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6화 헤론은 비올라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비올라는 고개를 들어 헤론을 쳐다보았다.
‘밑에서 바라봐도 굴욕이 전혀 없는 건 사실입니까?’
얼굴 천재라는 게 저런 거겠지? 그나저나 진짜 잘생겼다.
역시 내 최애다.
최애캐 부심이 뭉클뭉클 피어오르며 최애캐는 사랑입니다! 몸으로 쓰는 팬픽 만세!
…라고 외치고 싶다는 생각이 찰나의 순간만큼 짧게 들었으나 비올라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 선택에 후회가 있느냐?”
아린이 아는 헤론이라는 캐릭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린은 비올라답게 대답했다.
“벨라투에게 후회는 어울리지 않지요.”
“이곳은 연무장이다, 비올라.”
“알고 있어요.”
“공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비올라는 조금 의아했다. ‘뭐지?’
연무장은 자신을 단련하는 장소이며, 후계자가 되기 위해 피땀을 쏟아야 하는 곳. 사적인 영역보다는 공적인 영역에 훨씬 가깝다.
그런데 헤론이 공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 공적인 공간이 아니지? ‘이유를 모르겠어.’
비올라는 문득 ‘비올라’ 라는 이름에 집중했다. ‘굳이 내 이름을 언급했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될 타이밍에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마다 나오는 헤론의 특징이었다.
가령 ‘벨라투’를 강조하고 싶을 때는 ‘비올라 벨라투’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올라는 헤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를 비올라라고 부른 게 맞지?”
사적인 공간인 연무장. 벨라투의 성을 빼고 부른 비올라.
그 두 가지 단서는 한 가지 사실을 시사했다. ‘후계자 후보가 아니라 딸인 비올라를 부른 거야.’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말이다. 비올라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늘 가족이 필요했었다.
백 밤만 자면 돌아온다던 아빠가 필요했었다.
‘아냐. 정신 차려.’
최애캐가 이상행동을 보이고는 있으나 이곳은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 속이다. 피폐 소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비올라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대답했다.
“후회 안 해요.”
“왜지?”
“저는 아빠를 선택했고, 아빠도 저를 선택했잖아요. 후회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구나.”
“여기가 공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하신 건 아빠잖아요. 불편하시다면 다시 아버지라 부를게요.”
“아니.”
헤론 공작의 표정은 매서웠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비올라를 바라보며 팔을 들어 올렸다. 비올라는 속으로 움찔했다.
‘와, 쫄 뻔했어.’
빙의 6년 차의 노련미(?)로 가까스로 속마음을 감췄다. 헤론의 손끝이 비올라의 손끝에 닿았다.
오래전, 헤론이 선물해 준 반지를 낀 손가락이었다.
‘응?’
헤론이 그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각도를 이렇게 조정해 보거라.”
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자 어깨가 뻐근해졌다. “이 상태로 초검을 운용하면 정령력과의 융화 작업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비올라의 예리한 눈썰미에 헤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저러지?’
그녀가 덕질해 왔던 최애캐 헤론은 손 떨림 따위는 허용하지 않는 철혈의 공작이었다. 물론 비올라의 육체가 빼어나게 뛰어난 것은 맞았으나 그렇다고는 해도 헤론의 손 떨림을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 반지 때문인가 보다!’
대대로 벨라투는 정령 친화력이 극도로 나빴다. 그렇다 보니 아레나를 잔뜩 머금은 반지와 헤론의 상성이 좋지 못한 듯했다. ‘응?’
헤론의 몸이 스스르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비올라의 등 뒤에 섰다. 헤론은 왼팔로 비올라의 팔꿈치를 받쳐 들었다.
“이 정도 높이까지는 들어야 한다.”
천천히 힘을 주어 비올라의 팔꿈치를 살짝 접었다.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후, 각도를 이 정도로 조절하고서 초검을 운용해 보거라.”
마치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한 채, 입을 가리고 웃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헤론의 유도에 따라 몸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초검의 운용이 훨씬 쉬워졌다.
‘음?’
구결 없이도 초검 운용이 되었다. 별거 아닌 듯한 차이로 큰 변화가 벌어졌다.
아무리 헤론의 지도가 있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혼자 하는 게 아냐.”
비올라는 알 수 있었다. 헤론의 마나가 전달되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미묘하고 미세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비올라의 천재적인 육체가 아니었으면 못 느꼈을 거야.’
헤론의 오른팔이 비올라의 팔을 살짝 잡았다. 왼손은 비올라의 왼쪽 팔꿈치에.
오른손은 비올라의 오른쪽 팔에 닿았다.
품에 쏙 안기게 된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손을 통해 미세하게 마나를 흘려보내 비올라가 초검을 운용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보다 나은 길로 유도해 주며 비올라가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최애캐 만세다!’
초검의 운용은 둘째 치고 덕질에 성공한 기분이었다. 비올라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뒤에 서 있던 헤론은 비올라의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했다.
‘웃는다?’
이 아이라면 초검의 성장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구결 없이 초검을 운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니.
그래서 이 아이가 웃는 것이라 생각했다. ‘네가 웃으니.’
초검이 흩날렸다. 힘을 잃었던 초록빛 풀들이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기쁘구나.’
덕분에 아무도 보지 못했다. 헤론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미소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너는.”
비올라의 귀에 헤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검의 소리가 평소보다 워낙 커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내 딸이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 * *
어마어마한 마나의 흐름에 깜짝 놀란 힉슨은 서둘러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초검의 기운이야.’
비올라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기운을 쏟아낸 적이 있던가. 도대체 누구와 싸우길래 이렇게 큰 힘을 소모하고 있단 말인가.
‘비첸?’
비첸은 아닐 것 같았다. 비첸이라면 그놈 특유의 기세가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3공자 놈인가!’
그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놈. 그놈이라면 이토록 힘을 내지 않고 싸우는 것이 가능하겠지.
죽어가는 고양이를 비올라에게 던졌던 그때의 모습이 또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
‘오냐. 내가 네놈을 요절내 주마!’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소리를 빽질렀다. “네놈을 죽이고 천국에 가주마!”
그런데 3공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척을 죽이고 싸워도 이렇게까지 은밀할 수는 없었다.
‘누구랑 싸우는 게 아니잖아?’
뭐지? 초검의 풀들이 너무 무성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엥?’
힉슨이 눈을 크게 떴다.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비벼보았다.
분명 환상이라고 생각했는데 환상이 깨지지 않았다.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박아 보았으나 여전히 정신계열 마법은 그대로였다.
‘환상이 아니야?’
비올라와 헤론의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심지어 헤론은 아주 잠깐 미소를 지었던 것 같았다.
이윽고 초검의 운용이 끝나고 풀들이 힘을 잃고 바스러졌다.
힉슨이 쿵쿵대며 비올라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이 마치 코뿔소 같았다. “다친 덴 없냐?”
“안 다쳤어.”
힉슨은 재빨리 다가와 반쯤 무릎꿇고서 비올라의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혹시 아주 작은 생채기라도 났으면 공작과 생사 결전을 벌인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진짜 안 다쳤네?”
“다치길 바랐던 거야?”
힉슨이 몸을 일으켰다. 헤론을 쳐다봤다.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지도 대련.”
“지도 대련을 왜 그렇게 가까이 붙어서 하는 거지?”
헤론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걸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닐 텐데.”
“왜 상관이 없어? 네놈은 세심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잖아.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비올라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데.”
“비올라는 벨라투다.”
“어우, 그놈의 지긋지긋한 벨라투, 벨라투.”
힉슨이 거칠게 팔을 뻗었다. 비올라를 데려오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비올라가 힉슨의 팔을 톡! 쳐냈다.
“……너?”
사실 이건 비올라가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최애캐에게 조금 더 붙어 있고 싶었던 비올라의 본능이었다.
비올라가 본 힉슨은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여서 괜히 미안해지고 말았다.
‘아니, 그게 그니까.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헤론이 비올라를 살짝 끌어당겼다.
아린은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손길이었다.
“네 손길도 그리 세심하지는 못했던 것 같군.”
힉슨은 크게 상처 입은 마음을 숨기며 흥, 코웃음을 쳤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군. 방금의 초검은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비올라가 지금 헤론에게 마음을 연이유. 그것은 간단했다.
비올라의 성장을 크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올라가 헤론에게 안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힉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지!
헤론이 말했다.
“힉슨,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던데.”
“무슨 소문?”
헤론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마나에 음성을 실어 힉슨에게만 전달했다.
[비올라는 나의 딸이다, 힉슨.]
그리고 말했다. “나를 죽이고 천국을 가겠다?”
힉슨의 몸이 움찔했다. 헤론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감히 그 앞에서 버티고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의 막강한 살기였다.
“결투를 신청한 거라고 봐도 무방한가?”
“흥. 바라던 바다.”
힉슨이 검을 들어 올렸다. 날이 무딘 연습용 검이었으나 힉슨의 패도적인 검은 날붙이의 예리함을 필요로 하는 검술은 아니었다.
힉슨도 기세를 끌어 올렸다.
기세와 기세가. 살기와 살기가 부딪쳤다.
둘 사이에 선 비올라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두근.
두근.
심장의 팽창과 수축이 반복되었다.
‘아냐. 심장아. 제발 나대지 마!’
두 절대자의 살기에 비올라의 육체가 반응했다. 비올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전에 없이 강력한 풀의 폭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살성의 살기를 머금은 예리한 풀꽃들이 힉슨을 덮쳤다.
‘제발! 몸아 제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비올라는 허벅지 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들어 올린 뒤, 몸을 돌렸다.
바로 뒤에 서 있던 헤론을 찔렀다.
단도가 향하는 곳은 헤론의 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