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65화 제논은 자연스레 비올라의 뒤를 따랐다.
엘바토 영감의 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저는 집사니까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함께해야 하니까요. 그것이 집사의 본분이지요. “제논, 혼자 갈게.”
알겠습니다.” 제논은 약간 멍한 눈으로 비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스승님도 그냥 쉬어.”
“제자님은 작고 소중한데요.”
“그 말이 왜 여기서 나와?”
“끄응.”
셰일란도 포기했다. 비올라는 제자님이면서 고용주이기도 하니까.
툰드라의 걱정스런 눈빛에 비올라가 물었다.
“툰드라, 너는 나 믿지?”
“믿어요. 그렇지만 제가 필요할 거예요.”
“제가 필요할 거예요.”
“필요하면 부를게.”
툰드라도 비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가이아는 황당해했다. ‘왜 저렇게 안달들이 나 있어?”
어쨌든 비올라는 혼자서 엘바토 영감의 집으로 들어갔다. 비첸은 커다란 잎사귀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비첸.”
황급히 비첸에게 달려가 심장 부근에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다행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렇지만 맥동이 너무 약했다. ‘호흡도 너무 약해.’
엘바토가 말했다. “숨만 쉬는 송장이야.”
“살릴 수 있죠?”
“살리려고 했지. 내 모든 신성력을 쏟아부어서.”
엘바토는 비올라가 ‘월계관을 가져오기 이전에 이미 비첸을 살리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실패였다. 엘바토는 이러한 경험을 이미 한번 해본 적이 있었다.
“네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다. 나는 물의 마술사라엘을 살리지 못했지. 라엘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신의 뜻을 품고 있었어.”
“신의 뜻이요?”
“한낱 인간인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비올라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가 직접 명시했었다.
「오염된 인간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엘바토의 힘만으로는 비첸을 살리지 못했다. 저 ‘오염’에는 신의 뜻이 담겨 있었으니까.
‘신의 뜻은 곧 작가의 설정이다.
〈벨라투의 그림자)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녀가 숨을 거두던 날. 라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외로운 내 사람.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 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라엘은 이미 죽었다. 작가가 직접 죽었다고 설정했으니, 이 세계의 신관이 아무리 노력해도 살릴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나는 기적을 꿈꿨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감님은 지금도 기적을 꿈꾸시나요?”
엘바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오래전 기억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의 꿈은 오래전에 저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더구나.”
기적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져오라고 했다. 그걸.”
엘바토의 시선이 비올라의 손을 향했다. 비올라의 손에는 찬란히 빛나는 월계관이 들려 있었다.
생명과 기적의 권능을 담은 하모나의 왕관,
“이게 있으면 비첸을 살릴 수 있을까요?”
“확실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시도 해 볼 가치는 있겠지. 기적의 권능이 담긴 왕관이니까.”
엘바토는 신관이었다. 신관은 신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이 아이는 살아날 수 없어. 그게 내가 이 아이를 보자마자 읽어냈던 신의 뜻이야.”
「오염된 인간은 되살아날 수 없다.」
엘바토는 왕관을 받아 든 뒤 비첸앞에 섰다. 고해성사하듯 입을 열었다.
비올라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 말은 엘바토 스스로에게 하는 혼잣말이기도 했다.
“내 힘으로는 신의 뜻에 온전히 거역할 수 없다.”
엘바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엘이 죽은 이후로 엘바토는 두려웠다.
신의 뜻이라면, 나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일까.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나는 살려낼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신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많이 두려웠다.”
또 ‘신의 뜻’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내가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누군가의 죽음을 새겨넣었을까 봐.
“너무 두려워서 도망쳤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는 한 아이가 있구나.”
그 아이는 작은 거인이었다. ‘맹랑하고 작은 계집애’는 자신의 운명에 저항했고, 카레나와 하모나의 운명까지 바꾸어 버렸다. 엘프들이 말하는 ‘신언’을 스스로 읊기까지 했다.
‘너를 만난 것 또한 신의 뜻이겠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월계관 속에 담긴 기적의 권능을 끌어내려 노력해 보았다.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게는 운명을 바꿀 힘이 없다. 그러니 나 혼자서는 이 아이를 죽었다 깨어나도 살리지 못해.”
엘바토의 감은 두 눈 사이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월계관을 손에 쥐었으나 기적을 어떻게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살리고 싶다.’
모든 사람을 살리고 싶었으나 살리지 못해 도망친 엘바토다. 누군가가 죽는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커다란 두려움이 엘바토의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다.
‘나는 살릴 수 없어.’
살리고 싶다. ‘살릴 수 없어.
살려야 한다.
내게는 힘이 없다.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그의 뜻과 신의 뜻이 다르니 순종할 수밖에. 오늘도 난 도망치는 수밖에.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감님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이벤타가 눈을 떴다. 작은 거인이 보였다.
“우리는 운명을 극복할 수 있어요.”
이제 이 세계는 작가의 세계가 아니라 비올라의 세계니까. “저와 늘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툰드라.”
툰드라는 이미 이 소설 속에서 기적을 이루어냈다. 헤론과 메데이아조차 5년밖에 버티지 못했던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10년을 버텼다.
「속성 1: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자.」
툰드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자였다. 작가가 설정한 세계의 불가능을, 비올라의 세계의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어쩌면 툰드라는 자신의 역할을 이미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여기 들어오기 직전, 툰드라가 말했잖아요.”
툰드라가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필요할 거예요.”
비올라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필요하면 부를게.”
비올라가 문 쪽을 향해 걸었다. 툰드라가 필요했다.
툰드라는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반려견처럼 하염없이 거대 버섯 집의 문만을 바라보았다.
가이아가 조심스레 툰드라에게 다가갔다.
“반려견…… 아니 반려검 씨.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툰드라는 가이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비올라 공녀가 정말로 당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해?”
또 끄덕였다. “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툰드라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있었다. 가이아로서는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녀는 삶의 대부분을 정보에 의지해 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었다. ‘옛날로 돌아간 것 같군.’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발로 뛰며 공부하던 그때. 지금보다 실력은 없었지만 열정은 넘쳤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비올라 공녀가 갑자기 툰드라만 따로 부를 이유는 전혀 없어.”
그게 밤 고양이의 수장 가이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평소의 가이아라면 그렇게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묘했다. ‘근데 왠지….’
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왠지 감이 왔다. 부를 것 같단 말이지?’
얼마 후, 정말로 거대 버섯 집의 문이 열렸다.
“툰드라, 네가 필요해.”
툰드라는 기다렸다는 듯 저벅저벅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아의 감이 맞았다.
덕분에 그녀는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새로운 경지에 한 발자국 다가선 느낌이다.
단순히 사실과 정보들을 취합하여 가공하는 것은 여태껏 해왔던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감마저 더해진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가이아는 직감했다.
‘나는 발전했다.
비올라 일행과 함께하니 새로운 것에 눈이 틔었다.
일류에서 초일류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감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분명히 발전했어.’
가이아는 저도 모르게 흐흐흐흐-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향상심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날카롭게 벼려진 감이 한 가지 사실을 예지했다.
‘비올라 공녀는 언젠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거야.’
그럴 야망과 욕심이 있으며 그를 뒷받침할 충분한 실력과 재능도 있다. 그녀는 비올라와 함께하기로 완벽히 결심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비올라와 함께 대륙을 호령하는 최고의 정보단체로 우뚝 솟을 그날을 꿈꾸기 시작했다.
* * *
엘바토는 못 미더운 눈으로 툰드라를 바라보았다.
“네 명성은 익히 들었다만…….”
반려검. 신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검술가.
“힉슨의 제자라지?”
“그렇습니다.”
툰드라가 비첸 앞에 섰다. “그렇지만 지금은 스승님의 제자가 아니라 공녀님의 반려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반려?”
엘바토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 ‘반려’라 함은 연인을 뜻하기 마련이었는데, 툰드라가 말하는 반려는 단순히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보다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늘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비올라 옆에서 비올라를 위해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비올라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비올라의 세계를 채워 가기로 결심했다.
“툰드라, 비첸을 살릴 수 있겠어?”
“잘 모르겠어요.”
툰드라는 본능적으로 월계관과 비첸을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툰드라가 검을 뽑아 들었다. 월계관을 비첸의 가슴팍 위에 올려놓았다.
툰드라의 기운에 반응이라도 하듯 월계관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의 명이라면.”
툰드라가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 뜻과 명을 온전히 받듭니다.”
월계관을 향해. 비첸의 심장을 향해 대검을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