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45화
셀빈은 뭐가 감격스러운지 두 손을 모아 경건한 표정으로 비올라와 툰드라를 바라보았다.
어린 셀빈이지만 툰드라의 간절함은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툰드라의 말을 곱씹으며 ‘나중에는 나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했다.
한편, 몸을 일으킨 비올라는 마음이 복잡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잖아.’
느껴지는 분위기. 비올라를 바라보는 눈빛과 비올라를 대하는 태도.
모든 것이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금의 툰드라는 비올라가 알던 툰드라도 아니었고, 기억 속 강한준도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이었다.
“이름을 달라고?”
“네, 퐁퐁이에게도 이름을 주셨잖아요.”
비올라는 고민했다. 이름을 주어도 되는 걸까.
이름을 주는 순간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반려견 툰드라는 실수해도 된다.
비올라에게 그렇게 큰 책임이 뒤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올라에게 이름을 받은 자가 실수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은 결정을 뒤로 미루었다.
“아직 일러.”
“알겠습니다.”
툰드라는 그렇게 큰 미련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쉬운 듯 보였으나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비록 이름은 없지만 공녀님 곁에서는 것은 허락해 주시겠지요?”
“....…그래.”
사실 비올라는 툰드라에게 고마움을 느끼던 차였다. 툰드라가 없었다면 원귀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귀는 네가 죽였어?”
“예.”
사실 마무리만 툰드라가 했다. 툰드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비올라는 원귀를 토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녀님은 충분히 강하시니까요. 그렇게 강한 공녀가 ‘네가 죽였어?‘라고 물어보았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 공녀가 그렇게 물었다는 것은다 뜻이 있어서다…… 라고 툰드라는 착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예’라고 대답했다. 덕분에 비올라는 스스로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눈이 부는 곳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오랜 세월 공녀님을 그리워하며 수련했어요.”
“오랜 세월?”
“저도 정확한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없지만 체감으로 10년은 넘은 것 같아요.”
비올라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툰드라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여주인 비올라를 사랑해서, 비올라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칼에 찔려 죽어주는 비운의 남주.
‘그런 주인공이 10년을 수련했어?’
그렇다면 거의 세계관 최강자급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툰드라는 스스로에게 혹독하고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로 잡아서 10년인 거야.’
본인의 체감이 10년이었다면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수련했을 것이다. 그게 15년인지 20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이면 툰드라가 이렇게 변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럼 순수 능력으로는 소설 후반부, 혹은 그 이상?
그 정도 능력이면 아버지나 검제에 비교해도 그다지 밀리지 않는 실력을 갖춘 상태다. ‘헐, 대박.’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 〈벨라투의 그림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보니 이토록 큰 변수가 발생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건 불가능한 일인데.’
문득, 작가의 블로그에서 보았던 툰드라에 대한 설정이 하나 떠올랐다. . [속성 1: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자.]
비올라는 할 말을 잃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설정에서 크게 벗어난 건 아니었다.
남주 툰드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지금 그 속성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툰드라가 말을 이었다.
“옛 무인들의 성지. 그곳에서 저는 강한준을 봤어요.”
비올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여태껏 단련해 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쓰러졌을 것이다.
강한준이라는 발음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 굉장히 어려워하는 발음이었다.
보통은 ‘가르한지운’ 정도로 발음했다.
그런데 지금의 강한준’은 발음이 또렷했다. 마치 한국인이 발음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자를 베었어요.”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나는 강한준이 아니라는 것을 딱 잘라 선언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자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공녀님께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공녀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준 원동력이 비올라였다. 이곳에서 빠져나가 비올라 곁에 있어주겠다는 것이 그의 동기였다.
툰드라의 말을 들으며 비올라의 마음이 점차 정리되기 시작했다.
‘툰드라는 과거에서 벗어났어.’
비올라 자신과는 달랐다. 비올라는 아직도 과거에서 빠져나 오지 못했다.
그래서 툰드라의 얼굴을 볼 때면 늘 흔들렸고 마음을 다잡지 못했었다. ‘툰드라는 툰드라야.’
강한준이 아니다. 그것이 확실해졌다. 마음속에 뿌옇게 껴있던 안개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오빠가 나보다 어른이네.’
툰드라 덕분에 강한준의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 옛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비올라야.’
더 이상 아린이 아니었다. 소설 속 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였고, 이 세계가 나의 세계였으며, 비올라가 나의 이름이었다.
좋든 싫든 가족이 생겼고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세계관 최강자가 내게 이름을 달라고 하는데. 안 주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
“이름을 줄게.”
툰드라가 환하게 웃었다. “네, 공녀님.”
그리고서 무릎을 꿇었다. 비올라의 손길을 갈구하던 반려견으로서의 툰드라가 아니었다.
머리를 숙이고서 겸허한 마음으로 이름을 기다렸다.
“네 이름은……… 툰드라.”
이전부터 그의 이름은 툰드라였다. 세련된 이름도 아니었고 그다지 남주스러운 이름도 아니었다.
독자일 때도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비올라는 툰드라라는 이름을 다시 하사하기로 했다. 툰드라의 지금 존재 자체를 인정해 준다는 뜻이었다.
“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같은 이름이었으나 이전의 툰드라와 지금의 툰드라는 달랐다. 툰드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쁨에 젖은 눈동자로 비올라를 바라보다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당신께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마침 흑색 신전에 마기가 모여들어 마물들이 재생성되고 있었다. 그가 마나를 일으켰다. 오러를 끌어내 검기의 형태로 구성하여 사방으로 쏘아냈다.
비올라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런 게…… 된단 말이야?’
마나의 해일이 주변을 덮쳤고 생성되던 모든 마물이 빛을 보기도 전에 모조리 소멸했다. 그는 마물들의 피가 모여 이루어진 피 웅덩이에 검을 꽂았다. 분명히 딱딱한 돌바닥인데 푸딩 속에 들어가듯 쭈욱- 박혔다.
그 피를 머금은 툰드라의 검이 불그스름한 빛을 피워 올렸다. 툰드라는 검을 다시 뽑아 비올라 앞에 무릎을 꿇어 공손히 받쳐 올렸다.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공녀님의…….”
아니. 조금 더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툰드라는 비올라가 공녀는 아니든 상관없었다.
“비올라의 기사, 툰드라입니다.”
****** 비첸의 집사가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공자님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건….”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아들의 어이 없는 결정에 단단히 화가 났다. 화가 난 정도가 아니라 비첸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후계권을 포기해서?”
비첸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에 집사는 의아해했다. ‘울지 않으신다.
집사는 비첸이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말이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들 것 같은 아이였다.
‘공작 부인이 공자님을 혐오하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시다?’
비첸이 말을 이었다. “집사, 집사도 내게 실망했어?”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퇴직금은 넉넉히 줄게. 이 집에서 나가도 좋아.”
“공자님!”
“벨라투의 집사를 역임했다면 어느 곳에서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집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이내 비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집사직을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그럼 이제 내 집사가 아니네? 아이, 아쉬워라. 집사 아니니까 이름으로 부를게, 수벤.”
“말씀하십시오.”
“어머니는 나를 사랑했어?”
“제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공자님.”
사실 비첸도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누군가 대화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비첸을 사랑한 게 아닌 것 같아. 그렇지?”
“그게 아니라, 후계자 후보인 5공자를 사랑한 거겠지.
더 정확히 말하면 2공자의 지원군인 5공자를 사랑했다.
비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여태껏 인정하지 않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었는데.”
비첸이 환하게 웃었다. 환한 웃음이었으나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공자님.”
“괜찮아. 슬프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엄마는 잃었지만 나한테는 동생이 생겼거든!”
환하게 웃는 비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나는 기뿌다! 엄청 기뿌다!”
전직 집사 수벤은 마음이 아파 그 눈물을 마주 보지 못했다. 비첸에게 다가가 비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비첸이 입을 열었다.
“수벤.”
말씀하십시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어머니가 아니라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라고 불렀다.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아. 근데 나는 공작 부인을 배신했단 말이지?”
“……공자님?”
“그렇지만 나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을 거야. 그렇지만 수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수벤이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수벤은 겨울성을 떠나는 즉시 보복 살인을 당할걸? 집사직을 스스로 내려놓은 수벤이니 겨울성 내에서 다른 직업을 구하기도 어려울 텐데. 실직자되면 불쌍해서 어떡하지?”
퇴로가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제안할게. 다시 내 집사가 되어주겠어?”
집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좋으나 싫으나 비첸의 집사로서 살아가야 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함정 아닌 함정에 완벽히 빠져버렸다.
‘공자님이 변하셨다……!’
<벨라투의 그림자>에서는 단순 무식하고 쾌활하기만 했던 캐릭터인 비첸이 변했다.
겁쟁이 셰일란은 겁을 잃었고, 단순한 비첸이 계략을 쓰기 시작했다.
비올라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변화들이었다.
* * *
한편, 그 변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비올라는 여전히 흑색 신전 1층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말도… 안 돼.’
비올라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소설 속 남주만이 일으킬 수 있는 기적들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