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69화 (169/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69화

카이저는 코를 후볐다.

“지가 뭐 황제쯤 된대?”

“황제라는데요.”

“어떤 미친놈이 황제를 사칭해?”

황제가 움직일 때는 보통 서신으로 먼저 그 행선지를 알리게 마련이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경우는 반란을 진압할 때뿐이다.

카이저는 성벽 위로 올라섰다.

태양 기사 중 한 명이 다시 외쳤다.

“문을 열라!”

“야, 네가 태양 기사냐?”

태양 기사는 은색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었고 투구 때문에 그의 얼굴이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세는 대단히 강렬했다. “아니, 근데 진짜 태양 기사 같은데.”

카이저가 고개를 갸웃하고서 성벽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폴짝 뛴 것치고는 굉장히 커다란 소리가 났다.

쿵!

먼지가 피어올랐다.

“진짜 황제라고?”

“말을 조심하라.”

태양 기사가 카이저에게 검을 겨눴다. “됐다. 내 직접 이야기하지.”

기사들이 길을 텄다. 백마를 탄 남자가 투구를 벗었다.

“오잉?”

카이저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진짜 황제네.”

“무엄하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하겠는가!”

카이저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고서 황제를 향해 물었다. “쟤 신참이냐?”

“그래.”

카이저는 팔짱을 끼고서 흥, 콧김을 내뿜었다. “야. 나는 넬라크랑 친구야. 나는 넬라크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고.”

품을 뒤적거렸다. “아, 이게 어디 있더라.”

커다란 속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잃어버렸네.”

“은성훈장을…… 분실했다?”

“그거 혹시 재발행도 되냐?”

넬라크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카이저는 나이를 먹어도 똑같았다.

“네놈이 진짜로 겨울성의 남문 수비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니.”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경어를 사용해 주면 좋겠는데.”

“행, 그럼 은성훈장을 주질 말든가.”

“잃어버렸잖나?”

“재발급해 주라.”

“왜 이러고 있는 거냐?”

“말했잖아. 여기가 마음에 들어. 내 친구도 있고.”

“친구?”

“비올라. 너도 알지?”

넬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리나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지. 어쨌든 친구로서의 인사는 여기까지다. 지금의 나는 황제로서 이 자리에 왔고 겨울성의 수비대장에게 문을 열라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저의 눈이 가늘어졌다. “중무장한 태양 기사들을 이끌고?

게다가 너도 중갑 싫어하잖아. 왜 그렇게 차려입었어?” 카이저가 아공간에서 거대한 도끼를 꺼내 들었다. 이 거대 도끼의 이름은 ‘카이저 액스’로서, 카이저의 결전 병기라고도 불리는 위험천만한 무기였다. 태양 기사단장 론이 검을 뽑았다.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무기를 뽑다니. 반역이냐?”

“에베베, 그럼 너도 반역이냐?”

론으로서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인간상이었다. “인간이 아니라 고릴라라더니 지능도 고릴라 수준인가 보구나.”

“은성훈장을 가진 자는 잘나신 폐하 앞에서 무기 꺼내도 되거든?”

“분명한 적의가 느껴질 때는 다른 얘기지.”

“아, 생각났다. 너 옛날에 나한테 두드려 맞은 놈 아니냐?”

넬라크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그리고 오른손으로 검을 뽑았다. 스릉- 맑은 검명이 들려왔다.

넬라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이저, 순순히 길을 열지는 않겠다는 뜻이냐?”

“아무래도 황제 폐하의 의도가 영불손한 것 같아서.”

“말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옛정을 생각하여 마지막으로 권고하겠다.

길을 열어.”

“겨울성 남문의 수비대장은, 중무장한 기사들을 성안으로 못 들인다.”

“너 혼자서는 막지 못할 텐데.”

“시간은 끌 수 있겠지.”

카이저는 힐끗 뒤를 쳐다보았다. 지금의 이 사태는 긴급 연락라인을 통하여 공작성에까지 곧바로 전해질 것이다.

“나는 수비대장이다.”

카이저 액스로 땅에 줄을 그었다. “여기 이상은 아무도 못 넘어가.

잘나신 황제 폐하도.”

저 안에는 내 작은 친구가 있다고.

* * *

카이저의 예상대로 남문의 소요사태는 곧바로 공작저로 전해졌다.

비올라도 그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제논이었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대로 두면 아무리 용병왕이어도 목이 땅에 떨어질 텐데요.”

용병왕이 강한 건 사실이었으나 검제가 이끄는 태양 기사단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올라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비올라는 카이저와 넬라크의 관계를 안다.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둘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한 우정을 나눈 전 우다.

훗날, 카이저가 술에 취해 넬라크에게 ‘카이저 액스’를 집어 던졌는데도 넬라크는 웃어넘겼다. 넬라크는 이상하리만치 카이저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캐릭터였다.

“이 정도로 용병왕의 목을 치지는 못해. 대륙의 용병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게 될걸.”

비올라는 이 상황이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란 듯이 일부러 겨울 성 앞에서 소동을 피운 것 같았다.

이건 독자로서의 감이었다.

“공녀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신지 궁금한걸요?”

“곧 알게 될 거야. 일단 정리는 아버지께서 하실 거고.”

결국 상황 정리는 헤론이 직접 나서서 했다. 그가 남문의 문을 직접 열었다. “수비대장, 근신하라.”

“아이씨.”

겨울성의 남문 수비대장 카이저는 겨울성 군주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헤론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환영 인사가 격하군, 공작.”

넬라크는 검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태양 기사단원들도 똑같이 검을 회수했다. 그들의 숫자는 수십이었으나 동작은 하나였다. “나는 겨울성의 반역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헤론 공작은 인류를 지키는 최전방의 방패로서 명예로운 임무를 맡아 헌신해 온즉,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판단하고자 이곳을 찾았다. 나는 태양 기사단과 이곳을 조사할 것이니 그대는 황제의 행사에 협조하도록 하라.”

*** 넬라크는 공작저 안으로 들어와 한 가로이 차를 마셨다.

넬라크의 모습은 태양 기사들 앞에 서와는 사뭇 달랐다.

“어때, 좀 놀랐냐?”

“조금은.”

공석에서는 존대하던 공작이었지만 사석에서는 말을 편히 했다. 넬라크도 그게 편한 듯했다.

“그러니까 어디 싸돌아다닐 때는 미리 언질을 주고 돌아다녀야지. 네가 통행허가 없이 돌아다니면 반역으로 치부되는 거 몰라?”

딸을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 “헤론답지 않은 말을 하는군.

넬라크와 공작은 꽤 평온한 상태로 티타임을 가졌다.

“첩보가 있었다. 겨울성이 반역을 준비한다는.”

“그럴 리 없다는 걸 네가 가장 잘 알겠지.”

“그래.”

넬라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위에 관심이 있었다면 진작에 내 목을 쳤겠지.”

“.......”

“그러나 수상한 모습들이 포착되기는 했다. 겨울성에 장인들을 영입했다지?”

마탑 출신의 거지들. 그들은 모두 하나 이상의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이 유입되면서 겨울성 사람들은 보다 풍족해졌고, 수련에 깊이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용병왕 카이저. 그놈이 네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고.”

“그건 틀린 말이다. 내가 아니라 비올라야.”

“비올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고?”

“비올라의 친구라고 주장 중이다.”

“어째 넌 허락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나이대는 친구를 골라 사귀어야 하니까.”

넬라크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그때쯤 만났었나?”

카이저. 넬라크.

헤론.

이 셋은 열 살 무렵에 처음 만났다. 함께 수련했고 같이 성장했으며 똑같은 전장을 지나쳐왔다.

한 명은 용병왕이 되었고, 한 명은 검제가 되었으며, 또 한 명은 겨울 성의 군주가 되었다.

“고립되어 있었던 겨울성은 골든로 드를 통해 원활한 진출로를 획득할 수 있을 거고, 대륙의 용병들을 규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게다가 내실을 탄탄히 다지고 있으며 기적의 신관 엘바토를 영입하여 신관 양성을 계획 중에 있다.”

신관 양성. 그것은 기존 신관들의 큰 반발을 살 것이다.

신관은 타고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불행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의 뜻을 어겨가면서까지 말이지?”

“무엇이 신의 뜻이지?”

신관이 양성되면 더 많은 사람이 치료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관들은 신관이 많아지는 것을 분명 크게 반발할 것이다. 감히 인간 따위가 어찌 신관을 양성할 수 있느냐면서.

“아무튼 신관들도 양성할 거고, 거기에 ‘밤 고양이’와도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심지어 카레나의 엘프들까지 규합했어.”

온갖 세력이 겨울성과 협력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반역을 준비하는 그림아닌가?”

“그래서 대외적으로 반역을 추궁하기 위해 겨울성을 찾았다? 일부러 소요사태를 일으키면서?”

“그래.”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비올라 영애와의 독대.”

헤론은 넬라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딸과의 독대?

“살기는 왜 품어?”

“그런 적은 없는데.”

“분명 살기였는데.”

“감이 많이 죽은 모양이군. 실전은 중요하다, 넬라크.”

넬라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새 살기는 사라져 있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헤론 공작의 위엄이 영 안 사는군, 황제와 공작의 독대 자리에 감히 노크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비올라였다. “저를 찾으실 것 같아서요.”

넬라크는 피식 웃고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영애는 왜 그렇게 생각했지?”

“겨울성을 찾아오신 진짜 이유가 열풍 때문이리라 짐작했으니까요.

대외적으로는 반역을 추궁하기 위해서. 그러나 실제로는 열풍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열풍을 가장 먼저 언급했던 저를 찾아오셨으리라 생각했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넬라크는 잠시 침묵했다. 저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이내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셀리나의 말대로군. 셀리나가 말해주었다. 카이저가 깽판을 쳐줄 것이고, 헤론이 직접 나올 것이다. 헤론과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비올라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집사가 딸기 에이드를 만들어 가져올 것이다.”

마침 제논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비올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 역시 천재 캐릭터.’

역시 셀리나는 피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셀리나도 한 가지는 말해 주지 못했어. 그게 내가 이곳에 직접 온 이유고.”

넬라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올라 영애. 그대는 물망초 연회이전부터 열풍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그대는 어떻게 열풍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