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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80화 (180/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80화 비올라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우연이라고요?”

“우연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헤론공작이었다. 겨울성에서 집무를 보고 있어야 할아버지가 겨울성이 아닌 설인 마을 입구에 있었다.

“어쩐지 제 눈을 피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헤론이 비올라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 눈 마주쳤잖아요.”

그렇다는 말은 곧, 방금까지 눈을 피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잠시 다른 곳을 주시했을 뿐이다.

쉴 새 없이 마물들이 나타나는 곳이니.”

툰드라는 아까 느꼈던 불길한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학살이 벌어진 건 사실이었구나.’

그래서 피 냄새가 짙었다. ‘공작님이 마물들을 모조리 토벌하신 거야.”

그래서 비올라 일행은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번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연이라고요?”

“아주 큰 우연이군.”

“겨울성에 계셔야 할 아버지가 다른 곳도 아닌 ‘눈이 부는 곳에 있고,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옛 무인들의 성지’로 가는 데 필수 관문인 ‘설인 마을에 있는 것이 우연이란 말인가요?”

헤론은 거인이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관심의 대상이다. “아버지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겨울성에 없다는 사실 정도는 정보단체들도 알아차릴 텐데요.”

“상관없다. 원래 나는 ‘눈이 부는 곳’을 즐겨 찾으니.”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해요. 안 그래도 열풍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텐데요.”

헤론은 슬쩍 비올라의 시선을 피했다. 비올라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러니까, 우연히 만났을 뿐이다.

나는 내 갈 길을 갈 것이니, 너는 네 할 일을 하거라.” 제논이 빙그레 웃고서 말했다. “어째, 공작님께 잔소리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비올라는 찔끔 놀랐다. ‘그러네?’

너무 자연스러워서 느끼지 못했었다. 방금 자신의 태도는 감히 헤론 공작을 질책하는 듯한 태도였다.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뻔뻔하게 나가야 해.’

헤론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화가 나기 전에, 비올라가 먼저 선수 쳤다. “딸이 아빠에게 잔소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요?”

헤론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헤론은 비올라의 잔소리가 좋았다. 유일하게 자신을 편하게 대해주는 아이였으니까.

비올라 앞에서는 헤론 ‘공작’이 아니라 아버지 헤론으로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겉으로는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짐짓 엄하게 말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아빠를요, 상황을요?”

헤론은 잠시 침묵했다. 비올라는 이제 더 이상 헤론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은 반대로 했다. “두려워요.”

그 말에 헤론의 몸이 움찔했다. 어딘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그는 딸에게 두려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별거 아닌 말이었으나 아주 잠시 절망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 상황이 너무 두려워요. 신의 뜻을 거역하고, 신의 세계를 거부하는 길이 될지도 몰라요.”

“.......”

“그렇지만 아빠는 두렵지 않아요.”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두려웠다면 아빠 딸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어요.”

제논이 다시금 빙그레 웃으며 한가지 사실을 짚었다. “공작님, 입가가 꿈틀거리시는데요.”

“그렇지 않다.”

헤론이 몸을 돌렸다. “나는 대마물 전조증상이 있어 대마물을 토벌할 것이다. 매우 우.연.

한 만남은 이쯤 하도록 하지.”

*** 툰드라는 의외의 상황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설인들이 절을 하고 있어?’

툰드라는 이미 ‘옛 무인들의 성지’를 경험했었다. 그곳에 가기 위하여 설인들과 7일 밤낮으로 싸웠다.

당시의 툰드라는 설인들에게 여러번 죽을 뻔했다.

저들은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인 종족이 아니었다.

제논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희는 설인의 도움 없이 성지로 갈 수 없어요.”

오로지 저들만이 ‘옛 무인들의 성지’로 안내할 수 있다. 그래서 저들을 힘으로 억누르기만 해서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설인을 죽이면 절대 안된답니다. 그러면 ‘옛 무인들의 성지’로 향하는 길 자체가 닫혀버려요.”

설인을 죽이면 안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설인과 싸워 설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설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크게 네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는 모든 설인을 맨손으로 제압하는 것이고…….]

네 가지 방법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크기가 약 삼 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설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쿵! 쿵!

발소리가 났다.

“공녀. 우리. 친구.”

온몸이 하얀 털로 수북이 덮인 설인은 발목과 발 부분만 살이 드러나 있었는데, 그 덩치만큼이나 발도 거대했다. 수북한 털 일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헤론, 우리. 친구.”

설인이 손을 내밀었다. 비올라가 그 손을 맞잡았다.

강한 완력이 느껴졌다.

비올라의 육체가 아닌 일반 어린아이의 육체였다면 손이 가루가 되었을 정도의 악력이었다.

그러나 비올라는 크게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설인에게 악의도 없었다. “꼬마. 친구. 어디. 가?”

“옛 무인들의 성지로 가려고 해요.”

“오늘. 못 가. 세 밤, 자야 해.”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삼 일이면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나. 왁쿰. 설인, 족장.”

설인 족장 ‘왁쿰’은 비올라 일행을 거대한 이글루로 안내해 주었다. 이글루 안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제논이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공작님께서 뭘 어떻게 하신 걸까요?”

비올라는 문득 벨라투의 그림자) 속 설정을 한 가지 더 떠올렸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설인들의 격을 아득히 초월하여, 그들의 본능적인 경외감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자는 역사 속에 기록된 태양왕 칸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이글루의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은 툰드라는 한없이 따스한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보기 좋았어요.”

“뭐가?”

“공녀님께서 사랑받는 모습이요.”

툰드라는 자신을 ‘강한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과 강한준을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기억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공녀님이 행복한 게 제 소망이거든요.”

비올라는 툰드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숫자를 세보았다.

1초, 2초, 3초’시간이 지났다.

예전에는 5초가 한계였다.

‘5초, 6초, 7초.’

툰드라의 눈을 계속 바라보는데도, 원래의 비올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괜찮네?”

무엇이 달라진 걸까. 어쩌면 원작 속 비올라가 바랐던 꿈들을 이미 이루어버린 건 아닐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가족이었던 적이 있나요?’

그렇게 말했던 비올라에게는 이제 가족들이 생겼다. ‘진짜 비올라’는 이제 만족을 한 걸까? 그래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비올라는 툰드라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고, 툰드라는 그게 뛸듯이 기뻤다.

“봐주셔서 기쁘네요.”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해 주는 거야?”

“반반백서에 보면…

“그런 거 말고.”

‘반반백서’는 핑계였다. 결국 툰드라는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공녀님의 행복을 위하여 사니까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태어났어요.”

툰드라도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들 수는 없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없어서 늘 ‘반반백서’를 인용했을 뿐이었다. “툰드라, 우리는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열풍은 작가가 설정한 소설 최대의 흑막이었다. 소설 후반부 열풍과의 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악령들의 왕 ‘바하카룬’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과연 흑막다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봐.”

툰드라는 비올라의 말을 반박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열심히 찾아보기로 했다. 비올라의 행복 외에 자신이 바라는 것이 있는지.

간절하게 찾다 보면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겠지.

아마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일단 생각은 해보기로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슬슬 열풍에서도 내가 설인 마을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마물들의 습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열풍조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최소한의 습격도 없었다.

‘고요하네.’

삼 일째가 되었을 때,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설인 족장 ‘왁쿰’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가자. 친구. 성지.”

“족장이 안내해 줄 건가요?”

“왁쿰. 안내. 잘해.”

“그래요.”

제논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제 안내는 여기까지겠군요.”

‘옛 무인들의 성지’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단절된 외딴곳이다. 같이 들어가더라도, 함께할 수 없는 특별한 공간.

그러니 제논의 안내와 보호는 여기서 끝이었다. “고마워, 제논.”

비올라는 반지 속 ‘마거리트 꽃밭’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 제논에게 주었다. 제논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공손히 꽃을 받아 들었다.

“가자. 성지. 왁쿰. 안내. 출발.”

왁쿰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논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채 비올라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한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 든 꽃을 바라보는 제논의 눈동자가 더없이 싸늘했다.

“자, 그러면.”

비올라가 사라진 뒤 제논이 허리를 폈다. 그러고서 검을 뽑아 들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족장 왁쿰과 비올라 일행이 완전히 없어진 뒤. 설인들이 하나둘씩 이글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제논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눈 폭풍이 거세지네요.”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거센 눈 폭풍이 불어 닥쳤다. 제논이 자신을 둘러싼 설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아름다운 밤이 될 것 같은데.”

제논의 검에서 냉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에는 아직도 꽃송이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제논의 시선이 꽃송이로 향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 꽃보다 아름다운 밤은 없겠지만.”

그때, 꽃이 급작스레 삭아버렸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듯 바스러져 버렸다.

그것은 비올라가 남긴 신호였다.

“최대한 아름답게 장식해 볼 생각 이에요.”

제논의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완숙한 경지의 살성(殺星)이었다.

“여러분은 모두 죽을 겁니다. 나의 공녀님을 위해한 죄를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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