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55화 남자는 무릎 꿇고 바들바들 떨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제,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무섭고 두려웠다. 여자는 그야말로 이 공간의 신이었다.
신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서 어김없이 피 분수가 일었고, 그녀의 눈과 마주치는 모든 자가 오줌을 지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너는 살려달라는 사람을 살려준 적이 있었나?”
메데이아는 이들에게 그 어떤 용서도 베풀지 않았다. 저들의 몸에는 이미 진한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들 중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개중 용기 있는 몇몇은 악을 쓰기도 했다.
“당신은 그리도 떳떳한가! 살면서 부정을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느냐 말이다!”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벌하는 거냐!”
그 말을 끝으로 둘의 목이 데굴데 굴 굴러떨어졌다. 두려움에 가득 찬 악다구니가 그들의 유언이었다.
메데이아는 이들을 논리로 설득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난 너희의 부정을 처단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메데이아에게 수작을 부리던, 오빠들이 즐겁게 해주겠다던 남자는 벽에 찰싹 달라붙어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그, 그럼 우리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내가 준 시간을 어겼잖아.”
“그, 그게 무슨!”
그딴 게 무슨 이유가 됩니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는 소리칠 수 없었다.
저 여자는 압도적인 힘으로 이곳을 지배하는 자였고, 감히 신에게 항거할 수는 없었다.
“사,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
메데이아는 그를 살려주지 않았다. 이곳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자를 베었다.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끔찍한 참극을 벌인 메데이아는 천천히 걸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언제까지 지켜보기만 할 거지, 가이아?”
메데이아가 앉아 있는 의자 건너편. 아무도 없던 그곳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요, 메데이아 공녀님.”
“용케 알아보았구나.”
“얼굴은 속일 수 있어도 기세는 속일 수 없지요. 이래 봬도 밤 고양이의 수장인걸요. 이런 게 가능한 사람조차 세상에 몇 없어요, 그중에서 공녀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저를 불러내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기는 했지만… 진짜로 해버리실 줄이야.”
“진짜로 하라고 알려준 거 아니었나?”
“그래도 이곳은 제국 수도의 유명유흥가인 첸타 거리 한복판인걸요.”
모나크 제국 수도 한복판이다. 살인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그 어떤 범법행위도 용납되지 않는 곳.
더군다나 첸타거리는 경비대 혹은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순찰을 도는 곳이기도 했다. 메데이아는 이곳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
“밖에 분명 순찰하는 기사들이 있을 텐데, 아무런 기척도 못 느낀 것 같아요.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뵈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지신 것 같은데요?”
가이아가 메데이아를 만난 곳은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였다. 가이아는 대륙 최고의 정보 단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그녀는 베일에 둘러싸인 ‘옛 무인들의 성지’를 직접 찾아갔었다. 당시 그녀에게는 이렇다 할 정보원이 없어서 직접 몸으로 뛰었어야 했다.
그때 가이아는 죽을 뻔했었고, 그곳에서 가이아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메데이아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때의 공녀님도 황홀했지만 오늘은 더 아름다우시네요.
가이아는 결국 대륙 최고의 정보 단체인 ‘밤 고양이’를 운영하는 단체장이 되었고, 메데이아가 찾은 이곳은 ‘밤 고양이’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가이아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정말 깔끔한 솜씨예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메데이아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하나 이상의 생명이 사라졌다.
“죽어도 싼 놈들이었으니 죄책감은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손가락으로 목이 없는 시체를 가리켰다. “저놈은 어젯밤 한 아이를…
거기까지 말한 가이아는 힐끗 눈치를 살피고서 피식 웃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죄책감 같은 건 없는 같으시네요. 맥주, 드릴까요?”
“보다 은밀한 곳에서, 보다 깊이 있는 대접을 받고 싶은데.”
“물론이지요.”
둘의 대화는 평온해 보였다. 이 잔인한 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화였다. “이곳은 제가 깔끔히 정리하죠. 환영합니다, 밤 고양이, 가이아입니다.”
그러자 메데이아가 앉은 의자가 제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옛 마도 문명의 산물인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였다.
둘은 지하로 향했고, 그곳에는 또다른 지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크네. 용케도 안 걸렸어.”
“반쯤은 일부러 눈감아주고 계시죠, 셀리나 대신님께서.”
“그런가?”
“네, 저희는 그분께도 필요한 집단이니까요. 필요악이랄까요.”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고양이 가면을 쓴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맡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 데, 그들은 가이아와 메데이아를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여기가 제 집무실입니다.”
“단출하네.”
낡은 책상과 책이 많은 책장. 좋은 향이 나는 향초.
폭신한 붉은 카펫이 전부인 작은 방이었다.
검은색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한 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메데이아와 가이아가 마주 보고 앉았다.
꼬리를 바짝 세운 검은 고양이가 둘 사이를 살랑살랑 걸어 다녔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셔서 저를 부르셨나요?”
가이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메데이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메데이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중요한 정보는 곧 무한한 가치를 가진 자산이었고, 고양이가 오가는 이 테이블은 제국에서 가장 비싼 테이블이 될 것이었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메데이아의 말을 전부 듣고 난 가이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비밀 단체 열풍. 흑마법사 단체 데스, 저도 존재 자체는 인지하고 있어요. 그러나 메데이아 공녀께서 크게 관심을 가질 정도의 규모는 아닌데요?”
“내 동생이 관심을 갖고 있거든.”
“동생이라면…….”
메데이아에게는 많은 동생이 있다. 그렇지만 메데이아가 크게 관심을 가지는 동생은 한 명뿐이었다. “철혈의 비올라 공녀를 뜻하는 거겠죠?”
“그래, 그 아이가 열풍과 데스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야.”
“이유가 뭘까요?”
“글쎄.”
메데이아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비올라에게 있어서 메데이아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메데이아가 모두에게 그런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 동생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이라는 거야.”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방해물은 치워야지.”
“공녀님께서요? 왜요?”
“내가 언니잖아.”
가이아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메데이아 공녀가 진심으로 비올라 공녀를 밀어주려는 것 같은데.”
이건 단순한 의뢰가 아니었다. 메데이아가 비올라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메데이아 공녀님이 비올라 공녀를 완벽히 인정했다는 뜻이야.’
고작 열세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를 말이다. ‘메데이아 공녀님은 누구보다 가주에 대한 열망이 컸던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깨끗이 포기하고 비올라를 선택했다는 것에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다. 정보 단체 수장으로서 엄청난 것을 얻은 느낌이었다.
가이아가 한 서류에 서명하며 말했다.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무엇을?”
“비올라 공녀를 적으로 돌리면, 메데이아 공녀님도 적이 되는 건가요?”
메데이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적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혹시 저희 ‘밤 고양이가 비올라 공녀에게 해를 끼친다면요?”
순간, 가이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날카로운 살기가 모공 전체를 따끔따끔하게 찌른 느낌이었다. 가이아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밤 고양이’에서 일하던, 단체장과 메데이아가 등장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던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움찔했다. 그 와중에도 테이블 위를 걸어 다니며 하품하던 고양이는 살기의 영향을 딱히 받지 않았다. 메데이아가 그것마저도 정밀하게 조정했기 때문이다.
“이걸로 내 진심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해.”
메데이아는 분명 가이아를 살려준 적이 있었고, 가이아와 사적인 친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했다. “내가 너희를 무너뜨리지 않는 건, 나와 비올라에게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야.”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사인을 끝낸 가이아가 메데이아에게 서류를 건넸다. “저희 밤 고양이는 메데이아 공녀님과 비올라 공녀님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거예요.”
그날부터 가이아는 ‘열풍’과 ‘데스’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 비올라가 모르는 사이, 또 다른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셈이었다.
“아참. 그런데 그 사실 알고 계세요?”
“어떤?”
“소폭풍 제르미 공자가 이곳에 있어요.”
그녀는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송받았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메데이아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반려검 툰드라와 만났다고 하네요.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고자 둘이 연무장으로 향했네요. 결과는….”
“툰드라의 압승이겠지.”
“맞아요. 툰드라가 압승했어요. 그 간 툰드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죠?”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10년을 버텼다고 들었어.”
가이아가 입을 쩍 벌렸다. 그녀 역시도 옛 무인들의 성지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데 10년이라니. 헤론과 메데이아조차 5년밖에 버티지 못한 곳인데.
“최신 정보가 또 들어왔네요. 제르미 공자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툰드라에게 대패한 제르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툰드라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 “툰드라에게 비결을 물어보았고, 툰드라는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10년을 버텼다고 대답했네요.”
“제르미 공자의 눈에 총기가 돌기 시작했대요. 그리고 그도 옛 무인들의 성지로 향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약속?”
“본인도 최소 10년을 버텨보겠다.
고 하네요. 비올라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 정도 성의는 보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과연 가이아는 밤 고양이의 수장다웠다. “브란디아의 막내딸, 셀빈 영애도 그곳으로 향했어요. 동기는 비올라 언니처럼 되는 것. 덕분에 브란디아공작가는 지금 난리가 났고요.”
가이아가 씨익 웃었다. “폭풍 요새와 브란디아의 후계자들이 비올라를 위하여 옛 무인들의 성지로 향했어요. 세상이 비올라 공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제 착각인가요?”
*** 같은 시각, 비올라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
셀리나와의 만남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마차 안이었다.
오늘따라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왜 이렇게 춥지?”
“셀리나 대신과의 대화로 인하여 진이 많이 소진된 모양입니다. 담요를 덮어드리겠습니다.
제논이 자리에서 일어서 비올라의 몸에 작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 비올라는 제논의 에스코트를 받아 방에 들어섰다.
‘음?’
방 안에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저만치 앞, 테이블에 무엇인가가 놓여 있었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비가 왜….’
피투성이가 된 나비였다. 나비는 캣맘 힉슨이 애정을 듬뿍줘가면서 키웠던 고양이였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나비를 마주하기 두려웠다.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고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쪽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