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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81화 (181/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81화 눈이 부는 곳’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

비올라는 제논의 딸기 에이드를 마시며 한 가지 얘기를 건넸다.

“꽃을 선물할 거야.”

“공녀님께서 제게요?”

“응, 싫어?”

“그럴 리가요. 낭만적이어서 기쁘네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순수한 선물이면 좋겠지만, 아니겠지요?”

“다음에는 순수한 선물 줄게.”

문득 제논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도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잘 어울리겠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어쨌든 내가 주는 꽃이 무엇을 마셨는지는 알고 있지?”

“기적의 생명수 아레나를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그래.”

그래서 마거리트 꽃에도 기적의 권능이 깃들었다. 기적이란 본래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현상이다.

그것을 소설식으로 풀이하면 ‘설정을 파괴할 만큼 놀라운 것’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나는 초검을 배웠어.”

운이 좋은 건지. 필연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비올라는 초검을 익혔다. “아마도 나는 제논에게 줄 선물에 내 기운을 덧씌울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걸요.”

비올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윽고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꽃이 바스러지는 것이 신호라는 거지요?” “맞아.”

제논이 스산한 표정으로 웃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제 주인의 꽃을 시들게 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 ‘옛 무인들의 성지’로 향해가는 길. 방향감각은 사라졌다.

분명 눈이 오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변은 캄캄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딱 하나.

설인 족장 왁쿰의 커다란 발자국뿐이었다.

“툰드라, 내 목소리 들리지?”

비올라는 여러 번 물었다. 툰드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 옆에 있어. 그게 내 명령이니까.”

“..…다.”

아주 미세하지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 여기 있어.”

“…까?”

비올라는 이 어지러운 어둠의 공간이 그리 두렵지 않았다. ‘옛 무인들의 성지’는 작가가 직접 설정한 공간이다. [‘옛 무인들의 성지’는 시간과 공간을 왜곡시키는 특수한 권능이 깃든 곳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감각이 뒤틀리고 시간 축에도 큰 변형이 일어난다.

또한 그곳은 외로운 곳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극복해야만 하는 곳.]

지난 세월 동안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수련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함께’ 수련한 사람은 없었다. 들어갈 때는 함께 들어가더라도 나오는 것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게 작가의 설정이었다.

비올라는 그 설정을 부수기로 했다.

이 세계의 설정을 부술 수 있는 설정값을 가진 ‘남자 주인공’과 함께. 비올라가 다시 불렀다.

“나 여기 있어.”

“……다.”

턱! 무엇인가가 비올라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제법 따뜻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잘 찾아왔네?”

“공녀님이 제 옆에 있어주시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저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해요.”

궤변이었다.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서 ‘네 옆에 있어줄게’라고 말한 건 툰드라가 아닌 비올라였다.

“그건 네가 아니라 내가 약속한 거잖아.”

“결과적으로 옆에 있으면 약속을 지키게 되는 것이잖아요.”

툰드라는 비올라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비올라가 약속해 주었다.

비올라가 스스로 그 약속을 지킬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이 그 약속을 지키게 만들면 된다.

비올라가 툰드라 옆에 와주든, 툰드라가 비올라 옆으로 가든, 어찌 됐든 결과는 똑같으니까.

‘당신의 약속을 지켜내는 것도 제 사명이니.”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실례지만 손은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비올라도 직감하고 있었다. 이 공간은 방심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시시때때로 모든 감각이 뒤틀리고 변형되는 기이한 곳.

이곳에서 길을 잃으면 영영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느꼈다.

“툰드라.”

“네.”

“설인 족장의 이름은 왁쿰이 아니야.”

“그런가요?”

툰드라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비올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왁쿰은 그들의 언어로 제사장이라는 뜻이야. 제사라는 건, 제물을 바친다는 뜻이지.”

툰드라는 왼손으로 비올라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검을 꺼내 들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어느덧 왁쿰의 발자국이 멈추었다. 왁쿰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설인이 왜곡되어 이리저리 흔들려 보였다.

왁쿰이 가까이 다가왔다.

“제물. 바친다.”

[설인들은 바하카룬의 부활을 염원하는 종족이다.

설인들의 제사장 ‘왁쿰’은 제물을 선별하여 ‘바하카룬에게 제사를 올렸다.]

인간들에게 안내자’로 알려진 설인들은 사실 바하카룬의 추종자들이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왁쿰은 그중에서도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역할을 하였다.

‘옛 무인들의 성지’가 꾸준히 유지 될 수 있도록 사람의 생명을 바친것이다. 왁쿰이 툰드라 쪽을 바라보았다.

“너. 강해.”

수북이 덮인 털 사이로 붉은 입이 보였다. 입이 양옆으로 주욱 늘어났다.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 죽으면, 여기. 붕괴.”

왁쿰이 죽으면 이곳이 붕괴된다. 이곳에서 영원한 미아가 되어 소멸될 것이다.

“너. 돌아가. 제물. 얘.”

왁쿰은 제물로 비올라를 선택했다. 비올라에게서 ‘기적의 권능’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너. 먹으면. 왕. 부활.”

붉은 입에서 우악스러운 이빨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입이 굉장히 커졌다.

왁쿰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은 비올라에게 닿지 못했다. “공녀님께 손대는 것을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두 개의 팔을 가지고 있던 왁쿰은 이제 외팔이가 되었다. 왁쿰은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른 왁쿰이 계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죽으면, 너도, 죽어.”

그는 협상이라도 하듯 힘겹게 웃어 보였다. “너. 나. 살고, 쟤만 제물, 어때?”

“어떻기는.”

툰드라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언제 검을 휘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렇지.”

왁쿰의 둥그런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왁쿰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듯했다.

“멍청. 전부. 죽어.”

왁쿰은 변형된 공간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몸이 사라져 버렸다.

* * *

왁쿰이 본색을 드러내던 그 순간, 비올라는 ‘초검’을 운용했다.

제논에게 선물했던 꽃의 생기가 사그라들며 바스러졌다.

“너희를 모두 죽일 겁니다.”

제논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제논의 발밑이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눈이 부는 곳의 설인 마을조차 얼려버리는 극한의 냉기가 주변을 가득 에워쌌다.

“오랜만이네요. 이 힘을 사용하는건.”

라스본 빙검식 최종 오의. 빙검의 장송곡.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논이 일으킨 마나와 주변의 마나가 반응하며 일으키는 공명음이었다.

제국의 기사들은 제논의 이 기술을 보고 악마로 오해하여 추격했었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넌. 우리. 못 죽여.”

“우린. 안내자.”

설인들은 제논이 자신들을 죽이지 못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은 틀렸다. 제논을 둘러싼 설인들이 몰살당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신으로 이루어진 동산이 쌓였다.

이제 설인은 하나 남았다.

“우리. 죽으면, 성지. 못 가!”

그게 마지막 절규였다. 설인은 얼음 동상이 되었고, 이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져 부서졌다.

“상관없습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옛 무인들의 성지’는 사라져도 되니까요.”

그런 건 제논이 알 바 아니었다. “저는 그저 제 공녀님이 내린 명령을 수행할 뿐이니.”

비올라가 명령했다. 적을 말살하라고.

그러니 제논은 그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눈 폭풍이 불어왔다.

제논의 시선이 눈 폭풍 쪽을 향했다.

“다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눈 폭풍 속, 또 다른 설인이 보였다. 그 설인에게서는 불길한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오염된 비첸’과 같은 형상이었다.

“오염된 설인이 있을 줄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제 논도 멀쩡하지 않았다. ‘눈이 부는 곳’은 인류에게 그리 유리한 곳은 아니었다. 무리한 마나 운용으로 인하여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했다.

쿵! 쿵!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네가 나의 동족을 모두 죽였느냐?”

‘오염된 설인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강대한 기세가 느껴졌다.

제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싸우면 죽겠네요.’

오염된 설인이 나타나자 눈 폭풍이 더욱 거세게 불어닥쳤다. 이 폭풍에는 생명력을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제논이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저는 비올라의 집사이니.”

검을 들어 올렸다. “비올라의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비올라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보냈다. “당신의 명령. 적의 말살을 이행하겠습니다.”

문득 생각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논은 오늘이 비올라의 명령을 수행하는 마지막 날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는 확신도 있었다.

비올라가 명령을 내렸으니 ‘오염된 설인’도 죽을 것이다.

‘대신 저도 죽겠지만요.’

마지막 명령이니, 조금은 감성적이 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당신의 집사여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비슷한 명령을 들었는데요.”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여성이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눈보라를 헤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의 주인께서도 명령하셨어요.

적을 말살하라고.”

다만 한 단어가 더 붙었다. “함께.”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헤라 공녀님께서는 말씀하셨거든요. 비올라 공녀님은 혼자가 아니라고, 그러니 제논 집사도 혼자가 아니에요. 함께 싸우죠.”

헤라의 집사. 검귀라 불렸던 에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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