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79화
겨울성 북문.
그곳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북문을 열어라.”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나?”
붉은 머리의 거한은 콧방귀를 꼈다. “남문 수비대장님이시다.”
“남문 수비대장이라면…… 길치 카이저?”
겨울성의 북문은 ‘눈이 부는 곳과 가장 맞닿은 곳이다. 그곳의 기사들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로 꾸려지며, 모두가 일당백의 전사들이다.
용병왕 카이저의 등장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여긴 북문이다.”
안다.” “길을 잃은 게 아니고?”
“남문 온 거 아니고 북문 온 거 맞다.”
“왜?”
“아무튼 열라면 열어.”
“싫다면?”
“그럼 때려서 연다?”
“가능하다면.”
“머리통을
부숴서라도
열어주
카이저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비올라의 얼굴이 생각났다.
“야, 수문장 친구야. 내가 여기서 소란 피우면 비올라가 싫어할까?”
“철혈 성녀의 이름을 함부로 그 입에 올리지 마라. 그분은 겨울성의 명예이시다.”
카이저가 활짝 웃었다. “너, 착한 놈이구나.”
북문의 수문장 아칸은 황당했다. 카이저의 대화 흐름에 맞출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이거. 나 이거 있는데?”
은성훈장이었다. 힉슨이 카이저의 훈장을 잘 이용(?)한 뒤 카이저에게 돌려준 상태.
은성훈장은 황제가 내리는 최고의 영예였으며 대륙 내 어디든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통행권이기도 했다.
“도대체 왜 눈이 부는 곳으로 가려는 거지?”
“거기 간다기보다는.”
카이저는 흐음, 헛기침을 했다. “비올라가 자꾸 비밀로 하잖아.”
“무엇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
비올라는 헤론의 서재에서 밀담을 가졌다. 비올라가 ‘눈이 부는 곳’으로 향한다는 소식까지는 알려졌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목표인지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카이저는 결심했다. “저 밖에서 천막 치고 기다리면 언젠가 만나지 않겠어?”
수문장 아칸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성벽의 도움도 없이, ‘눈이 부는 곳의 경계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하겠다고?”
“그렇지.”
“정신이 나갔나?”
“멀쩡해.”
“차라리 북문에서 기다리면 되지 않나?”
“비밀로 움직일 것 같단 말이야.
저기서 기다리는 게 확실할 것 같아.”
아칸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용병왕 카이저의 무식이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라더니.”
“그거 칭찬이냐?”
... 칭찬이다.”
“그래, 착한 놈아. 난 간다.
어쨌든 ‘은성훈장’을 지니고 있는 카이저를 막을 수 없었다. 카이저는 북문 바깥에 천막을 치고 야영을 시작했다.
삼 일 밤낮을 잠을 자지 않고 버텼다.
‘몰래 가기만 해봐라.
비올라는 작고 소중했다.
그래서 같이 가서 지켜줘야 했다. ‘응?”
순간, ‘바람이 분 것 같은데?”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 기이한 바람이 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세하게 사람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잘못 느꼈나?’
‘눈이 부는 곳’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북문이 열렸다.
카이저가 활짝 웃었다.
“비올라!”
비올라를 혼자 보낼 수 없었다.
* * *
메데이아는 몹시 서운해했다.
그건 헤라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들은 언니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세요.”
비올라는 두 언니를 잘 다독인 뒤 공작저를 나섰다. “비올라아아아아아!”
단도를 들고 뛰어오는 한 남자아이가 보였다. 이름은 비첸.
“어디 가?”
“수련하러.”
“그럼 같이 가!”
“안 돼.”
“왜?”
“비밀 수련이야. ‘눈이 부는 곳에서 수련할 거야.”
“나도 거기 가려고 했어.”
“이번에는 아냐.”
“나는 비올라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걸?”
비첸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그 순박하고 착한 눈동자에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 너 왜 웃었어?”
“그냥. 많이 바뀌었다 싶어서.”
벨라투의 그림자> 속 살인귀 꿈 나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은 애교 많은 다섯째가 되어 있었다.
‘비첸이야말로 내가 세계를 바꾸고 있다는 증거지.”
비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비첸은 순간 움찔했다.
“공격하려고 한 거야? 하긴 정수리는 약점이지. 폭! 찌르면 죽어.”
“그런 거 아냐.”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오빠가 많이 변해서 좋아.”
“비첸이 변했어?”
“응, 많이.”
“어떻게 변했는데?”
“착해졌어.”
“그으럼, 비첸은 착해.”
비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비올라를 괴롭히는 애가 있으면 내가 죽일 거야.”
“죽인…… 다고?”
…응? 어딘가 포인트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실제로 비올라를 괴롭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비첸의 상상 속세계에는 그런 자가 이미 존재하는 듯했다.
“응, 내가 걔 죽여줄게. 그럼 너도기쁘겠지?”
비첸은 비올라의 속도 모르게 화사하게 웃었다. “최대한 아프게 죽일 거야.”
…고마워.” 비올라는 한참이나 비첸을 다독여주었다. ‘와, 출발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겨울성 안의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든 것은 좋았으나 조금 과한 것 같았다. 마탑의 못난이 엘시나와 전직 기적의 신관 엘바토도 마중을 나왔다.
비올라가 ‘눈이 부는 곳’으로 수련을 떠난다는 사실에 겨울성 주민들이 북문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다녀올게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어느새 하나의 군중이 되어 ‘철혈 성녀’를 외치고 있었는데, 비올라는 얼굴이 화끈거려 그들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그 모습조차 그들에게는 열광의 대상이었다. 과연 도도하고 오만한 겨울성의 지배자다운 모습이었다.
수문장 아칸이 크게 외쳤다.
“북문을 열라.”
북문에 새겨진 온갖 마법 술식이 해제되고, ‘눈이 부는 곳과 맞닿은 북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불어닥쳤으나 비올라는 그리 춥지 않았다.
마도 명장의 드레스는 혹한마저 수월히 막아주었다.
눈보라를 헤치고 거인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후후, 이 몸은 여기서 기다렸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내 작고 소중한 친구를 혼자 보낼 수는 없…….”
쿵! 소리와 함께 거구가 쓰러졌다.
그 거구를 누군가가 질질 끌고 왔다.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야?”
“네.”
“설마 용병왕을 기습했어?”
“네.”
“그러다 반격당하면 어쩌려고?”
“카이저는 5일 밤은 새웠을걸요?
게다가 제자님한테 온갖 신경이 다 쏠려 있어서 빈틈이 많았어요.” 아무리 강한 무인이어도 암살자 앞에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카이저는 결국 기습에 당해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 일주일은 푹 잘 겁니다.”
“고마워, 스승님.”
“뭘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요.”
아무튼 셰일란 덕분에 카이저는 곧 남문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카이저의 부재 자체가 ‘열풍’ 에게는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비올라는 ‘눈이 부는 곳’으로 수련을 떠나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변수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카이저가 벌떡 일어섰다.
“비올라는! 작고! 소중하다!”
셰일란의 얼굴이 굳었다. “치사량의 720배쯤 되는 수면 침을 찔렀는데?”
비올라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치사량의 720배?
“스승님, 나 방금 엄청 위험한 말을 들은 것 같아.”
“별거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셰일란이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 평화로운 모양새였다. 다행히 카이저는 다시 한번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셰일란은 카이저를 질질 끌며 말했다.
“제자님, 수련 잘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셰일란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제논이 말했다.
“공녀님, 그럼 출발해 볼까요?”
인원은 최소 인원. 제논과 툰드라만 함께하기로 했다.
말들이 ‘눈이 부는 곳’에서는 생존하기 어려워 셋이서 걸어가기로 했다.
비올라 일행이 ‘눈이 부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네.’
눈보라가 그만큼 강렬했다. 비올라와 제논, 툰드라는 마법 밧줄로 서로를 묶었다.
“저희는 설인 마을로 향할 겁니다.”
‘옛 무인들의 성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설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은 인간들을 ‘옛 무인들의 성지’로 안내하는 안내자들이었다. “길은 알고 있으나 중간중간 마물의 습격에는 대비하여야 합니다..…
만.”
제논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물이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툰드라, 당신은 어때요?”
“주변에 마물은 없는 듯해.”
미세한 피 냄새가 툰드라의 코를 찔렀다. 그의 후각은 인간을 초월한 지 오래되었다. ‘눈이 부는 곳’이 실시간으로 마물의 흔적을 지워내고는 있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은 살육을 읽어냈다. ‘살육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환상이 그려졌다. ‘일방적인 학살. 만약 이곳이 ‘눈이 부는 곳이 아니었다면 주변에 수천 마리의 마물사체가 널려 있었을 것이다. ‘위험한 냄새가 나.’
설인 마을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눈 폭풍이 너무 거세 육성은 전달되지 않는 상황.
툰드라는 마나를 담아 음성을 전달했다.
“공녀님, 제가 앞장설게요.”
뚜벅뚜벅 걸어 비올라 앞에 섰다. 비올라의 눈 폭풍을 대신 맞아주었다.
“공녀님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비올라는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툰드라의 입장에서 비올라는 무인(武人)이었다.
“그저 저는 공녀님께 쏟아지는 눈폭풍을 대신 맞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기 위해 수련했어요.” 신기하게도, 툰드라가 앞에 서자 비올라의 주위는 평온해졌다. 방금까지 불어닥치던 눈 폭풍이 사라져 버렸다.
비올라 주위만 그랬다.
‘따뜻해졌어.’
과연 벨라투의 그림자> 속 주인공의 능력이었다. 거센 눈 폭풍의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온하고 고요했다.
그쯤 되니 비올라도 이상함을 느낄수 있었다.
‘이상해.’
마물의 습격이 수십 번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비올라 일행은 제논의 안내를 따라 계속 걸었다.
비올라는 이곳이 과연 ‘눈이 부는 곳’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평온하게 걸음을 옮겼다.
‘너무 평화로워서 수상해.’
제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설인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때, 또 다른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만나다니. 매우 우연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