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72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비올라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올라 벨라투입니다.”
헤론은 흐뭇한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고, 살몬은 인상을 찡그렸으며, 메리사는 무표정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살몬이 가장 먼저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신의 뜻을 읽고 이 비밀회동을 주도했으며, 또 뭐더라, 아무튼 그런 대단한 위인이 비올라 공녀라는 뜻입니까?”
넬라크가 빙그레 웃었다. “그대의 반응을 이해한다, 살몬 공작.”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 역시, 비올라 공녀가 그대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가 궁금하던 참이야.”
“나 참.”
살몬 브란디아는 사실 비올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셀빈이 가출한 이유도 비올라 때문아니던가.
물론 비올라를 탓할 수는 없는 문제였으나 그래도 부모 마음이란 것이 그렇지가 않았다. “비올라 영애, 내가 영애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셀빈 영애의 가출 때문인가요?”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무슨 뜻인가?”
“꼭 네 어머니처럼 되어라, 네 어머니야말로 네 이상향이다, 네 어머니 같은 강함을 가져야 한다.”
그 말에 살몬의 눈이 커졌다. 저 말은 셀빈이 아기일 때부터 살몬이 주입했던 말이었다.
“물론 브란디아 공작 부인이 훌륭 한 분인 것은 맞아요. 그분은 일신으로 떨쳐 일어나 서대륙을 일통하여 무후(武后)로 군림하시다가 대의를 위하여 서대륙을 배신하셨지요.”
넬라크, 헤론, 메리사의 눈이 동시에 살몬 공작을 향했다. 넬라크가 먼저 물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공작 부인이 설마….”
헤론은 피식 웃었고, 메리사가 넬라크의 말을 이어받았다. “설마 창천무후(蒼天武后) 아셀다?”
‘아셀다’ 라는 이름을 모르는 대륙인은 거의 없었다. 아셀다.
그 세 글자가 아셀다를 나타내는 가장 뛰어난 표현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셀다를 일컬어 태양왕 칸에 비유하곤 했다.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중앙대륙에 태양왕 칸이 계셨다.
면, 서대륙에는 창천무후 아셀다께 서 계셨지요.”
“.......”
“태양왕 칸이 설화 속 영웅이시라면, 아셀다께서는 실존하는 설화고요.”
살몬 브란디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비밀이 새어 나간 건가?’
그의 부인이 아셀다라는 사실은 극비였다. 심지어 딸인 셀빈도 자신의 어머니 가 아셀다라는 사실을 몰랐다.
“내 아내는 아셀다가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렇지요.”
비올라가 싱긋 웃었다. “아셀다의 아내가 살몬 공작님이시죠.”
그 말에 살몬의 얼굴이 푸르르 떨렸다. 그의 각진 턱이 덜덜 떨렸다. “더 말해볼까요? 서쪽 끝, 메일론간척지. 그믐달이 뜨는 밤에 일어났던….”
“그만!”
살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메일론 간척지는 살몬이 아셀다에게 시집(?)가게 된 날이었다.
“맨손으로 무력을 겨루어 이기는 자가 상대를 아내로 삼는다, 라는….
“그만!”
살몬이 쾅! 책상을 내려쳤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책상이 두 동강 났고, 살몬의 주먹과 맞닿은 면은 가루가 되어버렸다.
꽤 살벌한 현장이었으나 넬라크는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야. 아셀다가 공작의 아내였다니. 아니, 아니지. 공작이 아셀다의 아내인 건가.”
비올라가 말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딸에게 어머니처럼 되라고 강요했던 분은 아버지인 공작님이셨어요.”
......” “그렇지만 셀빈은 알고 있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 가여운 아이는 선택했어요. 자신이 어머니처럼 강한 여인이 될 수 없으니, 어머니처럼 강한 여인을 좋아하고 따르자.”
“그 아이가 직접 그렇게 말했나?”
“아니요. 글자로 읽었어요.”
“글자?”
넬라크가 설명을 해주었다. “신의 뜻이 글자의 형태로 다가온다더군.”
“허무맹랑한 소리군요.”
그때,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메일론 간척지. 그믐달이 뜨던 그 밤.”
「살몬 공작은 오른 주먹에 강맹한 마나를 담아 휘둘렀다.
그의 일권(一拳)에는 태산을 쪼개고 하늘을 가를 만한 거력이 담겨 있었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꽃이 피어올라 주변을 뜨겁게 물들였다.」 “살몬은 그 힘을 일컬어 용암력이라 불렀으며.”
「아셀다는 거력이 담긴 주먹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내 아내가 되어야겠어.”
비올라가 왼손은 검지를 펴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었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 주먹에 대었다.
“솜털 같은 당신의 주먹이 마음에 들었거든.”
「용암거인의 피를 이은 살몬의 열기는 삽시간에 사그라들고, 그믐달이 드리운 어둠을 집어삼키던 열꽃은 서대륙으로부터 불어온 서풍에 하릴없이 저버렸다.」
“그는 난생처음 하늘을 겪었다. 그는 스스로를 부끄러이 여기며 결국 무릎을 꿇었다. 검지에 맞닿은 살몬의 오른 어깨가 빠져 있었다. 그는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겼소. 그리고 그날. 백년가약을 맺었다.”
살몬의 눈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마치 그날 밤의 일을 눈으로 본것처럼 읽어내고 있었다.
‘꾸며낸 게 아니다.’
꾸며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비올라는 신이 보낸 아이가 맞았다.
아예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게, 나를 표현하던 신의 뜻인가? 그게 끝인가?”
비올라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표현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 입으로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말해보도록.”
「하늘을 겪은 살몬은 확신했다.」
“하늘을 겪은 살몬은 확신했다. 내가 진정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노라고.”
“이런 미친. 진짜잖아.”
결국 그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비올라 영애의 뜻에 동참해 보도록 하지. 아니, 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
신의 뜻이라는 것이 궁금해졌다.
* * *
살몬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이봐.”
그는 소년이었다. 중앙대륙에서는 흔치 않은 흑발, 흑안을 가진 소년.
키가 굉장히 컸고 호리호리했으나 슬쩍 훑어만 보아도 굉장히 잘 단련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굉장히 작았고 어깨는 넓었다.
그는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배경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세상을 이루는 그림체와 소년을 그 린 그림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예.”
“이 저택의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그림체가 다른 그 소년에게서는 남다른 기백과 기품이 느껴졌다. 정돈된 무인이 아니라면 내뿜을 수 없는 정갈한 기운을 갖추고 있었으며, 단단한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키가 2미터가 넘는 자신을 올려다 보면서도 한 점 위축됨이 없었다.
“이름이?”
“툰드라입니다.”
“아. 네가, 그 반려검?”
“그렇습니다.”
“소문이 왜곡되었구나.”
반려검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왔다. 살몬은 ‘그 나이치고 대단하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너를 보니 누군가가 떠오르는구나.”
“칭찬입니까?”
“칭찬이다. 우린, 다음에 또 볼 수도 있겠군.”
살몬은 휘적휘적 걸어갔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혹시라도 열풍의 계략에 휘말려 일이 잘못되었을 때, 혹시라도 아내가 오염되었을 때 아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헤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둘이 있었군.”
이미 아내라는 하늘을 겪었던 살몬이다. 그래서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방금 그는 또 다른 하늘을 보았다.
저 나이치고 대단한 하늘이 아니라, ‘진짜’ 하늘이었다.
‘저런 자가 비올라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다고?’
아무래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한편, 비올라는 메리사와 독대를 요청했다. “메리사 공작님과 이야기를 나눌만한 좋은 장소를 제가 알고 있거든요.”
“독대라면 이곳에서 해도 괜찮다.”
“귀한 시간을 뺏지 않을게요.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공작님께 무릎 꿇고 사죄하겠습니다.”
비올라가 단언하자 메리사도 슬쩍 호기심이 동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만 아닌가?”
“그건 공작님의 양심에 맡기도록 할게요.”
“어지간히 확신이 있나 보군.”
“기뻐하실 거예요.”
비올라가 메리사 공작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마차에서 내린 메리사 공작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여긴……?”
“아마 만족하실 거예요.”
“소문은 익히 들었어. 본래는 길게 줄을 서서 먹는 곳이라 했는데.”
아줄레지아. 겨울성의 몇 안 되는 명소 중 하나.
엄격하기로 소문난 미식가 미셀로나 후작이 극찬한 곳.
겨울성의 주인인 헤론조차도 줄을 서야만 하며, 그조차 하루 두 개밖에 살 수 없는 천상의 디저트를 판다는 곳이다.
“달콤한 거. 좋아하시잖아요.”
“디저트로 나를 유혹하겠다?”
딱 어린아이다운 발상이군. 사실 살몬 브란디아의 반응 때문에 조금 긴장하던 차였다. 정말로 이 아이가 신의 뜻을 읽은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 아이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제 안심이 좀 되었다. “네가 살몬 공작의 비밀스러운 얘기를 알고 있는 것은 놀랍다만, 나는 그러한 얘기들에 현혹되지 않아.
물론 디저트 따위에 마음을 열지도 않을 거고.” …라고 말한 메리사는 그 자리에서 에그타르트 16개를 먹어치웠다. “원래 이곳의 에그타르트는 한 번에 두 개밖에 먹을 수 없어요.”
“재앙이군.”
“그렇지만 오늘 저는 이곳을 빌렸어요. 사장님과 깊은 친분이 있어서요.”
보통 때라면 비올라도 이런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맛있는 건 함께 먹어야 더 맛있다.
독점하면 안 된다.
그게 비올라의 생각이었으나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단것을 그렇게 많이 드시는데, 아름다운 몸을 유지하시는 게 참 신기해요.”
비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역시 백룡의 피와.”
17개째 에그타르트를 집어 들던 메리사의 손이 멈췄다. “마리앙투 가문의 비전 유물인 ‘여 제의 가면’ 덕택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