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달달, 치마 밑 다리가 떨렸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62화
제논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마법 점화기가 들려있었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불이 생성되는 장치였다.
‘이 정도로는 반응이 없다 이거지..
700년을 살아온 하모나다.
수십 년 전 있었던 정상전쟁에서도 ‘엘프들의 숲’은 중립을 유지하였고, 그 와중에 수많은 일을 겪었다.
이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듯했다. “붙여.”
셰일란이 초검을 운용하여 불쏘시개를 만들었다. 낙엽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초반에 잡지 못하면, 숲 전체가 타버릴 거야.’
엘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숲이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의 거주지가 집이듯, 엘프들의 거주지는 숲이니까.
‘반응이 있을 텐데.”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어찌나 세기가 센지 바람은 옮겨붙기 시작한 불을 삽시간에 꺼버렸다.
“나는 정령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령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렇지만 하모나를 이끌어 내려면이 방법밖에 없었다. “제논, 다시 불을 붙여. 스승님도.”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툰드라, 정령을 벨 수 있지?”
“원하신다면.”
툰드라는 검에 마나를 덧씌웠다. 툰드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아얏!’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정령들은 툰드라의 검에 베여 정령계로 역소환되었다.
가이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쳤어. 다들 미쳤다고.’
하모나는 ‘엘프들의 숲’을 다스리는 절대자다. 평소 온화하다고 해서 이런 짓을 그냥 넘어가 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했다고!’ 괜히 그녀가 700년간 인간들로부터 이 숲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러다 정령왕이라도 나타나면?
바람의 정령왕은 흉포한 바람을 일으켜 이곳을 삽시간에 죽음의 땅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가이아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진짜 전쟁이라도 할 셈인가.”
지금 비올라 측 전력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엘프들의 숲’ 전체와 싸울 수는 없었다. 이곳의 모든 것은 엘프에게 친화적이다.
하다못해 바닥을 기어 다니는 곤충들마저도 그랬다.
‘이곳에는 수천의 엘프 전사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요!’
가이아는 진지하게 도망을 고민했다. “혹여 나와의 전쟁을 원하신다면.”
비올라는 두려운 속마음을 감추고 씨익 웃었다.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취했다. 마치 하모나를 도발하듯 치맛단을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단.”
비올라는 퐁퐁이를 소환하여 물의 장막을 불러냈다. 엘프 전사들의 뛰어난 궁술로도 이 물의 장막을 파괴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흑경 힉슨과 용병왕 카이저, 아기사슴 용병대, 그리고 제 아버지까지 감당할 자신이 있으시다면요.”
힉슨 역시 나비에게 큰일이 벌어진 것을 알았고 이미 이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힉슨과 뜻이 맞아 좋은 친구가 된 카이저도 마찬가지다.
카이저는 짧은 시간 동안 나비에게 큰 정을 주었고 나비와의 교감에 흠뻑 빠져있던 차였다.
지금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엘프들의 숲’을 향해 뛰어오는 중이다.
그의 친구들인 ‘아기 사슴 용병대’도 함께였다. 가이아도 이러한 사실들까지는 알았다.
그런데 헤론 경? 그분이 온다고? 말도 안 돼!’
그때까지만 해도 가이아는 비올라의 허장성세라고 생각했다.
* * *
헤론은 어지간해서는 겨울성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겨울성을 떠나는 경우는 보통 ‘눈이 부는 곳’으로 할 때였다. 그는 인류가 자랑하는 최강의 방패였고, ‘눈이 부는 곳을 막아내는 최전선의 무인이다. 그런데 그가 겨울성을 벗어나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덕분에 모나크 제국의 정보원들은 굉장히 바빠졌다.
검제 넬라크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헤론이? 남하하고 있다고?”
“예, 목적지는 엘프들의 숲이랍니다.”
“통행 허가는?”
“아직 내주지 않았습니다만…….”
헤론은 절대적인 무인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위험천만한 공성병기. 그래서 그가 움직일 때는 반드시 황제 혹은 셀리나의 통행 허가권이 필요하다. “헤론처럼 원리원칙에 철두철미한 자가 절차를 무시하고 남하하고 있다라. 이건 선전포고인가?”
헤론만 남하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흑경 힉슨과 용병왕 카이저가 이끄는 아기 사슴 용병대까지 함께였다.
“이건 선전포고라고 봐도 무방한 것인가?”
저 정도면 검제조차도 긴장해야만 하는 전력이다. 즉시 황실기사단을 소집하려던 찰나, 셀리나가 말했다.
“아니에요.”
“무슨 뜻이오?”
“비첸이 열풍에 당했어요. 겨울성의 2공자와 이사벨라 공작 부인까지 연관이 있는 모양이에요.”
셀리나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저들이 ‘엘프들의 숲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전쟁을 위해 남하하는 것이 아니에요.”
“확실하오?”
“폐하를 향한 제 사랑을 걸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런 건 함부로 걸지 말아주시오.
소중한 거란 말이오.”
넬라크는 이 와중에도 입술을 삐죽였다. 오로지 셀리나 앞에서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힉슨 경은 어른으로서 엘프들의 숲을 향하고 있어요.”
“……….”
“카이저 경은 친구로서.”
“……….”
“헤론 경은 아버지로서 그곳으로 가고 있어요.”
셀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모두가 무섭지만, 저는 아버지가 제일 무섭네요.”
처음으로 비올라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생각보다 하모나는 비올라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숲에 불이 막 붙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이미 엘바토 영감의 집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신비로운 백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인상을 잔뜩 찡그린채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영감탱이.”
상당히 괴상한 현장이었다. 젊은 여인이 노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모나는 인간으로 치면 이십 대후반의 모습을 700년째 유지 중이었으니까.
“700살 할망구가 자꾸 나더러 영감탱이래.”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나는 전부터 할망구의 왕관이 탐났다고.”
“정말로 그랬다면 나는 영감탱이의 목을 쳤겠지.”
“온화한 숲의 주인이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 쓰냐?”
“온화한 숲의 주인에게 목이 잘리는 것도 꽤 훌륭한 최후일 거야, 그렇지?”
하모나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뾰족하게 솟은 귀가 파르르 떨렸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진짜 큰불이 날 것만 같았다.
바람의 정령들을 통해 들으니 비올라의 말도 진짜였다.
하모나도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힉슨에 카이저에 헤론까지.”
너무 큰 전력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특히 하모나는 헤론이 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25년 전 그날이 생각나네.”
“25년 전?”
“왕관을 빼앗길 뻔했어. 정확히는 빼앗겼지.”
“뭔 소리야? 그럼 머리 위에 그건 장식?”
“아니.”
하모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앞에서 금기어기는 한데.”
“라엘을 말하는 거냐?”
“그래, 그녀. 헤론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유일한 여인, 그 여자가 변덕을 부렸거든.”
“변덕을 부렸다?”
“처음에는 내 왕관을 가지고 싶었다나 봐.”
그래서 헤론이 움직였다. “그는 내 목을 잘라서라도 왕관을 가져다줄 생각이었어.”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화는 나지 않았다.
너무 압도적인 무력 앞에 그녀는 분노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약 670년 생애 가운데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다.”
만약 라엘이 끝까지 왕관을 탐냈다. 면.
그랬다면 하모나는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모나는 바깥에 불이 크게 신경쓰였다.
“아니, 근데 이러다 진짜 불이 나겠어.”
그렇다고 엘프 군대를 동원하여 비올라를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엘바토가 따뜻한 녹차를 후르릅 마셨다.
“그럼 대화를 하면 되잖아.”
“이 영감탱이가?”
하모나는 에바토에게 속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며! 빌어먹을 영감탱이!”
“그랬지.”
“그러면 철혈 공녀가 스스로 불을 끄고 아주 솔깃한 제안을 해온다며?
분명히 그럴 거라며!”
“이런. 내 예상이 틀렸군.”
“넌 내가 반드시 죽일 거야.”
“네가 안 죽여도 난 곧 죽어. 인간의 삶은 짧잖아. 껄껄.”
하모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래서 인간들이 싫어. 이번 일이마무리되면 반드시 네 목을 쳐버릴 거야.”
하모나는 씩씩대며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엘바토는 가볍게 웃었다. ‘고맙구나, 하모나.’
700년을 살아온 하모나다. 이까짓 속임수에 속아 넘어갈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모나는 속아주었다. 엘바토 자신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엘바토가 비올라를 조금만 지켜봐달라고 부탁했고, 하모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겉으로는 저리 툴툴대기는 해도 말이다.
엘바토는 속으로 생각했다.
‘운명을 바꾸고 싶다고 했지, 비올라 공녀.’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값을 치러야 한다. 어쩌면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공녀는 그 준비가 되어 있을까?’
*** “그만.”
하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비올라도 깜짝 놀랐다. 그녀가 엘바토의 집에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존재가 느껴지지 않아.’
700년 동안 엘프들의 숲을 다스려온 그녀의 몸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면 생명을 가진 생명체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자연,
스스로 존재하는 경건함을 마주하는 듯했다.
그녀의 존재에는 700년의 세월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하모나의 머리 위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월계관이 보였다.
“퐁퐁이. 불 꺼.”
“나는, 위대한, 퐁, 하! 비올라의 계약 정령이시지!”
퐁퐁이는 열심히 날아다니며(?) 불을 껐다. 하모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비올라에게서 어마어마한 정령친화력을 느꼈다.
‘엘프보다 더한 정령 친화력을 가지고 있잖아?’
엘바토가 가르쳐 줬었다. 비올라는 아마도 굉장히 소중한 것을 대가로 내놓을 거라고.
그것은 어쩌면 네 월계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비올라가 물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계셨던 거죠?”
“당신이 이 숲에 발을 디뎠을 그 시점부터요.”
하모나가 백금발을 쓸어넘긴 뒤 말을 이었다. “상황이 유쾌하지 않으니 본론부터 들어가죠. 저는 절대로 왕관을 그대에게 내어주지 않을 거예요.”
“보통의 경우라면 그랬겠지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확신해요. 월계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왕께 드릴게요.”
하모나는 잠자코 비올라를 살펴보았다.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것 중 월계관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어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하모나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채 비올라의 속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제시할지 맞춰볼까요?”
그녀의 눈이 비올라의 오른쪽 약지에 닿아 있었다. “생명수가 깃든 신비로운 꽃밭이 펼쳐져 있군요. 내 왕관에 대한 값으로, 무한히 생성되는 당신 세계의 꽃밭을 제시하려는 것 아닌가요?”
과연 하모나였다. 비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반지는 저의 소중한 사람이 저를 위하여 만들어준 특별한 선물이에요. 저는 이 반지를 받고 무척 기뻤어요. 그리고 제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주었죠.”
이 반지가 없었다면 퐁퐁이의 힘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끌어내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모나는 반지에서 풍부한 ‘아레나를 느꼈다.
엘프로서 정말 탐나는 반지였다.
왕관을 주고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
그러나 하모나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겼다. “그러나 그것이 제게는 그리 가치 있는 물건은 아닌 것 같네요.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더 이상은 그대의 적대 행위를 눈감아주지 않을 겁니다.”
하모나는 알지 못했다. 700년의 세월이 쌓아 올린 연륜으로도 독자를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