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38화 (138/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8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논입니다.”

“들어와.”

제논은 빙그레 웃으며 들어왔다. “힉슨 경도 함께 계셨군요.”

힉슨은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인사했다.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제논이었다.

“약간 어색한 상황인데, 어쨌든 저는 공작님의 명을 받들어 겨울성의 보급 창고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제논이 아공간을 열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말씀하신 최상급 마법 연고입니다. 담당자가 영 내주지 않아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사실 제논도 담당자의 마음을 이해 했다. 이 최상급 마법 연고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가격이 굉장히 비쌌다.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손목뼈가 완전히 박살 났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 연고는 필요 없습니다. 중급 정도면 충분합니다.

힉슨은 최상급 마법 연고를 보자마자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비올라의 손목을 다치게 한 것이 신경 쓰였던 거로군.

힉슨은 초검을 오롯이 다 받아들였다.

비올라를 제압하지 않고서 초검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 힉슨이 조금 다치기는 했으나 적어도 비올라는 다치지 않았었다. 그에 반해 헤론은 비올라의 손목을 거세게 낚아채며 비올라의 손목에 부상을 입혔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뼈에 무리가 간 것은 아니었다. 근육이 놀라 아린 통증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과연, 그래서 비올라를 방으로 따로 불렀구나.’

힉슨은 헤론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 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라엘을 잃은 이후로, 너는 급속도로 변해갔지.’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헤론 자신이 누군가를 아끼면 그 누군가는 힘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네놈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강박도 가지고 있었어.’

헤론은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고, 사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었다. 라엘에 대한 사랑이 커지면서 그만큼 두려움도 커졌었다.

라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라엘과 늘 함께하고 싶었다.

당연히 ‘눈이 부는 곳’과의 전쟁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힉슨은 헤론을 불쌍하게 여겼었다.

‘중앙 귀족 놈들의 정치 공작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됐었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는 약점이 된다. 그래서 헤론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저놈은 비올라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야.

힉슨은 기분이 나쁘면서 좋았다.

‘네놈도, 변하는구나.’

비올라가 헤론을 변하게 만들었다. 힉슨은 소리내지 않고 조심스레 뒤로 빠져주었다.

문을 살짝 열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복도를 걷다가 총집사 칼튼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칼튼.”

“예, 힉슨 경.”

“이거 받아.”

힉슨은 아공간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무성의하게 툭! 던졌다. “이건 최상급 마법 연고 아닙니까?”

“그래. 너 가져.”

“왜 주시는 겁니까?”

이렇다 할 개연성이 없지 않은가.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

“……예?”

“좋은 어른이 생긴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칼튼이 묻기 전에 힉슨은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멀어져갔다.

힉슨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래봤자 나보다는 아니지만.”

*** 비올라는 그제야 헤론의 의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다치게 한 것이 신경 쓰여서?’

크게 다친 건 아니었다. 손목이 살짝 욱신거리는 정도여서 하루 이틀 쉬면 나을 수준이었다.

“어째서 네가 좋아하는 간식을 먹지 않지?”

“다 식었잖아요.”

“그렇군.”

다음부터는 보온 마법이 걸린 마법용기에 담아 오라고 명령을 내려야겠어. 헤론이 잠깐 생각에 빠져들었을 때, 비올라가 말했다.

“아빠와의 시간을 달가워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헤론과 눈을 마주쳤다. “다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무엇이?”

“아빠와 제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 기억하세요?”

헤론은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이왕이면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어..

‘그렇게 해줄 거지?’

‘나는 고아야. 나는 늘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말로만 아버지 말고, 진짜 아버지가 되어줘.’

그때의 비올라가 떠오르자 마음이 먹먹해졌다. 손에 쥐면 바스러질 것처럼 여리고 작았던 아이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저에게는 가족이 필요했고 아버지가 필요했어요. 그렇지만 제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약육강식의 생태계였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경쟁이었어요.”

헤론의 먹먹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저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여태까지 헤론이 고수해 온 입장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성된 절대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죠.”

헤론은 13살 딸 앞에서 입을 열지 못했다. 비올라의 말은 모두 ‘사실’에 기반한 말이었다.

논리적으로도 틀리지 않았다.

비올라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 자리가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저는 겨울 성의 군주 헤론 벨라투와는 많은 시간을 보내왔지만, 아버지인 헤론과 보낸 시간은 턱없이 적으니까요.”

벨라투는 합리적인 가문이다. 논리와 이성을 중요시했다.

비올라는 그 점을 짚었다.

“그래서 저는 벨라투로서는 어색하지 않게 공작님을 대할 수 있지만, 딸로서는 아버지를 대하는 게 서툴수밖에요.”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은 말이구나.”

헤론이 마법 연고의 뚜껑을 열었다. 벌꿀 향과 비슷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최상급 마법 연고답게 어지간한 향초보다 향이 좋았다.

헤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이 떨린다.

대마물을 사냥할 때도 떨리지 않는 손이 지금은 떨려왔다.

비올라의 손목에 마법 연고를 조심스레 발라주었다.

그 손길은 제논만큼 세심하고 부드럽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정정하지.”

“네?”

“지난 1년간 우리는 아버지와 딸로 많이 만나왔다.”

예? 언제요?

비올라는 조금 억울해졌다.

1년 동안 한 것이라고는 연무장에서 대련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요.

비올라가 억울해하고 있을 무렵, 헤론은 비올라를 처음 만났던 그때와 똑같이 물었다.

“내 딸이 되겠느냐?”

표현은 똑같았으나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른 말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헤론은 말을 정정했다.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도 되겠느냐?”

헤론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내게도 가족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비올라의 손끝이 떨려왔다. *

6마탑의 천덕꾸러기.

시르송의 실패한 제자 엘시나는 최근 기적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엘시나 님!”

케이타룬이 엘시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빈민가의 왕초였던 케이타룬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구두를 신을 때는 꼭 저를 애용해 주십시오!”

마탑의 거지 패는 겨울성에는 꼭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겨울성의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마물과 싸우는 법을 익힌다.

전사들은 넘쳐나지만 기술자들은 부족했다.

거지 패는 대부분 하나 이상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겨울성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었다.

덕분에 거지 패는 점점 자존감을 회복했고 사람답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기뻐.’

엘시나는 그런 저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아생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서 각 마탑의 거지 패에도 희망이 생겼단다.

비올라가 도와줬을 때만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탑의 거지 패도 이제 현실을 자각했고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로 큰 변화였다.

그리고 이 변화를 이끌어 낸 사람은 당연히 비올라였다. ‘비올라 공녀. 당신은 정말.

엘시나도 어린 시절 천재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어왔다.

그녀도 스스로 천재인 줄 알았다.

그러나 비올라를 만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비올라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천재라는 단어가 완벽히 어울리는 사람.

‘나도 내 일을 해야지.’

엘시나는 베나토라는 어린아이의 유모 역할을 하게 됐다. 얼마 전에 태어난 사내아이였다.

어찌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엘시나는 베나토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들고 말았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베나토를 보살폈다.

다행히 겨울성에는 경험이 풍부한 유모가 많았고, 그들의 지원 덕택에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이 아이. 본능적으로 마나를 느끼고 있어.’ 그래서 비올라에게 말했다. “마법의 천재예요.”

“엘시나 경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로 천재겠지요?”

“맞아요. 좋은 마법 선생님을 붙여야 해요.”

마법은 어릴 때 익힐수록 높이 올라갈 확률이 컸다. “엘시나 경이 해주면 되잖아요.”

“저는 마법 봉인을 풀 수 없어요.

마탑에 정식으로 요청하여 마법 선생을 초빙하는 것이 좋겠어요.”

“왜 못 풀죠? 스스로 봉인을 했다.

고 들었는데.”

그녀는 과거 마법에 환멸을 느껴스스로 마나를 봉인해 버렸다. 인간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마법따위가 무슨 학문이란 말인가.

다시는 이 힘을 빌리지 않으리라.

그녀는 굳게 다짐했고, 마나를 단단히 봉인했다.

봉인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대마물급 마물의 심장에 박힌 마정석 3개가 있어야 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대마물급 마물을 사냥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야. 후회는 하지 말자.’

그것은 과거의 자신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엘시나가 말했다.

“봉인을 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절대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일부러 정확히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올라가 마음에 부담을 느낄까봐 그랬다. “절대로 구할 수 없어요?”

“네, 구할 수 없어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 마탑에 지원을 요청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이론과 관련된 것은 제가 옆에서 첨언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비올라에게 대마물의 마정석들이 필요하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을 모욕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비올라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행동이었으니까.

엘시나는 그렇게 염치 없이 행동할 수 없었다.

“혹시 이런 게 필요해서 그래요?”

천재인 엘시나는 몰랐다. 비올라가 사실은 빙의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