘이렇게 강력한 공격을 오래 지속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방어에도 취약하겠지.
거리만 어떻게든 좁히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됐어!’
거리를 좁혔다.
비올라가 보였다.
비올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기술의 싸움이 아니라 체술의 싸움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였다.
‘아악!’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온몸이 잘려나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때, 메데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메데이아가 검을 뽑아 한 차례 휘두르자 세상을 뒤덮고 있던 녹음이 소멸했다.
비올라의 초검도, 셀빈의 마나도 모두 메데이아 앞에서 숨을 죽였다.
흩날리던 풀들이 바닥에 가라앉아 가루가 되어 바람결에 흩날렸다.
결투장이 고요해졌다.
메데이아의 일검은 결투를 끝냈고 침묵을 불러왔다.
진한 풀냄새가 느껴졌다.
“셀빈 영애의 목숨이 위험하다 판단하여 개입하였습니다. 참관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마리앙투 공작가의 참관인인 레븐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도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대로 두었다면 셀빈은 죽었을 것이다.
레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올라 공녀의 무위가 실로 놀랍군요. 저희의 패배인 듯합니다.”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패배입니다.”
레븐은 비올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런 무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얀 벨라투라니.
믿기 어려웠으나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셀빈 영애는 패배를 인정합니까?”
셀빈은 한동안 말하지 못하다가 이 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느꼈다.
비올라를 끌어안았을 때, 죽음을 보았다.
비올라가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마주해 보지 못했던 커다란 벽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느낌이었다.
비올라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좋은 경합이었어요.”
“마지막에…… 그건 뭐였어요?”
거대한 재해가 다가오던 그 느낌.
셀빈이 비올라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셀빈은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하늘이 노래지며 숨이 가빠왔다.
‘뭐야?’
아까 그 느낌 그대로였다.
비올라를 안았을 때의 그 느낌.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던 그 공포가 다시 느껴졌다.
셀빈이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치고 물었다.
“그 반지…… 끼고 저랑 싸운 거예요?”
“네.”
매일 끼고 있어서 불편한 건지도 몰랐다.
“저 한 번만 껴보면 안 돼요?”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이라서요.
미안해요. 껴보는 건 좀 그렇고 잠시 보여줄 수는 있어요.”
셀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며 반지를 받아 들었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반지가 땅에 떨어졌다.
셀빈은 반지의 무게와 반지 안에 담긴 거대한 힘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채 기절해 버렸다.
비올라로서도 굉장히 당황했다.
‘왜 기절해?’
악수만 하려고 했는데 왜 기절한단 말인가!
오해 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당황한 티를 낼 수도 없어서 그저 담담한 눈으로 기절한 셀빈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늘,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거야?’
그냥 퐁퐁이와 함께 어찌어찌 버텨내고, 시간을 끈 다음 셀빈이 지쳤을 때 반격해 보려고 했다.
셀빈은 강한 힘을 가진 무인이지만 지구전에는 약한 타입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너무 이상하고 거창하게 끝이 나버렸다.
‘왜, 왜?’
메데이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힉슨 역시 굉장히 뭇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저들은 영문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메데이아나 힉슨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여기서 제일 답답한 사람은 비올라였다.
‘뭐야, 나 왜 이렇게 세?’
셀빈 영애를 너무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이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황스러웠다.
안 그래도 답답하고 황당한데, 또 황당한 일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