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74화 “이 땅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힘을 품고 있는 곳.”
비올라가 말을 이을 때마다 황제와 공작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번져나갔다. 무덤덤한 사람은 헤론뿐이었다.
“광인이 되었을 때 파멸을 몰아올 수 있을 만한 무인들이 태어나는곳.”
비올라 말대로 이들 역시 그러한 곳을 한 곳 알고 있다. 넬라크와 헤론, 살몬 역시도 그곳에서 수련했었다.
“시간과 공간이 차단되는 이적이 발현되며, 그것이 고대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이한 장소.”
넬라크가 물었다. “비올라 영애는 ‘눈이 부는 곳의 그곳을 언급하는 건가?”
“맞아요. 그곳의 이름은 ‘옛 무인들의 성지.”
“어째서 그곳이 옛 무인들의 성지라고 불리게 되었을까요? 폐하께서는 그곳 이름의 유래를 알고 계세요?”
“깊게 생각해 본 적 없군. 그저 수련을 위한 곳이라고만 생각했지.”
“성지에는 여러 뜻이 있어요.”
작가가 블로그에 직접 성지(聖地)에 대한 설정을 적으면서 사전을 인용했던 것이 생각났다. [1. 특정 종교에서 신성시하는 장소, 종교의 발상지나 순교가 있었던 지역으로 기독교의 예루살렘, 이슬람교의 메카 등이다.]
[2. 종교적인 유적이 있는 곳.]
“성지는 순교가 있었던 지역을 뜻하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는 가장 위대한 순교자들에 대하여 알고 있어요.”
고대에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악령들의 왕을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봉인했다.
“설마.”
“맞아요. 태양왕 칸, 겨울 검제 하젠, 용암 거인 브릭타. 세 영웅이 잠든 곳.”
“그래서……”
그들은 그제야 이름의 유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옛’, ‘무인들의, 성지’. 그 세 단어는 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었다. 넬라크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곳의 불가사의한 힘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태양이 있고, 산이 있고, 바람이 있고, 강이 있는 것처럼.
‘옛 무인들의 성지’는 그런 개념이었다. “신의 뜻을 읽었던 한 사람은 신에게 글을 보내보았어요.”
“글을 보냈다?”
“네, 숫자로 이루어진 가상의 언어.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호.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아린은 문과였다. 그저 디지털 세계가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댓글’을 보다 정확히 설명할 만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이토록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품고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 그것에 의아함을 품지 않느냐고, 왜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토록 생생하게 전해지면서, ‘옛 무인들의 성지’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냐고.”
‘열풍’의 본거지에 대한 이야기가 풀어질 때, 개연성을 지적했던 독자가 있었다. 그 열성 독자의 이름이 한아린이었다. “신이 답해주었나?”
당시, 작가의 답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대신 전편들의 내용이 조금 바뀌며 설정이 추가되었다.
「악령들의 왕 바하카룬은 봉인되기 직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옛 무인들의 성지’에 특별한 결계와 주술을 걸었다.」
아린이 지적하기 전에는 없었던 내용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옛 무인들의 성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을 떠올릴 수도록 인지 왜곡 마법 결계를 펼치는 한편, ‘눈이 부는 곳’을 만들어 지옥문을 열었다.」
아린의 지적 덕택에 작품 설정과 내용이 탄탄해졌다. 「‘눈이 부는 곳’에서는 끝없이 마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인간들은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하여 마물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인간들은 마물들을 죽였다. 마물들도 인간들을 죽였다.
수많은 사람과 마물들의 생명이 ‘눈이 부는 곳에서 바스러졌다.
그리고 그것은 ‘옛 무인들의 성지’에 담긴 불가사의한 힘을 유지하는 근본적인 힘이 되었다. “정확한 답은 듣지 못했어요.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요.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어요.”
“비올라 영애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 싶지?”
독자였던 아린은 보다 꼼꼼한 세계 관의 세계가 좋았다. 독자로서는 그러한 세계가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원해요.”
비올라는 완벽한 겨울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완전무결함은 곧 외로움의 다른 말이었다.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가족이었던 적이 있나요?」
비올라에게는 가족이 필요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내 옆에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 죽어야만 하는 신의 뜻을 타고났다 해도, 스스로 그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세계.”
등장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다.
원작 속 남주인 툰드라는 이제 비올라에게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메데이아 언니도 안 죽일 거야. 언니가 공작이 될 거야.’
비첸은 죽음을 극복하여 살아났고, 폭풍검 재칼도 죽지 않았다. 대마법사 벵가스가 되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아기는 이제 벵가 스가 아니라 베나토로 살아가고 있다.
원작에서는 죽고야 마는 세알 자작도 여전히 아내를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다.
흑경 힉슨은 제정신을 차려 마음으로 낳은 딸을 받아들였고, 검귀 에르사는 헤라의 집사가 되어 과거의상처를 이겨내는 중이다.
퐁퐁이는 피의 정령왕이 되지 않았으며, 6마탑의 천덕꾸러기 엘시나는 마탑의 거지들과 함께 새로움 삶을 살고 있다.
‘모두가 바뀌었어.’
바뀐 것은 이외에도 많았다. “겁쟁이가 겁을 잃고 용병왕이 어린 소녀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세계.”
이들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었다. 모두가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친구가 되고 싶으면 친구가 될 수 있고, 아버지가 되고 싶으면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다.
비올라의 세계는 앞으로도 그런 세계가 될 것이다.
“사랑이 약점이 되지 않는 세계.
우리가 우리 옆의 사람들을 자유로 이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원해요.”
넬라크가 한동안 비올라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한없이 어린 아이 같으면서도, 어린아이 같지 않은 말이구나. 그러나 영애의 말들이 모두 진심인 것을 알겠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황제가 비올라에게 조언을 구했다. 3대 공작들도 그것에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오로지 헤론만이 뿌듯한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에게 딸기 에이드를 건네주던 제논이 허리를 세웠다.
“문을 열까요, 공녀님?”
“그래.”
문을 열고 찾아온 사람은 메데이아였다. 메데이아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녀답지 않게 조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논, 딸기 에이드를 부탁해. 아주 시원하게.”
“알겠습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메데이아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마나를 최대한 불어넣어 빙검식을 운용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고마워.”
자매의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제논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제논은 문에 기대고 서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공작님들과 밀담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적어도 최측근인 자신에게는 말을 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비올라는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제논은 몹시 서운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감정 없는 괴물이 아니었다.
‘아마 메데이아 공녀님도 저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계시겠네요.’
메데이아의 마음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저는 집사로서의 일을 합니다.”
딸기 에이드를 만들러 가보기로 했다. 한편, 메데이아는 자신의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언니한테 말 안 해줄 거야?”
“ “비밀로 하라는 황명을 받았어요, 정말 미안해요, 언니. 혹시 언니 도움이 필요하면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정말 이렇게 나오겠다?”
비올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메데이아의 적안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지.’
자리에서 일어나 메데이아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메데이아는 움찔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뭐 하는…!”
비올라는 메데이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저도 너무 속상해요.”
메데이아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으나 이내 비올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비올라의 몸은 참 작았다.
“저도 무섭고 두려워요. 언니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요. 제가 아는 메데이아 언니는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곧은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공작이 되어주실 분이고요. 비올라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저와 툰드라만이 가능한 일이에요.”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비올라와 툰드라다.
비올라는 비올라의 세계를 그려가기로 결심했다.
“언니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제 간절한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비올라는 메데이아의 품에 안긴 채 메데이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표정과 얼굴로 바라보지 말거라.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구나.”
살성을 가진 저 아이가 이토록 귀여워 보일 수 있다니. 메데이아는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경험 중이었다.
“똑똑. 저도 대화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자매의 시간에 함께해도 될까요, 언니?”
헤라였다. 헤라는 보다 날카롭게 비올라를 다그쳤다.
헤라 역시 비올라의 단독행동에 서 운한 것 같았다.
“언니는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잖아.”
언니는 부자잖아. 내 최대 주식!!
언니는 돈 왕창 벌어줘.
나의 편안하고 행복한 노후를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
언니가 있어서 내가 마음껏 내 일을 할 수 있어.”
“하여튼 말은 번지르르해.”
헤라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이윽고 제논이 딸기 에이드를 가져왔다.
마치 헤라도 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네 잔을 가지고 왔다.
“각각 한 잔씩 드시면 됩니다.”
비올라. 메데이아.
헤라.
각각 한 잔씩.
“하나가 남는데?”
“비올라 공녀님이 두 잔 드셔서요.”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눈이 부는 곳에서도 제가 딸기 에이드를 타드릴 수 있는…”
거기까지 말한 제논이 천장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메데이아도 마찬가지였다.
메데이아가 말했다.
“손님이 찾아온 것 같네.”
“그러게요. 불청객은 아니겠지요?”
“아버지의 기감을 뚫고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살수는 없어.”
그렇다는 말은 헤론 공작의 허락을 받았다는 뜻이다. 제논이 슬며시 웃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암살자인 것은 맞는 것 같네요.”
사실 지금의 비올라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치마 밑 다리가 호달달 떨렸다.
‘암살자라니요?”
메데이아와 제논은 셰일란의 기운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니 ‘암살자’는 셰일란이 아닐 것이다. ‘누가……… 찾아온 거지?”
그때, 천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넌 뭐냐?”
겁을 잃은 셰일란의 목소리였다. “여긴 내 구역이야, 짜식아.”
탁! 누군가가 땅에 떨어져 내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