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95화 살몬 공작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
툰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툰드라는 어느새 살몬 앞까지 와 있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악령들의 왕 바하카룬의 힘을 받아들이라는 거지?”
“네.”
살몬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내가 왜?”
살몬은 딸을 찾았다. 사실 살몬에게 중요한 사람은 셀빈이었지, 비올라가 아니었다. 비올라에게 협력한다고는 했지만 이토록 큰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바하카룬의 힘을 몸에 받아들이라니?
“나는 딸도 있고 아내도 있는 사람이야. 그런 부탁은 총각 살몬에게 했어야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가족들의 안위였다. 그때, 아셀다가 말했다.
“내 남편 멋없네.”
그러자 살몬이 대답했다. 그의 태세 전환은 굉장히 빨랐다. “물론 유부남 살몬은 더욱 잘하지.”
괜히 민망해졌는지 크흠, 헛기침을 한 뒤 변명했다. “왜냐하면 난 가장이고, 지키는 데 익숙한 사람이거든.”
살몬이 진실석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기이한 감각이 들었다.
진실석이 액체가 되어 온몸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것이 보였다.
‘죽고 싶어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지 않았다.
어떤 거대한 염원’이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느껴졌다.
‘저기다. 마치 이 어두운 세계의 핵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 거대한 기운이었다.
‘엄청나네..’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용암 거인화가 진행되었다.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에게 오라, 같잖은 악령들의 왕이여!”
바하카룬의 권능이 ‘용암 거인’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가 용암 거인을 덮었다.
치이이이익-!
증기가 뿜어졌다.
이 세계 전체가 달아올랐다. 마치 활화산이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와, 이거, 까딱하면 죽겠는데.’
살몬 공작은 죽음을 직감했다. 용암 거인 브릭타의 힘을 계승했지만, ‘바하카룬의 소멸은 그야말로 강대한 권능.
‘오래는 못 버틴다. 그의 의식세계에는 저 ‘소멸 덩어리’와 ‘검은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깥의 상황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그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 살몬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의 신관 엘바토의 희생.
수많은 신관과 여왕 하모나가 완성한 성가.
이 두 가지 요소가 ‘생명의 권능’을 불러일으켜 살몬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살몬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툰드라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주었다.
툰드라는 전에 없던 활력감을 느꼈다.
무엇인가 새로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살몬 공작은 살몬 공작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툰드라는 〈벨라투의 그림자> 속주인공이었다. 원작 속 비올라를 사랑하였고, 그 때문에 비올라에게 죽어주는 비운의 주연.
만약 비올라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벨라투의 그림자> 속 세계는 툰드라가 지배했을 것이다. 툰드라는 세계관 속 최강의 설정을 부여받은 존재였다.
덕분에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알 것 같아.’
엘바토 영감이 어떻게 해서 기적을 일으켰는지. ‘나를 소모하여 기적을 일으킨다.
보지 않았으면 몰랐으되, 이미 보아버렸다.
본 순간 그는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동자를 힐끗 돌려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공녀님을 지킬 수 없다. 그는 직감했다. 엘바토의 기적으로도.
하모나와 신관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살몬 공작도.
그 누구도 ‘바하카룬’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이어야만 했다.
‘내가 해야 해.’
그럼 나는 죽어 없어지겠지. 태양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살몬 브란디아 공작이 본것과 같은 것이었다.
소멸의 원념.
자신의 소멸을 바라는 권능 덩어리.
‘저것을 벤다.
저것이 부르고 있었다.
자, 나를 찔러다오.
나를 없애다오.
진정한 죽음을 경험하고 싶구나, 아이야.
그곳을 향해 걸었다.
‘죽고 싶지 않다.
그는 죽음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으면,
더 이상 비올라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비올라 옆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했고, 비올라가 옆에 있어주겠다고도 약속했다.
어느덧 비올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
이제 이 세계에는 완벽히 홀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말을 할 수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태양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뒤 마나를 끌어올렸다.
‘생명을 소모하여 기적을 일으킨다.
이곳은 아마도,
바하카룬과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태양검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을 마주한 검은색 덩어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마치 흥분한 것처럼.
“그러나 다행입니다.”
툰드라는 검을 들어 올렸다. “비록 저는 곁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곁에 좋은 사람이 많이 있어서.”
그 옆에 내가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툰드라는 잠시 망설였다.
“제가 사라지면, 당신은 슬퍼하시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비올라를 설명할 때 꼭 ‘철혈’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철혈 공녀.
철혈 성녀.
그러나 툰드라에게 있어 비올라는 ‘철혈’이 아니었다. 그가 본 비올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슬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기적의 신관 엘바토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도 기적을 일으키기로 했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마지막 유언을 말했다. “먼저 가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바하카룬이 형체화된 ‘덩어리’를 향해 태양검을 내질렀다.
* * *
비올라는 무엇인가 이상함을 직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툰드라가 사라져 있었다.
‘설마.’
툰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툰드라라면’내가 아는 툰드라라면. 주인공의 힘을 가진 툰드라라면.
‘에바토 영감과 똑같이 할 거야.’
엘바토 영감을 잃은 슬픔을 아직 채 지우지도 못했다. 아직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툰드라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비올라가 말했다.
“내려주세요.”
“안 된다.”
“내려주세요.”
“안 된다고 말했다.”
헤론 공작은 비올라를 꽉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다시는 놓을 수 없는 보물을 움켜쥔 것처럼.
“지금 내려주시지 않으면, 저는 평생 아빠를 원망하면 살 거예요.”
“그래도 안 된다.”
“아빠는 제 평생의 원수가 되겠지요.”
“그래도…….”
헤론의 눈이 흔들렸다.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두려운 말이 있을까. 그러나 비올라를 내려줄 수는 없었다. 분명 비올라는 툰드라를 쫓아갈 것이다.
헤론은 ‘진안’을 통해 툰드라를 읽어내고 있었다.
“아빠 눈에는 툰드라가 보이죠?”
“.…보인다.”
“무엇을 하고 있어요?”
“이 세계의 핵이라 짐작되는 것을 찌르려는 것 같구나.”
비올라는 잠시 생각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랑 함께 가주세요.”
헤론의 몸이 움찔했다. 비올라를 혼자 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수는 없지만, 비올라와 함께 간다면?
“제발, 부탁드릴게요.”
비올라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헤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말했다.
“평소답지 않구나.”
평소의 비올라였다면 논리와 이성으로 점철된 말로 자신을 설득했을 것이다. 그것이 철혈 성녀 비올라니까.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래서 좋구나.’
설득이 아닌 부탁. 그것은 딸이 가질 수 있는 권리였다.
헤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헤론은 비올라를 안은 채 ‘진안’ 의힘을 끌어올렸다.
툰드라를 향해 달렸다.
* * *
툰드라는 태양검으로 ‘핵’을 찔렀다.
으하하하!
하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소멸시킬 수 있는 자가 진정 존재하였구나.”
바하카룬은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 툰드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전력을 다해야 해.
완벽하게 소멸시키지 못하면 바하카룬은 또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는 그토록 강대한 존재였다. ‘살고 싶지만,
모든 힘을 끌어내서, 나를 죽이지 않으면, 바하카룬을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니 어쭙잖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버려야 했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마음 꼭 기억해.”
툰드라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그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이면서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린에게 약속했었어. 내가 옆에 있어주겠다고.”
그 약속은 이 세계에 ‘언약’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강한준의 기억을 가진 ‘툰드라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러니 옆에 있어주고 싶어. 그렇지만 이제 그 역할을 네게 넘길게.
마음 같아선 내가 남고 싶지만.”
‘강한준은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쉽게도 그 약속은 이미 빛이 바래버렸거든.”
차원을 넘나들어 기적을 일으켰다. 약속에 깃든 권능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내가 사라질게.”
‘강한준은 자신이 사라지기로 했다.
강한준은 사라지고 툰드라만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완전히 소멸되어 기억조차 잊혀지겠지만.”
그래도 말해보았다. “너라도 날 기억해 주면 좋겠네, 툰드라. 너는 나이기도 하니까.”
강한준이 계속 말했다. “아, 그리고 나는 반쪽짜리인 거 알지?”
바하카룬을 없애기 위해서는 ‘완전한 생명을 하나가 필요하다. 그 생명을 바쳐 기적을 일으켜야 했다. 지금의 강한준은 반쪽짜리였다.
말하자면 0.5명.
그래서 0.5명이 더 필요했다. “저기, 오네. 내가 하는 말을 따라해.”
헤론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올라를 안은 채.
툰드라는 강한준이 하는 말을 따라 읊었다.
“비올라, 죽일 수 없는 것을 나와 함께 죽이지 않겠어?”
비올라는 저 말이 자신이 아닌 ‘원작 속 비올라’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툰드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원작 속 비올라’가 나타나지는 않게 되었다지만, 이번에는 비올라가 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진작 그렇게 했으면 좀 좋아? 비올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헤론도 무엇인가를 느끼고서 비올라를 내려주었다.
비올라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에게서는 망설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거참, 재미있겠네.”
비올라가 툰드라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비올라가 나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일 수 없는 걸 죽이는 건, 얼마나 황홀한 일일…….”
풀썩! 툰드라와 비올라.
둘의 몸이 동시에 쓰러졌다.
세계의 ‘핵’은 사라졌고, 툰드라와 비올라가 들고 있던 태양검도 가루가 되어 없어져 버렸다.
세계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하카룬은 즐겁게 소멸을 맞이했다.
“다 이루어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