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54화 ‘그,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저 귀하디귀한 은성 훈장을 보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반납하겠다니.
그렇지만 겉으로는 차분히 대답했다. “은성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조건을 거셨을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의 실책인 것 같아요.”
“실책이요?”
셀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론 공작께 그런 말을 해도 괜찮나요?”
“아버지는 논리적인 사람이거든요.
논리적으로 그릇된 것을 짚는 것은 괜찮아요. 셀리나 대신님께서 보시기에도 이 행위는 비논리적인 행동아닌가요?”
“그렇기는 하지요.”
“그러니 저는 아버지에게 옳고 그 름을 따져 물을 수 있어요.”
셀리나의 스카우트 제의는 비올라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이다. 이득이 되는 제안인데 ‘은성 훈장’을 소모하여 거절하는 것은 지나치게 불합리한 대응이었다.
“그것을 머리로 안다고 해도 헤론공작께 직접 따져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걸요?”
셀리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전부 마음에 들었다.
‘행동하는 신념을 가진 아이.’
물망초 연회에서 테러를 막아내던 그때에도 비올라는 움직였었다. 마탑의 거지 패를 구해낼 때도 비올라는 행동했다.
과연 겨울성의 차세대 지배자로 주목받을 만했다.
“만약 이유가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다면 비올라 영애는 어쩔 생각이지요?”
“........”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다음은? 비올라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따져야 하나?’
원래대로라면, 원래 소설 속 헤론공작이라면 그게 정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 헤론은 변했다. “그분을 안아드릴 거예요.”
“.…네?”
셀리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안아준다니요?”
“아버지께서 이토록 논리적이지 못한 일을 하셨다는 건, 비논리적인 어떤 이유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비올라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것 같았다. “아버지께 가족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헤론은 비올라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열세 살의 어린아이를 머나먼 땅으로 보내 궁중 암투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헤론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저는 기쁠 것 같아요.”
셀리나는 잇지 못한 채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비올라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기쁘다라.’
철혈 공녀 비올라의 입에서 나올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나는 이 아이의 다른 면을 보지 못했구나.’
셀리나는 비올라의 성장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올라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도, 어쩌면 비올라 본인보다 더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셀리나가 본 비올라는 철혈 공녀답게 강하기만 한 아이였다.
‘헤론 공작님을 처음 봤을 때, 진짜 가족이 되어달라고 말을 했다지.’
그건 진짜였던 것 같았다. 이 아이에게는 가족이 필요했고, 헤론은 그 소망에 응답했다. ‘이게 더 무서운 점이지.’
단순히 능력과 업적만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다. 셀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셀리나 본인도 그렇게 해왔고,
‘하지만 마음을 얻는 것은 어려워.’
비올라 주변에 영웅들이 집결하고 있다. 단순히 비올라의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고 모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올라에게 마음을 준 거야.’
셀리나는 씁쓸히 웃으며 ‘서약의 돌’을 책상 서랍 속에 넣었다. “아무래도 이건 사용하지 못할 것 같네요.”
“은성 훈장을 회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회수하고 싶지 않아요.”
잠시 씁쓸해했던 셀리나는 이내 다시 밝게 웃었다. “저는 비올라 영애의 마음을 사보려고요.”
*** ‘스카우트를 포기한 건가?’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셀리나는 스카우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비올라에 대해 물었고, 비올라는 마치 친구 혹은 언니와 대화를 나누듯 편안하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요즘 비올라 영애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무엇이죠?”
“그게….”
비올라가 셀리나를 찾은 것은 스카우트를 거절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마침 이렇게 물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말해봐요. 그대보다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편한 언니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사석에서는 언니라고 불러주면 저도 참 기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거기까지 말한 셀리나는 스스로 주책이라는 듯 호호 웃고 말았다. “그래도 역시 언니는 무리겠지요?”
“제게 그런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비올라는 아린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셀리나는 겉으로 보기에 20대 후 반이나 30대 초반처럼 보였고, 비올라는 아린의 인생을 포함하여 30년 가까이 살아왔다.
때문에 셀리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크게 거북하지 않았다.
‘음?’
셀리나가 전에 없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청 좋아하네?
소설 속 셀리나에게 이런 설정이 있었던가.
비올라의 기억으로는 없었다.
‘셀리나를 언니라고 불렀던 캐릭터자체가 없기는 했지.’
그래서 이런 상황이 연출된 적은 없었다. 캐릭터의 숨겨진 설정 하나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기분이 꽤 좋았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몸으로 쓰는 팬픽!’
비올라도 기분이 좋아졌고 둘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따스한 분위기 속,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물망초 연회에서 테러를 기획했던 단체,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단다.”
존대하던 셀리나는 비올라에게 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셀리나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열풍. 대륙에서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는 단체이지. 마법에도 능통한 것 같고, 분명 제국 고위직들과도 끈이 연결되어 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꼬리가 잡히지 않을 리가 없지.”
“저는 열풍을 혐오해요.”
“어째서?”
“그들의 방식이 지나치게 비겁하고 비인륜적이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강한 무인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역으로 이용하는 술수를 벌인다. 흑경 힉슨이 그랬고, 폭풍검 재칼이 그랬으며, 검귀 에르사도 그랬다.
소설 속에 일일이 나열되지는 않았지만 피해자가 상당히 많았다.
“언니께서는 브란디아 공작님의 막 내딸 사랑에 대해 익히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지, 그 막내딸 셀빈 영애가 비올라한테 흠뻑 빠져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단다. 비올라에게 미쳐있는 수준이라던데. 맞지?”
네, 일단은요.” 비올라는 머쓱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 아이도 습격을 받았어요.”
흑색 신전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밝혔다. “…그렇게 된 것이에요.”
“덱시알이라는 흑마법사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내막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현재 덱시알은 벨라투에서 심문중이고 그중 일부 결과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해요.”
덱시알은 흑마법사 단체인 ‘데스’소속이다. “두 개의 해골 모양이 그들의 표식 이에요.”
“그래, 두 개의 해골 모양 표식을 가진 자들이 대륙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들 단체의 이름이…….” 셀리나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잠시 생각했다. 대륙에 흑마법사 단체가 적어도 수백 개가 넘었다.
그 모든 것을 일일이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셀리나는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냈다.
“데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 본격적인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알고 계시는 거예요?”
아직 데스가 왕성하게 활동하기 전시점인데, 셀리나는 이미 데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놀라운 능력이었다.
거기서 비올라는 다시 통감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지금이야 셀리나가 좋게 봐주고 있지만 언제 비올라 자신의 가면이 벗겨질지 모를 일이었다. 밑천이 다 드러나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아무튼.
결론을 꺼냈다.
“데스의 수법이 열풍과 교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있었어요.”
“브란디아의 막내딸을 노렸다는 걸 짚는 거구나.”
열풍은 강한 무인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노린다. 힉슨의 딸이나 재칼의 아들, 에르사의 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마음에 크게 구멍이 생긴다.
그들은 그 구멍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사람을 망가뜨린다. “힉슨 아저씨는 딸을 잃고서 폐인 이 되었어요. 만약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브란디아 공작님은 어떤 상태가 될까요?”
“데스와 열풍 사이에 관련이 있다.
고 주장하는 거니?”
“네, 가정에 불과하지만요.”
사실 소설로 봤어요. 데스와 열풍은 한 몸이다.
소설 후반부까지 둘은 따로따로 움직이다가, 최종장에 이르러서야 그 정체가 밝혀지게 된다.
제국에도 큰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그들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요.”
비올라가 셀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셀리나는 비올라의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둘의 눈빛이 통했다.
“설마….”
“맞아요. 셀리나 대신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절실히 사랑하는 분이 한 분 계시지요.”
검제 넬라크. 그는 셀리나를 제 목숨보다 더 사랑했고, 셀리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셀리나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것을 본 비올라는 호로록- 딸기 에이드를 마셨다.
‘크으, 이 맛이지.’
열풍과 데스는 본래 ‘보이지 않는 검’이었다. 소설 후반부까지 몰래 힘을 쌓고 쌓아 한 번에 터뜨리며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검은 무섭지만, 일단 보이기 시작하면 무섭지 않아.’
비올라가 거창한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황들을 엮어서 이 세계의 절대자들이 ‘데스’와 ‘열풍’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만들기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인지하지 못한다면 모를까. 이미 인지한 이후라면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더더군다나 검제 넬라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셀리나 대신은 폭풍처럼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원래 병도 초기에 잡아야 금방 낫는댔어.’
딸기 에이드가 무척이나 맛있었다. 행복한 독립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었다.
* * *
같은 시각, 메데이아는 홀로 어딘가를 찾았다.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진 한 가게였다.
수많은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왁자지껄 떠들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메데이아가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우오!”
한 사내 무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제국의 수도에서도 메데이아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드물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메데이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봐, 아가씨, 혼자야?”
몇몇은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하기도 했고, 술을 사주겠다며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메데이아가 작게 말했다.
“10초 안에 검은 나비를 데려와.”
작은 목소리였으나 모든 사람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미세하고 정밀한 마나 컨트롤이었으나,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그 경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 중 몇몇은 저질스러운 농담을 하며 메데이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세 남자가 메데이아를 둘러쌌다.
“대낮부터 우리, 뜨겁게 한번 놀아볼까?”
“오빠들이 즐겁게 해줄 수 있는데.”
술에 잔뜩 취한 한 남자는 아우우우~ 하고 늑대를 흉내 내며 음흉한 눈길로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메데이아는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그 모습에 세 남자는 신이 난 듯했다. 메데이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이쁜 아가씨.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자자, 우리 방으로 가자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메데이아가 입을 열었다. “10초, 지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