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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89화 (189/201)

수많은 경험을 가진 힉슨조차도 처음 보는 ‘불길한 것’이 그곳에 있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89화 힉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검은 공간이 보였다.

저것은 끝없는 불길함이었고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있었다.

야금야금.

생명을 가진 무언가가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계를 잡아먹고 있다.

마치 세상을 좀 먹는 병균처럼.

저것에 닿은 모든 곳이 생명을 잃고 바스러졌다.

‘바위도, 풀도, 물도.

심지어 공기와 마나마저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힉슨이 느끼기에 저것은 완벽한 죽음의 기운이었다.

‘일단 피해야 해.’

힉슨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검은 공간’의 확장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다는 것.

“제논, 일어나.”

강철같은 체력을 지닌 제논은 금세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무슨 일인가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제논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카이저를 찾아야 할 것 같아.”

“용병왕을요?”

“그래.”

힉슨은 친구인 카이저를 걱정했다. “그놈, 완벽한 길치잖아.”

물론 비올라를 찾으면서 길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는 했다만, 그래도 힉슨 입장에서는 길치였다. “그놈은 꼭 위험한 곳을 찾아 들어가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길을 몰라서 헤매는데 도착한 곳은 꼭 역경과 고난이 있는 곳이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차라리 여기서 기다리죠.”

“여기서?”

“위험한 곳을 찾아오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면 이곳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제논은 안쪽의 상황을 보지는 못했지만 힉슨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제안에 위험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긴 한데.”

힉슨이 크게 외쳤다. “카이저!!!”

그러나 카이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이저가 뛰어올 때면 코뿔소가 뛰어오는 것처럼 지축이 흔들린다.

지금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안 되겠군.”

힉슨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야! 귀여운 카이저!

힉슨의 우렁찬 목소리가 과거 ‘눈이 부는 곳.

지금은 눈이 불지 않는 곳 여기저기에 널리 퍼졌다.

제논이 가볍게 웃었다.

“역시 귀여움에는 반응하시네요.”

아주 멀리. 정말 먼 곳에 카이저의 기척이 느껴졌다.

“제가 데려오지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글쎄, 일단 겨울성으로 가자고, 헤론이라면 뭔가를 알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제논이 먼저 움직였다. “용병왕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계울성에서 뵙지요.”

*** 셀빈은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코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괴로워.’

정신이 희미해졌다. 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었다.

그사이 브란디아의 육체는 강화되었고 그녀의 무력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 성장마저도 무색하게 만드는 강대한 적이 눈앞에 있었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니?”

“엄마…….”

아셀다의 환상은 끝없는 어둠이 되어 셀빈의 몸을 집어삼켰다. 셀빈은 그 거대한 존재감에 바들바들 떨었다.

“나조차 극복하지 못하면 어찌 브란디아의 후계자가 되겠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라, 셀빈.”

일어나지 못하면 넌 내 딸이 아니다. 내 딸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였니?

셀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을 다했다. 그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치열하게 이곳에서 버텼다.

“그래도 엄마를 넘어설 수 없는 걸어떡해요.”

아셀다는 너무 위대했고 셀빈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엄마가 너무 강한 걸 어떡해요.”

그녀의 눈과 귀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점차 숨이 막혀왔다.

마치 무거운 물에 빠진 것만 같았다.

“무서워요.”

“내 딸은 무서움을 몰라야 해.”

“아니에요, 무서워요.”

셀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엄마, 저 좀 안아주세요.”

차가운 대답이 들려왔다. “그냥 죽으렴.”

그 말에, 셀빈은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여태까지 많이 버텼다.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웠다.

“그게 엄마가 원하는 거라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버텨왔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옛 무인들의 성지’의 시련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죽어드릴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삶을 포기하려는 그 순간. ‘옛 무인들의 성지’의 제물이 되기 직전. 셀빈은 무엇인가를 느꼈다.

‘뭐지?’

꽃잎이 보였다. 보라색 꽃잎이었다.

‘이건…….’

보라색 꽃 폭풍이 휘날리고 있었다. 바로, 툰드라가 세계를 베어냈을 때였다.

자신을 둘러싼 무거운 물에 떨어져 내린 그것은 곳곳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셀빈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아공간을 열어 보았다.

‘언니의 꽃이야.

그제야 셀빈은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셀다는 진짜 엄마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셀빈의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셀빈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무거운 물이 증발했다.

셀빈의 몸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브란디아의 고유 특성인 ‘용암화’가 진행되었다.

“나를 사랑해.”

내가 비록 엄마를 넘어설 수 없어도. 내가 엄마를 이기지 못해도.

“왜냐하면.”

셀빈이 주먹을 내질렀다.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니까!”

쾅! 쾅! 셀빈이 연속해서 주먹을 뻗었다.

자신을 둘러싼 어둠을 부수었고, 자신을 좀먹은 세계를 깨뜨렸다.

“그리고 나는.”

잊고 있던 게 있다. 보라색 꽃잎을 보자 떠올랐다.

“나한테 꽃을 선물해 준 사람만큼 강해지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빛이 보이지 않던 곳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온몸에서 새어 나오던 피가 멈추었다.

“그래서 나는, 시련을 이겨내기로 했어.”

엄마한테. 그리고 언니한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 주먹을 내뻗었다. 살아 나갈 거야.”

** 제르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헉…… 헉…!”

그는 반쯤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그의 몸을 지탱해 줄 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검날은 모조리 상했고, 이제 곧 부러질 것이다.

저벅저벅.

상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고작, 그것밖에 안 되나?”

U 제르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겨우 그 정도 힘으로, 내 주인의 곁에 서려고 한 것이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툰드라의 목소리였다. 몸을 일으킨 제르미는 털썩! 하고 쓰러졌다.

더 이상은 기력이 없었다.

“너는 주인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가 다가와 제르미의 몸을 짓밟았다. “비올라 공녀님 옆자리는 나의 것이고.”

툰드라가 그의 검을 들어 올렸다. 역수로 쥐고서, 제르미의 목을 찌를 것만 같았다.

“나 하나면 충분하다, 제르미.”

툰드라가 킥, 웃었다. “나조차 극복하지 못한 주제에 네가 무슨 공녀님의 친구냐?”

그가 검을 내려치는 그 순간. 세상에 균열이 생겼다.

제르미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 기운은…!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제르미가 기억하는 기운보다 더 강맹한 기운이 느껴졌다. ‘툰드라다.

기억 속 툰드라의 기운보다, 지금 느껴지는 툰드라의 기운이 훨씬 강대했다.

세계 속에 스며드는 툰드라의 기운은 거대한 권능이 되어 제르미에게 다가왔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그것은 거창하지 않았다.

비올라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툰드라보다 더욱 강한 무인이 되고 싶었다. 주변에 보라색 꽃잎이 휘날리고 있었다.

‘비올라가 여기에 있어?’

그것을 직감했다. 제르미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정신을 좀먹던 모든 환상을 깨부수기 위하여 의지를 끌어올렸다. “진짜 툰드라는 너 같은 게 아냐.”

제르미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폭압적인 기운을 바탕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폭풍검’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툰드라의 사각을 점하고 네 방향으로 신속히 보법을 밟았다.

바람의 정령후 ‘스톰’의 바람이 불어왔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계약자!”

폭풍검의 계승자 제르미의 움직임이 가벼워졌다. 그는 툰드라를 넘어서기 위해 강맹한 힘을 버렸다. 힘만으로는 툰드라를 극복할 수 없으니까.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기민한 속도였다.

“미안하다, 스톰, 오래 걸렸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제르미에게 한 점이 보였다. 툰드라의 목이 커다란 점처럼 보였다.

‘찌른다.

그리고, ‘벤다.

툰드라의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한 번의 찌르기와 한 번의 검격이었으나, 실상은 스물여덟 번을 베었다.

쩌적-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갈게, 비올라.

친구가 저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

비올라 주변에 어둠이 내리깔렸다.

우주 속 미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깨워주어 고맙구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둘러싼 이 어둠 전체가 ‘바하카룬’으로 느껴졌다.

그에게는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다.

비올라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악령들의 왕, 바하카룬?”

“인간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더군.”

어두운 세계가 팽창했다. 그의 기운이 전역으로 뻗어 나가면서 곳곳에 검은 구멍을 만들어냈다. 힉슨이 발견한 그 ‘불길한 것’의 정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바하카룬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는 세상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신의 뜻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신은 이 세계를 창조했다. 설정을 짜고 줄거리를 만들고 세계 관을 입혔다.

“이 세계는 원래 백지였어. 아무것도 없는 완벽한 무(無)의 세계. 그런데 신의 의지가 새겨지면서 세계가 탄생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탄생한 것이 이 세계였으니까.

“누군가 개입하여 억지로 창조를 하였으니, 그 반대되는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것이 자연이야.”

작가가 세계를 창조했다. 바하카룬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는 ‘인위적인’ 세계였다.

세계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고, 인위적인 힘이 발생하여 창조가 이루어졌으니, 그에 반하는 힘이 생겨나야만 했다고 했다.

그것이 바하카룬이었다. “그러니 나는 모든 것을 자연으로 되돌릴 뿐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마저도. 모든 세계를 잡아먹고 최후에 잡아먹는 것은 자신이 될 터였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이다.”

어둠 가운데 더욱 짙은 어둠. 가장 어두운 어둠이 비올라와 툰드라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러니 너희가 먼저 소멸되어 기다리거라. 나도, 함께 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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