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66화
툰드라를 둘러싼 시간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보인다.
어떻게 마나를 유도해야 하는지.
심장으로부터 뿜어진 마나가 온몸구석구석으로 전달되며 기억을 각성시켰다.
‘공녀님이 이미 길을 보여주셨어.’
「녹음이 곧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리라.」
아린의 비웃음은 비올라의 간절함이 되었다. 그 간절함이 툰드라를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툰드라는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공녀님의 간절함이 곧 나의 간절함이다.
비올라의 시선으로 비첸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비첸이 다시금 소생하는 꿈을 꾸었다.
‘살린다.
살려야 했다.
‘그게 공녀님이 원하는 세상이니까.’
월계관과 함께 비첸의 심장을 찔렀다. 월계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악~!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벤다.
무엇을?
‘모르겠어.’
그렇지만 베어야 한다. 무엇을 베는지 모르겠지만 베기로 했다.
비첸의 몸을 옭아매고 있는 강대한 쇠사슬이 보였다.
그 쇠사슬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으로 비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저 쇠사슬을 벤다.
저것을 끊어내야 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
무척이나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그것에 툰드라는 검을 내질렀다.
결국 툰드라는 그것을 끊어냈다.
‘ ‘해냈…… 다. ”
툰드라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 같은 본능적인 불길함도 밀려 들어왔다.
금기를 넘었어.’
그러고 보니 엘바토 영감이 ‘신의 뜻’을 여러 번 말했었다. ‘어쩌면 나는 신의 뜻을 거역했을지도 모르지.’
그건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툰드라는 어지러운 가운데 비올라를 보았다.
비올라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비올라의 눈이 붉게 충혈된 것이 보였다.
‘내가 진정 두려운 것은.’
금기를 넘고, 신의 뜻을 거역하고.
그래서 신의 분노가 임한다고 해도, 그런 것쯤은 두렵지 않았다. ‘공녀님이 슬퍼하는 거니까.’
가장 두려운 상황은 피했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엘바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적이…… 임하였다.”
그리고 툰드라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 *
헤론, 힉슨, 카이저 중 ‘카레나’에 에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헤론이었다.
우거진 나무 넝쿨이 입구를 촘촘히 막아선 상태.
헤론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길을 열어라.”
나무 넝쿨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경고는 단 한 번이었다. 엘프들이 황급히 뛰며 소식을 전달했다.
“수, 숲이 사라지고 있다.”
“하, 하모나께 말씀드려야 해.”
나무 넝쿨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었다. 엘프들이 보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본대로 하모나에게 말했다. “과, 광인이 나타나 걸어오고 있어요.”
“광인의 손에는 차가운 냉기를 내뿜는 검이 들려 있어요.”
하모나는 처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검을 들고 오는데 입구가 열렸단 말인가?”
“그, 그게 아니라……….”
입구가 열리는 게 아니었다. 나무 넝쿨 자체가 소멸하는 중이었다.
하모나는 순간, 거대한 불길함을 느꼈다.
‘이 느낌은 마치…….’
하모나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녀의 700년 생애 중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설마.’
오만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 보던 그. 왕관의 힘으로도 카레나의 가호로도 막을 수 없었던 재해가 기억났다.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딸은 어디에 있나?”
헤론이었다. 하모나는 저도 모르게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모나의 왕관을 빼앗았던 유일한 인간.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무력감을 자아냈던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비, 비올라 공녀는……….”
헤론은 싸늘한 시선으로 하모나를 쳐다보았다. 하모나는 마치 이곳이 ‘눈이 부는곳’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눈이 부는 것은 아니었으나 눈이 부는 곳의 마물 군단이 엘프들의 숲에 강림한 것만 같은 기묘하고도 두려운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헤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눈이 부는 곳과 닮아 있었다.
“에, 에바토 영감의 거대 버섯 집에 있어요.”
그때 헤론 앞으로 나선 사람은 제 논이었다. “공작님, 오랜만에 뵙는 느낌인데요.”
“보고를 올려.”
제논은 유능한 집사답게 핵심부터 짚었다. “공녀님은 무사하십니다.”
그러자 카레나를 둘러싸고 있던 강대한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엘프들과 하모나는 그제야 숨을 깊게 내쉬며 호흡할 수 있었다.
일단 헤론을 진정시킨 제논은 상황을 요약하여 보고를 올렸다.
“……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헤론의 시선이 하모나에게 향했다. “운이 좋군.”
“무슨 말씀이시지요?”
“그 손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면 팔을 잃었을 것이다.”
하모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당황한 하모나를 위해, 제논이 설명을 해주었다.
“반지를 선물하신 분이 헤론 공작님이시거든요. 아까 공녀님이 말씀하신 거 기억하시죠?”
하모나는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비올라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내가 여왕께 제시한 것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고, 계속해서 생성되는 마거리트 꽃밭이에요. 제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 준 이 반지가 그대의 왕관보다 가치가 떨어 지나요?’ 하모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비올라 공녀가 말했던 소중 한 사람이….”
“네, 공작님이시지요.”
순간, 카레나에 훈풍이 불었다.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정령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눈이 부는 곳과도 같았던 헤론의 기세는 누그러지다 못해 부드러워졌다.
“비올라가 그렇게 말했나?”
“네,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 주었다고 했어요.”
“그렇군.”
헤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다. “엘바토의 집으로 안내하라.”
헤론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나서 하모나는 깊은숨을 토해냈다. 예전의 헤론도 괴물이었으나 지금의 헤론은 감히 괴물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정령술사도 아니면서.’
정령과 숲에 감응했다. 의지로 자연을 움직이는 수준에 도달했다.
헤론과 마주했을 때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자연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 이후부터 저랬다. 아주 오래전부터 방금 전까지 헤론은 폭풍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봄날의 훈풍 같구나.’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 *
힉슨과 카이저.
그리고 아기 사슴 용병대는 헤론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고맙다, 친구. 네 덕분에 길 안헤맸다.”
카이저는 엄청난 길치였고 힉슨이 아니었다면 엘프들의 숲에 이토록 빨리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장, 근데 이상한데?”
“엘프들의 숲은 신비로운 힘으로 보호받는 곳인데.”
마치 동굴의 입구가 생긴 것 같았다. 아주 커다란 입구가 보였다. 매끄러운 절단면이 보였다.
카이저가 고개를 갸웃했다.
“엥?”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한 거지? 친구, 넌 알아?”
힉슨의 눈이 깊어졌다. “알 것 같군.”
덩굴들이 모조리 잘려나가 있었다. 잘린 수준이 아니라 소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덩굴들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 경이로운 검술의 흔적.
그 흔적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냈다. “숲이 두려움에 질려 버린 느낌이야.”
“바보냐? 숲이 어떻게 두려움에 질려? 친구, 공부를 좀 해야겠어.”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어진 용병왕에게 듣고 싶은 충고는 아닌데.”
흑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을 이었다. “이 숲은 의지를 가진 숲이야. 분명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지금은 괜찮아진 듯하지만.”
“그래서? 어떤 미친놈인데?”
“딸에 미친 놈.”
힉슨이 걸음을 옮겼다. 카이저가 쿵쿵대며 뛰어왔다.
“가, 같이 가! 나 길 잃어!”
아기 사슴 용병대원들도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길이 이렇게 깨끗하게 나 있을 줄이야.”
“힉슨 경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숲이 두려움에 질려 스스로 길을 내어준 모양이야.”
마치 숲이 지름길을 내어준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가니 엘프들이 모여있었다. 힉슨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당신은 하모나?”
하모나는 힉슨을 바라보았다가 카이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아기 사슴 용병대도 발견했다. “모든 것이 정말이군요.”
힉슨과 카이저까지 이곳에 들어왔다. 비올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기 헤론이 왔다 갔지?”
“그랬어요.”
“목이 붙어 있는 걸 보면 비올라도 멀쩡한 모양이고.”
“비올라는 엘바토 영감의 집에 있어요.”
힉슨이 하모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힉슨의 눈으로 본 하모나는 지금 정상은 아니었다.
몸에 힘이 조금 풀려 있는 상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대충 짐작은 가네.”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비올라가 무사해서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하모나.”
“……그게 무슨?”
“비올라가 다쳤으면 아마.”
힉슨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나 하모나는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똑똑히 들었다. ‘카레나는 멸망했을 거야.’
그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재앙이 턱밑까지 다가왔다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비올라 공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죠?”
한편, 헤론은 제논의 안내를 받아 ‘거대 버섯 집’에 도착했다. 제논이 혹시 몰라 설명을 더했다.
“엘바토 영감은 비올라 공녀님 한 분만 안으로 들이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다른 일행들은 들어가지 못했었다. 이후 툰드라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엘바토는 원래 비올라만 집에 들인다고 했었다.
제논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헤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공작님께는 상관없는 얘기겠지만요.”
거대 버섯 집의 문이 소멸했다. 숲에 거대한 입구가 생긴 것처럼 집에도 입구가 생겼다.
엘바토의 지엄한(?) 명령이나 거대 버섯 집의 문 같은 것은 헤론의 발걸음을 단 1초도 멈추지 못했다.
헤론은 단숨에 엘바토의 집에 들어섰다.
그가 애타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비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