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4화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제안인가요?”
“내 아끼는 제자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법.”
퍽이나 아꼈겠다. 비올라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참았다.
“내 발에 키스하고 간곡히 부탁한다면 생각해 볼 수 있겠어.”
비올라는 발에 키스를 받는 것을 싫어한다. 받는 것도 싫은데 하물며 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미공자 제르미라고 해도 싫은데 마탑주 시르송이면 더더욱 싫었다.
순간, 제논은 생각했다.
‘발이 없어지면 키스를 받지도 못할 텐데요.
깊게 가라앉은 제논의 눈이 시르송의 발목을 향했다.
자르기 참 쉬울 만큼 얇은 발목이었다.
한편, 비올라는 시르송의 생각을 쉽사리 읽을 수 있었다. ‘시르송은 명예욕에 미친 인간이야.’
타인의 칭송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인간이다. 저 명예욕만 아니었어도 훨씬 더 뛰어난 마탑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자신의 발에 키스하며 존경을 표시했다는 걸 세상 널리 알리고 싶겠지.’
비올라는 고민했다. 목숨 걸고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살아가고 있는데, 까짓거 저 발에 키스쯤 못하겠냐.
……싶다가도,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고 회의감이 들었다.
“왜? 싫은가?”
시르송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제안을 조금 바꾸지. 소식지에 그러한 내용을 실어도 되겠는가?”
실제로 키스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다만 소식지에 ‘비올라 공녀가 자신의 발에 키스했다’ 라는 내용을 신겠다고 했다. ‘그래. 저 정도는 괜찮겠지.’
이 세계에서 발에 키스한다는 건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개인의 인성과는 상관없이 마탑주라면 존경을 받을 만큼 충분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크게 이상한 내용은 아니니까.”
이렇게 해서 엘시나를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이 순간까지는. 그러나 모든 상황이 비올라의 뜻대로 조율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소식지의 편집부와 보도부는 매우 바빠졌다.
“비올라 공녀와 관련된 최신 소식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용병왕 카이저. 아기 사슴 용병대.
흑경 힉슨,
이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비올라는 대륙의 가장 뜨거운 주제로 떠올랐다.
대륙의 수많은 소식지가 비올라에 대해 다루었다.
“6마탑으로부터 온 제보입니다.”
“뭔 제보인데?”
“비올라 공녀가 6마탑주 시르송의 발에 키스하며 존경을 표했다는 내용입니다.”
모나크 제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소식지 중 하나인 ‘모나크 페이퍼’의 편집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끝?”
“네, 끝입니다.”
편집장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마탑주가 키스받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런 건 크게 이슈가 되지 않는다. 물론 비올라 공녀가 떠오르는 신성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럴듯한 서사가 없으면 이 정도 일은 특종이라 볼 수 없었다. “그 영감탱이도 어지간히 뽐내고 싶은가 보네.”
“그런가 봅니다. 워낙 명예에 집착하는 인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합니다만……….”
편집장이 쩝, 입맛을 다셨다. “반대였다면 큰 이슈가 됐을 텐데.”
차라리 마탑주가 비올라 공녀의 발에 키스했다면 훨씬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게 훨씬 더 큰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이번 취재를 담당한 소식지의 기자 율리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편집장님, 허락해 주신다면 해당사건에 서사를 입혀보겠습니다.”
“어떤 서사?”
“비올라 공녀가 어째서 마탑주의 발에 키스했는가에 대해 떠오르는 것들이 좀 있어서요.”
율리튼은 유능한 기자였고 사건의 이면을 심도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올라 공녀에 대한 소문을 알고 계십니까?”
“피를 뽑아 먹는다거나? 벌써 수백명의 목을 베었다거나? 그런 거 말하는 거냐?”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비올라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그런 소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악마의 재능을 가졌지만 천사의 심장을 가진 공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에 입각하여 서사를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벨라투의 철혈 공녀는 어째서 마탑주의 발에 키스했는가…… 를 설명하는 서사가 될 것입니다.”
편집장이 눈을 크게 떴다. 특종의 냄새가 슬슬 나기 시작했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느 부분을 조명하고,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다.
“마탑의 거지 패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지요?”
“소문에 불과한 얘기 아니냐?”
마탑은 폐쇄적인 곳이고 그곳을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거지’와 관련한 루머만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마탑에서 빠져나온 거지들이 진짜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실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비올라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타이밍을 보십시오. 비올라 공녀가 마탑을 찾으면서 흑경과 용병왕, 거기에 아기 사슴 용병대까지 투입했습니다. 거기에 벨라투의 총집사칼튼까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전력이지요?”
편집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비올라 공녀는 전쟁을 감수하고서라도 마탑을 찾아간 것입니다.”
말하는 당사자인 율리튼조차도 사실관계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읍소했습니다. 마탑의 거지들도 사람답게 살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고. 그들을 내어 달라고.”
편집장의 머릿속에 특종 경보가 땡! 땡! 울리기 시작했다. 편집장이 말을 이어받았다.
“진심을 다하여 일단 설득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전쟁을 불사하려고 했다?”
“정황상 이야기가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마탑의 거지들과 인터뷰를 해보니 자신들을 내보낸 사람이 바로 비올라 공녀라고 하더군요.”
“다행히 마탑주와 이야기가 잘 되었고.”
“그래서 비올라 공녀가 마탑주의 발에 키스하였다… 라는 서사가 완성됩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감동적인 서사군.”
겨울성의 공녀가 생판 남인 거지들을 위하여 마탑주를 찾아 간곡히 부탁했다는 얘기가 완성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특종이 터졌다.
비올라가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 * *
비올라의 이름이 명성을 타기 시작하면서 각종 소식지가 비올라에 대해 다루었다.
개중에는 비올라의 악명에 대해 다루기도 하였고, 또 일부는 1년 전 세나 공녀의 실종이 비올라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보도를 내기도 하였다.
감히 내 사랑스러운 물주, 아니, 사랑스러운 제자님과 관련된 루머를 퍼뜨려?’
셰일란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비록 은퇴한 암살자였지만 잠시 현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화가 난 그는 겁을 잃었고, 겁을 잃은 셰일란은 최고의 암살자로 거 듭나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그따위 기사를 작성하면 눈알을 뽑고 혀를 자를 거야.”
“사, 살려만 주십시오.”
“정정 보도 써야지?”
“당장 쓰겠습니다.”
셰일란은 바빴다. 비올라의 화제성을 이용하여 악의 적 보도를 내고 물의를 일으키는 기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그중 몇은 셰일란을 협박하기도 했다.
발가벗겨진 중년 남성이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소리쳤다.
“나는 레논지의 수석 기자요! 이번 일을 절대 간과하지 않겠소. 비올라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려드리지!”
“내가 말 안 했나?”
“무, 무엇을?”
“너희가 날 경고의 유령이라 부른다며?”
셰일란은 소식지 기자들 사이에서 ‘경고의 유령’이라 불렸다. 셰일란은 그 별명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난 경고의 유령 따위가 아냐.”
복면 속 그의 입술이 씨익 올라갔다. “암살자지.”
툭. 가벼운 소리와 함께 목이 떨어졌다.
피 분수가 솟구쳤다.
셰일란의 손에는 원고가 들려 있었다.
충격! 벨라투 6공녀와 마탑주의 스폰 관계!)
셰일란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목을 잃은 몸을 감정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왜 내 제자님을 건드려?”
창문을 통해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니까 죽지.”
그의 앞머리가 살살 흔들렸다. 겁쟁이 셰일란은 겁을 점차 잃어갔다.
작가의 설정값이 조금씩 바뀌었다.
셰일란 본인도, 비올라도 모르는 사이에.
* * *
6마탑의 거지들은 겨울성에 도착했다.
처음 그들은 지나치게 겁을 먹은 상태였으나 점차 적응해 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기술자였다. 굴뚝 청소 기술, 광석 제련 기술, 무기 손질 기술, 베이킹 기술, 기타 등등. 마탑의 거지들은 마법사들이 ‘천하다 생각하는 것들을 대신하는 기술자였고, 그들의 존재는 이내 겨울성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 비올라에게 협박당했던(?) 케이타룬은 겨울성에 와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오, 깨끗하군요. 좋은 솜씨입니다.
자주 찾도록 하죠.”
그리고 5,000달리아를 받았다. 케이타룬은 구두닦이의 장인이었다.
그의 구두닦이 실력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겨울성의 사람들은 거지들의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
‘이게 살아 있는 거구나.’
케이타룬은 처음으로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제가 가진 기술을 인정받았다.
마탑에서처럼 숨어 살지 않아도 되었고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비올라 공녀님 덕분이야.’
그들은 자유를 배웠다. 겨울성에는 기술자가 많지 않았다.
겨울성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은 대부분 용맹한 전사로 성장하며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의 땅을 침범하는 마물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살아간다.
그래서 기술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빈자리를 마탑의 거지들이 채워주었다. 겨울성의 전력이 한층 보강된 셈이었다.
‘으, 춥다.
호호 입김을 불어 손을 녹였다.
추위와는 별개로 케이타룬은 오늘도 즐거웠다.
때는 새벽 4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케이타룬은 일부러 이렇게 빨리 나와 손님을 기다렸다.
마탑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하는 것이 즐거워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혹시 갑옷 광도 내주시나요?”
응? 이 시간에 누구지? 케이타룬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여자를 쳐다보았다.
‘헉!’
마탑에서부터 갈고닦아온 그의 예민한 촉이 발동했다. ‘절대자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절대자가 틀림없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성인 남자보다 더 거대한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복장은 기사의 것이었으나 말하는 태도나 표정은 귀족가의 그 어떤 영애보다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엄청난 사람이 틀림없어.’
이 사람은 자신이 사는 세계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분명했다. 케이타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여자 앞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무례할 것 같아 최대한 숨을 죽이고 공손히 말했다. “정성껏 내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그녀가 물었다.
“비올라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올 것이 왔다. 케이타룬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