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46화
소설에는 늘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주인공에 의한, 주인공을 위한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남주는 툰드라였다. 그는 1층의 지배자로 설정된 원귀를 죽였고, 더불어 새로이 나타난 마물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그 피로 진실함과 간절함을 담아 맹세하였고, 이곳에서 누군가의 기사가 되었음을 서약하였다. 이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고대 영웅 할콘의 안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의 친구였던 아르게를 친구로서 사랑했다. 고대 영웅 할콘의 목소리였다.
-나는 옳은 일을 위하여 나의 친우를 베었다. 비록 옳은 일이었다고는 하나 나는 몹시 슬퍼 잠을 이룰수 없었다. 이런저런 설명이 이어졌다. 요약하자면 할콘은 노년에 이곳을 찾아 자신의 검을 특별한 방식으로 묻어놓았다는 얘기였다.
내 친구를 베어버린 검을, 내 친구가 잠든 곳에 함께 묻겠다고 했다.
신전 전체가 웅웅~ 울렸다.
곳곳의 피 웅덩이가 부글대며 끊기 시작했다.
‘저긴…… 아까 툰드라가 맹세를 진행한 곳이잖아?’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과연 주인공 버프라고 할 수 있었다.
‘맹세한 저기가, 할콘의 검이 묻힌 곳이었어?’
그곳을 정확하게 찌른 모양이었다. 주인공은 앞으로 넘어져도 기연이고 뒤로 넘어지면 행운이라더니.
그 말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진짜 주인공인데?’
남주와 여주. 둘 중에 누가 진짜 주인공이냐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벨라투의 그림자는 보통 ‘비올라의 시선’으로 소설이 진행되었다.
근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에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튼… 저거 엄청 좋아 보인다.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 묵검(墨劍)은 은은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당시 대흑마법사로 불렸던 아르게의 목을 베었던 검.
툰드라가 마치 저 검이 원래 제것이었던 양 가까이 다가가 수욱-뽑아 올렸다.
순간, 콰직! 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저항감이 있었으나 툰드라는 그리 어렵지 않게 검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었다.
검으로부터 새어 나온 묵기가 툰드라의 몸 전체로 퍼져나가 일렁거렸다.
툰드라는 검으로부터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나를 가질 자격이 있느냐? 툰드라가 짧게 대답했다.
“물론.”
툰드라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묵검은 보물이다. 보물이 탐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보물이 있으면 보다 훌륭한 기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올라의 곁을 지키기에 이 보물은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너는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절실하지? 툰드라가 묵검을 본능적으로 느꼈듯, 묵검 역시 툰드라를 정확하게 느꼈다.
툰드라의 절실함을 읽어냈다.
“약속했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었었다. 이제는 자신이 비올라에게 손을 내밀 때였다.
“그 약속이 무겁기 때문이다.”
묵검은 툰드라의 말이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나의 이름은 올테가. 좋은 주인을 만난 것 같아 기쁘구나.
* * *
그림자를 다루는 퀼튼가.
퀼튼가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퀼튼가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륙의 굵직한 사건마다 모습을 드러내어 악마와도 같은 힘을 보여주었다. 가장 최근에 공식적인 활동은 25년 전 정상전쟁이었다. 당시 퀼튼가에서 파견 나왔었던 두명의 소녀는 전쟁터를 휩쓸었다.
그들은 영자매(影姉妹)라 불리며 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영자매라 불렸던 두 명의 여인.
한 명은 현 벨라투의 안주인인 이사벨라 퀼튼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퀼튼가의 가주 퀘이사 퀼튼이었다.
퀼튼가의 가주 퀘이사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의 손에는 피로 적은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은영전의 살수들을 움직여 달라?’
퀼튼가 내에는 몇 개의 단체가 있었는데 ‘은영전’은 퀼튼가 내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살수들만이 입성할 수 있는 최상위급 단체였다. 사실상 퀼튼가의 최고 전력이었다. 퀘이사는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몇 번이고 서신을 다시 읽어 보았다.
‘고작 13살의 어린아이를 죽이기 위해서?”
의뢰 대상은 비올라였다. 최근 철혈 공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 유명한 아이.
그 아이가 비첸을 망가뜨렸단다.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고작 이런 일로 은영전의 살수들을 움직이는 건 좀 그렇지?”
이런 일로 명령이 떨어진다면 은영전의 원로들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친언니인 이사벨라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됐어.”
퀘이사 퀼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을 열었다.
오늘은 마침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퀘이사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었다.
허공에서 작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퀘이사의 손가락에는 독이 묻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아들, 기척이 너무 컸잖아.”
“죄송합니다.”
“아냐. 제법 괜찮은 시도였어.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퀘이사와 똑 닮은 남자아이가 그녀앞에 섰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앞머리가 바람 결에 나부껴 찰랑거렸다.
총기를 머금은 붉은 눈동자.
햇빛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받아본적이 없는 것만 같은 뽀얗고 하얀 살결은 분명 미소년의 그것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키라엘 퀼튼.
퀘이사의 외동아들이자 퀼튼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는 오늘도 암살 훈련을 진행했고,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어머니 덕분이에요.”
퀘이사는 기분 좋은 듯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라엘은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 싫지 않은 듯 보였다.
키라엘의 등 뒤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지나치게 강한 영기 때문에 절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세요?”
“청부대상자를 죽이러.”
“어머니께서 직접요?”
“그래야 할 것 같구나.”
키라엘 퀼튼은 그 대상이 누군지는 몰라도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큰 죄를 저질렀나요?”
“내가 사랑하는 언니의 아들을 망가뜨렸대.”
“몹쓸 짓을 했네요. 그런데 혹시……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최근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비올라 영애인가요?”
“잘 아는구나.”
“네, 제 또래니까요.”
“한 살 누나란다.”
“저보다 고작 한 살 많을 뿐인데 많은 것을 이루었더라고요.”
“아들은 조급해할 필요 없어. 벨라 투는 겉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야 하지만 퀼튼은 다르단다. 퀄튼은 세상의 명예를 중요시하지 않아. 알겠니?”
“네, 명심할게요.”
고개를 끄덕인 키라엘은 무엇인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정말로 죽이실 건가요?”
“일단은.”
“안 죽일 수도 있는 건가요?”
퀘이사가 빙그레 웃었다. “두 개의 경우가 있겠지. 하나는 내가 암살에 실패하는 것이고.”
“가능성이 없겠네요. 어머니께서 죽이려고 했던 대상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으니까요. 지금도 살아 계신 게 용하기는 하지만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요?”
“또 하나는 그 아이가 내 마음에 들거나.”
퀘이사는 아무나 죽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녀 나름의 판단과 원칙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
적이라 할지라도, 의뢰 대상이라할지라도, 그녀의 마음에 들면 죽이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가능성이 희박하네요.”
키라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비올라는 며칠 지나지 않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것이 분명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이 저물것이다.
키라엘은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훌륭한 내 라이벌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다만 비올라는 운이 없을 뿐이었다. 조심스레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퀘이사는 아들의 걱정이 싫지 않은 듯 씨익 웃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아들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들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보렴.”
“부탁을 하나만 해도 될까요?”
“들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해보거라.”
“기준을 조금만 낮춰주세요. 비올라를 어여삐 봐주시면 좋겠어요.”
“어째서?”
“제 훌륭한 라이벌이 되어줄 것 같아요. 비올라의 소식을 들으면 자극이 많이 되거든요.”
퀘이사는 아들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고 있으렴.”
퀘이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제논은 묵검 올테가를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명검이네요, 툰드라. 축하드려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흑색 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큰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수 있었다. 비올라와 툰드라가 밖으로 나오자 흑색 신전이 무너져 버렸다.
“흑색 신전은 왜 무너졌나요?”
“제 소명을 다했기 때문이겠지.”
말하자면 흑색 신전은 묵검 올테가의 검집이었다. 검이 사라졌으니 본연의 목적이 없어졌고, 목적이 없어진 신전은 붕괴되었다.
지금은 마부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셰일란도 셰일라 나름대로 감탄하며 툰드라를 관찰했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사실 괴물에는 꽤 익숙해졌다. 비올라의 성장 속도를 보며 어지간한 것들은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더 이상 놀라기를 포기했던 셰일란이었지만 툰드라의 성장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마저 포기하기로 했다. ‘원래 이런 건가 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졌다.
기이한 일을 하도 많이 경험하다 보니, 스스로 ‘구결 없이 초검을 운용했었다는 사실 정도는 기적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것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비올라와 툰드라. 그리고 제논이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