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과 때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87화
시르송은 절규했다.
“너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사단과 신원미상의 여자가 6마탑을 점거해 버렸다. 시르송은 마나를 구속하는 구속 도구들이 채워진 채 무릎을 꿇었다.
백금발의 늘씬한 미녀가 시르송 앞에 섰다.
“내 정체는 알아서 뭐 하게?”
헤론은 한 발자국 뒤에 물러서서 아셀다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공성전에 있어서 최강의 무력을 보여준 아셀다에게 보내는, 헤론 나름의 경의 표현이었다.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이냐?”
뒤쪽의 헤론에게도 소리쳤다. “헤론 공작, 당신 미쳤소?”
그리고 힉슨 뒤에 숨어 있는(?) 살몬을 향해서도 외쳤다. “살몬 공작,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입니까!”
살몬은 휘파람을 불며 모른 척했다. 그는 괜히 이 상황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괜히 불똥 튈라.
척 보니 아내는 지금 화가 난 상태다.
천하의 살몬 공작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사람.
바로 아내인 아셀다였다.
‘모른 척해야지.’
열심히 휘파람을 불며 힉슨 뒤에 숨었다. 힉슨은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그런다고 덩치가 숨겨지나……….”
“아무튼, 좀 숨겨줘.
사실 그는 아내가 여기까지 달려올 줄은 몰랐다. 아셀다는 서방 대륙 출신으로서 중앙 대륙의 대소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셀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대륙의 정세에는 관심이 없어.”
이들이 뭘 하든 상관없었다. “그래도 내 새끼 얼굴에 상처는 내지 말았어야지. 귀여운 얼굴에 상처났잖아.”
힉슨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덩치를 가진 우락부 락한 남자를 귀엽다고 말하다니.
힉슨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관점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한 관점을 가진 친구도 한 명 있었다. “내가 좀 더 귀여운 거 같은데.”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붉은 머리의 근육질 카이저였다. 험상궂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카이저는, 자신보다 살몬 공작이 더 귀엽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듯했다.
“그치, 힉슨? 내가 좀 더 귀엽지 않냐?”
“둘 다 안 귀여워.”
아셀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귀염둥이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지 뭐야.”
아셀다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가볍게 윙크했고, 휘파람을 불던 살몬은 오른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페일라가 누구야? 이 모든 걸 계획한 철혈 성녀가 있다던데?”
** 비올라가 말했다. “이 세계에는 신의 뜻이라는 것이 존재해.”
그사이, 백룡 페일라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역사의 기록과는 달리 그녀의 비늘색은 찬란한 은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탁한 잿빛에 가까웠다. 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구렁이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원에 가까운 삶을 얻게 된 대신, 다른 모든 것을 내놓아야만 했던 것 같았다.
“신은, 내가 당신을 죽이길 원했어.”
그것이 벨라투의 그림자)에 서술된 내용이었다. 「비올라는 백룡 페일라를 직접 베어 죽였다.」
이 시점에서는 비올라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소설에도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비올라는 페일라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올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소설 속 주인공답게 ‘우연’과 ‘기연’과 ‘행운’이 더해진 결과였다.
「비올라가 페일라를 죽일 수 있었던건, 비올라가 포션 비올라를 마셨기 때문이다.」
원작 속 비올라는 소설 중반부에 포션 비올라를 마시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비올라는 이미 포션비올라를 마신 상태였다. 바로 환영 만찬회에서, 가족들 앞에서 포션 비올라를 모두 마셔버렸었다.
「비올라는 포션 비올라가 듣지 않는 특이한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비올라를 서방 대륙의 언어로 표기한 뒤 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거대한 형상의 구렁이가 된 페일라는 굉장히 컸다. 높이가 10미터는 넘는 듯하였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비올라를 향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할까?”
페일라는 비올라를 ‘여제의 가면과 함께 한입에 삼켜 버리기로 했다. 그러면 지금 새어 나가고 있는 ‘불변’의 특성도 어느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것이리라. 그녀의 몸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의 움직임은 빨랐으나 몸이 너무 거대해서 상대적으로 느리게 보였다. “중요하지. 비올라를 서방 대륙의 언어로 읽으면 페일라로 읽히거든.”
물의 마술사 라엘. 그녀는 포션 비올라를 만들었다.
“물의 마술사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했어. 그게 오랜 꿈이었거든.”
만약 그녀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뒤 물의 정령왕 웨일의 도움을 얻어 ‘포션 비올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걸 헤론에게 건넸었다. 「“이걸 마시면 당신도 죽어요.”
“외로운 내 사람. 나와 함께 따스한 곳으로 떠나요.”
“같이 죽으면 덜 아파.”」
백룡 페일라가 비올라의 몸을 감싸고 옥죄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스로 많은 사람을 죽일수 없다고 생각했어.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어.
수많은 생명을 잡아먹은 다른 사람을 죽이면 되겠다.”
그게 바로 포션 ‘비올라’ 였다. 물의 마술사가 진정으로 죽이려고 했던 것은 ‘헤론 공작’이 아니라 백룡 ‘페일라’ 였다.
페일라는 입을 크게 벌리고 비올라의 몸을 집어삼켰다.
“비올라!”
“공녀님!”
퐁퐁이와 툰드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막상 페일라에게 삼켜진 비올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포션 비올라는 백룡 페일라를 죽이기 위한 포션이었거든.”
물의 마술사는 헤론에게 포션을 건었다. 헤론이라면 이 포션을 먹어도 죽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페일라가 그 포션을 마신 자의 피를 마시면.”
비올라는 단도로 손바닥을 그었다. 그녀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백룡 페일라는 죽거든.”
원작 속에서 비올라는 페일라의 송곳니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때, 비올라는 많은 피를 흘리게 되고 페일라는 ‘포션 비올라’에 중독되어 소멸한다.
“그게, 신의 뜻이야.”
설정값은 대부분의 경우 강력한 강제력을 가진다. 비올라의 피가 페일라의 혀에 닿았다.
피가 흘러, 페일라의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들어갔다.
“우웨에에에에엑!”
페일라는 비올라를 토해내기 위하여 애썼으나 비올라는 송곳니를 붙잡고 입안에 머물렀다. ‘조금 더.’
일부러 피를 더 흘려보냈다. 비올라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겼어.”
거대한 구렁이의 몸 이곳저곳이 울룩불룩 튀어 올랐다. 무엇인가가 안에서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꽤 아플 거야.”
전대 물의 정령왕 ‘웨일’은 포션비올라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고, 결국 라엘을 배신하게 된다.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고 정령계로 돌아갔다.
때문에 웨일은 많은 힘을 잃었고, 다시는 누구와도 계약할 수 없게 되었다.
물의 정령왕의 깨끗한 정령력 덕택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라엘은 예정보다 더 빨리 죽게 되었다.
어느새, 용언에서 풀려난 툰드라가 대검을 휘둘렀다.
그의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감히, 나의 공녀님을.”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의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서는 언급 되지 않았지만 작가의 설정집에는 존재하던 ‘금안(金眼)‘이었다.
모든 특별한 눈 중에서도 최상위권능을 가진 눈이며, 신의 뜻을 행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신의 뜻을 파괴할 수도 있을 정도로 거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눈.
그의 검에 강맹한 마나가 깃들었다. 그는 대검이 여러 갈래 가닥의 실선을 만들어냈다. “으아아아아악!”
수천 년을 살아온 백룡 페일라는 툰드라의 검을 버티지 못했다. 툰드라의 검이 스쳐 지나가는 곳은 곧 길이 되었고 허공이 되었다.
그의 검로를 따라 거대한 구렁이는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파스스-!
그의 검에 맞닿은 모든 곳이 희뿌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퐁퐁이의 도움을 받아 땅에 착지한 비올라는 반쯤 멍하니 툰드라를 바라보았다.
‘지친 거 아니었어?’
지금의 툰드라는 지쳤다고 볼 수 없었다. 툰드라는 지금 검무(劍舞)를 추는 무희였다.
그의 검술은 강렬하다 못해 경이로웠다. 백룡 페일라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 초에 불과했다.
백룡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비올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금안의 툰드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툰드라가 펼친 검술에 대해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위에는 ‘소멸’이라는 경지가 있어. 상대의 존재를 소멸시키고, 더 나아가 세계까지 베어내는 검의 경지야.”」
작품 후반부, 비올라를 사랑했던 툰드라는 일부러 칼에 찔려 죽어준다.
피폐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남자 주인공다운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당신이 그 경지에 오른다면, 나는 더없이 기쁠 것 같아.”」
그는 죽어가면서도 가볍게 웃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당신은 나를 추억하겠지. 나는 그거면 돼.”」
작품의 극후반부에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작품 극후반부 기준으로 비올라는 아직 ‘소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의 툰드라는 이미 소멸의 경지에 이르렀다. ‘본인이 뭘 한 건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무의식적으로 소멸의 경지에 발을 담근 것 같았다. ‘타고난 천재니까 의식적으로도 소멸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겠네.”
퐁퐁이는 딸꾹, 딸꾹 하고 딸꾹질을 했다. 퐁퐁이는 처음 알았다.
정령도 딸꾹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페일라만 베어낸 것이 아니었다. 페일라가 있던 공간 모두를 베어냈다.
그곳은 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완벽히 무(無)의 공간을 만들어 버렸다.
세계를 베어낸다는 것이 존재한다.
면 저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헤헤.”
저런 검이라면 정령왕도 소멸시킬 수 있겠다. “툰드라,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나눈 사실 너를 좋아했그든.”
비올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백룡 페일라까지 소멸시켰으니 이제 ‘옛 무인들의 성지’는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근데……’
알 수 없는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다. 눈보라는 그쳤지만 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하늘은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땅밑에서 검붉은 기운이 일렁거리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원작과…… 다른데?’
비올라는 직감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