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19화비올라의 방에 들어서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슨 진시레 미간이에여(이것은 진실의 미간이에요)!”
순간 세나는 방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비올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그 어린아이는 검지로 자신의 눈썹과 눈썹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셀빈 공녀?’
이해할 수 없었다.
결투 대상자였던 셀빈이 왜 이 자리에 있는가.
패배한 사람치고 왜 저렇게 밝아보이는가.
“언니는 짱이에여! 쵝오, 쵝오!”
입안에 가득한 음식물-아마도 에그타르트라 짐작되는 때문에 발음이 뭉개진 건지, 원래 혀가 짧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셀빈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실제로 셀빈은 행복했다.
그렇게 줄을 서서 먹어도 인당 두개밖에 구매할 수 없는 에그타르트였는데, 이곳에 오니 무려 세 박스나 있었다.
한 박스가 12개가 들어 있었으니, 셀빈 입장에서는 36개나 되는 보물이 비올라의 방에 잠들어 있던 셈이었다.
셀빈에게 이곳은 천국이었다.
“어? 세나 공녀님이죠? 안녕하세요. 하나 먹어볼래요?”
비올라를 대하는 태도와 세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랐으나 지적하기에는 애매한 수준이었다.
비올라를 대할 때는 혀가 특히 짧아지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비올라 언니는 대단해요. 웬 줄 아러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셀빈은 우쭐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사장님이 비올라 언니의 팬이래여. 결투 승리를 축하하며 세박스를 보내줘써여.”
앙!
덥석!
“으으으으음!”
셀빈은 양손으로 볼을 부여잡고 환희의 전율을 느꼈다.
에그타르트의 달콤한 맛이 전신에 사르르 퍼졌고 셀빈은 몸을 부르르떨었다.
“넘 마시써. 나 비올라 언니랑 맨날맨날 같이 있고 시프다.”
세나는 황당하다는 듯 비올라와 셀빈을 쳐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외교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 비올라 공녀도 알고 계시지요?”
셀빈 브란디아와 비올라 벨라투가 친해 보인다.
어쩌면 둘은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설마, 셀빈 영애가 저한테 일부러져줬다거나.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요?”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셀빈이 난데없이 흑기사를 하겠다.
며 나설 때부터 이상했어.”
사실 셀빈이 흑기사를 자처한 것은 무인으로서의 호승심 때문이었지만세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를 모욕하기 위해 함정을 팠던 것이었나요?”
비올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쟤도 참 한결같네.”
어떻게든 사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잘 알 것 같았다.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저였다면 좀 더 현명하게 굴었을 텐데.”
“뭐라고요?”
“제가 셀빈 영애와 결탁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을 거란 뜻입니다, 세나 공녀.”
화가 나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지, 아니면 마리앙투 공작가에서 너무 화초처럼 자란 건지, 너무 허술했다.
“지금 제 눈앞의 이 모습이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지요?”
그랬더니 셀빈이 대답했다.
“까고 있네.”
순간, 세나는 황당한 얼굴로 셀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셀빈이 히히 웃었다.
“아. 이거. 포장지를 까고 있다고요.”
세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브란디아 가문이 야만적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게다가 충격적인 모습까지 이어졌다.
‘뭐 하는 짓이야!’
셀빈은 비올라가 보이지 않도록 손을 아래로 내려 가운뎃손가락을 세나 쪽으로 보여주었다.
가운뎃손가락만 세우는 저 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으나 세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매우 나빴다.
거지 패들이 상대에게 심한 욕을 할 때, 저런 행위를 한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세나 공녀, 그대의 모습은 사과하러 온 사람 같지 않네요.”
비올라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사과하러 왔으면 사과하러 온 사람답게 굴어.”
“요.”
세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한 가지만 확인하죠. 셀빈 브란디아 영애는 비올라 벨라투에게 패배한 것이 맞나요?”
“개발려써여.”
세나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서방 끝 공작령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많이 쓰는 듯했다.
“개발렸다는 게 무슨 뜻이죠?”
“대충 패배했다는 뜻.”
셀빈은 세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냠냠거리며 에그타르트를 먹었다.
말투와 행동이 묘하게 거슬렸다.
세나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사과하러 온 입장에서 굳이 따지기에는 애매한 수준이었다.
‘사과는 해야 해.’
결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니 사과하는 것이 옳았다.
좋든 싫든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지켜야 할 법칙이었다.
세나가 양손으로 치맛단을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제가 큰 무례와 결례를 저질렀어요.”
“그래요? 어떤 큰 무례와 결례를 저질렀죠?”
“헤론 공작님께서 주신 선물의 가치를 모욕하였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 하였어요. 제가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아요.”
“같아요?”
“보였어요.”
고개를 숙인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사과하는 입장에서 이 정도 수모는 각오하고 있었다.
“세나 공녀. 최근에 저한테 진심으로 사과한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요.”
“네.”
“그 사람은 손 글씨 연습을 해서 열 장이 넘는 편지를 제게 보내왔어요. 혹시라도 제가 용서해 줄까 싶어 먼 거리를 달려와 지근 거리에서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를 만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며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어요.”
세나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비올라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험천만한 독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의 태도와 그대의 태도가 심히 비교되는군요.”
비교해서 보니 알 것 같았다.
제르미가 얼마만큼 진심이었는지.
제르미가 얼마나 절실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반대로 세나는 얼마나 억지로 사과하고 있는 건지 훤히 보였다.
“그 사람이 말했어요. 사과는 사과 답게 해야 사과라고요. 귀족은 귀족답게 굴어야 한다고.”
“…제 사과는 사과답지 않다는 뜻인가요? 저는 귀족답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요? 그대는 심지어 결투에서까지 패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저와의 비교는 옳지 않아요.”
모든 순간 비올라에게 밀렸으나, 세나는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저는 마리앙투 공작가의 영애란 말이에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치맛단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분도 귀족이었어요.”
“공작가의 영애와 일반 귀족은 다르죠.”
“어떻게 다른데요?”
비올라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질적으로 모든 것이 다 달라요!”
세나는 평정심을 모두 잃었다.
비올라 앞에서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비올라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야만의 협곡을 지키는 폭풍 요새의 자제가 그렇게 질적으로 떨어지는 사람이었던가…….”
세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하니 그 사람이 제르미 공자일줄이야.
그리고 그 제르미 공자가 사과를 위해 손 글씨를 연습했다니.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째 시작부터 많이 꼬이네요. 사과하러 온 사람이 결투의 조작 여부부터 따졌죠. 제국의 1성기사로서 결투를 주관하였던 메데이아 언니를 모욕했네요.”
“그, 그건…….”
“그뿐만 아니라 브란디아 공작가의 명예를 의심했어요. 함께 결투를 치른 벨라투도 욕보였고, 거기에 폭풍요새의 공자까지 한껏 낮추어 말을 했어요. 이 모든 것을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피식 웃었다.
“사과하러 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말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
세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비올라와 대화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미로에 갇힌 것만 같았다.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나는 두려웠다.
비올라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비올라가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사과하길 바라요. 내 언니 앞에서.”
헤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생각나는 모든 것을 읊었다.
“헤라 공녀를 은근히 무시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제가 너무 못나서 그랬어요. 너무너무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헤라를 무시했던 것.
다른 귀족들과 결탁하여 은근히 따돌리며 사교계에서 배척했던 것.
검은 벨라투가 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하얀 벨라투가 된 낙오자라고수군거렸던 것.
모든 죄를 이실직고하며 엉엉 울었다.
헤라는 약간 황당하다는 듯 비올라 쪽을 쳐다보았다.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뭘 어떻게 한 거야?’
저 자존심 강한 세나 공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펑펑 울면서 고해성사할 줄이야.
헤라조차 황당한 일이었다.
‘폭력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말로만 세나를 저렇게 만든 것 같았다.
재주라면 참 놀라운 재주였다.
어쨌든 비올라는 약속을 지켰다.
비올라는 이렇게 약속했었다.
티 안 나게 죽여야지. 마음부터 차근차근.’
지금의 세나는 죽은 세나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엉엉 울면서 여기서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았다.
헤라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나 따위가 내게 사과한 것보다.
비올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네가 나와 약속을 지켜주었다는 것이 기뻐. 이렇게 세련된 방식으로’비올라의 또 다른 능력까지 확인한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아졌다.
‘역시 비올라야.’
헤라가 말했다.
“이쯤 했으면 됐어요. 세나 공녀의 진심은 잘 알겠고, 제국의 법도에 따라 그대가 사과하는 모든 모습은 마법 촬영 도구에 녹화되어 있어요.
앞으로 그대의 말에 책임지는 귀족이 되길 바라요.”
그제야 세나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자신의 모든 모습이 모두 녹화되었을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볼게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나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갖 수치심이 밀려왔다.
야만적인 가문 앞에서 엉엉 울며 사과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차라리 죽고 싶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감히 비올라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했지만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벨라투가 밉고 겨울성이 증오스러웠다.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들었다.
‘두고 봐. 반드시 다 죽여버리겠어!’
그녀는 몰랐다.
자신의 수난이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겨울성에는 비올라와 헤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