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7화
비올라의 속마음이 타들어갔다.
‘아, 안 돼!’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몸을 빼앗겼을 때 의식을 잃거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제발!’
비올라의 단도가 헤론의 심장에 닿기 직전. 헤론이 비올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비올라는 몸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파!
헤론의 아귀힘이 얼마나 센지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아차.’
너무 아파서 순간적으로 아픈 티를 내고 말았다. 여태까지 잘 해왔다고 생각했다.
탑을 잘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헤론의 말이 의외였다. “좋은 시도였다.”
헤론이 비올라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고 했던 것에 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덧 초검이 힘을 잃고 바스러졌고, 녹음의 폭풍 속에 갇혀 있던 회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힉슨의 몸에는 가벼운 상처들이 나 있었다.
“이야. 위험했어!”
힉슨은 그다지 위기감 없는 태도로 씨익 웃었다. 그리고 기분 좋은 듯 말했다. “좋은 기회를 잘 포착했네, 비올라.”
둘의 결투는 멈췄지만 비올라는 머리가 멍했다. 이 사람들. 왜 좋아하는 거 같지? ‘ ‘아니. 머리로는 이해가 되기는 하는데.’
이성으로는 알겠다. 이곳은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 속이니까 이런 일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적응은 안 됐다. 심장을 찌르려고 했는데 칭찬하고, 초검으로 죽이려고 했는데 흐뭇해하다니.
헤론이 말했다.
“타이밍은 좋았으나 관통력이 약했다.”
…좋은 가르침 감사해요.” 헤론이 손가락 두 개로 비올라의 어깨를 짚었다. “어깨의 회전력을 이용하거라.”
헤론은 몸소 시범을 보여주었다. 어깨뼈를 내밀면서 살짝 회전시켰다.
“방금 같은 타이밍이었다면 관통력이 배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헤론은 힉슨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상처가 났군.”
“비웃지 마라. 내가 못한 게 아니고 비올라가 잘한 거야.”
“둘 다겠지.”
“도발이냐?”
“도발도 상대의 격이 맞아야 하는 법이다.”
힉슨은 헤론의 얼굴에서 명백한 비웃음을 보았다. 힉슨은 저 비웃음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저놈.’
감정 없는 기계처럼 굴더니. ‘웃고 있잖아?’
물론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미소였다. 힉슨의 눈썰미 정도는 되어야 겨우 보이는 아주 희미한 미소.
‘라엘이 죽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게다가 헤론답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힉슨이 느끼기에는 헤론 ‘공작’ 답지 않았다.
지금의 헤론은 공작 헤론이 아닌, 사람 헤론 같은 모습이었다.
‘옛날 모습 같은데.’
어린 시절 힉슨과 헤론은 눈이 부는 곳에서 함께 수련했었고, 전쟁터에서도 수차례 동행했다. 그때의 헤론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니었었다.
‘비올라 때문인가?’
힉슨은 확실히 느꼈다. 헤론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힉슨은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힉슨이 헹!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봐주지 않았다면 비올라는 지금쯤 최소 기절했을걸?”
헤론과 힉슨 사이에 이어지는 미묘한 긴장감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던 비올라는 찔끔 놀랐다. 최소 기절이라니.
그럼 최대는 뭔데요, 아저씨.
“그건 칭찬하지.”
비올라는 둘의 대화를 통해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힉슨 아저씨는 사실 상처 입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거네?’ 요약하면 이러했다. 1. 초검을 제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초검을 운용하는 사람(비올라)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2. 마침 비올라는 헤론을 공격 중이었으니 빈틈이 많았다.
3. 비올라를 무차별적으로 제압했다면 힉슨은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4. 그러나 힉슨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초검과 직접 싸우는 쪽을 선택했다.
…라는 내용이네.’
헤론이 말했다. “나라면 겨우 그런 걸로 생색은 내지 않았겠지만.”
“뭐?”
“비올라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헤론과 힉슨의 시선이 동시에 비올라에게 향했다. 비올라는 차라리 땅 밑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아, 왜 날 봐요?’
두 사람의 눈동자가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비올라는 호달달 떨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일부러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저씨는 일부러 날 봐준 거야?”
봐줘서 고마워요, 엉엉. “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속마음과는 별개로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
“나는 심지어 아저씨가 봐준 걸 파악하지도 못했네.”
잘못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일단 잘못을 했다면 그 잘못을 파악하고 인정해야 했다. “…분해.”
하나도 분하지 않았지만 분한 척했다. 이 분노를 밑거름 삼아 성장하고야 말겠다는 포부를 보여줘야 했다. 다행히 공작은 굳이 진안을 사용하지는 않았고 비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어디를요?”
“할 얘기가 있다.”
비올라는 이내 팔을 들어 올려 헤론의 손을 잡았다. 키 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머리 위로 팔을 들어 올려야만 했다.
그런데 힉슨이 다가왔다. “잠깐.”
힉슨도 손을 내밀었다. “나도 같이 가지.”
“네가 왜?”
“본격적인 초검을 경험했잖아. 지금 타이밍에 나보다 더 비올라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힉슨은 맞는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초검의 감각이 생생해. 지금이야말로 비올라에게 조언을 해주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지.”
“시간 지나면 이 감각 무뎌질 텐데?”
힉슨의 불꽃 같은 눈동자가 비올라를 향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불꽃이 ‘당장 손을 잡아!‘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올라는 떨떠름해하며 그 손을 잡았다.
힉슨은 또다시 상처 입고 말았다.
‘저 자식 손을 잡을 때는 빨랐는데.’
단순히 빠른 게 문제가 아니었다. 헤론의 손은 꼭 잡고 싶었던 것처럼 손을 뻗었다.
저 고사리 같은 손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왜 난!’
그런데 자신에게 손을 줄 때는 떨떠름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쨌든 손을 잡은 힉슨이 헤론 쪽을 쳐다보았다. 이걸로 승리했다고 여기지 마라, 헤론’마침 헤론도 힉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 부딪혔으나 키가 작은 비올라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 * *
겨울성의 인형 술사이자 뛰어난 변장 술사인 세이반 마르코스는 조금 의아해했다.
“총집사님이 변장이요?”
“부탁하지.”
“왜요? 겨울성 밖으로 나가는 임무도 없으시잖아요.”
“에그타르트를 사 오라는 명을 받았네.”
“그런 명령은 왜 내리셨을까요? 그것도 칼튼 경께.”
칼튼 같은 고급 인력이 줄을 서서 에그타르트를 사 올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헤론에게 어떤 뜻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칼튼은 줄을 서서 에그타르트를 두 개 사 올 수 있었다. “수고했다.”
“네, 감사합니다.”
칼튼은 의외인 광경을 발견했다. 비올라를 가운데 두고 헤론과 힉슨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힉슨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고 말았다.
“설마 에그타르트 심부름을 칼튼에게 시킨 거?”
뒤로 돌아 나가려던 칼튼이 멈칫했다. 힉슨은 왠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칼튼만큼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치?”
헤론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여전히 말이 많군. 총집사는 나가 보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
칼튼은 힌트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임무라.
에그타르트를 사 오는 것.
그것은 완벽함이 필요했던 임무였다.
‘그래.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것이 있겠지.’
에그타르트 속에 숨겨진,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는 듯했다. 힉슨과 공작이 무엇인가를 공모하고 있는 듯했다.
재미있는 건 그 둘의 공모에 비올라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후계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거야.”
괜스레 뿌듯해졌다. 7살의 비올라를 처음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사실 비올라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헤론이 아니라 칼튼이었다. 칼튼은 유리 조각을 쥔 채 맨발로 서 있던 비올라를 측은히 여겼으며, 성장 과정 내내 비올라를 남몰래 응원했었다.
‘시작이 늦기는 했으나.’
칼튼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응원하지요, 철혈의 공녀’ 그리고 얼마 후. 비올라는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흥! 연무장이 공적인 장소가 아니라고?”
힉슨은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너는 거길 귀여운 딸과의 데이트장소로 여겼다는 뜻이겠지!”
그 말에 비올라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리 없다. 지난 6년간 잘해오기는 했으나 헤론이 그런 마음을 가졌을 리 없다는 사실을, 찐 독자였던 비올라는 잘 알고 있었다.
힉슨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1년이나 그딴 곳을 데이트 장소라고 쓰다니. 무드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지!”
아니요, 힉슨 아저씨. 데이트 장소라니요!
귀여운 딸이라니요!
내 분위기를 보시라고요!
‘저게 말이야 방구야!”
거울을 매일 보는 비올라다. 귀여울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비올라는 오늘 처음으로 에그타르트가 맛이 없었다.
도무지 식욕이 생기질 않았다.
‘불편해.’
두 사람이 너무 불편했다. 두 사람은 가벼운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둘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일반인들은 감당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비올라의 육체쯤 되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더 무서운 건 저 둘은 딱히 기세를 내뿜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것.’
그냥 편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마나들이 감정에 동화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상 마법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가고 싶다. 제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게 이런 걸까.
이 자리가 몹시 불편하다 못해 체할 것만 같았다. 오죽하면 에그타르트에 손도 안 갔다.
“너를 이곳에 초대한 것은 비올라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위한 말을 해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게 아니라면 이만 나가보지?”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려.
힉슨의 손가락이 비올라를 향했다.
“비올라는 에그타르트 좋아한다고.
쟤 저거 먹으려고 지금 군침 흘리면서 기다리고 있을걸? 넌 그것도 모르지?”
콜록!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사실 비올라는 왜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나 사랑스럽냐? 근데 이 순간에도 검술이니 성장이니 해대는 건너무 가혹하지 않냐?”
비올라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더 있으면 어지러워서 기절할 것 같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이만 일어나봐도 괜찮을까요?”
“오! 좋은 생각이다, 비올라. 그래그래, 우리 같이 연무장으로 가자.
내가 아까 보고 느낀 것들을 좀 말해줄 테니.”
힉슨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논이 여기 없다는 걸 의식했는지, 마치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어서 손을 잡으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 손을 맞잡기 직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
비올라는 또다시 찔끔 놀랐다. 말이 아니라 마치 언령 같았다.
저 말을 듣지 않으면 목이 달아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왜 너는.”
헤론의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비올라를 향했다. 비올라는 무서움에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아비와의 시간을 이토록 꺼려 하는 것이냐?”
…예? 꺼려 한다기보다는 불편해 죽겠는 건데요.
억울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너를 데려온 이유를 정녕 모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