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25화비올라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셰일란과 다르게 잎사귀 등의 풀을 따로 준비하거나 주변의 풀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무한히 생성되는 꽃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의 장막에 둘러싸인 비올라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저 아저씨 싫어.”
퐁퐁이는 울먹거렸다.
“아포다.”
“조금만 버텨줘.”
“응. 나는 위대한 퐁퐁이니까 참을 수 있…… 으으, 없어!”
한 남자가 목검을 휘둘렀다.
사실 목검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어디서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온 모양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헤론이었으며 겨울성의 절대자였다.
퐁퐁이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며 비올라의 아버지 이기도 했다.
‘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겠어.’
초검을 아무리 사용해도 비올라는 헤론에게 미세한 상처 하나조차 남기지 못했다.
비올라의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1년 전부터 헤론은 비올라의 대련 상대가 되어주었다.
겨울성 내에서는 꽤 큰 이슈였었다.
헤론이 자식에게 직접 대련 상대가 되어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 대단하다는 메데이아 공녀조차도 헤론과 대련을 해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온갖 소문이 겨울성을 강타했다.
“이봐. 그 얘기 들었어? 철혈 공녀께서는 사실 악마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더군.”
“나도 들었어. 그런데 그것은 피를 마셔야만 가능하다나 봐.”
“그렇기에 그분께서는 검은 벨라투가 아닌 하얀 벨라투가 되기로 작정하셨다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피에 미쳐서 광인이 되어버리면 안 되니까. 하얀 벨라투는 극한의 정신 수련이 동반되어야 하잖아. 스스로를 다스리고 안정시키기 위하여 하얀 벨라투가 되신 거래.”
여태껏 하얀 벨라투는 늘 공작저의 변방이었다.
검은 벨라투야말로 진짜 벨라투로 인정받는 시대.
하얀 벨라투는 낙오자로 인식되어 왔다.
“ “세상에나, 그런 속사정이 있었단 말이야?”
“악마의 재능을 가졌으나 천사의 심장을 가지셨군.”
아무튼 비올라는 헤론과 대련하게 되었고, 덕분에 겨울성 내에서 비올라의 이름값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다만 비올라는 죽을 맛이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비올라가 딱 그 꼴이었다.
헤론과 가끔 대련하게 되면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강해져야 했다.
“스승. 나 열심히 가르쳐 줘. 보너스 두둑이 줄게.”
셰일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물(돈)만 주면 무엇이든 주었다.
“비첸 오빠. 나랑 대련하자.”
그동안 피해왔던 비첸과의 대련도 수없이 진행했다.
어쩔 수 없었다.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낙오될 것이 뻔했으니까.
가늘고 길고 행복한 삶을 꿈꿨는데 자꾸 뭔가 거창해졌다.
비올라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만하지.”
헤론은 귀신같이 비올라의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꼭 기절하기 직전에 대련을 멈추었다.
다음번에는 더 좋은 모습 보일게요.”
제발 부탁이니까, 우리 대련 그만 좀 하면 안 될까요?
나 매일매일 살 떨리는 기분이야.
그 말은 하지 못했다.
“6마탑을 방문한다지?”
“네, 섭외할 사람이 있어요.”
“그렇군.”
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섭외 이유는?”
“제가 벌인 일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요.”
벵가스, 아니, 베나토를 가르쳐 줄마법 스승이자, 베나토를 사랑으로 감싸줄 사람이 필요했다.
비올라는 6마탑에 적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탑에서는 네 방문을 거절했다던데.”
마탑은 대륙에서 가장 폐쇄적인 곳이다.
마탑의 마법사들과 마탑의 피고용 인들이 아니면 들어가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아무리 지체 높은 귀족이라도 특별한 이유 없이는 마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랬죠.”
“방문 거절과 상관없이, 마탑으로 가겠다?”
“네.”
헤론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마탑은 불법 침입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상당히 성가신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비올라와 헤어진 뒤 서재로 돌아온 헤론이 칼튼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비올라를 지원해.”
…예?”
칼튼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공작을 모셔온 평생 동안 공작이 아닌 다른 사람을 지원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마탑으로 간다더군.”
“어디입니까?”
“6마탑.”
칼튼의 눈빛이 깊어졌다.
“설마 전쟁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겨울성과 6마탑은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게다가 최근 6마탑이 골든 로드의 이권 다툼에 깊게 개입하면서 겨울 성과 의견 다툼이 많았다.
‘만약 비올라 공녀가 그곳에서 죽게 된다면… 마탑을 칠 명분이 생긴다.
비올라를 지원하라?
역시 이상한 명령이었다.
명목상 지원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미행하여 증거를 수집하라는 얘기로 해석했다.
비올라의 죽음을 증명할 증거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공작님께서 비올라 공녀와 종종 대련하셨던 건, 대외적으로 친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공작이 6마탑을 부숴 버릴 명분이 생기니까.
1년 전부터 공작은 오늘을 계획해온 것 같았다.
“크흠! 공작님 외람되오나…….”
칼튼이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공작님, 비올라는 꽤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직한 말로 칼튼은 비올라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올라는 훌륭한 벨라투로 자라주었으며 늘 좋은 모습만을 보여왔다.
알고 있다.”
“그러니 기회를 조금 더 주시는 건 어떨까요?”
이대로 희생시키기에는 너무 아쉬운 아이입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총집사.”
헤론은 여태껏 칼튼을 신뢰해 왔다.
칼튼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고, 칼튼은 그 신임을 받기에 한 점 부족함이 없는 집사였다.
그런데 오늘은 칼튼답지 않게 조금 답답했다.
“혹여 비올라가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지원하라는 뜻이다. 티 나지 않게.”
칼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벨라투의 자식을 향해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무나 이상한 명령이었다.
공작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6
…알겠습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깊은 속내를 알기는 어려웠으나 명령은 수행하기로 했다.
***
“네가 웬일이냐, 나를 다 호출하고?”
힉슨은 더 이상 옛날의 힉슨이 아니었다.
술주정뱅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항아리처럼 나왔던 뱃살은 모두 사라졌고 가늘어졌던 팔다리에는 다시 보기 좋은 근육이 차오른 상태였다.
폐인 같던 분위기를 풍기던 힉슨은 이제 흑경의 모습을 되찾았다.
“썩은 생선 눈 같았었는데. 생기를 되찾았군.”
“좋은 어른이 되어주기 위해서지.”
“누구에게?”
“딸에게.”
헤론이 쥐고 있던 깃펜이 뚝! 부러졌다.
아무튼 저 ‘딸’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네 딸은 죽었지 않나.”
“새로운 딸이 생겼잖아. 몰랐어?”
“내가 모르는 새 결혼했나?”
“여자 좀 소개시켜 주고 그런 말을 해라.”
헤론은 아무래도 힉슨의 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반대로 힉슨은 어떻게든 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고.
“서류상 너는 딸이 없는 걸로 확인 되었다만.”
“서류상에만 딸이 있는, 폭력적인 누구보다는 각별한 딸이 있지.”
“폭력적인 누가 혹시 나를 뜻하는 건가?”
“글쎄, 나는 누구라곤 말 안 했다.”
다행히 이 자리에 총집사 칼튼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둘의 대화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이 대화는 마치 어린 사내아이들의 투닥거림처럼 보였으나, 느껴지는 마나의 충돌은 가히 전쟁터에 비견되었다.
흑경 힉슨과 천살 공작 헤론의 기세가 부딪치면서 겨울성 전체가 흔들렸다.
“지, 지진?”
“재해 알림은 없었는데?”
“대마물의 전조 증상이다!”
“어서 대피해!”
때아닌 대피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공작저의 몇몇 유리창이 박살 나기도 했다.
공작저의 유리창은 마법으로 강화된 특수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둘의 기세가 어찌나 살벌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헤론이 말했다.
“네게 부탁을 하려 한다.”
“부탁을 하는 사람치고 태도가 영좀 그런데?”
“정정하지. 명령을 하려 한다.”
“헹! 명령?”
힉슨은 크게 코웃음 치며 팔짱을 꼈다.
코에서는 콧김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명령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내가 너를 이기지는 못해도 말이야.”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내가 갈 때, 적어도 네 팔 한쪽은 함께 가져갈 수 있어.”
그동안 힉슨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피나게 수련했다.
그는 정말로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었다.
‘열풍’에 대한 조사마저 뒤로 미루어두고, 그는 수련에 매진했다.
그는 간절했고 간절한 만큼 더 높이 성장했다.
“비….”
헤론은 ‘비올라’ 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벨라투의 막내딸이 6마탑으로 갈것이다. 초대받지 못한 자리다. 어쩌면 크고 작은 다툼이 벌어질 수 있겠지.”
비올라의 얘기가 나오자 힉슨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데?”
“내 막내딸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라.”
벨라투치고는 지극히 이상한 명령이었으나 힉슨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똑똑하고 유능한 칼튼과는 달랐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미 딸을 잃었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내 딸은 지키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낳은 딸은 지킬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다짐하며 살아간다.
힉슨이 다시 한번 헹!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네 명령이 아니라 내 의지로 지킬거야.”
뭐 그런 시답잖은 것도 명령이라고,힉슨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딸 앞에서도 좀 그렇게 솔직히 굴어봐라. 지가 무슨 츤데레인 줄 알아.”
힉슨은 요즘 귀족 영애들이 읽는다는 로맨스 소설을 읽는 중이다.
어린 영애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영애들의 심리는 어떠한지.
영애들의 눈에 어떤 사람이 멋있는 사람인지.
“츤데레가 뭔지도 모르지?”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은 좋은 아빠가 되어주고 싶은 힉슨의 노력 중 하나였다.
헤론은 ‘츤데레’가 무슨 뜻인지 알수 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겨울성의 그 누구도 헤론과 힉슨사이에 이러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편, 비올라는 짐을 챙기면서 시름에 잠겼다.
‘
책임을 지긴 해야 하는데..
헤라한테도 멋있게 말해놨고.
아버지한테도 말을 해놓았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빼박이다, 이제.’
6마탑으로 가야 한다.
가서 시르송의 낙오된 제자이자 6마탑의 천덕꾸러기라 불리는 엘시나를 만나야 했다.
마탑의 특성상, 아마도 힘든 과정이 될 것이었다.
“퐁하. 나 지켜줄 수 있지?”
“그으럼. 나는 위대하니까.”
“마법이 막 날아오고 마도 병기가 공격하고 그러면, 잘 막아줘.”
“꽁하만 믿어, 꽁하만.”
그래.
날 지켜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제논이야 어차피 직접적인 관여는 거의 안 할 테고.
그렇다고 수호기사 등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면 6마탑에 대한 선전포고처럼 보일 수 있다.
비올라는 제논과 단둘이 길을 떠났다.
‘나는 무해한 존재입니다… 를주장하기에는 이 정도 인원이 딱이지.”
마차 밖에서 제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곧 6마탑의 권역에 도착합니다.”
얼마 후, 사이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허가받지 않은 자는 돌아가라는 마법 알림이었다.
여러 차례 경고가 이어졌다.
돌아가지 않으면 마도 병기의 발포가 있을 거라고 했다.
“어떻게 할까요?”
“멈춰.”
비올라는 마차에서 내려섰다.
“ “뚫고 갈 거야. 마탑의 탑문 앞까지.”
비올라는 물의 장막을 펼친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법 공격이 쏟아졌다.
몸에 충격을 조금 준다거나 피부가 가렵다거나,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 진다거나.
그 정도 수준이었다.
“이제 진짜 마탑의 권역 안에 들어 섭니다, 공녀님. 단순히 경고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논은 늘 그렇듯 빙그레 웃었다.
그와 동시에 마법 알림이 들려왔다.
[해당 권역은 마탑의 권역입니다.]
[마탑은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마도 병기의 사격이 시작될 것을 고지합니다.]
후우.
비올라는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는 다 예상하고 왔다.
“가자.”
그런데 그때,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마탑 놈들 이거, 인간적으로 너무 하네! 나 좀, 화가 나려 하는데?”
비올라의 계획에 없던,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