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 오기 시작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44화흑색 신전은 고대 영웅이었으나 타락해 버린 흑마법사.
아르게가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그는 이곳에 특별한 안배를 몇 가지 해놓았다. 1층의 지배자 역시 그 안배 중 하나였다.
“흐흐흐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셀빈과 비올라의 목덜미에 닭살이 돋았다.
“언니, 무지 기분 나빠여.”
“그래.”
비올라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한 채 상황을 살펴보았다. ‘흑마법사 아르게가 부활할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아르게의 원혼이 부활하는 것이다. 생전 아르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지금의 비올라와 셀빈에게 벅찬 상대인 것도 사실이다.
‘어떡하지?’
비올라는 필사적으로 소설 속 정보들을 떠올렸다. 흑마법사 아르게는 이곳에서 악령이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그 악령을 퇴치할 것까지도.
‘흑색 신전 1층의 마물들을 육(肉)의 제물 삼고, 악령의 혼(魂)을 제물 삼아 원혼을 부활시키는 거야.’
지극히 흑마법사다운 발상이었다. 문제는 원혼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다는 것.
‘원작에서 아르게의 원혼을 죽인 사람은 툰드라야.’
그것도 원래는 몇 년 후에나 벌어질 일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소설 속남주에게 직접 처단되어야 할 만큼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원혼이라는 소리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조무래기들과 열심히 싸우지는 않으니까.
‘제논이 들어와 주지는 않겠지?’
스스로 살길을 찾아내야 했다. “나를 되살린 것들이 너희냐?”
목이 없는 원령이 보였다. 목이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말을 했다.
늙은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 데, 볼품없이 야위어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저러한 것들을 일컬어 ‘원귀’라고 불렀다.
“내 배가 많이 고파 너희를 먹어야겠다.”
목이 없는 그것은 비올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비올라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싸워야 해.’
직접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그것도 부활한 원혼에게 잡아먹힐수는 없었다.
‘억울해서 못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고 생각하자 괜스레 화가 났다. 그때, 셀빈이 털썩! 하고 쓰러졌다.
셀빈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헤헤, 언니, 어지, 러, 워, 여, 헤에, 헤헤…….”
비올라는 셀빈이 왜 쓰러졌는지 알것 같았다. ‘원혼에게서 새어 나온 탁한 기운에 중독된 거야.’
다만 비올라는 반지에서 새어 나오는 기운 덕택에 탁기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의 반지에 담긴 기적의 정령수. 아레나가 비올라의 몸을 외부의 나쁜 기운으로부터 지켜주었다.
“호오? 제법 쓸 만한 아이로구나.”
“쓸 만한 것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듣는 사람도 없었다. 비올라 벨라투를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너 죽고 나 살자다.
절대 여기서 죽을 수 없었다.
“퐁퐁! 물의 장막!”
물의 장막을 펼쳤다. 눈에 힘을 꽉 줬다.
진짜 아르게도 아니고 아르게의 원한이 남긴 원귀에 불과했다.
“네가 우리 최애캐보다 세냐!”
이 몸은 최애캐와 1년 동안 대련을 해서 살아남으신 몸이라고. 원귀 따위한테는 절대 안 죽어.
비올라가 초검의 기운을 일으켰다.
‘대련이 아냐.’
이건 실전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상대를 죽여야 했다.
비올라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살고 싶어.”
비올라는 기묘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죽일 거야.’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 진짜 비올라가 무의식 속에서 튀어 나와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성이 발현되면서 비올라의 초검에 살의(殺意)가 깃들기 시작했다.
살기를 머금은 마거리트 꽃잎들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마거리트 꽃잎과 풀잎들이…… 변했어.”
초검으로 인해 운용되는 모든 풀잎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비올라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세상 전체가 보라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
‘두 번의 기회는 없어.’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전력을 다해 힘을 끌어냈다.
비올라도 모르는 사이, 비올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
제논이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신성한 피의 맹세를 하고 계십니다.”
“상관없어.”
“공녀님께서 화를 내실지도 몰라요.”
“그건 내가 감당해.”
제논은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툰드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이 부는 곳의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탈출하여 이곳을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툰드라의 기세가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정제된 눈빛.
갈무리되어 안정된 기운.
그러나 내재되어 있는 기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셰일란도 깜짝 놀랐다.
‘뭐야, 저놈?’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눈이 부는 곳으로 수련을 간다더니,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제논이 다시 말했다.
“저는 분명히 말렸습니다. 제 책임은 없는 겁니다.”
툰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서 안에 계셔.’
아니.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비올라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비올라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공녀님이 안에 계셔.’
툰드라 비올라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는 대외적으로 사람이 아닌 개에 불과했고, 비올라를 돕는 것이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다.
흑색 신전 안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있어. 불길하고 위험한 것이.
툰드라는 두렵지 않았다.
눈이 부는 곳에서 끝없는 환상과 극복해 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과도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안에서 시간의 흐름은 바깥세상의 흐름과는 많이 달랐다. 툰드라는 그 안에서 10년 이상의 세월을 수련했다.
10년의 세월을 흘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비올라의 기운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녀님의 기운이 느껴져.’
얼마 후. 보라색 풀 폭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눈이 부는 곳의 눈 폭풍 이상으로 위험한 기운이었다.
‘성장하셨구나.’
굉장히 강한 기운이었다. 툰드라는 주변을 둘러싼 꽃잎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잘라낼 수 있었지만 잘라내지는 않았다.
때문에 몇몇 꽃잎이 툰드라의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피가 난다.
아무리 툰드라여도 모든 꽃잎을 피해낼 수는 없었다.
툰드라는 아공간에서 회복 연고를 꺼내 얼른 발랐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내가 피 흘리는 모습에 가슴 아파하시겠지.’
그래서 최대한 빨리 회복하기로 했다. 풀 폭풍 가운데,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원귀를 찾았다.
‘네놈이구나.’
비올라가 이토록 강력한 살의를 지닌 살검을 펼치게 만드는 것이. 툰드라가 대검을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원귀와의 거리를 좁혔다.
힉슨의 검식인 테헤론 검식을 펼쳤다.
“넌 뭐냐!”
원귀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비올라의 초검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상황이었다.
“나?”
테헤론 검식 1장. ‘파도’를 펼쳤다. 여섯 갈래의 검은색 검기가 원귀의 몸을 덮쳤다.
“공녀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원귀가 여섯 갈래로 갈라졌다. 툰드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말하고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공녀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다른 인생의 기억. 그러니까 강한준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한준은 강한준이고, 툰드라 자신은 툰드라였다.
그렇지만 기억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툰드라는 비올라의 옆에 있어주기로 다짐했고, 그것은 곧 툰드라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되었다.
“이, 이익!”
원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점차 사라져 갔다. 툰드라는 무심한 듯 대검으로 원귀의 기운을 흐트러뜨렸다.
1층의 지배자로 모습을 드러낸 원귀는 무력했다.
연기가 흩어지듯, 원귀가 소멸되어 갔다.
툰드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를 흩어내고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곧장 빠르게 걸어갔다. “공녀님.”
비올라는 모든 힘을 소진하고 쓰러져 있었다.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퐁퐁이까지 역소환되어 버렸다.
툰드라는 얼른 비올라를 살짝 안아일으켰다.
자신의 무릎에 비올라의 머리를 대고 호흡을 확인했다.
‘탈진하셨구나.’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지쳐서 쓰러진 것뿐이었다.
비올라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비올라의 얼굴과 몸이 작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무섭고 크게만 느껴졌었는지.
‘정말 강해지셨네요.’
사실 툰드라 자신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비올라는 무리 없이 원귀를 토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비올라의 초검은 강했다.
그 강함과는 별개로 지금의 비올라는 참 작았다. 툰드라는 무릎 꿇고 비올라의 머리를 받친 채 6시간 동안 그 곁을 지켰다.
그사이, 셀빈이 정신을 차렸다. 셀빈은 깜짝 놀라 외쳤다.
“귀, 귀신이냐!”
툰드라는 그제야 옆에 셀빈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6시간 동안 셀빈의 존재를 몰랐다.
비올라만 신경 쓰느라 그랬다.
얼마 후, 비올라가 정신을 차렸다.
원귀를 베어낼 때도, 셀빈이 정신을 차렸을 때도, 무감정한 기계 같던 그의 표정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녀님?”
툰드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까지의 툰드라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셀빈은 그 모습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셀빈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중인격?’
어쨌든 비올라는 정신을 차렸고, 한동안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툰드라가 돌아왔다.
예정보다 훨씬 빨리 말이다.
비올라는 툰드라의 표정을 보며 직감했다.
‘뭔가가…… 많이 바뀐 느낌인데.”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았다. 느껴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공녀님.”
툰드라는 비올라의 앞머리를 다시 한번 정돈해 주었다. 기력 소모가 너무 컸던 비올라는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지금 툰드라의 무릎에 누워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제가 옆에 있어드릴게요.”
비올라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한 가지를 부탁했다. “제게 이름을 주세요.”
예전의 퐁퐁이에게 그렇게 하였듯. 벨라투에게 있어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였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소유하겠다는 것이니까.
다시 말해,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의 소유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공녀님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드릴게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진심을 담아 간곡하게 부탁했다. “제가 공녀님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옆에서 당신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