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91화
비올라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많이 컸잖아?’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텨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비올라가 기억하는 셀빈보다는 훨씬 성숙했다.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그 아이는 비올라보다 키가 컸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비올라를 와락 끌어안고서 볼을 부볐다.
“언니, 키가 왜 작아졌어요?”
“네가 큰 거야.”
비올라는 셀빈을 얼른 밀어냈다. 만남을 기뻐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네 힘에 대해 들은 적 있지?”
“제 힘이요?”
“그래, 마법을 빨아먹는 힘.
“아!”
아마 살몬 공작도 그 힘을 사용하여 6마탑을 공격했을 것이다. “알아요.”
“그럼 그 힘을 사용해.”
셀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거 하면 안 예뻐지는데.”
언니 앞에선 예쁘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셀빈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네요.”
셀빈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브란디아 가문 특유의 힘 ‘용암 거인화’가 진행되었다.
그녀의 몸이 굉장히 커졌고 피부가 붉어졌다. 붉어진 피부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전 뭘 하면 될까요?”
“소멸을 잡아먹어야 해.”
셀빈은 침을 꼴깍 삼켰다. 머리 위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퐁!
하고 용암이 솟아올랐다.
“굉장히 강력해 보이는데요.”
“그래.”
셀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소멸을 잡아먹으면 셀빈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요.”
바람이 불어왔다. 셀빈만 이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비올라.”
툰드라만큼 훌쩍 성장한 제르미가 보였다. 이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그의 미모는 빛을 발했다. “네 친구가 되어주기로 약속했고.”
제르미는 직감했다. 지금은 한가로이 인사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공간 자체가 ‘적’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데.”
주변을 둘러보았다. 툰드라의 몸이 약간 투명화 상태가 된 것을 발견했다.
“나는 무엇을 하면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셀빈과 제르미가 나타나 준 것은 행운이었다. 비올라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기연.
‘나는 주인공이니까.’
원래 주인공에게는 기연과 행운이 뒤따른다. 그건 소설의 제1법칙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주인공이면 그런 기회를 놓치면 안 돼.”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비올라는 반지를 빼내어 제르미에게 건네주었다.
“부탁이 있어, 제르미.”
“무엇이든.”
“이 반지를 들고 겨울성으로 가.”
본래 비올라는 툰드라와 함께 ‘옛 무인들의 성지’를 잠재우려 했다. 그러면 열풍도 자연스레 사라질 테니까. 그렇게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가서 내가 너무 오만했다고 전해줘.”
툰드라와 둘이서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버지의 힘인 진안도 필요하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나와 툰드라 둘이서는 할 수 없어.’
지금쯤이면 6마탑도 정리되었을 것이고, 옛 무인들의 성지’도 힘을 잃었으니 열풍 추종자들도 세가 기울었을 것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도와주러 올수 있을 것이다. “도와달라고, 내 옆에 서달라고 전해줘.”
‘옛 무인들의 성지’에 갇혀 있던 제르미는 저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비올라의 말을 가슴속에 담았다. 제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는 비올라의 증표가 되어줄 것이다.
“겨울성으로 갈게. 조금만 버텨줘.”
다행히 이 세계는 아직 열려 있었고, 제르미가 ‘옛 무인들의 성지’에서 특히 중점적으로 갈고닦은 것이 바로 ‘속도’와 ‘체력’ 이었다. 순수 힘과 검술만으로는 툰드라를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제르미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버텨줘. 금방 돌아올게.”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옛 무인들의 성지’가 멀어지기 시작했고 제르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한 줄기 바람만이 남았다. 그 바람이 겨울성으로 향했다.
* * *
엘프들의 여왕 하모나는 꿈을 꾸었다.
카레나의 중앙수에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꿈속의 하모나는 비석 앞으로 다가가 글자를 읽어보았다.
[원한과 증오와 복수 대신.
용서와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이가 있어.
어울릴 수 없는 것을 어울리게 하고.
조화롭지 못한 것을 조화롭게 하여.]
저번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문장들이 쓰여 있었다. 꿈속의 그녀는 또다시 확신했다.
‘계시야.’
이건 꿈을 통해 전해지는 신의 메시지였다. 전에는 신의 메시지가 흐릿해서 보이지 않았었다.
[아이의 몸에 담긴 기적의 마나가…… 진정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흐릿했던 부분에서 글자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아이의 몸에 담긴 기적의 마나와 도움을 청하는 자의 간구가 만나, 진정한 신의 뜻이 그 자리에 강림하리.]
하모나는 그 즉시 겨울성으로 향했다. 계시의 위에 언급된 ‘아이’는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
현재 엘시나가 키우고 있는 베나토가 바로 그 아이였다.
황급히 겨울성에 도착한 하모나는 곧바로 헤론 공작을 찾았다.
“계시의 뒷부분을 알아냈어요.”
반쯤 광인이 되었던 헤론은 하모나의 등장에 정신을 차렸다. “말해보아라.”
“기적의 마나와 도움을 청하는 자의 간구가 만나 진정한 신의 뜻이 강림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 엘시나가 헤론을 찾았다. “기적의 마나라면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지난 1년간 마탑의 못난이 엘시나와 전직 기적의 신관 엘바토는 ‘신관 양성’ 프로젝트에 힘을 기울였었다. 그리고 그들은 커다란 성과를 이뤄냈다. 그들은 실제로 신관들을 양성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 당연히 많은 신전이 거품을 물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관은 가짜신관이다.
우리는 결코 그들을 신관으로 용납할 수 없다. 신전 세력의 반대가 워낙 격렬하여 엘시나와 엘바토는 양성한 신관들을 전면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엘시나가 헤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올라 공녀님이 가르쳐 줬어요.
기적의 아이는 베나토라고.”
그것이 실마리였다. “저희의 이론만으로는 사람들을 신관으로 각성시킬 수 없었는데.”
기적의 아이가 기적을 일으켰다. “베나토의 손에 닿은 사람들은 신관으로서 각성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수많은 신관이 생겨났다. 수련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수많은 신관.
아직 신전의 신관들처럼 강력한 권능을 행사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은 분명 신의 힘을 빌려 쓰고 있었다. “그러니 계시에서 말하는 ‘기적의 마나’란 우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신관의 힘을 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헤론은 순간 무엇인가 빠른 것이 겨울성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뭐지?’
마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존재감과 속도는 마치 쾌속으로 대변되는 대마물 ‘카를란’ 보다 더욱 빠르고 강맹했다. 그는 순식간에 겨울성의 성문을 지나쳐 공작저까지 발을 들였다. 겨울성의 주요 전력은 현재 ‘눈이 부는 곳을 탐색하고 있었고, 제르미를 막을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쾅!
문이 열렸다.
제르미는 황급히 뛰어들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제르미가 반지를 내밀었다. 헤론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내해라.”
*** 제르미는 깜짝 놀랐다.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속도에 열중했다.
거기에 정령의 도움까지 받고 있다.
적어도 속도에 있어서만큼은 헤론에게도 밀리지 않을 거라 자부했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헤론은 제르미보다 더 빨랐다. “빨리 오지 않고 뭐 하느냐?”
주변 세계는 실선이 되어 사라질만큼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으나 헤론에게는 성이 차지 않는 듯했다. 제르미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표식을 남겨야 합니다.”
헤론은 마음이 급했으나 더 이상 제르미를 닦달하지는 않았다. 딸이 도와달라고 말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식이 필요했다. 길치인 카이저조차 찾아올 수 있을 표식이.
“길을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되겠지.”
헤론은 그의 독문병기 ‘혹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눈이 멈춘 ‘눈이 부는 곳에 거대한 길이 생겼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골짜기가 순식간에 생겨 버렸다.
“가자.”
이후, 헤론과 제르미의 발자취를 좇는 무리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살몬 브란디아 공작과 창천무후 아셀다도 있었다.
아셀다가 가볍게 웃었다.
“중앙대륙에 헤론이 있고, 서방대 륙에 아셀다가 있다고들 하던데.”
그 말은 틀렸다. “헤론이 이렇게 강한 자였어? 나랑 비교될 수준이 아닌데?”
흔적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헤론은 자신보다 몇 수는 더 강한 무인이었다.
살몬은 헛웃음을 지었다.
“나랑 붙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살몬의 기억 속 헤론보다 지금의 헤론이 몇 곱절은 강했다. 최근 몇 년간 어마어마한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다.
제논이 따라붙었다.
“단순한 무인의 성취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제논은 힉슨, 카이저와 함께였다. 제논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달리는 반면, 힉슨과 카이저는 공룡처럼 뛰었다.
힉슨이 말했다.
“무인이라서 강한 게 아냐. 아버지라서 강한 거지.”
이들 중 근력은 가장 강하지만 체력이 약한 카이저는 핵핵댔다. 제논이 슬쩍 그의 다리를 걸었다.
방심하고 있던 카이저는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야, 뭐 하는 거냐!”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또 다른 원군들이 올 겁니다. 그들을 호위해서 함께 와주시길.”
그들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카이저는 몸을 털며 일어섰다.
“힘들어서 멈춘 거 아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변명했다. “나는 호위를 해야 해서 여기 남은 거다.”
*** 한편, ‘어둠’에 갇힌 비올라는 슬슬 한계임을 느꼈다. 그토록 강인한 육체를 물려받은 셀빈의 몸도 흐릿해졌다.
“셀빈, 정신 차려.”
“네, 언니.”
꼬박꼬박 대답은 잘했으나 셀빈도 이제 한계에 이른 것 같았다. 바하카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보여줄 것은 없느냐?”
여태껏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 없던 바하카룬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자신이 소멸될 수 있으리라, 조금은 기대했던 모양이다.
비올라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내 몸도 없어질 거야.’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깜빡, 깜빡, 수명을 다한 전구 같았다.
최선을 다했는데.’
포기하지 않기로 했는데 마음이 자꾸만 약해졌다. ‘소멸’이라는 힘은 육체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좀먹었다. 그런데 그때, 비올라의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다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일 수 없는 걸 죽이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비올라가 비릿하게 웃었다. “향긋한 피 냄새가 그립네.”
비올라의 정신이 약해진 틈을 타, 원작 속 여주인공. 진짜 ‘비올라’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