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82화
에르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뭐가 그렇게 당신을 절실하게 만들어요? 동료인데도 무서웠어요.”
에르사 앞에는 거대한 덩치의 ‘오염된 설인’이 쓰러져 있었다. 오염된 설인의 심장에 검을 꽂아넣은 사람은 에르사였다.
그녀는 과연 검귀다운 실력으로 오염된 설인을 토벌했다.
그런 그녀조차 제논의 살기에 위축될 정도였다. 에르사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린 제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에는 녹은 눈과 피가 뒤엉켜 굉장히 지저분했다.
“오래간만에 흥분을 좀 했네요. 미안합니다, 에르사.”
제논이 검을 갈무리했다. “제논 집사의 그런 모습 처음 봤어요.”
“누군가는 저를 괴물이라 불렀지요.”
“그럴 만도 하네요.”
설인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오염된 설인 조차 두려움 없이 상대했다. “제논 집사가 없었다면 나는 오염된 설인을 토벌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만큼 오염된 설인은 강했다. 일반적인 설인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싸워줘서 고마워요.”
“그저 우리는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단순히 그것뿐입니까?”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제논의 눈이 원래의 보라색을 찾았다. 이내 그의 호흡도 정돈되었다.
“그것뿐이라니요?”
“헤라 공녀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겁니까?”
에르사는 잠시 고민했다.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해요.”
“그럼요?”
제논의 눈에 옅은 기대감이 서렸다. “비올라 공녀님을 위해서였어요.”
“헤라 공녀님의 집사인 당신이 왜 저의 공녀님을 위해 움직였나요?”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예요?”
“그냥.”
어느덧 눈 폭풍은 멈추었다. 인류가 설인 마을을 발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녹지 않았던 이글루들이 녹기 시작했고 설인들의 시체는 눈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냥 제 공녀님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요.”
“비올라 공녀님은 제게 위로가 되어주신 분이에요.”
예전에, 비올라가 위로해 준 적이 있었다. ‘네 딸은 행복했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엄마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든든하거든.”
“네 딸은 무섭고 외롭기도 했겠지만, 그 이상으로 행복하고 즐거웠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 말은 에르사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리고 저의 공녀님께서 의지하고 사랑하는 분이기도 하지요.”
에르사는 딸을 잃었었다. 이후 그녀는 헤라를 만났고, 헤라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에르사에게 있어 헤라는 주인이며 또 다른 딸이기도 했다.
“잠자리에 무척 예민한 제 공녀님은 비올라 공녀님 옆에서만큼은 깊게 잠드시거든요.”
“파르아 자작령으로 향하던 그때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아요.”
그때, 에르사는 다짐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올라 공녀님이 단단히 저 높은 곳에 서 계셔야겠네요. ‘저는 비올라 공녀님을 지지하겠습니다.
에르사가 말했다.
“저는 비올라 공녀님에 편에 서기로 결정했었거든요.”
“그것참 다행한 일이네요.”
“네?”
“저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순간, 에르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인지하지 못했던,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냉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죠?”
“저는 비올라 공녀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제논도 툰드라에게 많은 자극을 받았다. 동대륙의 탁월한 암살자인 셰일란과 많은 교류를 이어가면서 제논은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닦았다.
〈벨라투의 그림자> 속 등장인물인 제논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래서 암살 기술도 조금 익혀놓았어요.”
제논은 생각했다. 나의 공녀께 방해가 되는 모든 장해물을 말살하자.
“제 공녀님의 미래에 방해가 된다.
면 이곳에서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이곳은 눈이 부는 곳. 이곳에서 죽이면 증거가 남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요.”
“………”
“혹시 화가 나셨나요?”
“아니요.”
에르사는 화가 나지 않았다. “든든한 집사라고 생각했어요.”
비올라는 날갯짓을 했고, 그 바람에 제논이 성장했다. 에르사는 제논의 영향을 받았다.
“본받고 분발해야겠네요.”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제논의 모습에, 에르사도 큰 자극을 받았다. 비올라가 모르는 사이, 주변인들이 점점 더 강해졌다.
* * *
툰드라는 비올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비올라의 손을 놓는 순간, 비올라를 영영 잃게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두려웠다.
“왁쿰이 죽었으니 ‘열풍’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설인은 ‘옛 무인들의 성지’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중에서도 제사장인 왁쿰은 하나의 ‘열쇠’였다.
왁쿰이 사망하면, ‘옛 무인들의 성지’는 바스러지고 열풍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열풍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툰드라가 알기로 ‘열풍’은 단체였다. 단체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눈보라가 멈추고 주변의 일렁거림도 점점 사라졌다.
삭막하고 메마른 땅이 나타났다.
“열풍은 인간이 만든 단체가 아니거든.”
비올라도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겨우 알게 되는 사실이다. ‘단체’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열풍은 단체가 아니었다. “악령들의 왕 바하카룬은 영웅들에게 봉인당하기 직전, 자신의 심장을 꺼내 조각냈어.”
그 각각의 조각들은 바하카룬의 의지를 품었다. 세상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자 하는 ‘순수한 악의’ 였다.
“그 조각들은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쳐.”
때로는 조각품의 형상으로, 때로는 보석의 형상으로, 때로는 인형의 형상으로, “그것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열풍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변질되는 거야. 그리고 ‘옛 무인들의 성지’는 가장 거대한 심장 조각이 잠든 곳이고.”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알고 있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람.”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한 여자가 보였다. 노란색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입술이 유독 붉었다.
겉감은 붉은색.
안감은 검은색.
금실로 수놓은 각양각색의 문양들.
소설 속에 묘사된 하이디의 모습과 같았다.
소설 속에 묘사된 옷은 내가 대신 얻었었는데.”
비올라가 입자 보라색으로 변했던 이 드레스. 원래는 하이디의 것이었다.
‘루이바르텐의 드레스를 얻지는 못했어도, 취향은 똑같다는 건가.
하이디가 걸어왔다.
‘이 옷을 내가 가지게 되었는데, 하이디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설정값이 유지되었다.
는 얘기야.’
비올라의 ‘나비효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하이디는 ‘물의 정령’과 계약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퐁퐁이는 나와 계약했는데.’
그럼 어떤 정령과 계약을 했을까. 그녀의 몸을 물보라가 감싸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서 모습을 드러냈는지도 잘 아는 것 같고.”
하이디가 씨익 웃었다. “네가 켈베론의 계약자야?”
“그래.”
하이디의 몸을 둘러싼 물보라가 옅은 붉은색을 띠었다. “안 그래도 켈베론의 계약자를 죽여보고 싶었어. 저번에 못 죽여서 아쉬웠거든.”
그 말에, 비올라는 하이디와 계약한 정령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블러드.”
***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는 ‘피의 정령왕’이 둘 존재한다.
하나는 하이디와 계약한 켈베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블러드’라 알려진 정령이다.
‘왜 블러드라는 생각을 못 했지?”
블러드는 살성을 지니고 태어난 정령이었다. 속성도, 계약자도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령왕이라 불리는 정령.
인간을 살육하고 미치게 만드는 데에 정신이 팔린 잔혹한 정령왕.
‘모든 것이…… 바하카룬의 목적과 너무 똑같아.”
말하자면 블러드는 ‘오염된 정령’이었다. ‘인간만 오염되는 게 아니었어. 본래 작품 속에서 ‘블러드’의 계약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블러드라는 정령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기술되어 있었을 뿐이다.
비올라는 이미 이 ‘블러드’와 만난 적이 있었다.
제논이 일부러 블러드를 받아들였고, 블러드는 제논의 의식을 지배하며 비올라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것은 비올라에게 있어 자연재해와도 같은 사고였었고,
‘도와달라고 말하렴. 네 자연재해를 막아줄 테니.’
그 사고를 막아준 사람이 메데이아였다. 하이디가 말했다.
“메데이아, 그 성가신 여자만 아니었어도 너를 죽여서 피를 맛볼 수 있었을 텐데.”
하이디와 블러드는 거의 동일인이나 다름없는 듯했다. 동조율이 너무 높아 하이디가 곧 블러드고, 블러드가 곧 하이디가 된 상태였다.
“뭐, 그때 큰 타격을 입은 덕택에 블러드와 계약할 수 있었지만.”
사실 하이디의 ‘정령 친화력’은 ‘블러드’와 계약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제논을 지배하는 것에 실패한 블러드는 존재에 큰 타격을 입었고, 제논에게 일부의 힘을 빼앗기기도 했다. 제논이 완숙한 경지의 살성을 획득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블러드는 약화되었고, 덕택에 하이디는 블러드와 계약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널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야. 네 피 맛이 궁금했거든.”
“나도 다행이야.”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미안해, 하이디. 나는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수 없어.”
“너를 포기하는 대가로 나는 소멸하겠지만.”
」 켈베론(퐁퐁이)은 피의 정령왕이 되고 싶지 않았었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
「‘나는 따뜻한 정령이고 싶은데.’」
퐁퐁이는 사실 따뜻한 아이였다.
꽃밭에 물 주는 것이 소원인 착한 정령이었다.
「‘나는 이제 꿈을 꾸지 못하게 되었어.」
하이디를 더 이상 지키지 않기로 작정하고 소멸을 받아들였을 때. 퐁퐁이는 물었다.
「“너를 원망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내가 처음 만난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그리고 소설 속 하이디는 대답했다. 「“운명은 바뀌지 않아, 켈베론.”」
그러나 비올라는 안다. 운명은 바뀐다.
이미 많은 사람이 변했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운명은 바꿀 수 있었고 오늘도 바뀔 것이었다.
퐁퐁이는 비올라를 만났고 비올라는 퐁퐁이의 삶을 바꿔줄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로 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어서.”
그것을 증명하기로 했다. “그렇지, 퐁퐁?”
비올라의 몸에서 물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툰드라는 하마터면 비올라의 손을 놓칠 뻔했다.
‘뭐지, 이 기운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대한 정령력이 느껴졌다. 블러드라 불린 저 불길한 정령이 내뿜는 기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 정도의 권능이었다.
격이 달라.’
블러드와는 격이 다른 힘이었다. 물보라가 한바탕 피어오르더니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비올라.”
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눈. 아름다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