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1화비올라는 가벼운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엘시나 경의 따뜻한 계몽으로는 저들을 밝은 곳으로 이끌 수 없어요.”
“확신하듯 말씀하시네요.”
“방금도 봤잖아요. 이름을 숨기고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던 엘시나 경이 제 앞에 있어요. 저는 마탑에 들어온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엘시나 경을 찾아냈죠. 제가 엘시나 경처럼 따뜻한 방법만을 사용했다면 가능했을 것 같아요?”
“그건….”
엘시나로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아주 적극적으로 숨겼던 건 아니었다.
사실 마탑의 고위 관계자들은 이미 엘시나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탑과는 관계없는 외부인 이 하루 만에 찾을 줄은 몰랐다.
“엘시나 경의 방법이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가끔은 다른 방법도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겨울성에는 마물이 많아요. 가끔은 맹독을 가진 마물들도 내려오지요. 그 맹독에 당하게 되면, 겨울성의 무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알고 계세요?”
“마법으로 치료하겠지요.”
“마법조차 통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라면요?”
“그러면…….”
엘시나는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무인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요.”
“심장으로 통하는 길목을 잘라요.”
“….…예?”
“손이 물리면 손목을 자르고, 팔을 물리면 어깨를 잘라요. 발가락을 물리면 발목을 자르고, 발목이 물리면 무릎을 잘라요. 독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에요. 동대륙의 언어로 고육지책이라고도 하지요.”
엘시나는 비올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우리에게도 고육지책이 필요하다.
는 뜻인가요?”
“요르가 체조를 통해 저들은 마나를 익힐 수 있었어요. 최소한 글씨를 쓸 정도는 됐겠죠.”
그러나 아무도 마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누구도 자유를 탐하지 않았다.
자유를 속박당하는 두려움보다, 마탑 밖의 생활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라는 건 상대적인 거예요. 더 무서운 게 있고, 덜 무서운게 있죠.”
용병왕 카이저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지만 팬 케이크는 두려워한다.
“일단 저들은 경험해야 해요. 자유가 무엇인지. 지금의 저들은 자유를 생각할 여유나 의지조차 없어요.”
이 안에 더 무서운 것이 생기면 밖으로 나갈 거다.
“엘시나 경은 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고 생각하죠?”
“최선을 다하고는 있어요.”
“저들을 공포에 밀어 넣은 적은 없겠죠.”
아까 케이타룬을 보며 느꼈다.
저들은 두려움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다.
비올라가 마나를 실어 말했다.
“일주일의 여유를 줄게. 마탑 밖으로 나가.”
대외적으로 저들은 마탑을 나갈 권리가 있다.
서류만 제대로 구비해서 제출하면 자유로이 나갈 수 있다.
“일주일 동안 이곳을 비우지 않는 자들은.”
초검이 마을의 나무 기둥 하나를 잘라냈다.
“목을 벨 거야.”
엘시나는 ‘그만둬!‘라고 외치려고 했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엘시나는 스스로 마나를 봉인한 상태였고, 최소한의 마나 운용밖에 못했다.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다.
엘시나는 잔뜩 화가 나서 비올라를 노려보았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엘시나 입장에서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토록 요지부동이었던 1번 빈민가의 사람들이 결국 서류를 모두 접수했고, 마탑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텅 비어버린 1번 빈민가의 마을 광장.
그곳에서 엘시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죠?”
“말했잖아요. 공포는 상대적인 거라고.”
“아뇨. 그거 말고, 마탑의 관리인들이 모두 승인을 했잖아요.”
거지들의 서류라면 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집어 던졌을 텐데.
“가르쳐 줘요? 가르쳐 주면……….”
비올라는 순간 고민했다.
베나토의 선생님이 되어줄래요?
진지하게 거래에 대해 얘기해 볼래요?
여러 가지로 고민했으나, 아린은
‘비올라답게 말하는 것을 선택했다.
“내 사람이 되어주세요.”
발가락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런 대사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왜인지…… 인재 컬렉터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비올라는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참. 그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마탑 밖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놨으니. 안내자가 붙었을 거예요.”
“..…안내자요?”
“이름은 아실 거예요. 검은 고래힉슨.”
엘시나의 눈이 커졌다.
흑경 힉슨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과거 헤론 공작과 함께 활약했었던 영웅 아닌가.
‘그런 거물을 움직였다고?’
비올라가 엘시나의 가슴에 쐐기를 박았다.
“이 정도도 증명하지 않으면서 엘시나 경을 내 사람 삼겠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오므라드는 손가락과 발가락에 힘을 꽉 주면서,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엘시나 경이 꿈꾸었던 세상. 그대가 소망하는 세상에 동참할게요, 내가. 그러니 엘시나 경도 저를 도와주세요.”
***
칼튼은 주위를 살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주변에 마을이라도 있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흑경과 용병왕의 싸움이라니.
주변은 모조리 폐허가 되어버렸고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힉슨과 카이저의 힘은 막상막하.
힉슨의 패도적인 검과 카이저의 막 강한 철퇴는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칼튼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먼저 싸움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힉슨 경이었습니다.
그는 감히 내 딸을 괴롭혔다면서 카이저에게 매우 심한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카이저는 화가 잔뜩 나서 힉슨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둘의 싸움은 4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4시간이나 지속된 결투.
그러나 둘 다 지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점점 더 흉폭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둘의 싸움을 멈춘 것은 지나가던 아기 표범이었다.
[둘이 한창 전투를 벌이는 그곳에 아기 표범이 나타났고, 힉슨 경과 카이저는 모두 무기를 거두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둘은 마음이 통하여 악수를 나누기까지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기는 했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둘 다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겉에서 보기에 둘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면 아기 표범이 근처에 나타나지도 못했다.
접근하기도 전에 검압에 의하여 산산조각 났을 것이었다.
다시 말해, 둘은 아기 표범의 존재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아기 표범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절하며 싸웠다는 뜻이었다.
“너 제법 괜찮은 놈이구나.”
“너도.”
힉슨과 카이저는 손을 맞잡았다.
“네 딸. 귀엽더라.”
“그치?”
힉슨의 눈에 자부심이 차올랐다.
비올라가 귀엽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들 비올라의 살성에 지레 겁먹고 비올라를 두려워하기만 했다.
“좀 볼 줄 아는 놈이구나. 비올라의 귀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놈들은 몇 없는데.”
“이상한 놈들이네. 귀엽던데.”
마나를 사용하여 대화를 엿듣던 칼튼은 말해주고 싶었다.
‘ ‘당신들이 이상한 겁니다.’
그런데 카이저가 말했다.
“대화 엿듣는 저놈은 같은 편?”
“같은 편.”
“난 엿듣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
죽여도 돼?”
“힘들걸?”
힉슨은 칼튼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진심으로 싸워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네가 져?”
“결투는 내가 이길 거 같고.”
뻥 뚫린 공간에서 시작 신호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 결투다.
“전투는 질 거 같고.”
목숨 걸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죽이는 게 전투다.
결투는 이기겠지만 전투는 질 것 같았다.
총집사 칼튼은 흑경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근데 문제는, 칼튼을 죽이면 비올라가 너 싫어할걸?”
“그럼 안 되겠네.”
카이저는 단순했다.
“근데 말이야, 나 때문에 손해배상청구서가 날아갈 거라는 건 사실이야?”
“글쎄. 내가 6마탑의 탑주라면 그렇게 할 거 같긴 해.”
“난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데, 왜?”
“그야 6마탑 입장에서는 겨울성에 돈을 받아내고, 겨울성이 네게 돈을 뜯어내게 하는 것이 편하니까?”
힉슨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칼튼. 당신 생각은 어때?”
멀리서 몸을 숨기고 있던 칼튼은 은신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냥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겨울성에서는 일단 손해배상을 해준 뒤, 카이 저 님에게서 강제로 추징하겠지요.”
카이저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겨울성에 너 같은 놈이 많아?”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만, 적지도 않습니다.”
“괴물이 득실거리는 곳이군.”
카이저는 에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힉슨과 칼튼은 동시에 긴장했다.
‘머리도 근육으로 만들어진 저놈이 선전포고라도 하는 거 아냐?’
‘용병들을 규합하여 겨울성과 싸우겠다고 하면 불편해집니다만.’
그렇지만 카이저의 말은 의외였다.
“내가 겨울성의 식구가 되도록 하지.”
“.……예?”
“안 그래도 용병일이 지겹던 차였어. 겨울성에서 일하면서 손해를 메꿔줄게. 어때? 나 몸값 꽤 비싸다?”
칼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공작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올려야 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얘 딸이랑 친구 하기로 했거든.”
카이저가 크하핫! 웃었다.
“친구를 도와주고 싶어졌어.”
비올라가 모르는 사이 강력한 지원군이 겨울성에 제 발로 몸을 의탁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하얀 벨라투의 용병술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칼튼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라고 합니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카이저는 계속하여 비올라를 힉슨경의 딸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그다지 신경 쓰시지는 않겠지만 혹시 몰라 첨언합니다.]
***
엘시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의 방법은 틀렸을까?’
그녀가 수년간 해오려고 했던 것을, 비올라 공녀는 단 일주일 만에 해버렸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냐. 틀리지 않았어.’
비올라가 말해주었다.
엘시나 경의 지난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은 없었을 거라고.
그들이 요르가 체조를 익히지 않았다면 글씨조차 쓰지 못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충격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1번 빈민가의 사람들을 모조리 밖에 내보냈어.’
관리인이 승인하게 만든 것도 놀라운 일이었으나 겨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흑경과 용병왕이라니.’
사실 용병왕은 비올라의 계획에 없던 사람이기는 했다.
원래 거지 패의 인솔은 힉슨에게만 부탁해 놨었으나 엘시나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힉슨 한 명만 해도 놀라운데 거기에 용병왕까지 거느리고 있다니.
‘그대가 소망하는 세상에 동참할게요’라던 비올라의 말이 허풍이 아닌 것 같았다.
엘시나는 한참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제 가르쳐 줘요.”
마탑의 관리인들은 본래 서류를 잘 수리해 주지 않는다.
특히 거지들의 서류는 더욱 그랬다.
“어떻게 이렇게 일이 빨리 진행될 수 있었죠?”
마탑에서 나고 자란 엘시나이기 때문에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 사람이 되어줄 거예요?”
“그럴 것 같아요.”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됐다!’
엘시나는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베나토의 훌륭한 어머니이자, 참 스승이 되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비올라가 웃자 으스스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비올라의 말을 듣자 엘시나는 또다시 충격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