툰드라는 비올라를 위하여, 비올라의 적을 베기로 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84화
퐁퐁이는 다시 돌아왔다.
뒷일은 툰드라에게 맡긴다는 듯 하이디에게 등을 내보이고 걸어왔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퐁퐁이의 모습을, 비올라는 넋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해?’
푸른 머리카락의 꼬마 아이가 며칠만에 저렇게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어른이 말했다.
“나랑 한 약속 잊으면 안 돼.”
목소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린아이의 음성은 이내 어른의 그것이 되었다.
“무슨 약속?”
“나랑 꽃밭에 물 주기로 했잖아.”
비올라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단순히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인데, 퐁퐁이를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아냐.”
퐁퐁이를 퐁퐁이로 대하기로 했다. ‘편하게 대하자.’
퐁퐁이는 퐁퐁이다. 아무리 미인이 되었다고 해도.
어른의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다고는 해도, 그래도 퐁퐁이는 퐁퐁이였다.
퐁퐁이가 가까워졌다.
“내가 안을게.”
퐁퐁이는 비올라를 끌어안았다. 원래 퐁퐁이는 비올라보다 더 작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커?’
예전보다 훨씬 커졌고, 그 품은 많이 따뜻했고, 이전보다 더 아늑했다. 따스한 미온수에 몸을 담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내 퐁퐁이는 물이 되어 비올라를 감쌌다.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죽이지 않아도 괜찮아.”
“응.”
비올라는 물 너머로 툰드라를 바라보았다. 툰드라가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툰드라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툰드라 역시 퐁퐁이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너는 공녀님의 피난처가 되어줘.”
비올라를 지킬 산성이 있다. “내가 공녀님의 검이 될 테니.”
순간, 하이디가 땅 밑으로 쑥 꺼졌다.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툰드라는 당황하지 않고 대검을 역수로 쥐었다.
이내 땅을 향해 푹! 찔러 넣었다.
“내가 냄새를 잘 맡는다고 얘기 안했었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더 이상 하이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귀곡성이 들려왔다.
듣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쭈뼛솟아오를 것만 같은 고주파였다.
툰드라는 땅을 향해 꽂아 넣은 대검을 회수했다.
그의 대검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툰드라가 비올라 옆으로 돌아왔다.
“적을 말살하였습니다.”
비올라는 잠시 침묵했다. 하이디는 그래도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악녀다.
‘거의 끝판왕에 가까운 악당인데.”
그 악당을 겨우 한 번의 찌르기로 없애버릴 줄은 몰랐다. 굳이 시기를 나누자면 지금은 〈벨라투의 그림자> 속 초중반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툰드라가 〈벨라투의 그림자) 후반부의 툰드라보다 더 강한 느낌이다. ‘아니, 툰드라가 어린 만큼 하이디도 어려서 그런가?’
하이디가 퐁퐁이와 계약하지 못했다는 변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요소를 다 따져보아도 툰드라가 비상식적으로 강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눈은 여전히 강하게 불어닥쳤다.
“그만하지?”
비올라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생각했지만 이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올라를 둘러싼 물이 파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뭘 그만하라는 거야?”
“언제까지 공녀님을 안고 있을 거지?”
“피난처가 되어주라며.”
“적이 없잖아.”
“적이 또 몰려올 텐데?”
“지금은 없잖아.”
“안전한 게 최고지.”
“지금도 안전해.”
“안 안전한데?”
“무엇이 안전하지 않지?”
“몰라. 아무튼 안 안전해.”
모습이 달라졌어도 퐁퐁이는 퐁퐁이였고 툰드라는 툰드라였다. “너는 성체가 되었다.
“정령에게는 성체의 개념이 없어.
난 그냥 어른이 되었을 뿐인걸.”
“그러니 공녀님에게서 떨어져.”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나는 비올라의 계약자이고, 친구고, 동반자라고.”
“나는 공녀님의 반려다.”
“헹! 반려견이시겠지.”
“삶에 동행한다면 그것이 곧 반려겠지.”
“그럼 나도 반려인데?”
툰드라가 대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정령왕을 베고 싶진 않은데.”
“에베베. 베어봐라. 그럼 너 비올라한테 혼난다.”
비올라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둘 다 그만하지 못해?”
하이디는 분명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악당이었지만 그녀가 끝은 아니었다. ‘옛 무인들의 성지’를 닫아야 ‘열풍’도 사라진다. “이제 곧 그들이 몰려올 거야. 우리끼리 싸우면 되겠어?”
퐁퐁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둘이 화해해. 악수도 하고.”
어느덧 어른의 모습이 된 퐁퐁이는 못 이기는 척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주 짧고 빠르게 말했다. “미안.”
툰드라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았다. “툰드라, 너는?”
툰드라도 마지못해 그 손을 잡았다. “미안.”
정령왕과 주인공. 두 절대자는 비올라 앞에서 유치해졌다.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툰드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 * *
대륙에는 7개의 마탑이 존재했다.
마탑은 마도 공학과 마도 문명을 이끌어가는 선구자들이었다.
현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는 대부분의 문명은 마탑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마탑의 마법사들을 존경했고, 제국을 비롯한 귀족들은 마법사들을 존중했다. 마탑의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반쯤은 치외법권으로 인정되기도 했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어지간한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좀 달랐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인지 잊었느냐!”
“어디긴. 마탑이지.”
쾅! 마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좀 단단하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목을 돌렸다. 우득- 소리가 났다.
남자의 이름은 살몬 브란디아.
원래는 대륙 끝에서 서방의 침략자들을 막아내고 있어야 할 브란디아공작이 마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마탑을 공격했다.
[마탑은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마도 병기의 사격이 시작될 것을 고지합니다.]
“마도 병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너 재밌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카이저. 용병왕이었다.
오늘 그는 대(對) 공성병기.
거대한 철퇴 형상의 ‘파성퇴(破城)‘를 든 상태였다.
카이저가 말했다.
“저번에 부수려다 못 부쉈는데.”
“마도 병기. 맞으면 아프냐?”
“그거? 간지러워.”
“그러냐?”
그 말을 믿고 브란디아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의 몸이 거인처럼 커졌다. 이내 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고, 몸 전체에서 뜨거운 용암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야. 더우니까 저기로 가.”
카이저는 콧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근데, 좀 부럽다?”
“뭐가?”
“나도 근육을 많이 키웠는데, 거인은 안 되던데.”
“거인이 되고 싶냐?”
“크면 좋지, 뭐.”
카이저는 이내 헹, 콧김을 내뿜었다. “덩치만 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무척 부럽지만 부럽지 않기로 했다. “내가 더 잘 부숴주마.”
마도 병기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건, 마도 병기의 마법 탄환이 모조리 브란디아 쪽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용암 거인 브릭타’의 힘이었다.
모든 마나의 흐름을 자신 쪽으로 끌어와 마법 공격을 끌어당겼다.
“으하핫, 간지럽지도 않구나.”
마도 병기의 공격은 용암에 모두 녹아버렸다. 브란디아 공작가에 계승되어 내려온 능력은 마법사들에게는 천적이었다.
이내 아기 사슴 용병대가 합류했고, 겨울성의 병력이 마탑을 에워쌌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겨울성의 칼이 ‘눈이 부는 곳’이 아닌 ‘인류에게로 향했다.
이건 전 대륙적으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큰 동요는 없었다. -황제 폐하의 승인하에, 겨울성이 움직였다. 밤 고양이의 수장 가이아는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대륙 전역에 소식을 뿌렸다.
정보에 혼선이 없도록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전했다.
– 겨울성의 전사들과 살몬 공작이 힘을 합쳤다. 이 역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겨울성은 ‘눈이 부는 곳’을.
브란디아는 ‘서방의 침략자들을 막아내기에 바빴으니까.
– 마리앙투 공작가, 위대한 전사들의 발족에 지지성명을 발표. 황제와 3대 공작가가 뜻을 함께했다.
이쯤 되니 다른 마탑에서도 대놓고 항의하기가 어려웠다.
황실과 3대 공작가 모두가 합심해서 움직인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들을 모두 움직인 사람은 비올라라는 사실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각종 소식지에서 속보가 빗발치는 상황.
황제는 셀리나의 집무실을 찾았다.
“셀리나, 그대는 정말로 괜찮다고 보오?”
“비올라 영애를 믿어야지요.”
비올라 영애는 열풍의 뒷배 중 하나로 ‘6마탑을 지목했다. “사실 저희도 마탑에서 인체실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잖아요.”
고위귀족쯤 되면 모두가 안다. 알고 있으나 쉬쉬했다.
그들의 인체실험 덕택에 수많은 마법이 발전했고, 그것이 많은 이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그랬지.”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사람들이 죽는 것만으로, 그곳이 유지되었을 리 없다는 사실도 알고 계실 테고요.” 단순히 설인이 제물을 바치고, 그곳을 찾은 무인들이 그곳에서 생명을 다하여 빼앗기는 힘만으로 ‘옛 무인들의 성지’가 유지될 수는 없었다. 옛 무인들의 성지.
그러니까 ‘열풍의 본거지를 유지 시켜 주는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뜻이다.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그 누구보다 높고.”
“옛 무인들의 성지와 가장 가까운 마탑.”
옛 무인들의 성지와 가장 가까운 영지는 바로 겨울성이다. 겨울성에서 가장 가까운 마탑이 바로 6마탑이었다.
“옛 무인들의 성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마탑주가 있는 마탑.”
6마탑주 시르송은 ‘눈이 부는 곳에서 수련했었다. “발 빠르게 힉슨 경에게 접촉해서, 불안정한 상태의 힉슨 경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 수 있는 사람.
6마탑주 시르송은 힉슨과 함께 ‘눈이 부는 곳에 갔었다.
힉슨이 직접 언급했었다.
‘저기 6마탑의 시르송도 거기서 나랑 같이 수련했어.”
셀리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6마탑주는 그 당시에 힉슨 경에게 마법을 걸어놓았을지 몰라요.”
마법은 미리 걸어 놓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정신이 불안정해지면, 비로소 마법이 발동되어 사람을 광인으로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은 시르송밖에 없어요.”
64 “게다가 그는 6마탑의 못난이 엘시나의 핑계를 들어, 더 이상은 제자를 받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으면서.”
“평소 새로 변해서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시르송의 행적을 완전히 밝혀내기란 어려웠다. 그는 변신 마법에 능통했고, 하늘을 날아다녔으니까. “평소 평판에 매우 신경 쓰며 집착에 가까운 명예욕을 보이며 이미지 메이킹에 힘써서,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법한 사람.”
그 모든 것이 시르송이 ‘열풍의 추종자’임을 가리키는 단서들이었다. 그러나 아직 증거는 없었다. “걱정 마세요. 6마탑에 분명 숨겨진 자료들이 있을 거예요.”
아직 증거도 없는 상황이지만 무턱대고 6마탑을 쳤다. 사실 황제로서도 큰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7개의 마탑은 현대 문명의 근간이었으니까.
그들이 단체로 반발하는 건 넬라크로서도 바라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주 강력한 원군이 둘이나 있잖아요.”
“두 명이나 있었소?”
셀리나가 웃었다. “누군지, 맞춰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