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카룬이 손가락으로 비올라를 가리켰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90화
비올라는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냄새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비올라는 이 비슷한 것을 바로 전에 경험했다. ‘이건….’
툰드라가 세계를 베어냈던 힘. ‘소멸’로 불리는 그 힘이었다. 툰드라보다 더 강렬했다.
아니. 바하카룬이야말로 소멸 그 자체였다.
“공녀님께서 말씀하셨다.”
툰드라가 검으로 어둠을 가리켰다. 누군가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 전체가 바로 바하카룬이었다. 어디를 베어도 바하카룬을 베는 것일 터.
“전심을 다하여 싸우라고.”
그래서 툰드라는 진심을 다하기로 했다. 비올라를 둘러싼 ‘소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인간으로서 그러한 경지에 오른 자는 두 번째 보는구나.”
숨쉬기가 조금 편해진 비올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툰드라가 황급히 비올라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툰드라의 소멸마저도……… 별로 소용이 없어.’
세계를 베어냈던 그 검마저도 바하카룬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에 그쳤다. 소설 극후반부의 경지를 뛰어넘은 툰드라인데도 그랬다.
‘이길 수 없는 걸까?’
태양왕 칸마저도 봉인하는 게 끝이었던 바하카룬. 그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소설 속 지식을 모조리 뒤져봐도,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봐도. 악령들의 왕을 봉인하거나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올라 주변에 보라색 잎새들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야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둡다.
그러나 어두워도 걷는다. 그게 비올라가 살아가기로 결심한, 비올라가 살아내는 방식이었다.
“힘의 격차를 그토록 느끼고서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단 말이냐?”
“그래.”
비올라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툰드라는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웃었다.
“나의 공녀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니.”
그러하니, 나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가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려 마나를 끌어냈다. 비올라는 정신을 집중하며 반지 속에 잠든 꽃밭을 통째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수천만 송이의 마거리트 꽃밭이 잠들어 있던 반지.
마도 명장의 힘이 담긴 반지를 통해 비올라의 초검이 운용되었다.
“네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권능을 가진 자라면.”
비올라는 이미 배웠다. ‘소멸’의 경지가 있다면, ‘생검’의 경지도 있다. 살성의 힘을 거꾸로 운용하면 생명을 살리는 힘이 된다.
비올라는 이미 경험했었다.
“그리고 네가 말한 진짜 세계라는 것이 균형을 맞추기를 원한다면.”
창조가 있으면 소멸이 있다. 소멸이 있으면 소생도 있다.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는 창조와 소멸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영원’으로 칭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나 중요한 건, ‘살고 싶다는 거야.’
죽고 싶지 않았다.
소멸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소생시키는 힘도 존재하겠지.”
정령의 기적수. 생명수라고도 불리는 아레나를 머금은 꽃밭이 바하카룬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너는 분명 태초부터 이 세계의 법칙에 속했을지 몰라.”
그러나, “나는 그 아니야.”
이 소설에 빙의자는 없었다. 이 세계의 법칙. 이 세계가 원하는 것. 그것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 거야.”
툰드라는 비올라 앞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녀님을 그저 지키는 것뿐.’
아까 느꼈다. 자신의 검으로는 바하카룬의 세계를 베어낼 수 없었다.
지금 바하카룬의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비올라였다.
비올라가 비올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는 비올라를 지키기로 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생기를 머금은 검이라. 소생을 논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알겠다.”
비올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바하카룬의 세계는 점점 짙어졌고, 비올라는 점점 지쳐갔다.
수천만 송이에 담긴 생명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내어 사용하는 것은 비올라에게도 크게 무리가 되는 행동이었다.
“나의 세계에 균열을 만들어낸 자는 네가 두 번째구나.”
비올라는 한 명을 알고 있다. 태양왕 칸.
비올라는 순간,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태양왕 칸은…….’
후대에 미래를 맡겼다. 그래서 친우들에게 권능을 나누어주었다. 그 위대한 영웅은 언젠가 이러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가 무엇인가를 준비해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 무엇인가를 남겼어.’
그러나 바하카룬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은밀하게. 그렇게 숨겨놓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바하카룬은 급해 보이지 않았다. “너희의 시간으로 벌써 1년여가 흘렀다.”
툰드라는 바하카룬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세계 전체가 자신을 주시했다.
“아무래도 저 기이한 힘을 가진 소녀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너를 먼저 소멸시켜야겠다.”
바하카룬은 이제 비올라가 아니라 툰드라를 없애기로 결심한 듯했다. 툰드라는 비올라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기운을 느꼈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용언보다 더 상위 등급의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자신을 뒤덮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올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
‘툰드라, 조금만 버텨줘.’
알아내야 했다.
태양왕 칸이 무엇을 안배해 놓았을지.
‘태양검.’
초검을 운용하는 한편, 아공간에서 태양검을 꺼냈다. 그 검을 본 바하카룬이 반응했다. “오랜만에 보는 검이로구나.”
그에게서는 분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랜만에 보았다는 ‘사실’을 감상처럼 말했을 뿐이다.
‘진실석.’
진실석의 조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벨라투의 진안과 브란디아의 강인한 육체.’
그것들은 빌려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설령 빌려올 수 있었다고 해도, 그건 너무 뻔한 것들이었다. 그때.
비올라는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반대로, 바하카룬에 섰던 백룡의 힘이라면.’ 여기까지 오는데 페일라가 남겼던 것들이 반드시 필요했었다.
거의 파편이 되어버린 ‘여제의 가면’과 ‘백룡의 피’.
‘어쩌면.’
그것조차도 태양왕 칸의 안배 아니었을까.
어찌 되었든 여기까지 오기 위해선 페일라의 것들도 필요했었으니까.
메리사 공작으로부터 피가 담긴 포션들을 받아왔다.
비올라는 왼손으로 포션을 꺼냈다.
‘반응이 있어?’
이 세계가 움찔 떨렸다고 느꼈다. 분명 이 피와 연관이 있었다.
‘아.’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백룡 페일라는, 그 누구보다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고 싶어 했어.”
그 강렬한 열망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왔다. 죽음을 거부하고 수천 년을 살았다.
그 피에는, 그 절실함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을 조금은 어그러뜨릴 수 있겠지.”
비올라는 지체하지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툰드라의 몸이 흐릿하게 변한 상태였다.
‘안 돼.’
툰드라를 지켜야 했다. 비올라는 포션을 깨뜨렸다.
그녀의 손을 타고 ‘백룡의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익-!
소리와 함께 피가 증발했다.
공간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며 그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어둠은 마치 상처를 회복하는 것처럼 구멍을 메워버렸다.
바하카룬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머리를 쓰고는 있으나, 부족하다. 더, 보여줄 것은 없느냐?”
백룡의 피가 반응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뭘 더 할 수 있지?’
해야 했다. 툰드라가 사라져 간다.
“툰드라, 정신 똑바로 차려. 소멸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말에 툰드라의 몸이 다시 진해졌다. 다시 연해졌다.
다시 한번 진해졌다.
또다시 연해졌다.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툰드라의 몸이 점점 더 진해졌다. 툰드라는 비올라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소멸에 제 항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바하카룬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바하카룬.”
“그래. 나의 이름은 바하카룬이다.”
비올라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아.’
만약 툰드라와 비올라 자신을 소멸하려고 했다면 진작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하카룬은 그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비올라와 툰드라를 살려두었다.
게다가 ‘더 보여줄 것이 없느냐?’ 라고 친절히 물어보기까지 했다.
저건 도발이 아니었다.
바하카룬의 진심이었다.
왜냐하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하카룬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소멸을 강력하게 원하는 존재인 거야.’
세상을 모두 소멸시키고, 이후 자신도 소멸시키겠다고 했다. 바하카룬의 최종 목적은 본신의 소멸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너를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이 뭐지?”
“나를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
세계는 잠시 침묵했다. 이내 말을 이었다.
“백룡의 피가 세계를 적시고.”
그것은 이미 만족되었다. “나의 권능을 잡아먹고 버틸 수 있는 강인한 것이 나타나, 진실석을 머금은 채 나의 권능을 일시적으로 집어삼켰을 때. 신을 거역할 수 있는 자가 태양검으로 나를 찔러야 한다.”
세계의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백룡의 피는 흘렀으나, 내 권능을 집어삼킬 강인한 것이 없구나.”
그리고 그때. 쾅! 쾅!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의 초검이 생검의 기운으로 생채기를 냈던 그 공간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언니!”
세계에 금이 갔다. 아까와 똑같이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비올라 언니!”
와장창! 세계가 깨지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빈 브란디아.
마법을 포함한 모든 ‘이능’을 집어삼키는 용암 거인의 후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