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왕 웨일의 몸에서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64화
물의 정령계 전체에 수증기가 피어 올랐다.
“잊지 말거라. 너는 나의 아이란다.”
정령들은 인간과 달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웨일은 태어나는 모든 정령을 사랑했다. 불길한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켈-베론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태어나던 그때부터 나는 너를 보았단다.”
“처음부터요?”
“그래, 처음부터. 그때의 너는 사랑스러웠어.”
퐁퐁이는 켈-베론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던 그때 이렇게 외쳤다.
‘나는 아주아주 위대하고 강력하고 엄청 멋있는 정령왕이 될 거야.’
웨일은 그때를 떠올리고서는 가볍게 웃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정령왕님의 기운이 세상에 가득해요.”
“켈-베론, 너는 오늘로 인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퐁퐁이가 자신을 포기하고 비올라를 선택한 것처럼.
정령들은 스스로 소멸을 택하거나 정령계의 법칙을 위배하지만 않으면 죽을 일이 없다.
웨일은 정령왕의 권능을 이용하여 퐁퐁이에게만 목소리를 보냈다.
– 정령계에는 수많은 ‘켈’이 있어. 켈은 정령후라고도 불린다. 정령왕의 후보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위하여 제 소멸을 감당할 수 있는 정령만이 진정한 왕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지. 분명 너는 훌륭한 정령왕이 될 수 있을 거야.
웨일의 몸에서 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령계 전체가 그에 반응하여 따뜻해졌다.
“왜 웨일 님의 기운이 약해지고 있어요?”
웨일의 몸에서 피어오른 수증기가 퐁퐁이의 몸을 덮었다. 퐁퐁이는 그 기운이 따뜻하고 포근하다고 느꼈으나, 마음 한편은 불길했다.
“뭐 하시는 거냐니까요?”
-나 또한 같은 방식으로 왕이 되었단다. 그게 정령계의 시간으로 300년 전이었다.
선대 정령왕이었던 룬이 똑같은 방법으로 웨일에게 정령왕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부디 그 따뜻한 마음씨를 잊지 말렴. 퐁퐁이는 본능적으로 정령왕의 권능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퐁퐁이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보냈다.
-웨일 님은 죽는 거예요? -나는 오래전 왕의 자격을 잃었어. 훌륭한 자질을 가진 ‘켈’이 태어나기를 기다려 왔고, 오늘 마침내 위대한 ‘켈’을 만났지. -웨일 님은 좋은 정령이에요.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못했단다. 나는 계약자를 배신한 정령왕이거든. 수많은 정보가 퐁퐁이에게 전해졌다.
환청과 환상이 보이고, 그것은 그대로 퐁퐁이의 경험과 지식이 되었다.
-‘물의 마술사’가 누구예요? 환상 속 웨일은 울고 있었다. 계약자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자의 얼굴은 흐릿하게만 보였다.
웨일이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인지,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물의 마술사’라고 불렸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전에 비올라가 물의 마술사에 대하여 얘기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나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계약자이자 친구였어. 그녀는 나의 힘을 이용하여….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웨일은 존재는 정령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웨일 님.’
퐁퐁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는 웨일이 전해준 정령력을 받아 들여 많이 성숙해졌다. ‘안녕히 가세요.’
웨일은 자신의 소멸을 조건으로 내 걸고 법칙을 어겼다. 그리고 다음 정령왕으로 퐁퐁이를 선택했다. 정령문이 활짝 열렸다.
‘웨일 님이 선택하신 길을 후회하시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퐁퐁이는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른은 어른답게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음먹고, 의젓하기로 했다.
‘저는 이제 어른이니까요.
정령문을 향해 움직였다.
빛이 밝아왔다.
“정령왕, 위대한, 퐁! 하! 등, 장………. 후에에에엥!”
비올라를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퐁퐁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 속에는 기적의 생명수 아레나가 잔뜩 깃들어 있었다. 엘프들의 숲 ‘카레나’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엘프들의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이 나무 밖으로 뛰쳐나왔다.
“달콤한 비야.”
“이 비는 뭐지?”
어떤 곳에는 물웅덩이가 생겼다. 몇몇 아이는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저거 봐!”
“중앙수가 살아나고 있어!”
700년 전, 하모나를 낳았던 중앙수(中央樹)가 다시금 푸른 잎을 피워 내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숲 ‘카레나’에 기적이 벌어졌다.
물이 말랐던 계곡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물고기가 모여들었다.
새와 네발 달린 짐승들.
그리고 벌레들까지 모두 나와 아레나의 기운에 흠뻑 취했다. 하모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봄이 도래하여 새로운 꽃을 피우리라.”
하모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올라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가이 아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누가 말한 거지?’
그런데 그때. 비올라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그때 한 아이가 있어 슬피 울며 기적을 노래하니.”
본래 소설 속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있어 슬피 울며 기적을 노래하다.」
‘하니’와 ‘하나의 차이였으나 그 뜻은 명확하게 달랐다. 하모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비올라의 말에 집중했다.
‘저 다음은…….’
「겨울이 찾아올 새에 깊은 흑암이 드리워.」
“겨울을 몰고 올 흑암의 권세가 지극히 두려워 떠나갈 새.”
하모나의 뾰족한 귀가 더욱 바짝 세워졌다. 700년 전,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운명의 계시가 바뀌었다.
700년 동안 이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카레나의 모든 잎이 땅에 떨어져 썩고.」
“여왕의 어머니가 다시금 꽃을 소생하며.”
같은 시각. 카레나의 중앙수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월계관도 썩어 없어지나.」
“기적의 권능이 여왕의 왕관에 임하니.”
비올라의 말은 마치 신언(神言)과도 같았다. 하모나의 월계관에서 황금빛 광채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 빛을 발견한 엘프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하모나는 왕관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충만한 생명의 기운에 저도 모르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녀 역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봄이 도래하여 새로운 꽃을 피우리라.”
“언젠가 봄이 도래하여 새로운 꽃을 피우리라.”
하모나와 비올라가 동시에 말했다. 하모나의 귀에만 들렸던 미지의 음성이, 다시 한번 비올라와 하모나의 입을 통해 재현되었다.
비올라가 눈을 떴다.
음?’
비올라는 자신이 방금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간지러웠고 무엇인가 말을 내뱉었다는 기억은 있으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영 이상했다. 다들 왜….’
엘프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건 하모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뭐 한 거야?’
하모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서 비올라에게 왕관을 바쳤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공손하여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무릎을 꿇은 사람들은 비단 엘프들만이 아니었다. ‘아니, 너네는 왜 또 무릎 꿇는데?’
제논과 가이아, 셰일란도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엘프들만큼의 경이로움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왠지 분위기상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공녀님은 오늘도 빛나시는군요.
제논은 기뻤고,
‘엘프들이 기묘한 힘을 느낀 것이 분명해. 일단은 저들을 따라 하면서 정보를 얻어보자.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지?’
가이아는 비올라를 훔쳐보기 바빴으며, ‘역시 내 제자님이다. 셰일란은 별 생각 없었지만 그냥 무릎 꿇었다.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은 툰드라가 유일했다.
오직 툰드라만이 비올라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근데 너만 무릎 안 꿇으니까 뭔가 튀는데…….’
저건 저것 나름대로 모양새가 영이상했다. 다만 비올라는 벌써 빙의 6년 차였고 이 정도의 역경(?)으로 포커페이스를 잃지는 않았다. 비올라가 하모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약속대로 왕관은 제가 받아갈게요.”
“당신은 혹시 신이신가요?”
비올라는 하마터면 포커페이스를 잃을 뻔했다. ‘신?’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관에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관이 있고 신성력이 있으니 신이라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작중에 서술된 적은 없었다.
“700년 전, 저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어요. 저는 그것이 신이 제게 내린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당신의 선포와 함께 저와 카레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제 선포요? 제가 선포를 했나요?
‘아, 내가 선포를 했구나.’
그렇구나. ‘뭔가 바뀌긴 했네.’
숲에서 활력과 생명력이 느껴졌다. 하모나에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듯했다.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했다.
“신이 내린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분이라면, 역시 신이시겠지요.”
“저는 신이 아니에요. 그냥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책 속에 들어왔다. ‘말하자면 작가가 신이겠네.”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설정하고 시놉시스에 따라 결말을 정해놨으니까. 등장인물이 된 비올라는 그 결말을 바꾸기로 마음먹었고,
“그리고 쓰는 것도 좋아하기로 했어요.”
어느덧 엘바토 영감이 거대 버섯집의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엘바토가 종려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네 운명을 극복한 것이냐?”
비올라의 손에는 월계관이 들려 있었다. 이것만으로 운명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비올라도 답을 알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예요.”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답은 없었다.
“제가 쓰는 책의 결말에, 내 사람의 죽음은 없어요.”
툰드라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비올라에게는 비올라의 방식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삶에 동행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니까 비올라의 결말에서, 비올라의 사람이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
그의 눈이 아주 잠시 황금색으로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한편, 엘바토는 인상을 한차례 찌푸리고서 몸을 획! 돌렸다. 거대 버섯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너라. 중요한 얘기가 있다.
비올라. 너만 들어오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