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빙의자에게 아주 친한 부자 언니가 있다는 사실도.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9화
제논이 받쳐 든 흰 천 위에는 영롱한 빛을 뽐내는 세 개의 돌이 있었다.
엘시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검은빛을 내는 건 분명 묵시록의 망령에게서 나오는 마정석이고.
묵시록의 망령은 재난과 기근이 불어닥쳤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유령기사 형태의 마물이다.
대마물로 분류되어 2급 기사 이상의 실력자가 아니면 사냥할 수 없는 마물이다.
개당 가격은 1억 달리아 정도.
‘저 노란빛을 내는 건 아르마딜런… 아니, 크기를 보아서는 거대 아르마딜런의 것이 분명해.’
크기가 20미터를 넘어가면 거대 마물로 분류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거대 아르마딜런’은 단단한 껍질을 두른 네발 달린 짐승형태의 마물로서, 거대 마물 중에서는 작은 축인 20미터 초반대의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는 ‘묵시록의 망령’보다 약했다.
그러나 ‘거대 아르마딜런’은 늘 무리 생활을 했고, 오로지 화염 계열마법으로만 죽일 수 있기 때문에 토벌 난도는 훨씬 높았다. ‘시세는 개당 1억 5천만 달리아.’
그리고 또 다른 하나. 엘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은빛. 오묘한 색상을 띠는 제건….’
은색의 아름다운 털과 신비로운 자태 때문에 신수(神獸)라고도 불리는 마물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달의 여우’.
고대인들은 이 ‘달의 여우’를 신성시하여 제사를 지내거나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달의 여우’는 그저 찰랑거리는 털을 가졌을 뿐인 식인 마물로 분류되었다. 달의 여우는 정신 계열 마법에 능통하여 사람을 현혹하고 사람의 간과 심장을 파먹는 것이 특징이다.
‘워낙 움직임이 은밀하고 눈치가 빨라서 토벌하기가 극도로 어렵다고 알려져 있는데.’
엘시나조차 달의 여우를 직접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물대백과에나 나오는 마물이었다.
‘달의 여우를 토벌해서 얻은 마정석이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억 달리아.”
그러니까 지금 제논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거의 6억 달리아에 달하는 초고가의 마정석들이었다. “비, 비올라 공녀가 저걸 어떻게…!”
“믿으라고 했잖아요.”
엘시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저 어린 소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높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읽어내고 있는 것일까?
“동행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랬… 지요.”
엘시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웠다. “이걸 저한테 주신다고요?”
“네.”
“왜요?”
“베나토의 좋은 보호자가 되어주세요.”
“저 세 개의 마정석이면 저보다 훨씬 좋은 보호자를 구할 수 있을 텐데요.”
“엘시나 경이 아니면 안 돼요.”
“어째서… 죠?”
“엘시나 경만큼 훌륭한 어른을 본적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엘시나는 괜히 뭉클해졌다. 마탑에서는 엘시나를 이렇게 필요로 하던 사람이 없었다.
마탑주 시르송은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너 같은 것은 사 오지 않았어야 했는데. 은혜도 모르는 것!’
엘시나는 어린 시절 팔려왔다. 시르송은 송아지 세 마리를 값으로 주고 엘시나를 데려와 마법 교육을 시켰다.
엘시나는 천재였고 시르송의 가르침을 쏙쏙 흡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엘시나는 천재로 칭송받게 되었고, 시르송은 엘시나를 키워낸 훌륭한 스승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엘시나는 스스로 마나를 봉인해 버렸다. ‘너 따위 버러지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때부터 시르송은 엘시나를 늘 저주했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 없애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그러지도 못했다.
마탑 마법사들에게는 배척당했고, 마탑의 거지들에게는 외면당했다.
거지들을 돕기로 마음먹은 그 시점부터 그녀는 늘 혼자였다.
시르송을 비롯한 많은 마법사가 엘시나를 경멸했고 엘시나는 경멸의 시선이 익숙했다.
그런데 비올라는 경멸이 아닌 존경의 시선을 보내왔다.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시죠?”
“……네, 들었어요.”
“저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어요.”
엘시나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도 송아지 세 마리에 팔렸으니까.
“저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어요.
제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을 간절히 원했어요.” “제가 본 엘시나 경은 어른이에요.”
엘시나의 신념은 옳았다. 자신이 가진 힘을 보다 아름답고 따뜻하게 쓰고 싶어 했다.
“엘시나 경의 신념은 옳았어요. 저는 그러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존경해요.
“…고마워요.”
“따뜻한 어른이잖아요. 누구보다도 멋진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비올라가 담담하게 말을 잇자 엘시나의 가슴속에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십 년에 걸쳐 쌓아왔던 서러움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 제 선물을 받아주…….”
비올라는 말을 멈췄다. 더 좋은 대사가 떠올랐다.
‘조금 부끄럽기는 한데.’
그래도 이런 캐릭터들에게는 이런 대사가 직빵이지. 비올라가 말을 조금 바꾸었다.
“엘시나 경의 미래를 살게요, 이 보잘것없는 것들로.
엘시나는 세 개의 마정석을 받아들었다.
* * *
비올라는 테이블에 앉았다.
평소처럼 제논은 정령빙으로 만든 딸기 에이드를 만들어왔다.
제논의 딸기 에이드는 날로 발전하여, 이제는 거의 마약 수준의 중독성을 갖게 되었다.
비올라가 빨대를 쪽쪽 빨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제논은 늘 그렇듯 빙그레 웃었다. 제논의 눈길을 느낀 비올라는 흠칫 놀랐다.
‘나 너무 돼지 같았나?’ 괜스레 민망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마음이 좋아서요.”
가늘어진 눈 사이로 제논의 눈동자가 보였다. 표정은 한없이 따사로웠으나 여전히 의뭉스럽기는 했다.
갑자기 마음이 좋다니.
비올라로서는 영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엄청 큰 임무라도 가져온 건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임무 얘기는 없었다.
제논이 엘시나에 관한 보고를 올렸다.
“……와 같습니다. 베나토를 보는 눈빛에서 모성애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
이제 정말로 ‘대마법사 벵가스’가 나타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세알 자작에게도 편지가 왔는데, 세알 자작은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큰 것들은 대충 해결한 것 같네. 비올라의 열세 살 무렵에는 이제 더 이상 큰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그랬다.
산적 무리 토벌이나 마물 토벌에 참여했다고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런 것들은 이제 ‘큰 이 슈’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게다가 하얀 벨라투를 선택한 이상 그런 피 튀기는 임무에는 파견되지 않을 것이고, 당분간은 평화로운 일상을 즐길수 있겠어.’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살아왔다. 큰 이벤트는 별로 없으니 내실을 다지며 조금은 평화롭게 지내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가주는 메데이아 언니니, 까.’
창틀을 통해 전해지는 햇살은 따사로웠다. 딸기 에이드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달달하고 맛있었다.
‘으으음!’
맛있다, 맛있어. 쟁반에 올려진 쿠키를 집었다.
갓 구운 쿠키라서 아직도 따뜻했다.
마치 구름을 집은 것처럼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맛있어!’
크으. 이런 게 행복이지. 난 안전하고 평화롭게 독립해서 과자 집을 짓고 살 테다.
근데…….’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기분 좋고 쿠키와 에이드는 맛있는데. ‘왜 불안하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무엇인가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비첸의 집사가 비올라의 방을 찾았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왜 네가 와?”
왜 헤론 공작의 명령을 비첸의 집사가 수행하고 있단 말인가. 집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세히 보니 눈도 충혈되어 있었다.
비탄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비첸 공자님께서. 충격 선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충격 선언?”
“예, 때문에 공작님께서 비올라 공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비올라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역시 평화는 사치였다.
겨울성에 이 따스한 일상은 어울리지 않았다.
‘소설 속에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왠지 모를 위기감이 느껴졌다. 서둘러 공작의 서재로 가보니, 비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뭐야?’
피 냄새가 굉장히 역했다. ‘비첸의 피가 아냐.’
마물의 피인 것 같았다. 아마도 어떤 마물을 죽이고 돌아온 직후인 것 같았다.
‘본래는 깨끗이 씻고 보고를 올리러 갔을 텐데.
씻지도 않고 서재를 찾을 만큼 급한 일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비올라는 그게 뭔지 알아내야 했다.
비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다, 헤헤.”
피 칠갑을 하고서 웃고 있는 모습이 마냥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당장에라도 칼을 들고 달려들 것처럼 섬뜩한 모양새였다.
공작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왔느냐?”
비올라는 떨리는 다리를 숨기고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호출하셨다 들었어요.”
“그래, 비첸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구나.”
근데 그걸 왜 여기서 하지? 둘이 따로 하면 되는데?
비올라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헤헤, 비올라. 나는 이제 널 안죽일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를 안 죽이고 싶어졌어.”
비첸이 해맑게 웃으며 공작 쪽을 쳐다보았다. “그렇죠, 아버지?”
헤론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버려진 흑색 신전에 들어가서 흑색 트롤을 죽이고 그 피로 맹세했어.”
흑색 신전은 ‘흑색 마물종’이라 불리는 마물들이 상당수 발견되는 신전이다. 그 피에는 특별한 힘이 있어 맹세할 때 그 피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비올라랑 안 싸울 거야.”
열네 살이 된 그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고 인정했다. “대신 비올라랑 싸우는 애들을 죽여줄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후계자 안 될래.”
“그럼?”
“너 해.”
비올라는 머리가 아파왔다. 비첸은 어차피 후계자가 될 욕심은 크게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지목하며 지원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후계권을 포기하겠다고?”
그러고 보니 비첸의 집사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폭탄 선언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후계자 후보가 후계 권을 포기하겠다니.
“그래서 아부지가 공증해 주기로 하셨어.”
“그걸 허락하셨다고?”
비올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공작의 입에서 현실성이 전혀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