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0화각 빈민가에는 빈민가를 대표하는 거지 패의 수장이 있었다.
거지들은 그를 일컬어 왕초라고 불렀다.
그들은 약자들의 대표답게 눈치가 굉장히 빨랐고 어떤 경우에는 기감이 굉장히 예민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강한 자의 기운’을 쉽게 읽어내는 본능적인 감각을 가졌다.
2번 빈민굴의 왕초인 케이타룬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올라를 보자마자 알았다.
‘저, 절대자다!’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절대자의 운명을 타고난,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우아하게 피어난 고귀한 자.
그의 눈으로 본 비올라는 그러했다.
‘눈을 마주치면 안 돼.’
잠깐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했다.
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느낀 적은 몇 번 없었다.
‘무서워. 도대체 저런 자가 여기는 왜?’
케이타룬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비올라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따뜻하게 웃는다고 웃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케이타룬이 침을 꿀꺽 삼키고 되물었다.
“무, 무엇이 궁금하십니까요?”
“시르송의 낙오된 제자를 찾고 있어.”
“저, 저희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요!”
케이타룬은 혹여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펄쩍 뛰며 엘시나를 부정했다.
엘시나는 마탑의 권력자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고, 거지들은 엘시나와 얽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괜히 엘시나와 얽혔다가 마탑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 두렵기도 했고,
“엘시나를 몰라?”
“정말, 정말 모릅니다요.”
“6마탑의 사람이 엘시나를 모른다니. 지나가던 고슴도치도 안 믿겠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비올라의 살성을 마주하고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저희는 정말 없는 것처럼 조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그건 너희 하는 거 봐서.”
비올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내뱉었다.
약간은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와, 나도 이제 벨라투 다 됐네.’
왠지 뒤에 서 있는 제논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비올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엘시나는 모른다 쳐. 너희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지?”
“어, 없습니다!”
엘시나가 거지들에게 가장 먼저 하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문맹 탈출이었다.
글자를 알아야 저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최소한 마탑을 빠져나갈 권리는 획득할 수 있을 거고, 세상 밖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케이타룬은 한사코 그런 적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진짜로 모르는 거 같네.’
가명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 속에서 읽은 가명을 그냥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너희에게 체조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체, 체조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 여러 번 묻게 하지 말고.”
미안합니다, 여러분.
핍박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괜히 소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마탑 경비대가 출동하면 또 곤란해지 거든요.
시간이 생명이에요.
양해 좀 해주세요.
비올라는 속으로 저들에게 사과했다.
“있을 텐데. 요르가 체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요르가 체조는 말이 체조일 뿐, 사실은 명상식이다.
비올라가 오래전 제르미에게 해주었던 말.
‘요르가 명상식을 수련하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등장하는 ‘요르가 명상식’이 곧 ‘요르가 체조’였다.
거지 패가 명상식이라는 말에 워낙 거부감을 느껴서 체조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엘시나는 명상식을 체조에 접목하여 몇몇 동작을 창안해냈다.
“아, 아! 체조 선생이라면 있습니다! 아, 알고 있어요! 제, 제1빈민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
비올라와 제논은 잘 닦인 대로를 걸었다.
바닥은 대리석이었는데 촉감은 폭신폭신했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 상당히 편했다.
태양은 졌고 밤이 되었으나 마탑 안은 환했다.
마탑의 도시는 불이 꺼지지 않는 화려함을 자랑했다.
‘이토록 화려하고 깨끗한 도시인데….’
케이타룬 같은 거지 패가 존재한다.
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했다.
저들을 저렇게 만들지 않았어도 충분히 공존이 가능했을 텐데.
사람들이 참 못된 것 같다.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 있던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아니, 그래도 그렇게 발발 떨 일이야?’
사람이 자신을 보며 벌벌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손을 싹싹빌던 그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때, 제논이 물었다.
“요르가 체조가 무엇입니까, 공녀님? 저는 처음 들어봐요.”
“나도 최근에 소식지를 통해 접한 거야.”
사실 소설에서 봤다.
“요르가 명상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귀부인들이 익히는 우아한 명상식이라고 알고 있어요. 마나를 수련하는 데 아주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정신을 수양하고 맑은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요르가 체조는 그 맑은 정신을 강제로 만들어줘.”
본래는 명상으로 명상식을 완성하고, 그를 통해 마나의 움직임을 유도한다.
이것이 원래 요르가 명상식의 순서였다.
그러나 체조는 순서가 반대였다.
“특별한 자세와 호흡법 등을 통해 마나가 저절로 움직이도록 만들어.”
본인이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마나를 유도한다.
“마나가 그렇게 움직이니까 저도 모르게 체내에 마나가 쌓여가. 명상식과 비슷한 효과를 내.”
“가능한 일인가요?”
““마도의 메데이아라면 가능하겠지.
메데이아 언니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왔잖아.”
“그건 그렇네요.”
제논은 빙그레 웃고서 비올라와 보폭을 맞추었다.
오늘도 비올라는 신기했다.
‘저런 건 언제 공부하신 거지?”
하루하루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역시 우리 공녀님이셔.’
제논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비올라 공녀를, 진심을 다하여 보필하겠다고.
어느덧 그들은 케이타룬이 말해주었던 1번 빈민가에 도착했다.
1번 빈민가는 도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낙후된 곳이었다.
이곳은 어두웠고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마을 입구로 추정되는 나무 대문이 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나무 대문은 거의 썩어 있었다.
대문 근처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비올라를 발견했다.
비올라가 손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그들은 모조리 도망쳤다.
조금 민망해진 비올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을 내렸다.
‘집들의 대문과 창문이 닫히고 골목의 어린아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간간이 보이던 어른들도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혹은 ‘일할 때’를 제외하면 감히 다른 사람(마법사)과 마주쳐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있어서일지도.
비올라가 작게 말했다.
“요르가 체조를 배우러 왔어요, 엘나 선생님.”
케이타룬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엘나라고 했다.
엘시나의 가명이었다.
케이타룬은 엘나가 엘시나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듣고 있는 거 다 알아요.”
작게 말하고 있지만 엘시나는 모두 듣고 있을 거다.
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어차피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다라는 말에 비올라의 살성이 절로 반응했다.
그녀의 살기는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주변으로 흩어졌다.
초검의 기운을 일으켰다.
단순한 ‘운’이었지만, 초검에 비올라의 살기가 덧씌워졌다.
살기에 예민한 비올라이니만큼 자신이 뭘 했는지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울고 싶다.
어마어마한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심약한 자들은 환상을 보거나 기절할 수도 있는 기운이었다.
아린이 꿈꾸었던 행복한 세상의 따뜻한 뿌! 꺄! 삐! 뽀! 영애는 이 자리에 없었다.
넘치는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살인귀 꿈나무가 있을 뿐.
‘제논. 그렇게 흐뭇하게 웃지 말아주라.’
정확히 2초 후, 한 집의 문이 열렸고 늘씬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우와, 어른이네.’
큰 키와 늘씬한 선을 가진 저 사람은 비올라의 이상향에 가까웠다.
단단한 무인과는 다른 느낌의 몸선이었다.
비올라가 치맛단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시나.”
가명이 아닌 본명을 불렀으나, 그녀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마탑에서 보냈나요?”
“아뇨. 제 이름은 비올라. 엘시나 경을 섭외하러 왔어요.”
“저를요?”
엘시나는 비올라에게 그다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살기를 뿌려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엘시나 경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가 있어서요.”
“그런 사람은 이곳에도 많아요.”
비올라는 미래를 알고 있다.
엘시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거지들을 품어가지만 결국 거지들은 엘시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
거지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엘시나는 결국 처형당하게 되고 거지들은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엘시나의 방법은 그다 .
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엘시나 경이 저를 도와주시면, 저도 엘시나 경을 도와드리지요.
“왜요?”
“방금 저는 케이타룬이라는 자를 만났어요.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조아렸고 무릎을 꿇었어요.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비올라가 엘시나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잘못됐잖아요.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씨익 웃었다.
“잘못을 보았으면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귀족의 의무 아닌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엘시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비올라라는 이름을 알고는 있었다.
벨라투의 철혈 공녀이자 악마의 재능을 가진 소녀라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허튼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요?”
그러자 저 작은 소녀의 입에서 아이답지 않은 말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엘시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