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70화 (170/201)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70화

넬라크의 질문에 먼저 반응한 사람은 헤론이었다.

“넬라크, 황제 폐하, 어쩐지 제 딸을 취조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저의 착각이냐?”

“말을 통일해 주면 좋겠는데, 헤론공작.”

넬라크가 헤론을 ‘헤론 공작’이라 불렀다. 그 말로 인하여 이 자리는 공적인 자리가 되었다. “저의 착각입니까?”

“착각이 아냐. 비올라 영애는 애초부터 열풍의 테러를 알고 있었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공격할지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말을 읊는지도 알고 있었지. 뭐였더라.”

비올라가 대답했다. “뜨거운 바람이 사막으로부터 불어 오리라.”

“그래, 그거. 비올라 영애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군.”

넬라크의 눈이 헤론을 향했다. “헤론 공작답지 않게 행동하는군.

보통은 스스로 답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나? 공작이 누군가를 변호하려 나서는 게 영 수상한데.”

저 모습은 마치 라엘과 함께 있을 때의 모습 같았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헤론의 모습. 그때의 모습이 지금의 헤론과 겹쳐 보였다.

“내 생각에는 비올라 영애도 그걸 원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헤론의 시선이 비올라를 향했다.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겨울성을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이곳을 찾아온 시점에서 아버지도 알고 계셨겠지만.”

“아빠.”

“……네?”

“굳이 아버지라 부를 필요는 없다.”

넬라크가 허- 하고 웃고 말았다.

헤론은 라엘에게도 이렇게 말했었다.

‘헤론. 헤론이면 돼. 굳이 헤론 공자라 부를 필요는 없어.’

비올라는 괜스레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아빠를 부르는 것은 왠지 벨라투답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닌 아빠를 종용하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이 낯부끄러운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제가 직접 얘기하고 싶어요.”

“……….”

“딸을 믿어주세요.”

넬라크가 피식 웃었다. “비올라 영애도 나와의 독대를 원하는 것 같은데.”

“독대는 영 싫긴 합니다만.”

헤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딸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딸이 직접 자신이 얘기하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니 그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 그게 아버지, 아니, 아빠로서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 딸이 부탁했으니 들어드리겠습니다.”

“내 명령 때문이 아니라? 황명인데?”

“황명은 거부하라고 있는 거라고 제가 아는 누가 그랬습니다만.”

그건 거의 30년 전, 가출한 황자였던 넬라크가 직접 했던 말이었다. 넬라크가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인류 최강의 방패. 겨울성의 군기가 개판이군.”

“원하신다면 진짜 개판을 보여드릴 수도.”

“사양하지. 내가 아는 누가 날뛰면 감당하기 힘들거든.”

헤론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비올라와 넬라크의 독대가 시작되었다.

* * *

넬라크가 말했다.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보다 심도 있는 얘기를 해볼까?”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영애가 보기에 그래 보이나?”

“네.”

“내가 아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여서.”

“제 아버지의 밝았던 모습이요?”

“아버지라 그러면 서운해할 텐데?

그냥 아빠라 불러줘.”

“황제 폐하 앞에서 어찌 사사로운 호칭을 쓰겠습니까?”

넬라크는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도록. 영애는 열세 살이 맞나?”

“맞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얼어붙었다. “물망초 연회 당시. 영애는 가이아와의 접점도 없었고, 겨울성 밖에서 이렇다 할 정보단체와 접촉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헤라 공녀가 운영하는 테라 상단과 깊은 연을 맺었을 뿐이지.”

황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비올라도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제가 신의 뜻을 읽을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영애가 신관이라 주장하고 싶은 건가?”

넬라크는 뭐가 그리 웃긴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살성을 지닌 영애가?”

“태양왕 칸의 유품을 가지고 오셨지요?”

넬라크의 웃음이 멈췄다. “칸의 유품?”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붉은 보석. 벨라투의 핏줄에 계승되어 내려오는 ‘진안(眞眼)‘의 원류. 진실석을 가져오셨을 거라 확신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의 선조, 태양왕께서 유품을 남기셨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유품들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어.” 심지어 ‘밤 고양이’의 수장인 가이 아조차 모르는 정보였다. 황실 대대로, 오로지 계승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정확히는 진실석의 파편이겠지요.

태양왕 칸께서는 벨라투에 진안의 힘을 나누어주었고, 그에 따라 진실 석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으니까요.”

넬라크는 믿기 어려운 현실에 또 침묵했다. “신의 뜻을 읽고 알아냈다는 건가?”

“네.”

넬라크가 아공간을 열어 엄지손가락 크기의 붉은 돌을 꺼냈다. 영롱한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게 진실석이군요.”

“진실석 앞에서 진실을 고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

“물론이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진실석이 푸른색으로 변할 테니까요.”

넬라크는 또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 외부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비올라의 입을 통해 줄줄 새어 나왔다.

“신의 뜻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하군.”

“저는 옛날부터 신의 뜻을 읽었어요. 처음에는 그게 신의 뜻인지 몰랐어요.”

작가의 서술. 그것이 곧 이 세계의 ‘신의 뜻’이며, 다른 말로는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소설로만 읽었다.

넬라크의 눈이 진실석으로 향했다.

진실석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게 ‘글자’의 형태로 다가왔어요.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읽을 수 있었고, 제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었어요. 저는 ‘신의 뜻’을 읽어가며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했어요.”

“공감하고 화를 냈다?”

“신의 뜻에는 서사가 있었거든요.

마치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처럼.”

진실석은 여전히 붉은색. “어느 날 문득, 저는 그 글자들이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거리. 비올라 벨라투는 노예상인들을 이고 헤론 공작에게 발견된다.

그때,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던 핏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났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이게 정말 신의 뜻인지 헷갈렸거든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그것들이 신의 뜻이자 계시였다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어째서?”

“제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저는 알고 있었고, 미래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도 일부 알 수 있었어요.

열풍이 활개 칠 것도.”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올 것도 알고 있었나?”

비올라가 고개를 저었다. “몰랐어요. 제가 모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들을수록 믿기 힘든 얘기뿐이군.”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얘기를 제 아버지에게도 하지 않았어요. 이런 걸 함부로 발설하면 마녀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확실히.”

“그러니 황제 폐하 앞에서 처음 털어놓는 거예요. 폐하께서는 이 제국의 태양이시고, 태양께서 인정해 주시면 저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넬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사실을 숨겨왔던 것에 대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되었다.

“그리고 저는 신관이 아니에요. 신관은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지만, 저는 신의 뜻을 거역했거든요.”

“거역했다?”

“제가 봤던 신의 뜻에서 비첸은 죽었어요.”

“비첸은 멀쩡히 살아 있던데.”

“살려냈어요. 신의 뜻을 거역해서.”

“그 말인즉, 비올라 영애가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뜻인가?”

“신의 뜻이 변할 수 있다는 거겠지요.”

작가의 세계가 아닌 비올라의 세계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다.

“우리는 모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니까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신은 우리에게 살아갈 권리를 준 것 같아요. 그것이 설령 신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고 해도.”

진실석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비올라가 넬라크를 바라보았다.

넬라크는 비올라의 눈빛이 참으로 단단하다고 느꼈다.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태양왕 칸께서는 오늘날을 예비하신 것 같아요.”

“그건 무슨 뜻이지?”

“벨라투에게는 진안을, 브란디아에는 강인한 육체를, 황가에는 태양검을.”

이 역시 황제에게만 전해지는 비밀들이었다. “악령들의 왕, 바하카룬을 봉인하셨던 태양왕께서는 자신의 친우들에게 능력을 나누어주었죠. 저기 진실 석이 그 증거 중 하나이고, 그리고 그분께서는 황족에게 유언을 남기셨어요. ‘언젠가 때가 오리라. 지나치게 추상적인 말이라 황실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넬라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올라는 분명 신의 뜻을 읽을 수 있는 아이였다.

‘언젠가 때가 오리라는 칸의 유언이 맞았다.

황실의 직계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유언.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그래, 이상하지.”

넬라크도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바하카룬을 봉인했던 태양왕 칸에게는 세 명의 동료가 있었다.

겨울 검제 하젠 벨라투.

용암 거인 브릭타 브란디아.

그리고 백룡 페일라. “백룡 페일라께서 인간과 혼인하여 번성시킨 가문이 마리앙투잖아요.”

태양왕 칸은 동료들에게 능력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페일라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선물하지 않았다. “그리고 칸과 동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이고.”

페일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하카룬의 봉인을 위하여 목숨을 내던졌다. “과연 그녀만 운이 좋아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녀가…….”

“그만.”

넬라크가 말했다. “지나치게 민감한 얘기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듣도록 하지.”

더 이상 얘기했다가는 증거도 없이, 3대 공작가인 ‘마리앙투’ 공작가를 모함하는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해도 될까요?”

“무엇을?”

“이전에 세나 공녀가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소식은 알고 계시지요?”

“그래. 마리앙투에서 추격대를 보냈고, 겨울성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색에 임했다고 들었다.”

“그 수색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저희 첫째 언니예요. 별을 하사받은 기사. 무려 1성기사가 수색했는데 아무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어요.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이상한 일이었죠.”

메데이아가 실패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임무였다. 그들은 그야말로 증발해 버렸다. 비올라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인간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때, 쿵! 쿵! 커다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문이 부서질 것 같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