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51화 (151/201)

비올라 입장에서는 터무니없이 이상한 질문이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51화

‘나도 나가라는 게 아니었어?’

요즘 머리가 복잡했다. 겁쟁이였던 셰일란에게 겁이 사라졌고, 툰드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용병왕 카이저가 겨울성에 눌러앉았고, 비첸은 후계자를 포기했다.

반쯤은 비올라가 의도한 것이었지만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았다.

‘분명 축객령을 내렸는데, 왜 나가려 했냐니?’

질문부터가 논리적이지 않았다. 헤론의 캐릭터성에 한참 어긋나는 질문이었다.

‘도통 감이 안 와.”

결국 비올라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상식에 의거한 합리적인 대답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부상을 입으셨잖아요.”

“부상을 입었다?”

힉슨과의 대련으로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지금은 깨끗하게 나은 상태다. 최상급 마법 연고를 다량 사용했으니까.

다시 말해 지금 헤론은 부상을 입지 않았다.

“예, 여전히 호흡이 거치신걸요.”

헤론은 그제야 제 호흡이 가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호흡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마도 작지 않은 부상을 입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이 아니라 서재로 오셨다는 건, 정말 급박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잖아요.”

헤론은 말하고 싶었다. 아니다. ‘이곳에, 네가 있지 않느냐.”

헤론이 이곳으로 직행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 비올라가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을 차마 입에 담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리를 비켜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비올라의 논리정연한 말에 헤론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듣고 보니 비올라의 판단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합리적인 판단이군.’

저토록 좋은 판단을 내린 것이 기뻐야 한다. 그러나 기쁘지 않았다. 지난 6년간 그는 깨달았다.

비올라의 ‘벨라투다움’이 마냥 좋지 않다고.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에 조금은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 있거라.”

“명이라면 받들게요.”

“명이 아니다.”

헤론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 뿐인데 왜 명령이란 단어가 나온단 말인가.

서재의 유리창이 바르르- 떨렸다.

헤론은 마음을 다스리고서 의자에 앉았다.

“흑색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듣고 싶구나.”

“맹세에 관한 보고는 제논이 올렸을 텐데, 미흡했나요? 혹시 중복 보고가 될까 싶어 염려되어서요.”

사실 흑색 신전의 맹세 같은 건 헤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비올라가 거기서 무엇을 경험했고 어떤 것을 보았는지.

뭘 먹었고 누굴 만나 어떤 생각을 했는지.

‘네가 궁금하다.

제논을 통해 듣는 보고와 딸의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는 다르다.

헤론은 그저 비올라의 얘기가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 마음을 도통 알지 못한 비올라는 예의를 갖추어 보고를 올렸다. “……를 거쳐 복귀하였습니다. 보고를 마칠게요.”

“그렇군.”

헤론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잠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올라는 작았지만, 그래도 7살 때보다는 훨씬 커졌다.

“많이 컸구나.”

……예? 보고에 관한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던 비올라는 의아했다.

갑자기 컸다니?

흑색 신전에서의 일을 잘해냈다고 칭찬하는 건가.

“키 말이다.”

“제 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작았지.”

“……….”

“그래서. 너는 겨울성을. 그리고 나를 떠나려는 것이냐?”

저기요. 대화의 흐름이 영 이상한데요.

따라가기가 많이 벅차요.

비올라는 헤론의 화법에 도통 적응하기 힘들었다.

소설 속 헤론과는 너무 다른 대화 방식이었다.

“제가 겨울성을 왜 떠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황제의 친서를 받지 않았느냐.”

게다가 혼인 제의까지 받았지. 도통 떠나겠다는 신호밖에 없구나.

물론 비올라가 거절하기는 했으나, 그것 또한 역시 출가하겠다는 하나의 신호 아니겠는가. 공작의 마음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 올랐으나 애써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아.”

비올라는 이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 있었다. ‘셀리나 대신의 스카우트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누가 봐도 그 제안은 좋은 제안이었다. 셀리나 대신 밑에서 일을 배울 수 있고, 제국 중앙에서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것은 곧 하얀 벨라투로서도 큰 업적이 될 수 있고.

“내가 불허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비올라는 바짝 긴장했다. 공작 입장에서도 불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굳이 불허하면 어쩌겠냐고 물었다. ‘또 시험인가?

“벨라투답지 않아요.”

“그래, 벨라투답지 않지. 너는 응당스카우트에 응하여 제국으로 향할 것이다. 그게 합리적이고 옳은 선택이다.”

헤론의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서늘한 예기까지 새어 나올 정도였다.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삼켰다.

역시 시험이었나.

그렇게 생각할 무렵, 헤론은 결국 마지막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용기를 내었다. “떠나지 말거라.”

물이 가득 차서 찰랑거리던 둑이 무너졌다. “너는 겨우 열세 살이지 않느냐?”

“......”

“아비의 곁에 있거라.”

비올라는 혼란스러웠다. 이 세계에서 열셋은 결코 어리기만한 나이가 아니다. 공식적인 성년은 열일곱이지만, 열넷부터는 거의 성인과 비슷하게 취급받는다.

심지어 결혼도 가능하다.

‘난 어린 나이가 아닌데.”

헤론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근데…….’

비올라는 떠나지 말라는 말과 곁에 있으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백 밤만 자면 돌아온다던 아빠의 허황된 약속보다 훨씬 더 좋았다.

‘흔들리면 안 되는데…….”

이건 시험일 거야. 나를 새로운 방식으로 흔드는 걸거야.

저런 모습에 중심을 잃으면 안 돼.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걸어가 헤론 앞에 섰다.

자세히 보니 헤론의 손가락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오로지 라엘 앞에서만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헤론이다.

그 헤론이 비올라 앞에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엄청 용기를 내고 있던 거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비올라가 헤론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가족이 필요해졌다고 하셨잖아요.”

다시 생각해 보면 시험이 아니었다. 작가의 설정값은 이미 바뀌어 버렸다.

캐릭터들의 성격과 설정이 바뀐 것이 마냥 혼란스러울 문제는 아니었다.

이들은 자아를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다.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떠나지 않을게요.”

사실 그 말은 비올라가 평생토록소망했던 말이었다. 떠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돌이켜보면 비올라만큼 가족이 필요했던 사람은 없었다.

헤론과 처음 만났을 때, ‘늘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라고 말했던 것도 진심이었다.

‘말로만 아버지 말고, 진짜 아버지가 되어줘.’

그 말 또한 진심이었다. “진짜 아버지가 계신 곳에 머물게요.”

헤론은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떠나도 좋다. 나는 늘 이 자리에 있으니.”

“원하지 않아요.”

비올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쩌면 헤론은 훨씬 이전부터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도 외면했거나. 비올라도 스스로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캐릭터의 설정이라는 굴레 아래, 무시무시한 ‘천살 공작’이라는 이명아래, 공작의 마음을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론은 눈시울이 붉어진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순간, 제논의 보고가 떠올랐다.

‘수많은 가면을 이용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타고났다. .

라.’

헤론은 그 보고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보고는 틀렸다. 비록 ‘진안’은 작동하지 않지만, 비올라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혹여 가면이라 해도 상관없겠지.’ 비올라가 가면을 쓰고 자신을 대하는 것이라 해도 괜찮았다. 지금 비올라의 모습이 연출된 가짜라면 마음이 아프기는 하겠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진심이니 그걸로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모습이 진짜면 좋겠구나.’

헤론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비올라를 살짝 안고 토닥여 주었다. “네게는 좋은 기회이다. 진정 원하지 않느냐?”

“원하지 않아요.”

제국에 스카우트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지금 최애캐의 따뜻한 품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비올라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그래, 이건 최애캐한테 안겨서, 기뻐서 그런 거야. 그래서 눈물 나는 거야.’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 ‘나한테도…… 아빠가 생겼어.’ ’말로만 아버지 말고, 호적상 아버지 말고, 진짜 아버지가 생겼다.

눈물이 계속 났다.

겨울성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

헤론은 비올라를 시험한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비올라를 대했고, 비올라는 그 진심에 솔직하게 응답해 주었다.

헤론은 비올라의 진짜 아버지가 되었고, 비올라는 헤론의 진짜 딸이 되었다.

비올라가 말했다.

“그래도 다녀오기는 해야 할 것 같아요.”

황제의 친서를 받았는데 딸랑 서신한 장으로 거절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직접 황실을 찾아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으로 거절에 대한 예를 표시하기로 했다.

“몸 조심히 다녀오너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고.”

“무엇이든지요?”

“무엇이든.”

비올라의 눈에 장난기가 담겼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말씀드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네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모든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제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아버지의 능력을 감히 측량할 수 없다, 뭐 이런 뜻으로 해석하면 될까요?”

헤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성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법한 대화가 오갔다.

헤론은 직접 겨울성의 남문까지 나와 비올라를 배웅해 주었다.

그것을 두고 수많은 의혹과 추측이 생겨났다. “공작님께서 직접 배웅해 주셨다.

지?”

“포옹까지 해주셨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나?”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지.”

“그게 뭘 의미하는 걸까?”

“글쎄. 후계자 후보로서 조금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아닐까? 비올라 공녀님은 어리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힘을 더 실어주는 게 아닐까 싶은데.” “후계자 경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은 아니시잖아.”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