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93화 삼 일 전.
헤론은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제르미는 헤론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잠시 체력을 회복하며 헤론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베는 것이 아냐.
어딘가를.
무엇인가를 확실히 베고 있었다.
헤론은 진안의 힘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상태.
그가 검을 휘두르면 일대에 폭풍이 불었고 땅이 울렸다. 대마물들은 헤론의 기세에 눌려 멀리 도망쳤다.
제르미도 사실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엄청난…… 힘이다.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울 만큼의 강맹한 힘이 느껴졌다.
이건 힘이 아니라 검으로 행사하는 권능이었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갈라졌어.”
헤론이 서 있는 세계가 두 동강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메데이아가 동참했다. “아버지, 저도 함께할게요.”
제르미는 몇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윽고 힉슨이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논과 카이저도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저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르미를 향해 물었다.
“이봐, 꼬맹이. 저 둘은 뭐 하고 있는 거냐?”
“저도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저 두 분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겉으로는 웃고 있으나 그는 오른손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었다. 그 오른손 주먹이 가볍게 떨렸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집사 제논은 너무나 초조했다.
‘길을 찾아내셔야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힘.
진실을 꿰뚫어 보는 ‘진안’의 힘이라면 나의, 아니, 우리의 공녀님께 닿을 수 있겠지요.
그래야만 합니다.
제논은 침착을 가장한 채 헤론과 메데이아를 지켜보았다.
어느덧, 그들이 검을 휘두르는 곳에 검은색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헤론은 직감했다.
‘길이 열리고 있다.
저 안에,
‘비올라가 있다.
그걸 생각하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딸에게 닿는 것이다.
‘비올라.’
비올라의 이름을 가슴에 담았다. 진안으로 길을 보았다.
진안은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비올라가 위험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
비올라가 말했었다.
울보 아빠 두고 어디 가지 않는다 .
고,
‘그러니 거기 있거라.’
약속했다. 어디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마도 명장의 역작이자 헤론 공작의 애검 ‘혹한’ 이 박살 났다.
명검이라 칭송받는 그 검조차 헤론의 강대한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혹한이 부서짐과 동시에 자그마한 틈이 열렸다. “내가 먼저 가겠다.”
메데이아가 검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뒤따라가겠습니다.”
헤론의 몸이 사라졌다. 아주 작은 틈. 헤론은 이 세계와는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그러나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제르미와 셀빈도, 비올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어딘가에 비올라가 있을 것이다.
헤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보이지 않아.”
그는 마나를 소진하여 형상화시켰다. 그것은 ‘검의 형상’이 되었다.
극의에 이른 무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인 ‘오러 소드였다.
그 오러 소드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러 소드 안에 소멸의 경지를 담았다.
헤론은 스스로가 소멸의 경지’를 검에 담았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길 뿐.
‘비올라의 흔적을 찾아야 해.’
제르미도, 셀빈도 그 흔적을 찾았다고 했다. 비올라가 바하카룬의 세계에 생채기를 냈다고 했다.
그 생채기에는 비올라의 향이 남아 있다고 했다. ‘찾았다. 헤론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담긴 ‘소멸의 경지는 소멸과는 정반대로 작용했다. 모든 것이 극의에 이르면 그 성질이 바뀐다.
극의에 이른 무인은 ‘생검을 구현할 수 있다.
사람을 살리는 검.
비올라를 살리겠다는 아버지의 일념이, 헤론을 그 경지로 이끌었다.
화악~!
빛이 새어들어 왔다.
비올라의 생검보다 훨씬 더 거대한 기운이, 아버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보인다.
그리고 보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나의 아이가.
“비올라.”
그 아이의 눈에 피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히죽 웃으며 툰드라를 찔렀다. ‘비올라가 아니야.’
예전의 헤론이었다면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헤론은 비올라의 저 모습에 반하여 비올라를 입양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저 비올라는 가짜 비올라였다.
진짜 비올라는, 진짜 나의 딸은, 저 의식 속 세계 어딘가에 갇혀 울고 있을 것이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군.
침착해야 하는데 침착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이 성적일 수 없었다.
아버지란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이성적이지 못하게 된 아버지는 오늘 기적을 염원했다. 단 한 번도 허황된 꿈을 꾸지 않았던 헤론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 메데이아는 눈을 크게 떴다. ‘길이…… 크게 열렸어.’
이건 아버지의 힘이 분명했다. 어두운 세계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메데이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 문을 열어주셨어요.”
헤론과 메데이아가 작은 틈을 만들었다. 이내 헤론이 들어가서 큰 문을 열었다.
모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용병왕 카이저가 쿵! 쿵! 뛰기 시작했다.
“흐흐, 친구를 도와주러 가볼까나.”
“그렇게 느려서 쓰냐?”
흑경 힉슨은 용병왕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마치 두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가 달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제논이었다.
제논은 그 둘을 지나쳐 빠르게 ‘검은 세계’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에 반해 창천무후 아셀다와 살몬브란디아 공작은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었다.
아셀다도 어두운 세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쯤 되면 철혈 성녀가 정말 궁금해지네.”
도대체 그 아이가 어떤 아이길래.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영웅들이한데 모여 이토록 갈망하고 있는가.
“궁금하니 어쩔 수 없지.”
아셀다가 피식, 웃었다. 이건 철혈 성녀를 구하기 위한 거 룩한 사명이라기보다는 그냥 호기심이야.
호기심에 그 아이를 구해보고 싶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걸을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좀 데려가 주십시오.”
노인이었다. 그는 오른손에 종려나무 지팡이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체격은 작고 왜소했는데, 얼굴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
성질머리가 꽤 있어 보여 인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살몬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당신은 엘바토 영감?”
엘바토 영감을 데려온 사람은 다름아닌 헤라의 집사 에르사였다. 엘바토가 말했다.
“저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셀다가 뒤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상당히 많은 짐짝을 데려온 것 같은데.”
저만치 멀리. 흙구름이 일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평이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아셀다가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어중이떠중이 들을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아무런 도움도 안 돼.”
헤론 정도 되는 극의에 이른 무인이 겨우 길을 열었다. 한 명, 한 명이 공성병기 수준의 무인들이 비올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저런 수준의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다. “부탁합니다.”
아셀다는 엘바토 영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좋아.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
아셀다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살몬이 따랐고, 그 뒤를 엘바토와 에르사가 따라 걸었다. 아셀다는 앞장서서 ‘헤론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걸었다.
뒤쪽의 에바토 영감을 힐끗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엘바토는 아셀다 자신의 도움 없이는 단 1초도 이 공간에서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곳을 둘러싼 ‘어둠’은 소멸의 힘을 내포한 권능.
엘바토는 아마 지금 숨조차 쉬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엘바토는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댔지만 꾹 참고 걸었다.
‘그래도 마음가짐은 기특하네.”
아셀다는 마나를 일으켜 엘바토를 도와주었다. 무엇이 저 노인을 저토록 간절하게 하는가.
곧 끝날 것만 같은 생명의 불꽃을, 왜 저렇게 아낌없이 불태우려 하는가.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아셀다는 이내 비올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살기군.”
저렇게 어린아이가 저 정도의 살기를 내뿜을 수 있을 줄이야. 바하카룬의 세계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저쪽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저게 전부라면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는데.”
살성(殺星)에 잡아먹힌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응당 무인이라면,
자신이 가진 힘을 자연스레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가진 힘에 잡아먹히는 것은 훌륭한 무인이라 할 수 없다.
그때, 엘바토가 말했다.
“비올라.”
그의 말은 비올라에게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엘바토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나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
엘바토는 수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목표였고 사명이었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기에, 그것이 그저 이상일 뿐이기에. 과거의 엘바토는 그것에 절망하고 엘프들의 숲으로 도망쳤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그의 뒤로 수많은 ‘평범한 사람’이 섰다. 저들은 모두 약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신관에서는 ‘가짜 신관’이라 배척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미약한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엘바토와 엘시나는 수많은 신관을 양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은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셀다는 의아했다. ‘저들이 어떻게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지?’
어느덧, 에바토 역시 편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윽고 아셀다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들에게서 새어 나오는 신의 힘이… 이 세계를 몰아내고 있잖아’한 명, 한 명은 미약했다. 그러나 그것이 모이고 모여 강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힘이 이 ‘어두운 세계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엘바토가 담담히 무엇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