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나가 책상 서랍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53화
셀리나가 책상 서랍 속에서 꺼내 든 것은 옥빛의 작은 돌이었다.
아이의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표면이 매끈매끈한 구슬 같았다.
‘저건…… 서약의 돌?’ ‘
황제의 권능이 담긴 ‘서약의 돌’이었다.
3대 공작가의 일원들은 서약의 돌앞에 평생 한 번의 서약을 맺어야만 한다.
서약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황제가 명령하고 공작가가 그것을 받들게 되는 구조였다.
“서약의 돌을 사용하여 명령하실 건가요?”
“그러려고요.”
“서약의 돌은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절대 명령권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걸 사용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면 사용해야 하지요. 역대 황제폐하와 그 권한을 위임받은 대신들은 아끼다가 똥을 만들었거든요.”
셀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일부러 격의 없는 표현을 사용하여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하고 있었다.
분위기 자체는 분명 따사로웠다.
그러나 그 내용마저 따뜻한 것은 아니었다. ‘안 돼!’
비올라는 제국의 대신 밑에서 중역을 맡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벨라투의 그림자는 늘 ‘비올라의 시선’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국의 대소사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비올라는 모나크 제국에서 활동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주 활동 반경은 겨울성과 ‘눈이 부는 곳’이었고, 모나크 제국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해박하지 못했다. ‘으, 생각만 해도 무서워.’
보이지 않는 칼날이 오가는 곳 황궁. 무시무시한 궁중 암투와 계략이 넘쳐나는 곳.
비올라가 꿈꾸는 행복한 세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이었다.
“겨우 열세 살에 불과한 저를 스카우트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보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걸 사용하지 않도록 영애가 내 제안을 수락하면 되겠는데요?”
“그건….”
“비올라 영애는 늘 합리적이고 이 성적인 판단을 내려왔어요. 모든 것을 최선의 결과로 이끌었지요. 내 제안 역시 영애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텐데요. 안 그래요?”
“그렇지요.”
셀리나의 스카우트는 가문의 영광이다. 궁중 암투에서 잘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다.
‘난 안 돼.’
천재들이 모여 암투를 벌이는 살벌한 전장. 그곳이 바로 황궁이었다.
<벨라투의 그림자> 속 지식을 활용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천재들과 두뇌 싸움을 하라고?
비올라는 절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얀 벨라투로서는 굉장히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저는 하얀 벨라투이기 전에 벨라투의 성을 이은 영애랍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이죠?”
“벨라투는 아주 오래전부터 북방끝에서 외로이 존재해 왔어요.”
덕분에 대륙의 중앙 귀족들은 벨라 투를 야만인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중앙 귀족들은 마물의 무서움을 잘 모르는 자도 많았다.
실제로 마물과 조우할 일이 많지 않았으니까.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는 것이 벨라투가 가진 위대한 사명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렇기에 저는 겨울성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이곳에서 더 큰 일을 해낸다면, 마물들을 막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벨라투에게 가치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셀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제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거네요? 결국 제가 ‘서약의 돌을 사용해야 하나요?”
“현명한 대신님께서, 그 소중한 명령권을 겨우 이런 기회로 소진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요.”
“소중한 명령권이기에 비올라 영애를 스카우트하는 데 쓰려는 거예요.
비올라 영애는 스스로의 가치를 상당히 낮게 평가하고 있군요.”
셀리나가 본 비올라는 단순한 천재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높은 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곁에 두고 싶었다. 일단 서약의 돌을 다시 책상 서랍속에 넣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짐을 풀고 조금 쉬도록 하세요. 며칠 뒤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요.”
칼튼은 이상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일단 칼튼은 황궁으로 향했다.
필요한 경우, ‘은성 훈장’을 반납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필요한 경우가 구체적으로 어떤 필요한 경우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셀리나 대신을 만나게 되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그녀가 억지를 부린다면 은성 훈장을 반납하도록.”
그래서 칼튼은 정식으로 요청을 넣어 셀리나와 만남을 가졌다. “명성이 자자한 총집사 칼튼 경을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제가 영광입니다, 대신님.”
둘은 따뜻한 재스민차를 마시며 약간의 담소를 나누었다. “헤론 공작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셨나요?”
“필요한 경우, ‘은성 훈장’을 반납하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경우가 어떤 경우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명령이네요.”
“예.”
헤론답지 않은 명령이었다. 그러나 셀리나는 단박에 헤론의 의중을 읽어냈다. “저는 ‘서약의 돌을 사용하여 비올라 영애를 스카우트할까 하거든요.”
“서약의 돌을 말입니까?”
그 귀한 것을 겨우 스카우트 따위에 쓰시렵니까? 그 말을 꾹 눌러 담았다. ‘비올라가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고는 해도, 너무 과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셀리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려는 것 같았다. “비올라의 잠재력은 무한해요. 좋은 토양 위에서 자란다면, 세계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제국의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제국민들의 안전한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 거예요.”
“비올라 공녀를 높이 평가하시고 있군요.”
“최대한 보수적으로 평가한 거예요. 만약 황가의 아이였다면, 아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 말을 들으면 황제 폐하께서 속상해하실 겁니다.”
“폐하께서도 인정하시던데요?”
“……그렇습니까?”
“그런 아이를 얻고 싶어서 ‘서약의 돌’을 쓰려고 한 거예요. 그걸 알고 헤론 공작께서는 제게 은성 훈장을 보내셨고요.”
은성 훈장은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훈장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 등급의 훈장이었다. 은성 훈장을 가진 자는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되고, 제국의 어딜 가더라도 경례를 받을 수 있는 특전을 가졌다.
제국의 영웅에게만 주어지는 이 은성 훈장’을 가진 자에게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명령 거부권이었다.
“은성 훈장을 반납하게 되면, ‘서 약의 돌’을 무력화시킬 수 있거든요.”
“.……아.”
비올라를 영입하기 위해 ‘서약의 돌’을 쓰겠다는 셀리나나, 그 영입을 막기 위해 ‘은성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헤론이나. 칼튼 입장에서는 둘 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최정상에 다다른 이들은 나와 시야가 다른 것인가.’
칼튼은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셀리나와 헤론은 이 세계의 최정점에 선 자들이었다.
그자들의 시선과 시야가 일치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두 분은 보고 계신다. 비올라 공녀에게 숨겨진 무엇인가가 더 있어. 내가 보지 못하는!’
실력이나 업적은 저들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그리 좁지 않다고 자부해 왔었다. 넓은 시야를 통해 헤론을 잘 보좌해 왔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총집사로서 실격이다.
절실해졌다.
내게도 수련이 필요하다.
더 유능해져야 했다.
여태껏 너무 현실에 안주해 왔던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헤론과 셀리나는 더욱 높아졌고, 자신은 제자리에 정체되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성장해야 한다. 두 분과 같은 시야를 지닐 수 있도록.
비올라가 만들어낸 작은 날갯짓이 총집사 칼튼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 * *
제논이 허리를 숙여 양해를 구했다.
“저희 공녀님은 차보다는 딸기 에이드를 더 좋아하셔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딸기 에이드를 대접해도 괜찮을까요?”
“좋아요. 저도 한 잔 주시겠어요?”
셀리나와의 2차 회담. 비올라는 재스민차 대신 딸기 에이 드를 마셨다.
셀리나도 딸기 에이드에 크게 감탄했다.
“과연…… 딸기 에이드의 대가답네요.”
“별말씀을요.”
셀리나는 눈을 감고 딸기 에이드를 음미했다.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비올라 영애가 부럽네요. 이런 수준 높은 딸기 에이드를 매일 마실 수 있다니. 이런 에이드는 처음 마셔봐요.”
“제논이 유능한 편이긴 하지요.”
“명인의 칭호를 내려달라고 황제폐하께 간청해야겠어요. 어때요? 명인이 되지 않겠어요?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거예요.”
황제에게 명인의 칭호를 하사받은 딸기 에이드 장인.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단 한 명을 위한 집사라서요.”
명인이 되면 너무 바빠진다. 여기저기서 섭외연락도 많이 올 것이 뻔했다.
그러면 비올라에게 쏟는 정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비올라를 위한 딸기 에이드의 품질이 저하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제논은 셀리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셀리나는 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올라는 주변의 사람들을 확실히 제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차세대 겨울성의 군주로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이다웠다. 다른 것들보다도, 주변인들을 제 사람으로 만드는 저 재능이야말로 가장 무섭고도 놀라운 능력이었다.
‘탐나. 정말 탐나.
비올라가 탐났다.
이토록 탐이 났던 인재는 처음이었다.
“사실 서약의 돌을 사용해서라도 비올라 영애를 섭외하려고 했어요.”
“저를 이렇게까지 안달 나게 한 사람은 처음이에요.”
“감사합니다.”
겉으로 평온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비올라의 머리는 복잡했다. 어떻게 하면 이상하지 않게 셀리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를 열심히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렇지만 제 곁에 두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비올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표정 관리를 위해 무던히 애써야만 했다.
“헤론 공작께서 이걸 보내셨거든요.”
은성 훈장이었다. “물어보고 싶어요. 헤론 공작님은 왜 은성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초강수를 둔 것일까요? 저 역시 비올라 영애의 가치와 잠재력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제가 비올라 영애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이득이 되는 스카우트일 텐데. 왜일까요? 그대가 대답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