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24화세알 자작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끝없이 다투었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부인의 아이야. 내가 사랑해 줘야 해.
‘내가 정말 그 아이를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 아이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훗날, 그 아이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원망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미워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없다면…
벨라투로 보내는 것도 고려해야 해..
무엇이 옳은 선택일까.
아니.
애초에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자작저 지하에 마련된 지하밀실에 들어가 오랜 시간 펑펑 울었다.
“신이시여. 저는 연약합니다.”
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가끔씩 부인의 외도가 떠오르곤 했다.
부인을 진심으로 용서하였으나 기억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나약한 저를 용서하소서.”
마음 같아서는 그 아이를 품은 채 살아가고 싶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 혼자만 아프면 될 일이었다.
“그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했다.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골방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아이를 품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아니.
내가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부인이 외도하지도 않았을 텐데.
세알 자작은 새벽 내내 그곳에서 혼자 울었다.
가슴을 탕탕 치면서.
***
셰일란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제자님, 세알 자작이 지하 골방에 들어갔었는데요.”
안정된 삶과 돈맛을 본 셰일란은 이제 더 이상 암살자가 아니었다.
은퇴한 암살자인 그는 특기를 살려 비올라의 정보수집원 역할을 하곤 했다.
“지하 깊은 곳이라 곰팡이 냄새도 많이 났어요. 그 뭐랄까, 다 큰 사내가 5시간 넘게 울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대략 힘들었으니 돈 달란 뜻이지?”
“에이, 우리 제자님. 스승을 어떻게 보시고, 아이 참, 또 그렇게 핵심을 짚으신다.”
“알겠어. 추가 수당으로 30만 달리 아를 지급할게. 제논에게 말하면 될 거야.”
“스승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돈맛을 본 셰일란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초검을 알리겠다는 그의 원대한 꿈은 이미 낙엽처럼 바스러져 버렸다.
셰일란을 통해 세알 자작의 상황을 모두 알게 된 비올라는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 살자고 벌인 일이었다.
이로써 강력한 적인 벵가스는 없겠지만 세알 자작은 평생을 아파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세알 자작에게 물었다.
“마음의 결정은 하셨는지요?”
“예.”
세알은 결국 새로 태어날 아이를 벨라투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철혈 공녀께서 후견인이 되어 주신다니 믿음직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요.”
“아이의 이름은 정하셨어요?”
“베나토, 베나토 세알로 하겠습니다.”
세르폰의 아이에게도 세알의 성을 주었다.
“베나토, 사랑의 결실이라는 뜻인가요?”
세알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부인의 아이를 외딴곳으로 멀리 보내면서 ‘사랑의 결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가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 누구도 세알 자작님을 탓하지 않아요.”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 부모 없는 서러움을 잘 알아요.”
“……아.”
세알은 현재의 비올라와 옛날의 비올라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빈민가에서 입양되었다고 했다.
현재의 모습이 너무 찬란해서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했다.
“또 다른 비올라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정확히 말하면, 또 다른 아린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비올라도 안다.
그 누구도 엄마와 아빠를 대신할 수는 없다.
보육원 선생님들은 늘 친절하고 따뜻했지만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했었다.
“베나토 세알은 제가 책임질게요.”
그리고 세알 앞에 섰다.
13살이 된 비올라는 여전히 작았고 세알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한참 들어 올려야 했다.
“자작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세알 자작은 자책하고 있다.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지 마세요.
자작님은 충분히 멋있는 사람이니까.”
세알은 입술을 꽉 깨물고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저 작은 소녀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생명이 깃든 것 같았다.
비올라의 손에는 저번에 보았던 핑크 다이아몬드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자작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비올라가 크게 느껴졌다.
커다란 사람이 다가와 자신을 안아주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작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받아 들었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용서받은 기분이 들어 후련해졌다.
“제 아이의 후견인이 비올라 공녀님이라서 다행입니다.”
비올라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어린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세알 자작에게는 거인이었다.
“언젠가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제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다시 데려와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세알 자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비올라와 눈을 마주쳤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 일생에 당신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
비첸이 히히 웃었다.
“손목이 덜렁덜렁하잖아? 에효, 아프당.”
피가 철철 났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마법 포션을 발라 지혈했다.
“제법이야, 멍멍이. 진짜 잘릴 뻔했어.”
“손목을 자르려고 했는데 실패했군요.”
툰드라도 정상은 아니었다.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실전을 가장한 대련을 펼쳤기 때문이다.
둘이 대련을 펼친 연무장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대련이 끝난 뒤, 툰드라는 힉슨에게 말했다.
“저는 더 강해져야 합니다.”
힉슨은 볼을 살살 긁었다.
툰드라는 충분히 빠른 속도로 성장중이었다.
벨라투의 직계인 비첸의 손목을 거의 자를 뻔했다.
수련한 시간이 비첸보다 훨씬 적은데도 벌써 여기까지 왔다.
“뭐가 널 그렇게 간절하게 하는 거냐?”
“그야……….”
툰드라는 비올라를 떠올렸다.
툰드라에게 있어 비올라는 늘 갈망하는 존재였다.
“ “주인님께 부끄럽지 않은 반려가 되고 싶어서요.”
주인을 지키는 개라면 적어도 주인 보다는 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한껏 믿고 휘두를 수 있는 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툰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야! 그래! 그거지. 드디어 견이라는 글자를 뺐네.”
힉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저놈이 고집을 꺾었다.
어딜 가도 자꾸 제 스스로를 ‘반려 견’이라고 표현하는 통에 힉슨은 난 감했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비올라를 둘러싸고 괴이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빼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주인님께 부끄럽고 싶지 않아요.”
비올라는 강했다.
하얀 벨라투여서 무력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긴 했지만 말이다.
“저는 날카로운 이빨이 되고 싶어요.”
“흠.”
힉슨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방법이 있기는 한데.”
아주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의 훈련 방법은 굉장히 무식했다.
수련하다가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무엇입니까?”
“눈이 부는 곳’에서 수련하면 돼.
옛 무인들의 성지가 그곳에 잠들어 있거든.”
지나치게 위험하고 혹독한 훈련이라 지금은 그 누구도 눈이 부는 곳을 찾지 않는다.
수련을 위해 들어갔던 무인 중 6할은 죽고, 3할은 심각한 부상이나 정신병에 시달린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있지.”
힉슨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리고 또 헤론 공작의 방을 가리켰다.
“쟤.”
약간 옆으로 움직였다.
메데이아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메데이아.”
이번에는 손가락을 남쪽으로 움직여 멀리 가리켰다.
“검의 황제 넬라크.”
약간 왼쪽으로 틀었다.
“폭풍검 재칼. 아 참. 제논이 스스로 말을 안 하기는 했는데, 아마 걔도 눈이 부는 곳에서 수련했을걸?
냄새가 나.”
문득 생각난 듯, 한 명을 더 언급했다.
“저기 6마탑의 시르송도 거기서 나랑 같이 수련했어.”
한두 세대 거슬러 올라가면 눈이 부는 곳에서 수련한 사람이 꽤 된다고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일단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어느 한 분야의 정점.
혹은 정점에 근접한 자가 되었다고 했다.
툰드라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저를 그곳으로 보내주세요.”
“시간이 오래 걸릴 거다.”
“괜찮습니다.”
“네놈이 그토록 집착하는 네 주인을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부끄러운 반려가 되어 옆을 지키는 것보다는, 보다 당당한 반려견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낫겠지요.”
힉슨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처음에는 견을 잘 뺐는데, 뒤에는 본심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래 그럼. 가봐. 길을 알려줄 테니.”
“스승님은요?”
“야. 나는 다 늙어서 거기 못 가.
무서워.”
캣맘 힉슨은 진심으로 말을 이었다.
나까지 가면, 나비는 누가 챙겨주냐?”
***
비올라는 품속에 작은 아이를 안았다.
자작령으로 올 때는 낡고 볼품없는 마차를 타고 왔으나, 벨라투가로 돌아갈 때는 최고급 마차를 섭외했다.
이례적으로 벨라투 공작가를 상징하는 황금사자의 깃발을 높이 들었으며, 화려한 군악대와 수많은 호위기사가 함께했다.
거대한 마차에서 은발의 소녀가 내렸다.
“데리러 왔어, 비올라.”
비올라는 이 위풍당당한 행렬에 찔끔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구나.
부자 언니 만세다.
“이 정도면 그 누구도 우리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야.”
1년 전 세나 공녀를 습격했던 놈들을 제외하면 말이야.
헤라는 그 말을 삼켰다.
한편, 비올라는 세알 자작 내외에게 인사했다.
“베나토의 안전은 책임질게요. 두분께서는 언제든 겨울성을 방문하셔서 아이를 만나보아도 괜찮습니다.”
세알 자작 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비올라는 마차에 올라탔다.
훗날 벵가스가 될 뻔했던 베나토는 두터운 요람에 둘러싸여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각종 마법이 걸려 있는 최상급 요람이었다.
헤라가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후견인이 되어줘야지. 최선을 다해서.”
“왜?”
“나는 귀족이니까.”
헤라는 킥, 웃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단 말이야.”
오래전 샤이크 황무지의 땅을 대거매입할 때도, 동대륙의 암살자를 굳이 살려서 스승으로 삼은 것도, 헤라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네 선택은 늘 옳았어. 그래서 이번에는 널 의심하지 않아보려 해.”
헤라는 요람에 둘러싸인 아기를 바라보았다.
“꽉 쥐면 부서질 것같이 생겼네.”
비올라는 속으로 기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략 귀엽다는 뜻이지?’
그걸 헤라식으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예상대로 산적 무리 등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고 별다른 탈 없이 공작저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작저에 도착하기 전, 헤라가 물었다.
“6마탑을 찾아가겠다는 계획은 진심이야?”
마탑은 폐쇄적인 곳이다.
어지간해서는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억지로 마탑에 진입하려다가 마법트랩에 걸려 죽은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초대받지 않은 자는 마탑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비올라는 마탑에 초대받지 못했다.
진작에 서신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이미 거절당했잖아. 네가 아무리 벨라투의 공녀여도 위험할 수 있어.”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언니 미래를 사겠다고 했잖아.”
비올라의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헤라는 전율을 느꼈다.
비올라의 말이 크게 다가왔다.
“보여줄게. 어떻게 하는지.”
헤라의 눈이 총총 빛났다.
오늘도 비올라의 다리는 달달 떨렸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