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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71화 (171/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71화

넬라크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비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열 받았다.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힉슨이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 왔다. “비올라!”

그의 발걸음에 저택이 진동했다. 화가 나면 해일을 일으킨다는 흑경(黑鯨)답게, 그의 움직임과 기세는 강맹했다.

그는 다짜고짜 비올라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 “괜찮냐?”

비올라는 힐끗 눈치를 살폈다. 넬라크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흑경 힉슨의 기세가 마치 불타오르는 활화산 같았다면, 검제 넬라크의 기세는 혹한의 냉기를 머금은 눈보라 같았다.

둘의 기세가 허공에서 부딪쳤고 대마물용 유리창들이 쩌적- 깨져나갔다.

“황제가 독대를 하고 있다.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힉슨?”

“어, 황제, 안녕? 황제가 있는 줄 몰랐지.”

넬라크는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았다. 이곳이 겨울성이 아니었다면, 아니, 겨울성의 주인이 헤론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검을 뽑았을 것이다.

넬라크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네 목을 베어 기강을 바로잡으리라.”

비올라는 상황 파악을 위해 애써야만 했다. ‘힉슨은 무모하긴 하지만 카이저같은 멍충이는 아닌데.”

그렇게 안 보여도 지략이 꽤 뛰어난 편이다. 비올라가 아는 힉슨은 그랬다.

‘카이저야 넬라크와 워낙 친하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힉슨은 아니었다.

황제와 그렇게까지 두터운 친분은 없었다.

넬라크가 참아서 그렇지, 참지 않았다면 당장에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세상에, 황제와 독대 중인 자리에 무턱대고 쳐들어오다니.

앞을 보니 문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지 파괴하고 들어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지금, 제 목을 벤다 했습니까?”

“그렇게 말을 했다.”

둘의 눈이 다시 한번 부딪쳤다. 강대한 폭풍이 불어닥치는 듯했다.

“그 말, 후회할걸?”

“후회할걸?”

넬라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이저와 헤론까지는 그렇다 쳐도, 힉슨에게까지 반말을 허락한 적은 없었다.

“네 오만이 네 명줄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황제가 스스로 내뱉은 말을 못 지키면 체면이 많이 상할 텐데.”

“못 지킬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직접 네 목을 벨 테…….”

넬라크가 눈을 크게 떴다. 힉슨의 손에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다.

“거봐. 후회한다고 했잖아.”

힉슨의 손에는 ‘은성훈장’이 들려있었다. 은성훈장을 지닌 자는 황제에게 말을 낮출 수 있다.

그게 은성훈장의 특권이었다.

“난 너에게 은성훈장을 하사한 기억이 없….”

넬라크는 순간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아, 이게 어디 있더라. 그거 혹시 재발행도 되냐?

용병왕 카이저는 은성훈장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넬라크가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훔친 건가?”

“설마.”

“그럼?”

“주웠지.”

“주웠다?”

“주웠다니까.”

은성훈장을 어떻게 주울 수 있느냐. 그렇게 물으려다가 묻지 않았다. ‘카이저 놈이라면 가능한 일이지.’

넬라크가 한숨을 푸욱~ 내쉬고서 의자에 앉았다. “은성훈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게 곧바로 말을 놓는 놈이 있을 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군.”

이곳은 겨울성이다. 헤론 공작의 암묵적 허락 없이, 슨이 여기까지 쳐들어왔을 리는 없다.

다시 말해 헤론과 힉슨은 공범이라는 얘기였다.

“딸이 너무 걱정돼서.”

“딸?”

힉슨은 당당했다. “마음으로 낳은 딸.”

“......”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한지 넬라크조차 할 말을 잃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내 넬라크가 비올라 쪽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둘이라 좋겠군.”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비올라도 상황 파악을 끝냈고 힉슨의 등을 떠밀었다. “황제 폐하와 독대 중이잖아. 아저씨는 나가 있어.”

넬라크가 피식 비웃었다. “헤론보고는 아빠라고 하던데. 네게는 아저씨라 하는군. 딸이라고 안했나?”

황제 앞에서도 당당했던 힉슨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다고 비올라에게 아빠의 호칭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야야, 비올라, 밀지 마라.”

“제발. 자중 좀 해.”

힉슨의 사랑과 걱정이 고맙기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 “아니, 비올라,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괜히 너를 추궁하거나 그러면.”

“내 일이잖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말은 비수가 되어 힉슨의 심장을 찔렀다. 알아서 한다는 저 말이 왜 이렇게 상처가 되는지.

“상처받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예의를 어긴 건 아저씨잖아.”

문 앞까지 힉슨을 떠민 비올라가 작게 말했다. “날 마음으로 받아준 아버지잖아.

나를 좀만 더 믿어주면 안 돼? 나 잘할 수 있어.”

밖으로 나온 힉슨은 복도를 걷다가 헤론과 마주쳤다. 헤론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떻게 됐지?”

힉슨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비올라가 어른이 됐어.”

“그 아이는 늘 성숙했다.”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면서 나한테 손을 내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네가 필요 없어진 거겠지.”

힉슨이 시무룩해진 만큼 헤론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렸다. “자만하지 마. 비올라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너랑도 멀어진다는 뜻이니까.”

“그럴 리 없지.”

헤론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 뿌? 빠? 삐? 뽀?를 아나?”

“그게 뭔데?”

“확실히 모르지?”

“몰라. 뭔 헛소리야?”

“모르는군.”

헤론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넬라크와 비올라가 독대를 가진 후 2주가 흘렀다.

브란디아 공작가에 서신이 한 장 도착했다.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는 서신이었다.

[신화의 재림에 함께하겠는가?]

넬라크의 주도하에 3대 공작가가 비밀리에 회동했다. 검제 넬라크.

헤론 벨라투.

살몬 브란디아.

메리사 마리앙투.

넬라크가 말했다.

“영웅왕 칸께서는 3명의 동료와 함께 악령들의 왕인 바하카룬을……….”

모두가 아는 얘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하여 우리는 다시 힘을 합쳐 바하카룬의 봉인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브란디아의 수장인 살몬 브란디아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서, 그놈의 바하카룬이 다시 준동하고 있다는 게 확실합니까?”

“그래.”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빠집니다. 제 애 찾기에도 벅찹니다.”

살몬 브란디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잃었다. 막내딸은 편지를 남긴 채 ‘눈이 부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을 수색하고는 있지만 살몬도 잘 알고 있었다.

‘ ‘옛 무인들의 성지’를 찾아간다고 해서 셀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살몬은 매일같이 ‘눈이 부는 곳으로 들어가 ‘옛 무인들의 성지’ 주변을 배회하는 중이다.

한편, 메리사 마리앙투 역시 고개를 저었다. “저도 요즘 일이 바빠서요. 제 딸도 찾아야 하고.”

넬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 공녀가 행방불명되었다지.”

“네.”

“포기하지 않았나?”

메리사가 넬라크를 노려보았다. “제 자식을 포기하는 어미는 없어요.”

“그렇군.”

넬라크는 살몬 공작과 메리사 공작의 반응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헤론이 입을 열었다. “내 딸의 예측대로군.”

그 말에 메리사 공작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당신 딸이라면, 혹시 비올라 영애?”

메리사는 비올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나가 행방불명된 것이, 비올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중이기도 했다.

비올라에게 사과하러 갔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니까.

그게 비올라의 잘못이 아니라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가슴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 비올라.”

“우리가 어찌 행동할지, 비올라 영애가 예측했다는 뜻인가요?”

“그랬지. 너희가 너희의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고,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고 있었어.”

헤론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열풍’은 우리의 그 마음을 역으로 이용하는 놈들이다. 내 오랜 친우였던 힉슨이 그랬고, 나의 경쟁 상대였던 폭풍검 재칼도 그랬다. 검귀로 명성을 떨치던 에르사역시 마찬가지였지.”

‘에르사’라는 이름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살몬이었다. “에르사?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

“내 또 다른 딸인 4공녀의 집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가 집사로 일하고 있다고?”

“왜? 젊은 날의 추억이 떠오르나?”

살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린 시절, 살몬은 에르사에게 패한 적이 있었다.

“다시 붙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그녀가 사라졌었다.”

“그녀의 딸이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헤론이 공작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우리는 그러한 마법에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살몬 브란디아 쪽을 쳐다보았다. “네 딸을 잃는다면, 광인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메리사 마리앙투 쪽을 쳐다보았다. “당신 딸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면, 미치지 않을 수 있나? 무엇보다 나는 당신 딸의 실종이 열풍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어.”

“어째서죠?”

“실종 직후, 메데이아가 겨울성의 정예들을 이끌고 탐색에 나섰다. 그러나 아무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어. 마리앙투의 수색대도 아무런 소득조차 얻지 못했지.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

메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이 맞았다.

사실 메리사도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딸과 딸을 모시던 무리가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이번에는 넬라크가 말했다.

“나 역시 셀리나를 잃으면 광인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군. 아니, 높은 확률로 나는 미쳐 버릴 것이다.”

그가 문 쪽을 바라보았다. “신의 뜻을 읽을 수 있는 한 사람은 그걸 일컬어 ‘오염’이라 표현하더군.”

살몬과 메리사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신의 뜻을 읽는다고 했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넬라크가 피식 웃고서 말했다. “신의 뜻을 읽어낼 수 있는 자. 신의 뜻을 거역하여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자. 엘프들의 숲에 기적을 내리고, 엘프들의 여왕이 여왕으로 떠받드는 자. 이번 비밀 회동을 진짜로 주도한 철혈의 공녀를 소개하지.”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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