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 신부님 || 아리탕
1장. 가금산의 애기 신부님
산 깊숙한 곳에 별처럼 콕 박힌 뱀말의 풍경은 계절마다 황홀했다. 봄이면 진달래가 하늘하늘한 치맛자락 같은 꽃잎을 펼치고, 여름이면 녹음으로 물든 산자락에 눈이 시렸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드높은 하늘과 어우러지는 가을 정취는 또 어떠하며, 눈꽃이 배꽃처럼 흐드러지고 고드름이 수정처럼 반짝거리는 겨울 산수의 아름다움은 말하기도 입 아플 정도였다.
고작해야 열다섯 집이 모여 사는 뱀말의 여름, 붉게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굴뚝마다 연기가 올랐다. 낮 동안의 뜨거운 햇볕이 물러가자 미지근한 바람이 마을을 휘돌며 휘파람을 불었다. 좁지만 정겨운 길과 도둑질 염려할 일 없는 마을 인정을 보여 주는 야트막한 담장, 멀리서는 컹컹 개 짖는 소리…….
“도란이 년 어딨어?”
매서운 목소리가 평화로운 풍경을 깨고 쨍하니 치솟았다.
싸리비로 이 씨네 마당을 쓸며 마을을 바라보던 도란은 허둥지둥 비를 내려놓았다. 다 해어진 치맛자락을 날리며 툇마루로 달려가니 곰방대가 홱 날아왔다.
“굼떠선. 다 저물어 마당은 뭣 하러 쓸고 앉았어?”
도란은 맨바닥에 떨어진 곰방대를 들어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마당을 쓴 건 이 집 며느리의 명령 때문이었지만, 그런 말을 해 봐야 뺨이나 얻어맞을 것이다. 그래서 해명 대신 곰방대만 공손히 내밀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이 노인이 가래를 뱉으며 곰방대를 낚아챘다.
“너, 사당에 좀 다녀와라.”
“네, 네?”
“귀까지 먹었어? 무슨 짓을 해도 장손 열이 안 떨어지니 어쩌누. 사당에 가서 찬물이라도 바치고 빌어야지.”
“하지만 날이…….”
“날이 뭐?”
다시 날아온 곰방대가 도란의 이마를 후려쳤다. 도란은 화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를 생각도 못 하고 얼른 몸을 굽혔다. 곰방대를 다시 내밀자 노인이 그것으로 도란의 머리를 쳤다.
퍽 소리와 함께 작은 몸이 휘청거렸다.
“구걸하는 거지 밥 먹여 길렀더니 심부름 하나에도 꼬박꼬박 대답을 달아? 주둥이를 찢어 놔야 군소리를 안 할 테냐, 응?”
“아이고, 아버님!”
창호문이 벌컥 열리며 이 씨네 며느리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애 겨우 잠들었는데 깨겠어요! 그냥 빨리 보내기나 하셔요!”
“되바라진 것들.”
혀를 찬 노인이 까딱 턱짓을 했다.
“부엌에 밥 떠 놨으니 사당에 바쳐라. 귀한 도련님 열 떨어지게 해 주십사 싹싹 빌고 와.”
“네…….”
도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엌으로 갔다. 아궁이 옆에 놓인 나무 밥그릇에 식은 밥이 고봉으로 얹혀 있었다. 도란은 밥그릇을 들고 조심조심 움직여 달아나듯 마당을 벗어났다.
단풍잎처럼 붉던 저녁 하늘이 어느새 캄캄해져 있었다. 도란은 시커먼 어둠이 내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산 입구로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열다섯 된 어린아이를 혼자 산으로 보내면서 횃불 하나 내주지 않는 인심이 야박했다.
뱀말은 가난한 마을치곤 야멸참이 덜했다. 그러나 그건 자기들끼리 이야기고, 도란의 처지는 달랐다.
‘나도 엄마랑 아빠가 있었다면…….’
도란의 부모는 호랑이에게 물려 갔다. 처음에는 아비가, 그 뒤에는 어미가. 도란에게 남겨진 것은 너무 초라해서 아무도 탐내지 않는, 어머니의 나무 비녀 하나뿐.
비극을 이해하지도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도란은 그 뒤로 산골 뱀말의 천덕꾸러기이자 잡일꾼으로 살았다. 집집을 돌아다니며 헛간에서 잠을 청하고 굳은 밥을 얻어먹으며 자라는 내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이 잡혀 손등이 다 터지도록 얻어맞기도 수십 번. 열다섯 소녀의 손은 굳은살과 흉터로 뒤덮여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이렇게 한밤중에 산으로 심부름 가는 일이다.
어미 아비를 물어 간 범이 도사리고 있는 산. 밤이면 칠흑같이 어두워 자기 발밑도 분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간. 맑은 개울물을 길어 와라,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와라, 뱀 사당에 정성을 올려라, 갖은 이유로 들어갈 때마다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서는 깊은 산중.
‘거기다 뱀 신당이라니…….’
낮에 가도 무서운 그곳이 떠올라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뱀 그림 한 폭만 덜렁 걸려 있는 그 신당은, 아무것도 모르는 도란이 보기에도 기묘하고 으스스했다. 장마철이면 허물어진 지붕 틈으로 비가 줄줄 새는데 그림은 찢어지지도 번지지도 않고 오랜 세월 그대로였다. 뱀말 사람들은 그거야말로 뱀신이 그곳에 머문다는 증거나 다름없다고 수군대곤 했다.
도란은 밥그릇을 꽉 잡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밥그릇이고 뭐고 팽개치고 싶었지만, 이 노인은 분명 내일 직접 사당에 와서 밥그릇을 챙겨 갈 것이다. 거지 계집애 못 믿어 불편한 몸 이끌고 사당까지 올 그를 생각하면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식은땀이 나도록 무서워 작은 심장이 사정없이 콩닥거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소복 입은 형상이 언뜻 지나간 듯하고, 눈, 코, 입 없는 허연 얼굴이 희뜩 비친 듯하고,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오는 듯 또 다른 발소리가 들리고…….
‘발소리?’
제자리에 얼어붙은 도란이 급히 귀를 기울였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작은 산짐승이 나뭇가지 사이로 오가는 소리, 그리고 도란 자신의 가쁜 숨소리.
휴, 다행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는 두려움이 만들어 낸 가짜였던 게 분명하다. 안도 속에서, 도란은 나도 이제 열다섯이나 먹었으니 어린애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귀신 따위는 무섭지 않으며, 살면서 범 울음은 들은 적도 없으니 부모를 물어 갔다는 범도 어디 멀리 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잘못한 게 없으니 뱀신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서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짜가 아닌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귀신도, 범도, 뱀신도 아니었다. 도란이 잘 아는, 열다섯 해 동안 지긋지긋하게 들은 껄껄 소리였다.
마을 남자 몇이 산중에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뱀 사당이 있는 방향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남자들이 피운 불빛이 보였다. 초라한 모닥불이지만 어둠 속에서는 선명했다. 껄껄대는 웃음소리와 취기 오른 목소리 역시 또렷해졌다.
“아, 글쎄, 은전을 준다고 했다니까. 진짜 은전 말이야!”
“부자들은 원래 그리 헤픈가?”
“그게 아니지. 내 말솜씨가 아니었으면 그 빼빼 마른 도란이 년을 그 비싼 값에 팔 수 있었겠어?”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밥그릇이 발치에 떨어져 굴렀다.
“그 상인이 열 살 난 어린애를 찾고 있다지 않아. 손자도 있다던데 열 살 어린애를 찾으니, 아랫도리가 어지간히 허전한가 봐?”
“그런데 도란이는 열세 살이잖아. 아니, 열넷인가?”
“열다섯인데 딱 봐도 열 살로 보이잖아. 봇짐장수한테 딸려 보내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야. 그 뒤로는 아, 알 게 뭐야? 알고 보니 열다섯이라고 따지기라도 하겠어?”
“내일 보낸다면서. 그걸 한 번도 못 건드려 본 게 아쉽네. 지금까지 먹여 준 값은 받고 보내야 하는데.”
“아, 그거야 오늘 밤에 해결하면 되지! 가만 보자. 오늘…… 이 씨네 헛간에서 자던가? 들어가 자빠뜨리면 저도 어쩔 거야?”
자기들끼리 불콰하게 취해서 뱉는 말은, 그 뒤로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몰래 가져온 술을 전부 마신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인사불성이 되어 산을 내려갔다. 웃고 고함치는 소란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도란은 주저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이대로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굴러간 밥그릇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이마와 등은 식은땀에 젖어 척척하고, 한여름인데 자꾸만 한기가 들어 몸이 발발 떨렸다. 방금 들은 말이 전부 거짓이라 믿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금껏 도란이 겪은 인생이 너무나 모질었다.
“흑, 흐윽…….”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도망질이었다. 이 길로 달음박질쳐 그악한 손길을 벗어나자. 일단 뱀말을 벗어나면 솟아날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솟아날 구멍이 있을까. 부모를 호환으로 잃은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기다릴 구멍이 ‘솟아날 구멍’일지 아니면 더 깊은 구렁텅이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모르긴 몰라도 구렁텅이일 가능성이 훨씬 클 것이다.
‘차라리 여기 남게 해 달라고 빌어 보자.’
곰방대로 자주 때리긴 하지만, 이 씨 노인은 도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장손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게으른 며느리에, 매일 술만 마시고 밭고랑에 나자빠져 제명에 못 살 거라는 반푼이 아들까지. 도란이 없으면 살림에 제일 큰 어려움을 겪을 집이 그 집이었다.
간절하게 매달리면 필요해서라도 안 보내지 않을까. 은전, 그래, 그까짓 은전이 이 산골 마을에 무슨 필요가 있다고.
이 씨 노인을 설득하려면 일단 심부름부터 잘 해내야 한다. 도란은 식은땀이 흐른 얼굴을 소매로 벅벅 문질러 닦으며 어디로 굴러가 버린 밥그릇을 찾았다. 발치를 몇 번이나 더듬거린 후에야 밥이 반 넘게 쏟아진 그릇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도란은 그거나마 잘 챙겨 뱀 사당으로 달려갔다. 산으로 들어올 때의 무섬증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렴, 귀신보다 사람이 훨씬 더 무섭지 아니한가.
“헉, 헉…….”
다 쓰러져 가는 초라한 나무 신당 앞에 섰을 때도 숨이 가쁘다 뿐이지 두렵지는 않았다. 경첩이 낡아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문도, 퀴퀴한 냄새도, 왠지 빛나는 듯한 그림 속 뱀의 눈도 다 괜찮았다.
“시, 신령님.”
도란은 허전한 상에 밥그릇을 탁 소리 나게 올려놓고 꿇어앉았다.
“귀한…… 귀한 장손 열 내리게 해 주세요.”
그 한마디 했는데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씨 노인네 장손은 아프기는커녕 너무 건강해서 탈이었기 때문이다. 도란을 가장 모질게 괴롭히는 사람 중 하나인 그 소년은 솥뚜껑만큼 두껍고 단단한 손과 기둥처럼 굵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반항하는 도란의 손톱에 긁히기라도 하면 눈이라도 뽑힌 양 서럽게 울며 제 어미 품으로 들어가는 머저리기는 해도 병약하지는 않았다.
“저, 그리고, 그리고…….”
사위가 무섭도록 고요했다. 산을 지키는 신이 산다는 신당으로 스산한 바람이 새어 들어 도란을 감쌌다.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와 헐거운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이어졌다.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토록 무서운 모의를 엿들어 놓고도 이런 일밖에 못 하는 자기 처지가 한심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무슨 용을 써도 결국은 내일 팔려 가게 될 것임을. 여기서 목을 매달아 죽지 않는 한 나이 든 남자의 다리 사이로 팔려 가 비참한 삶을 살게 되리라. 고작 은전 한 닢에. 자신을 판 남자들은 그 돈으로 아랫마을 술도가의 탁주를 살 테고 금세 고주망태가 될 것이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그날 바로 잊겠지.
‘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해?’
박 씨네 며느리가 귀한 곶감을 몰래 훔쳐 먹고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해 매질을 당한 날이 떠올랐다. 이 씨네 장손이 제 머리채를 끌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창피를 주었던 것도. 한겨울에 꽁꽁 언 손으로 온 마을의 빨래를 도맡아 하다가 동상에 걸려 고생한 일도.
그만큼 괴롭혔으면 됐지, 은전에 자신을 팔아넘기는 걸로도 모자라 오늘 밤에 욕보이려 들기까지 하다니.
두근, 두근, 도란은 거세게 뛰는 제 심장에 손을 대 보았다. 처음에는 이 두근거림이 슬픔인 줄 알았다. 외로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만은 뭔가 달랐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숨까지 가빠졌다. 눈은 터질 듯 붉어졌고 두 손이 저절로 말렸다. 낄낄거리며 자신을 팔 일을 의논하던 남자들을 떠올리면, 부모를 물어 간 호랑이마저 겁에 질릴 정도로 크게 고함치고 싶어졌다.
차올랐던 눈물이 쑥 들어갔다. 도란은 지금 슬프지 않았다.
이건 분노였다.
“신령님.”
도란은 낡은 상에 있던 밥그릇을 탁 쳐서 떨어뜨렸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릇이 나뒹굴었다. 안에 있던 밥이 쏟아져 신당 바닥을 더럽혔다. 그러나 도란은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품을 뒤적거렸다. 다 떨어져 가는 저고리, 오늘 밤 무도한 사내들이 벗기기로 모의한 그 저고리에서 나무 비녀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기억도 안 나는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만지작거린 바람에 반들반들하게 닳아 버린 비녀가 밥그릇 대신 상에 올라갔다.
지금 도란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귀한 물건이었다.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정면에 붙은 그림 속에서 뱀이 스슷, 혀를 날름거린 것 같았다. 환영이었을까. 도란은 두 손을 깍지 껴 맞잡은 채 간절히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도란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사당에 걸려 있었다는 그림은, 조금 누렇게 변하긴 했지만 상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이 저를 팔지 못하게…… 아니…….”
이를 너무 꽉 물어 턱이 아팠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도란의 눈이 한순간이나마 번뜩였다. 오랜 시간 노예처럼 살며 죽이고 죽여 왔던 울분이, 신과 도란 둘뿐인 자리에서 마침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뱀말 사람들이 오늘 밤 전부 죽게 해 주세요.”
다정하게 대해 준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일은 일대로 시키고 밥은 주지 않아, 개가 먹는 쉰밥을 뺏어 먹으려다가 다리를 물린 일도 부지기수였다.
가장 먼저 밭에 나가고 가장 늦게 마을로 돌아오는 그녀를 기다린 것은 늘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뿐.
억울하게 매를 맞아도 약 발라 준 이 하나 없고, 억울한 사연이 밝혀져도 사과한 이 없으니, 도란은 진정 뱀말 전체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한 살 한 살 먹어 갈 때마다 음흉하게 변하던 사내들의 눈빛이야 말해 무엇 할까. 나어린 소년부터 시큼한 몸 냄새가 나는 노인까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니, 오늘 겁탈당한다 해도 차라리 때가 늦었다 해야 옳을 터다.
“아주 고통스럽게, 아주 잔인하게 죽게 해 주세요. 제가 당했던 고통의 백배, 천배만큼 아프다가 죽게 해 주세요.”
사과받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도란을 살랐다. 소원을 비는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그림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며, 작은 몸에 갇힌 울화를 드러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신령님께 제 모든 것을 바칠게요.”
무서운 신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소원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뱀말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는 꼴을 두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도란은 범에게 물려 갔다는 어미 아비처럼 죽어도 좋았다. 시체도 못 찾고 뼈도 못 추리게 되어 산중에 피와 살점이 흩뿌려지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도 달가웠다.
“저를 잡아먹어도 좋으니 제발.”
저들이 죽고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도란은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요, 신령님.”
도란이 그때 눈을 떴다면, 금빛으로 번뜩이는 뱀의 눈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일으킨 것은 그림 속 안광이 아니었다.
찢어지는 비명이었다.
* * *
가파른 산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몇 번을 굴렀는지 모른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내리막에서 균형을 잃어 고꾸라졌다가도 도란은 벌떡벌떡 다시 일어났다. 바닥을 짚느라 까진 손바닥도, 깨진 무릎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걸려 치맛자락이 찢어지는 줄도 몰랐다.
“아아악!”
“개울! 개울로 가!”
달리면 달릴수록 비명이 가까워졌다. 창처럼 꽂힌 나무들 사이로 시뻘건 불길이 너울너울 비쳤다. 도란은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산 입구까지 내려왔다. 신발 두 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뱀말은 더 이상 마을이 아니었다.
불지옥이었다.
초가지붕에도, 싸리울에도, 사람에게도 불이 붙었다.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불붙은 옷을 벗으려 버둥거리다가 서로 부딪히고 짓밟고 넘어졌다. 화상 때문에 옷이 피부에 달라붙었고,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지독했다. 살 익는 누린내가 천지에 진동하니 비명보다 그 냄새가 더 참기 어려웠다.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펼쳐진 광경이 역겨워서가 아니라 불이 너무 찬란해서였다.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는데 도리어 눈이 부셨다.
“으아아아!”
아까 도란의 겁탈을 모의했던 사내 하나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휘적휘적 개울로 내달았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에는 이미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차가운 개울에 몸을 담근 이들 중 비명을 멈춘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아무리 물을 묻혀도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 아래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살려 줘! 살려 줘어어!”
이 씨 노인네 집에서 귀한 장손이 뛰쳐나와 개울로 몸을 던졌다. 퉁퉁한 몸과 잔인한 힘도 이만한 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늘 장손, 장손 노래를 부르며 도란을 구박하던 이 씨 노인네 며느리는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흙벽을 긁으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열을 참지 못하고 장독에 머리를 처박는 사람, 이성을 잃고 똥통에 뛰어드는 사람, 사람이 바글거리는 개울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의미 없이 첨벙거리는 사람……. 불길이 그들의 혀와 목구멍까지 남김없이 태워 비명조차 점차 잦아들었다.
도란의 부릅뜬 눈에 모든 장면이 생생히 박혀 들었다. 무시무시한 불길이 검은 눈동자에 무늬처럼 어른거렸다. 커다랗게 떠진 눈과 달리 입은 앙다물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도란에게 그토록 잔인했던 이들이 자연의 힘 앞에 무력하게 으스러지고 있었다. 조용히, 품위 있게 눈을 감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모든 추한 꼴을 드러내며 잡귀처럼 펄펄 뛰고 있었다. 머리카락, 눈썹, 눈알, 콧구멍, 귀, 혀, 목구멍, 가슴팍, 내장, 성기, 음모, 무릎뼈,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속속들이 타들어 가며 절규하는 모습이 추하기 그지없었다.
뻘건 불티가 날린다.
지붕이 무너진다.
개 짖는 소리가 끊어진다.
사람의 비명도 사라진다.
별이 총총한 하늘까지 불길이 치솟았다. 달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춘 뒤였고, 시커먼 연기 속에서 별들만이 어깨를 움츠리고 떨었다. 그러나 도란은 떨지도 울지도 않고 자유로운 하늘 아래 자신의 두 다리로 우뚝 서 있었다.
도란만 빼고 평화롭던 뱀말이 세상에서 지워진다.
초라한 산골 마을의 몰락에 불과할진대, 도란에게는 그만큼 장엄한 풍경이 없었다.
거센 바람이 도란의 치맛자락을 마구 흔들었다. 귀신처럼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도 치마와 같은 방향으로 어지러이 날렸다.
그 바람을 이끌고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불이 다 꺼지지 않은, 폐허가 된 마을을 가로질러.
‘불이 붙지 않았어.’
도란은 정확히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그 사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뱀말 사람이 아니었다. 뱀말에는 저렇게 키 크고 풍채 좋은 남자가 없었다. 저렇게 머리를 짧게 자른 사람도 없었다. 금사로 수를 놓은 비단옷은 바람의 호위를 받는 듯 펄럭였으며, 풍성한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은 크고 희고 단단해 보였다.
남자는 새까맣게 탄 시신을 넘어 도란에게로 왔다.
불타는 땅을 가로지르는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은커녕 조심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잔잔한 초원을 가로지르는 양, 물 위를 미끄러지는 양 평온하기까지 했다. 걸음걸이에서 자신감이 묻어났으나 성급하지 않았고, 앞뒤로 흔들리는 팔이 경박하지 않고 오히려 호인의 기세였다. 젠체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기품과 위엄이 묻어나 도란의 가슴이 움찔거렸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황홀하도록 희었다. 피를 머금은 양 붉은 입술 때문에 더욱 희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단정하고 짙은 눈썹과 물결처럼 보드랍고 맑은 피부, 한밤중의 산처럼 동요 없는 표정이 도란을 동요케 했다.
무엇보다도 도란을 사로잡은 것은 남자의 눈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금빛 눈은 마치 뱀의 것처럼 서늘하여…….
그 눈이 도란을 위아래로 훑었다. 도란은 달아날 생각도, 고개를 숙일 생각도 못 한 채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그때 남자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게 참.”
남자가 뱉은 것은 인사도 무엇도 아닌 탄식이었다.
풍성하게 늘어진 소매에서 하얗고 단단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도란의 턱을 쥐었다. 낮은 체온이 화기에 달아올라 있던 도란의 피부를 식혀 주었다.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도란의 얼굴을 이쪽저쪽으로 돌려 보다가 지그시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몇이냐.”
도란의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나이를 묻고 있을 뿐인데 남자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무시무시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볼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남자는 너무나도 컸고 또 너무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실금할 것 같았다.
“작은 아이야.”
“…….”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기분 탓일까, 남자의 어조가 아까보다 부드럽게 누그러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턱을 억세게 쥐고 있던 손도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대답이 늦으면 곧장 발로 걷어차거나 물건을 던지던 마을 사람들과는 달랐다. 남자는 바보처럼 덜덜 떨고만 있는 도란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도란에게 힘을 주었다. 그녀는 가녀린 어깨를 마구 떨면서도 겨우 입술을 달싹거렸다.
“열…… 열다섯입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호칭을 생략했는데 남자는 그리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대신 빚어 놓은 듯 아름다운 손으로 스스로의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작은데 열다섯이라고?”
“그, 그렇게…… 작지는…….”
“고작 열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 어쩌자고 그리 무서운 소원을 빌었을까.”
소원. 그 단어가 도란의 가슴에 꽂혔다.
남자는 금빛 눈으로 골똘히 도란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눈동자. 불 속에서도 태연히 시체를 넘던 모습. 무엇보다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자신의 소원.
“혹 산의 신령님이세요?”
남자는 똘똘한 아이를 칭찬하듯 짧게 웃었다.
“그래, 네가 이 작은 비녀로 청한 신이 나다.”
남자가 반대편 손에 들었던 나무 비녀를 보여 주었다.
그리 작은 비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손에 들려 있으니 장난감 같았다. 어머니의 유품이니 자신에게는 무척 소중한 물건이지만, 그래도 남자가 보기에는 참 보잘것없는 공물이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도 소원을 들어준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잡아먹어도 좋다고 하더니.”
“…….”
“이 작고 마른 몸에는 먹을 것도 없겠다.”
“…….”
“게다가 너는 기가 차도록 어리구나.”
남자의 교교한 금빛 눈이 도란을 꿰뚫었다. 화마에 사그라지는 마을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다정하면서도 무섭고 천진하면서도 요사스러웠다.
“아이에게 공물을 받는 것도 민망하니, 가져가도 좋다.”
나무 비녀가 불쑥 내밀어졌다. 도란은 남자의 손바닥에 놓인 초라한 비녀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가 손을 가볍게 움직이며 어서 가져가라는 뜻을 보인 순간.
도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그마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저, 저를 데려가 주세요.”
남자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맹랑한 꼬마라고 생각하는 게 환히 읽혀서 도란은 초조해졌다.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몸입니다. 그리고…… 몸은 크지 않지만 할 줄 아는 일은 많아요. 길쌈도 할 줄 알고, 청소나 빨래도 잘하고요, 아기도 잘 보고, 밭일도 잘하고, 또…….”
“내 땅에는 이미 길쌈하는 이가 있다. 소제(掃除)하는 이들도 많고. 아기는 어미와 아비가 함께 돌보고, 농군도 필요치 않아. 네가 할 일은 없을 거다.”
도란은 꼭 이 남자와 함께 가고 싶었다. 어차피 이 빈 마을에 남아 있어 봐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마을에 가서 빌어먹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부모 없는 가난한 계집애, 어딜 가나 똑같이 천대받을 게 뻔했다. 인간의 노예로 사느니 신의 노예가 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도란은 간절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심부름도 잘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몸으로 무슨 심부름을 한다고?”
“들짐승을 사냥할 때 미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 지난번에 들개들을 잡을 때 제가 미끼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다 잽싸고 침착하다고 했어요.”
“……미끼?”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렇게 조그마한 여자애를 들개 미끼로 쓰다니, 인세가 언제 이리도 그악스러워졌단 말인가?
이 마을에 가득한 악심을 보기는 하였다. 불로 살라야만 깨끗해질 것들이기에, 또 소원을 비는 아이의 음성에 맺힌 절절한 원한을 읽었기에 벌을 내리긴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미끼 운운하는 말을 들은 후에야 유난히 상한 아이의 손이 시야에 걸렸다. 생이 고단했는지 하얗게 튼 입술과 꺼칠한 피부도. 걸친 옷은 다 해진 데다, 신발이 벗겨진 발에는 버선조차 없었다. 맨발로 산길을 내려왔는지 발이 상처투성이였다.
열다섯 살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마른 몸도 뒤늦게 이해가 갔다. 이만한 사연이라면 인세에 남기 싫을 법도 했다.
“미끼로도 쓸모가 없으면…….”
“…….”
“살을 찌워서 나중에 드셔도 되지 않을까요?”
남자의 침묵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도란이 진지하게 헛소리를 해 댔다. 남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픽 웃고 말았지만, 도란은 그 표정에서 오히려 희망을 읽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드셔도 얌전히 있겠습니다. 절대 도망가지 않을게요.”
여기서 죽으나 신에게 죽으나 죽음은 매한가지일 텐데, 이 아이는 이토록 인세가 밉고 두려운 것일까. 이토록 좌절스럽고 외로운 것일까. 하기야, 소원을 빌 때의 기세를 떠올려 보면 마냥 어리고 순진무구한 꼬맹이는 아닌 것이다.
“그만.”
거절이라 여겼는지 도란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더 빌지도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무는 모습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아이가 이미 부르튼 입술을 더 괴롭히지 못하도록 한 후에야 손을 내렸다.
“이름이 무엇이냐.”
아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도란입니다.”
“도란.”
“…….”
“다정한 이름이구나.”
데려가 주려는 걸까. 도란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 모습을 본 남자의 표정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뜨겁게 분노하며 소원을 빌다가 애처롭게 빌면서 매달리다가 또 아이처럼 순진하게 구니, 재미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네게 어울리는 일이 하나 있기는 한데.”
작은 머리통이 번쩍 들렸다.
“뭐, 뭐든 하겠습니다! 저는 밥도 적게 먹고 잠도 덜 자요!”
“밥 많이 먹고 잠 많이 자도 고된 일이다. 그래도 좋으냐?”
밥 많이 먹고 잠 많이 자도 고된 일이라니.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또 원 없이 잘 수만 있다면 뒷간에서 변 퍼내는 일을 하라고 해도 온종일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을 텐데.
도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다시는 인세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느냐?”
의미심장한 물음에, 도란은 남자 뒤로 펼쳐진 폐허를 바라보았다.
뱀말에 살던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다. 타들어 간 서까래와 무너진 기둥, 뒹구는 신발과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짖지도 않던 개들은 목줄이 풀린 틈을 타 어디로 달아난 지 오래였고, 이제 이곳에 살아 있는 존재는 도란뿐이었다.
부모도 없고 벗도 없는 외로운 허허벌판.
그것이 세상이었다.
“상관없습니다.”
남자는 단단하게 대답하는 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나무 비녀를 쥐지 않은 손이었다. 손바닥이 넓고 깨끗했다.
“그렇다면 잡아라.”
“…….”
“내 너를 거두겠다, 도란아.”
도란아, 도란아. 따스한 부름이 귓가에서 맴을 돌았다.
산에서 구르느라 더러워진 손이 신경 쓰였다. 손보다 더 더러운 치마에 손바닥을 몇 차례 문지른 후에야, 보석 같고 비단 같은 남자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크기 차이가 심해 잡았다기보다는 그저 살짝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남자의 손은 아까와 달리 따뜻했다.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더니 속수무책으로 눈이 감겼다. 단단한 팔이 쓰러지는 몸을 받아 주었다.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올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입을 여는 것보다 잠에 빠지는 것이 먼저였다. 죽음처럼 혼곤하고 포근한 잠이었다.
* * *
가금산은 가온산맥을 이루는 산 중 가장 우뚝하고 씩씩하며 호젓한 경치를 자랑했다. 보기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기운도 맑아 가장 많은 영물과 신선이 모여 사니 명산 중 명산이라 할 만했다. 또한 웅대한 산맥 전체를 다스리는 뱀신의 거처가 있는 곳이기도 해 영험한 공기마저 감돌았다.
가신의 처소에서 잘 준비를 하던 소야는, 그 영험한 공기가 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침의 차림으로 벌떡 일어났다.
“신령님이 오시나 보다!”
일곱 살 난 소녀 모습을 한 소야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수줍은 별들이 총총한 게, 천문이 오늘따라 참 온화하기도 하였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뱀신의 거처, 신궁으로 가니 아니나 다를까 신이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다. 소야는 반가운 마음에 후다닥 그에게로 달려갔다.
“신령님!”
다른 가신들은 쿨쿨 자느라 주인을 맞이하지도 못했는데 자기만 나온 것이 뿌듯했다. 어찌 이리 늦은 시간에 오셨느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신의 품을 확인한 순간 그 말은 쏙 들어갔다.
“어어어어?”
“조용히 해라, 소야.”
“어찌 조용히 해요? 우리 신령님이 드디어 신부님을 보쌈해 오셨는데!”
위대한 신의 품에 안겨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잠꾸러기 신부님을 보던 소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리 꼬질꼬질한 분을 모셔 오셨을까. 얼굴이 온통 재투성이네.”
“소야, 입.”
“게다가 신령님의 신부가 되기에는 너무 작고 어리지 않아요? 이 조막만 한 몸으로 신령님과 밤일을 해내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소야.”
웃음기가 싹 빠진 부름에 소야가 얼른 자기 입을 막았다. 눈치를 보며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으니, 신은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소야는 서둘러 뒤에 따라붙었다.
신은 별다른 말 없이 신궁의 대문을 넘었다. 주인을 알아보고 저절로 열린 대문을 지나 연못이 딸린 별채로 향하는 걸음을 따라 밤바람이 불었다. 소야는 한 번 혼이 났음에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신의 품에 안긴 소녀를 계속 힐끔거렸다.
자신도 일곱 살 난 어린애 몸이긴 하지만 이쪽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얼굴은 연기에라도 그을린 듯 거뭇하고, 입술도 하얗게 트고 갈라져 볼썽사나웠다. 이마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 정도는 제법 봐 줄 만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특별히 혼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지도, 연꽃 같은 도와 덕의 향기를 풍기지도 않았다. 그냥 좀 불쌍해 보이는 인간 꼬맹이였다.
하지만 저 구저분한 어린애를 연못 별채까지 데리고 와 침상에 눕히는 신의 얼굴은 무척이나 따사로웠다. 아마 이 신부에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굉장한 매력이 있는 듯했다. 도대체 그게 뭘까?
“소야.”
“네, 네!”
다른 생각에 잠겼던 소야가 화드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가금산에서 너만 한가하다며 불평했으니 일거리를 주마. 이 아이는 오늘부터 가금산에 머물 테니 네가 옆에 붙어서 잘 돌봐라.”
“저를 믿고 신부님을 맡겨 주시니 은혜가…….”
“그리고 다시는.”
“…….”
“신부니 뭐니 하지 마. 열다섯 살 먹은 꼬마다.”
엄중한 경고에 소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신의 으름장에 겁을 먹어서는 아니었다.
“열다섯이요? 많이 쳐줘야 열 살 정도인데! 제가 너무 어린 신부를 데려왔다 타박하니 농을 하신 거지요?”
“열다섯이 맞다. 못 먹어 그리된 모양이지.”
“세상에……. 인세가 언제 이렇게 각박해져서.”
아이를 바라보는 소야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기함과 호기심만 가득하던 눈에 연민과 사명감이 들어찼다. 소야는 두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먹이고 잘 입혀 때깔 곱고 포동포동한 여인으로 만들겠습니다!”
신은 잠시 걱정 어린 시선으로 소야를 바라보았다. 할 일을 달라 칭얼거리기에 도란을 맡겼는데 잘한 일일까. 일곱 살 어린애 모습이라 하나 소야도 관록 있는 가신인데, 어쩐지 애한테 애를 맡기는 듯 불안했다.
그래도 소야는 활달하고 정이 많으니 낯선 곳에 온 도란을 잘 챙겨 줄 것이다.
“사나흘 쉬게 두었다가 일을 맡길 생각이니 그동안 몸을 보하게 해.”
“붓도 못 들 것 같은 손인데 무슨 일을 맡기시려고요?”
“가금산 분화구 화원을 돌보게 할 거다.”
소야가 멈칫했다.
“분화구 화원이라면 오랫동안 죽어 있던 땅이잖아요? 서천꽃밭 꽃감관도 살리지 못한 땅을 어떻게…….”
“글쎄.”
무슨 일이든 할 테니 데려가 달라고 매달리던 도란을 본 순간, 어째서인지 삼백 년을 죽어 있던 화원이 떠올랐다. 그 떠오름은 직감에 가까웠다.
“이 애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신령님도 참.”
싱거운 이유라 여겼는지 소야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더니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러면 신령님도 이만 나가 계세요. 좀 씻겨야겠어요. 이렇게 지저분한 채로 자면 없던 병도 생길 테니까.”
대야와 천을 준비해야겠다며 부지런을 떨던 소야가 나가려던 신을 붙잡았다.
“참, 애기 신부님 이름이 어찌 되세요?”
신의 입가에 한숨이 맴돌았다.
“이미 말했지만 그 아이는 내 신부가 아니고.”
“…….”
“이름은 도란이다.”
도란. 도란.
신이 나간 후 소야는 그 이름을 몇 번 입에서 굴려 보았다. 그리고 신 앞에서는 감히 할 수 없었던 말을 살짝 입 밖에 내 보기도 했다.
“진사해와 도란. 도란과 진사해…….”
괜찮은데?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린 후 젖은 천으로 도란의 몸을 닦아 주는 그녀에게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신부가 아니라는 말은 또 까맣게 잊고 말았으니, 애에게 애를 맡기었나 하는 신 진사해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던 셈이다.
* * *
도란은 시원한 박하 향을 맡으며 눈을 떴다. 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개운했다. 이렇게 푹 잔 게 얼마 만인지. 게다가 잠자리는 꽃구름 속처럼 안락한 것이 이대로 이부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푹 자서 개운한 몸도. 아늑한 잠자리도.
누려 본 적 없는 호사가 도란을 일으켰다. 죄라도 지은 양 벌떡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지는 않지만 정다운 방이었다. 벽에는 매화와 멧새 한 쌍을 그린 화조도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낮고 긴 자개 장식 서랍장도 보였다. 서랍장 위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으며, 도란이 평생 가져 본 적 없는 귀한 경대와 손거울이 전시품처럼 놓여 있었다.
덮은 이불과 걸친 옷도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손을 대면 그대로 찢어질 것만 같은 비단 이불과 나비 날개처럼 가볍고 보들보들한 침의라니. 모자란 지식으로는 차마 값을 헤아릴 수도 없었다.
“아, 어제…….”
한참을 몽중인 양 얼떨떨하게 앉아 있던 도란은 뒤늦게 어제를 기억해 냈다. 나무 비녀를 바치고 뱀신에게 소원을 빈 일, 증오스러운 마을이 화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 옥골선풍의 미남자가 재 가루 날리는 폐허를 가로질러 다가온 일까지 차례로 떠올리자 자신이 어디 와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는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때 꽃살문이 살며시 열리고 낯선 아이가 들어왔다. 일곱 살 정도 먹은 듯한 아이는 일어나 앉은 도란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한참 잘 줄 알았는데! 애기 신부님은 부지런도 하시네요.”
애기 신부님이라니? 낯선 호칭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아이가 침상 옆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하는 행동이 대차고 구김 없었다.
“전 소야라고 해요. 오늘부터, 아니지, 어젯밤부터 애기 신부님을 돌봐 드리게 됐어요. 제가 애기 신부님보다 어려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이가 많으니 친언니다 생각하고 뭐든 편하게 맡기세요!”
“저, 저어…….”
“그렇지, 배가 고프시구나! 어젯밤부터 쫄쫄 굶었을 텐데 빨리 상을 올려야겠네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기운차게 일어난 소야는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행동이 번개 같고 의욕이 굉장했다. 속이 너무 허해서 개죽이라도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일단은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려야 할 텐데.
그러나 소야가 작은 몸으로 번쩍 들고 온 상을 보자마자 준비한 말이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상이 조촐해서 어째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조촐하다니. 이 상이 조촐하다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 뼈에 붙은 소갈비를 몇 덩이나 넣고 팔팔 끓인 후 잘게 썬 파를 뿌린 고깃국, 혀 밑에 침이 고이는 깻잎장아찌, 들기름을 두르고 보기 좋게 깨까지 톡톡 얹은 나물 세 가지, 뱀말에서는 잔치할 때나 겨우 구경했던 잡채까지!
“얼른 드세요. 어휴, 어쩌면 이렇게 피골이 상접했을까?”
고소한 음식 냄새가 머릿속 잡념을 단번에 몰아냈다. 도란은 홀린 듯 숟가락을 들었다. 지금은 이 밥을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숟가락이 예쁜 사기그릇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걸신들린 듯 그릇을 들고 밥 한 톨, 국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반찬도 순식간에 동났다.
마지막까지 아껴 두었던 잡채를 먹으려고 했는데, 젓가락질이 서툴러 힘들었다. 옆에 사람이 있는 것도 잊은 도란은 그릇에 입술을 대고 그대로 잡채를 빨아들였다.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만큼은 세상보다 이 잡채 한 그릇이 더 귀했다.
처음 먹어 본 잡채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도란은 뱀말에서 기르던 개들처럼 그릇에 혀를 대고 남은 기름기를 싹싹 핥았다. 입술은 물론 코끝과 뺨까지 전부 기름투성이가 되었지만, 침을 줄줄 흘리지 않은 것까지가 도란의 최선이었다.
“저런…….”
배가 좀 부른 후에야 소야의 탄식이 귀에 들렸다.
천천히 그릇을 내려놓는 도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추한 꼴을 보인 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 음식을 전부 토해 내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자신이 ‘애기 신부님’이 아니라 그냥 일하러 온 사람인 걸 알면 소야가 당장 무섭게 눈을 치뜨고 목구멍에 손가락을 욱여넣을 것 같았다. 제 것도 아닌 음식을 훔쳐 먹은 도둑년 취급을 받는 것보다 이 맛있는 음식을 전부 토해 내고 다시 주린 배를 움켜쥐게 될 것이 훨씬 더 무서웠다.
“더 가져왔어야 하는데. 이렇게 허기지신 줄 몰랐네요. 한 상 더 내올게요!”
“저, 저기, 선녀님.”
한 상 더 내온다는 말이 너무나 유혹적이었지만 더 뻔뻔하게 굴 수는 없었다. 배를 채우자 이성이 돌아오기도 했고 말이다. 겨우 용기를 쥐어짜 소야를 부르자 그녀의 눈이 댕그래졌다.
“선녀님?”
“저기, 저는 그냥 일하러 온 사람이에요. 밥…… 밥 먹은 건 죄송해요. 너무 배가 고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진땀까지 흘려 가며 겨우 고백했는데 소야의 관심은 영 딴 데 있었다.
“선녀님? 선녀님이라니! 우와, 누가 절 그렇게 부른 건 처음이에요. 저 그리 선녀처럼 예뻐요?”
“네? 네에…….”
“으하하! 신령님께 꼭 말씀드려야지. 내가 선녀라니, 선녀라니! 애기 신부님, 제가 얼른 달려가서 한 상 얼른 더 가져올게요.”
“서, 선녀님!”
벌떡 일어나는 소야를 붙드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제 말 들으셨어요? 저 그냥 일하러 왔는데.”
소야가 여전한 얼굴로 도란을 돌아보았다. 잠시 도란을 바라보던 그녀가 방금과는 달리 조금 차분한 기세로 빙긋 웃었다. 몸은 소녀의 것이었으나, 미소만은 아이를 안심시키는 어른의 것이었다.
“들었어요. 우리 애기 신부님, 아직 배고파요?”
“……네, 저, 아니요.”
“그래요? 이걸 어쩌지, 귀한 음식을 다 버리겠네. 애기 신부님 먹이려고 차린 건데……. 부엌에 밥도 국도 잡채도 한참 더 남았던데…….”
도란이 꼴깍 침을 삼켰다. 소야는 도란이 부르튼 손을 괴롭히며 초조해하는 걸 지켜보았다.
“버, 버리는 거면 제가 먹을게요.”
“어휴, 잘 생각했어요!”
소야는 속이 시원하다는 투로 칭찬하고 밖으로 나섰다. 일꾼으로 왔다는 사실을 밝혔는데도 밥을 토해 내지 않게 된 도란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편 상을 들고 밖으로 나온 소야의 표정은 겨울 서리처럼 싸늘했다.
“아무리 인세가 가난하대도 저렇게 어린 애 먹을 밥 한술 없었을까.”
음식을 보자마자 눈을 뒤집고 달려들던 모습은 추하다기보다는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불쌍했다. 잡채 하나 못 집는 서툰 젓가락질은 또 어떻고? 인세에 있으면서 반찬이란 건 구경도 못 했나 싶었다. 밥 한 끼 먹어 놓고 대역 죄인처럼 살곰살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봤을 때는 예의도 잊고 탄식할 뻔했다.
도대체 도란은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포동포동한 여인으로 만들려면 한참 걸리겠어.”
소야는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저 처량한 애기 신부님을 겨울 산토끼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럽게 살찌우고 말리라!
* * *
그 뒤로 이틀, 도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보기만 해도 향기로운 꽃물에 목욕하고 손톱, 발톱까지 손질했다. 옷은 매일 새것으로 바뀌었고 소야가 아침마다 옥빗으로 머리도 빗겨 주었다.
물론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식사였다.
삼시 세끼를 진수성찬으로 챙겨 먹은 것은 물론이요, 사이사이에 혀가 녹을 것처럼 달콤한 간식까지 잔뜩 받았다. 일도 안 하고 먹기만 하는 게 민망하여 다음에는 조금 덜 먹어야지 다짐해도, 막상 음식을 앞에 두면 자제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그릇이 기름기조차 없이 깨끗해진 뒤였다. 예전에는 며칠 굶어도 끄떡없었는데 오히려 밥을 잘 챙겨 먹기 시작하자 식욕이 무한정 솟아났다.
밥값이라도 하고 싶어서 소야에게 몇 번이나 무슨 일을 하면 되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소야는 밥 먹는 게 가장 급한 일이라며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애기 신부님 일은 신령님이 차차 알려 주실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허약해서야 신령님이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기시겠어요?”
“저 열다섯 살이나 먹어서 애기 아니에요. 몸은 작아도 뭐든 잘하고요. 그리고 또…….”
“알았으니까, 아―.”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자 작은 약과 하나가 입 안으로 쏙 들어왔다. 달콤한 간식을 우물거리느라 말을 잃은 도란을 보며 소야가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가신들이 모두 모여 신령님과 같이 식사를 할 거예요. 저도 가고, 우리 애기 신부님도 가니까, 그때 신령님이 일을 주실지도 모르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게요!”
입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 씩씩하게 다짐하는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 작고 귀여운지.
인간 아이를 가금산 신궁까지 고이 모셔 온 신령님의 마음이 이해 갔다.
“그런데, 저기, 신령님과 식사요?”
도란이 남은 약과도 집지 못하고 조심조심 물어 왔다. 소야는 얼른 그녀를 안심시켰다.
“단둘이 먹는 게 아니라 가금산의 모든 가신이 모일 거예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그래도 저 같은 게 그런 자리에 가도 될지…….”
“저도 가는걸요?”
“선녀님은 선녀님이잖아요.”
“애기 신부님은 애기 신부님이고요.”
도란은 도르르 눈을 굴렸다.
소원을 들어준 신령님께 감사한 만큼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까지 한 일이라곤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것뿐이었다. 신령님이 게으름을 피웠다고 화를 내시면 어떡하지? 작은 가슴이 콩닥거려 앞에 쌓인 약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소야가 새벽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왔을 때 도란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애기 신부님, 신령님 뵙는 날이니 제가 예쁘게 단장해 드릴게요.”
꽃물에 목욕을 하고 손가락 발가락 끝에 순한 분까지 두드렸다. 얼굴에는 약수로 만들었다는 화장수를 바르고 동백기름을 먹인 머리는 한 갈래로 단정히 땋았다. 개나리색 저고리에 상앗빛 치마를 차려입고 아이들이 차는 꽃 노리개도 달았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버선까지 신겨 주는 소야의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자, 어때요? 예쁘지요?”
도란의 눈이 경대로 향했다.
반질반질한 유리에 못난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선녀처럼 예쁜 소야에 비하면 눈도 삐뚤고 코도 삐뚤고 입도 삐뚤었다. 게다가 울상인 표정은 또 얼마나 미운지. 단장하느라 고생한 소야의 손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 꼴로 고마우신 신령님 앞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자 소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애기 신부님, 왜 그래요?”
“……겨서요.”
“네에?”
“너무 못생겨서요.”
뱀말 사람들이 자기더러 못났다, 못났다 할 때도 이만큼 서럽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리고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아팠다.
“애기 신부님, 눈 좀 봐 봐요.”
부드러운 손가락이 턱을 받쳤다. 소야가 얼굴을 가까이 디밀고 도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하네, 눈이 삐지는 않은 것 같은데.”
“네?”
“눈 크게 떠요. 후우!”
갑작스러운 바람에 눈이 시렸다. 소야는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었다.
“이제 다시 경대 좀 보세요. 제대로 보일 테니까.”
눈에 바람 좀 분다고 거울에 비친 얼굴이 갑자기 월궁항아처럼 어여뻐지진 않았다. 시무룩한 표정을 본 소야가 도란의 거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애기 신부님, 예뻐요.”
“…….”
“동글동글 눈도 예쁘고 코도 멋지고, 입술은 어쩌면 이렇게 순할까?”
“…….”
“요기, 요기 눈물만 닦아 내면 얼마나 더 예쁠까요?”
소야의 정성을 이기지 못한 도란이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소야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활짝 웃었다.
“자, 이제 신령님 뵈러 갈까요?”
도란은 눈을 내리깔며 경대를 외면했다. 눈물은 닦았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 * *
신궁에 온 후 처음 방 밖으로 나와 본 것인데 사방이 별세계였다. 향긋한 내음이 낭하에 가득했고, 곳곳에 걸린 그림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각과 전각 사이의 정원과 길은 또 어찌 이리 그림 같은지. 탐스러운 나리꽃과 소나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서 있고, 그 위로 꾀꼬리와 줄무늬나비가 짝을 지어 정답게 노니니 그야말로 선경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머무는 별채에 딸린 연못은 눈부시게 맑아 꼭 하늘의 선물 같았다.
경대를 보며 느낀 울적함도 잠시 잊고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장지문이 나타난 후에야 도란은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그냥 편히 밥 먹는 자리예요.”
긴장한 도란을 다독인 소야가 문을 양옆으로 열어젖혔다.
“헉.”
앞에 펼쳐진 풍경에 도란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안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았다. 좌우로 갈라져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이들이 어림잡아 백 명은 될 것 같았다. 나이 든 남자부터 소야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까지, 남녀노소가 어우러진 모습도 심히 낯설었다.
각자의 상을 앞에 놓고 식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야와 도란에게 꽂혔다.
도란은 너무 무서워서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소야. 이리 가까이.”
그때, 귀에 익은 음성이 넓은 방을 가로질러 도란의 귓전에 내려앉았다.
안쪽에 앉은 신령님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가장 멀리 있지만 이렇게 보니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무수히 거느린 산 같았다. 그의 주변에만 신비로운 운무가 드리운 듯한 환상마저 어른거렸다.
“애기 신부님, 갈까요?”
너무 긴장해서 쓰러질 것 같은데, 소야는 그리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곤 도란을 왼쪽 길로 이끌었다. 두 줄로 앉은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도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적의 어린 눈빛은 하나도 없었지만, 도란의 다리는 저절로 후들거렸다.
그래도 말석에 앉을 테니 신령님 앞에서 고꾸라지는 못난 꼴을 보일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만 더 걸으면, 조금만 더 걸으면…….
그런데 이상했다. 소야는 앞으로, 앞으로 자신을 이끌었다. 까마득하게 멀던 신령님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신령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의 상 두 개가 비어 있는 걸 본 순간, 도란은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빨랫방망이로 심장을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애기 신부님!”
다리에 힘이 풀린 도란이 고꾸라진 것과 소야가 놀라 비명을 지른 건 거의 동시였다. 도란은 두 무릎을 동시에 쿵 찧으며 완전히 넘어졌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모여 있던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고, 도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신 진사해도 눈을 가늘게 떴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무서워서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도란의 귀로 혀 차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쯧쯧, 인세가 요즘 참으로 말세라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제대로 걸을 수 있을 턱이 있나.”
“마음 아파라. 천제님 복숭아라도 따다 주고 싶네.”
호의적인 음성도 정신이 혼미한 도란에게는 천둥 같은 비난으로 와닿았다. 자기 발로 걷지도 못하고 이 귀한 자리에서 꽈당 넘어지다니 얼마나 한심하고 천해 보일까. 도란은 소야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훔쳐본 신령님의 표정이 굳어 있어 너무나 무서웠지만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자신 때문에 식사도 못 하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도란은 신령님 바로 옆에 주저앉듯 자리를 잡았다. 맑은 화장수를 발랐던 이마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손은 하도 꽉 쥐어 얼얼할 정도였다.
“무릎은?”
비단 물결 같은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멍하게 있는데 옆자리의 소야가 도란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무릎을 다치지는 않았느냐?”
파들파들 떨면서 겨우 고개를 들자 신령님이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 네. 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
도란은 놀라움이 덜 가신 얼굴로 신령님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 고마운 신령님은 한밤중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멋졌다.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고, 꿋꿋하고 강고한 소나무가 사람의 형상을 하면 이럴까 싶고, 차분한 태도와 침착한 어조는 꼭 물속 같았다. 금빛 눈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타오르던 밤과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이 멋진 신령님은 곧 도란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머지 가신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가온산맥을 두루 돌아보고 오니 너희의 노고가 크고 깊음을 알겠다. 날짐승, 들짐승과 땅에 기는 것과 땅 밑에 웅크린 것과 산에 슬어 사는 인간들, 수목과 화초가 고루 어우러져 안연한 것은 전부 너희의 수고가 맺은 열매다. 모두 즐겁게 들고 더욱 힘껏 가꿔라.”
격려는 봄날처럼 온화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아름다운 말에 정신을 빼앗긴 도란은 잠시나마 긴장도 잊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덩치 큰 가신이 앞으로 나와 나부죽이 엎드렸다.
“신령님. 저는 오늘의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맡은 마을의 인심을 가지런히 하지 못하고 신령님을 고단하게 해 드렸으니 죄가 무겁습니다.”
도란은 그의 침통한 고백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신령님이 잠시 자신을 바라본 이유도 몰랐다.
“해범아, 뱀말의 인심은 네 죄가 아니다. 경계 너머의 어지러운 마음을 뉘라서 가지런히 할 수 있겠느냐. 때로는 천벌로써만 다스릴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니 자책하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라.”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머리를 깊이 조아린 남자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도란은 왜 갑자기 뱀말 이야기가 나왔는지, 그 뱀말이 자기가 살던 그 마을이 맞는지도 모른 채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신령님의 고요한 음성 덕분인지 심장이 아까만큼 요란하게 뛰지는 않았다.
“모두 먹자.”
더 나오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신령님이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조용하지만 편안한 공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도란이 상상한 것처럼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가신들은 자기들끼리 무어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가끔 작게 소리를 내어 웃기도 했다. 평화롭고 단란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아직 숟가락도 들지 못한 이는 도란 딱 한 명뿐이었다.
“애기 신부님, 어서 드세요.”
옆에 앉은 소야가 소곤거렸다.
신령님도 이쪽을 힐끗 쳐다보시기에 도란은 쫓기듯 숟가락을 들었다. 긴장이 앞을 가려 찬이 무엇인지도 보지 못했는데, 박박 닦은 조개를 가득 넣어 끓인 된장찌개에 노릇노릇 구운 조기가 올라와 있었다.
막상 음식을 보니 배가 고파서 도란은 숟가락으로 찌개를 한 입 떠먹었다. 놓인 지 오래일 텐데 신비롭게도 조금도 식지 않았다.
따끈한 국물이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입맛이 돌았다.
신령님과 다른 가신들 앞이니 전처럼 게걸스럽게 먹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굶주린 세월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가장 늦게 식사를 시작한 도란의 밥그릇이 가장 먼저 비워졌다. 한 그릇, 아니, 두 그릇만 더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불쑥 나타난 또 다른 선녀님이 새 밥과 찌개를 놓아 주었다. 빙긋 웃는 얼굴이 친절했다.
소야도 옆에서 마음껏 먹으라고 다독거리고 신령님도 조용히 식사만 계속하시니, 도란은 정말로 긴장이 풀렸다.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닌데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고 찌개를 떠먹고 조기를 뜯고 조개껍데기에 붙은 통통한 조갯살까지 남김없이 발라 먹었다. 서툰 젓가락질 때문에 쉴 새 없이 다각다각 소리가 났지만 도란 스스로는 깨닫지도 못했다.
조개에 혼이 팔려 있던 도란은, 마지막 껍데기의 조갯살까지 입에 넣은 후에야 쥐 죽은 듯 고요한 주변을 인식했다.
“…….”
“…….”
진작 식사를 마친 가신들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도란을 보고 있었다. 그들뿐 아니라 신령님의 시선까지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깨달은 도란은 소스라치게 놀라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먹은 게 전부 올라올 것 같았다.
“소야.”
“네, 신령님.”
선녀님이 나 때문에 경을 치면 어쩌나. 도란이 손끝을 마구 헤집던 그때.
“배불리 먹여라.”
“물론이죠! 반드시 포동포동하게 만들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황하여 신령님을 보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다른 가신들도 푸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처음 받아 보는 대접에 도란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밥알과 국물이 흘러 지저분해진 상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수저가, 기름 범벅이 된 입가가 처음으로 창피했다. 아무도 구박하지 않고 무안 주지 않는 지금에서야.
시뻘게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령님이 다른 말을 꺼냈다.
“소개가 늦었구나. 가금산에 새 식구가 왔다. 이름은 도란이고, 앞으로 분화구 화원을 맡아 가꾸게 될 것이다. 보다시피 어린아이니 정성으로 보듬고 아낌없이 도와주길 바란다.”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도란은 신령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온 것에 첫째로 놀라고, 일이 주어진 것에 둘째로 놀랐다.
화원 가꾸기라니, 도란은 화원을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는 서툰 손으로 귀중한 꽃들을 망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섰다.
그때 신령님의 깊은 눈이 도란에게 닿았다.
“분화구 화원에는 삼백 년 전부터 꽃이 피지 않는다. 어떤 이도 죽은 땅을 살려 내지 못했으니 너도 마음을 무겁게 먹을 필요 없다. 네 책임으로 맡겨진 땅을 정성으로 사랑해 주면 그걸로 족하다.”
“…….”
“할 수 있겠느냐?”
얕은 숨을 할딱이던 도란이 두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신령님이 명하셨으니 화원 일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거름 푸는 일이라도 해내겠다고 다짐했으니 못 배울 일이 무엇이고 못 해낼 일이 무엇이겠는가.
도란은 식사 자리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눈을 맑게 뜨고 또랑또랑 대답했다.
“뼈를 갈아서라도 해내겠습니다!”
조그마한 꼬마가 비장하게 뼈를 갈겠다고 외치니 몇몇 가신들이 손녀 재롱을 본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신령님은 웃지 않았다. 그는 도란만큼이나 진지하게 응해 주었다.
“너를 믿겠다.”
믿겠다니. 그런 말을 해 준 건 신령님이 처음이었다.
신령님이 일어나자 모두가 따라 일어섰다. 그가 가운데를 가로질러 나가는 동안 가신들은 모두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기다렸다. 도란도 허리를 한껏 꺾어 예를 보였다. 그녀의 조그마한 가슴에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분화구 화원을 풍성하게 가꿔 신령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
신령님이 나간 후, 미소를 띤 가신들이 도란에게 다가왔다. 목을 움츠린 그녀를 쓰다듬어 주는 이들도 있었다.
“인절미 좋아해요? 말랑말랑 인절미? 아니면 성샛골에서 만든 곶감은 어때요, 애기 가신님?”
넉넉한 인상을 가진 가신의 물음에 소야가 냉큼 나섰다.
“계수 님, 애기 신부님이에요.”
“어머, 몰랐네요. 애기 신부님, 우리 집 인절미 참 맛있어요. 조금씩 보내 줄 테니 많이 먹어요.”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여러 가신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제대로 대답도 못 하는 도란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는데 하나같이 음식 얘기였다.
“가금산은 그리 덥지 않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화채가 제일이죠. 애기 신부님도 좋아하실까 모르겠네.”
“입이 심심할 땐 육포도 좋은데. 애기 신부님은 어려서 이가 약해 딱딱한 건 못 씹으실까?”
“옥춘당 아셔요, 옥춘당? 알록달록하니 예쁜 사탕인데 살살 녹여 먹으면 달아요. 조금 보내 드릴게, 응?”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당황한 도란은 자신은 애기 신부님이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꾸벅꾸벅 고개만 숙였다. 훈풍처럼 따뜻한 말과 손길이 어색해 온몸이 간지러웠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허겁지겁 먹었으면 전부 음식 이야기만 할까 창피하기도 했다.
“애기 신부님.”
낮은 부름과 함께 그림자가 도란을 덮었다.
놀라서 바라보니 아까 신령님 앞에 나와 엎드렸던 그 남자였다. 호랑이처럼 큰 가신, 뱀말이 있던 산을 다스리던 해범이었다. 무인처럼 큰데도 기세가 순하여 그런지 별로 무섭지 않았다. 무뚝뚝한 남자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나도 음식을 보내겠습니다.”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이 낯설었다. 지금까지 도란 앞에서 미안한 표정을 지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 우리 애기 신부님은 이제 갈 시간이에요!”
소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도란은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새 식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그토록 뜨거웠다.
겨우 방으로 돌아온 도란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런 다음 찬물을 가져오겠다고 수선 떠는 소야를 붙들었다.
“선녀님, 죄송해요.”
“네? 뭐가요?”
“애써서 단장해 주셨는데, 제가 밥을…….”
도란은 참기 어려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구박하는 사람이 없으니 부끄러움이 더욱 생생해 괴로웠다.
그때 담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애기 신부님, 배고프게 산 삶은 창피한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젓가락질도…….”
“그것도 애기 신부님에게 제대로 된 밥상 한 번 내주지 않았던 어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에요.”
“…….”
“아까 애기 신부님에게 말을 건 커다란 가신은 해범 님이에요. 애기 신부님이 살던 마을과 그 산을 해범 님이 맡아 다스렸지요. 해범 님은 그래서 미안해하신 거랍니다.”
“…….”
“신령님과 가신들이 아무리 애써도 인세의 모든 슬픔을 구제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지 애기 신부님 몫이 아니에요.”
소야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올곧은 진심만큼은 곧바로 전해졌다. 가슴에 맺힌 무언가가 녹아내리는지, 도란은 정말 애기가 된 듯 엉엉 울고만 싶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면, 제가 젓가락질도 가르쳐 드리고 화원 가꾸는 일도 가르쳐 드릴게요. 어떠세요?”
“용서라뇨, 저는 그런 건…….”
깜짝 놀란 도란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연민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소야가 짝 손뼉을 쳐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럼 어서 이를 닦고 분화구 화원으로 가 볼까요? 제가 직접 안내할게요!”
소야의 노력 덕분에 도란도 울적한 생각을 떨쳐 낼 수 있었다.
“네!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큰 소리로 다짐하자 흐린 마음이 활짝 개며 용기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젓가락질도 배우고, 깨끗하고 예의 바르게 밥 먹는 법도 배우고, 화원 일도 배워야지. 매일매일 열심히 하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뱀말에서는 밥도 못 먹고 종일 일만 했는데,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먹을 수 있는 이곳에서는 그보다 백배, 천배 더 잘할 수 있었다.
‘너를 믿겠다.’
신령님의 말씀을 되뇐 도란은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
‘반드시 신령님의 믿음에 보답할 거야. 반드시.’
* * *
뱀신 진사해의 침방에는 남쪽으로 난 창문이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면, 오래전에 죽은 화산의 분화구가 보인다. 호수만큼이나 널따란 분화구에 있는 것은 어떤 씨앗도 품지 못하는 시커먼 흙뿐이다. 삼백 년 전까지만 해도 낙원 같은 화원이었다는데 말이다.
맡은 땅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신의 책무이니, 분화구가 삼백 년 동안 저 모양 저 꼴인 것은 진사해 본인의 태만이었다. 쉽게 해결하지 못할 일임을 일찌감치 인정하고 속을 태우진 않았지만, 볼 때마다 편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마음 불편한 풍경에 변화가 생겼다.
“어린애가 잠도 없군.”
넉넉한 침의 차림으로 창가에 앉아 있던 진사해가 낮게 혼잣말을 했다.
그의 말대로 잠도 없는 도란이 아침부터 소야와 함께 분화구에 나와 있었다. 고운 치맛자락을 날리며 그 넓은 땅에서 깡총거리는 모습에 저절로 눈이 갔다. 뱀말에서 처음 봤을 때는 겁을 집어먹고 달달 떠는 깡마른 꼬마였는데, 저렇게 밖에 있는 모습을 보니 활발하고 밝은 면도 많은 모양이었다.
도란이 해도 안 뜬 시간부터 분화구를 돌아다닌 게 벌써 며칠째였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다부진 각오와 의욕이 전해졌다. 아이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너무 열심히 하다가 몸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하기야, 소야도 다른 가신들도 아이를 살뜰히 살피는 모양이니 그 부분은 염려치 않아도 좋을까.
그때 침방의 장지문이 조용히 열렸다.
“신령님, 아침 준비가 다 되어 갑니다.”
“곧 내려가겠다.”
진사해는 차분히 낯을 씻고 의복을 정돈했다. 전할 소식도 있고 하여 전처럼 가신들과 아침 식사를 함께하기로 하였는데, 그 김에 도란의 얼굴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유심히 볼 생각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분화구 화원 일에 너무 매달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아이답게 뛰어놀기도 하라고 한마디 덧붙이기도 할 것이다.
식사를 하러 내려가니 이미 모든 가신이 자리해 있다가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이 가장 늦은 것인가 싶었는데, 도란과 소야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저번에도 가장 늦게 들어오더니. 괘씸하다기보다는 참 애들답다 싶어 웃음이 났다. 오래된 가신인 소야까지 ‘아이’로 묶어도 될지는 모르겠다만.
다 함께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장지문이 열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급히 뛰어온 게 분명한 도란이 흐트러진 차림새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소야의 차분한 호흡과는 참으로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역시 저 둘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겠다고, 진사해는 한가한 생각을 하였다.
“우리 애기 신부님이 뛰어오셨네.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먼 자리에 앉은 가신이 한 말에 진사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래도 애기 신부님 얼굴이 전보다 발갛고 좋네요. 역시 소야, 지나는 고양이도 살찌우더니 이번에는 애기 신부님을 포동포동하게 만들려나?”
“애기 신부님, 내가 보낸 인절미는 먹어 봤어요? 말랑말랑?”
“애기 신부님이…….”
가금산의 ‘애기 신부님’은 살갑게 말을 거는 이들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가며 자리에 다다랐다. ‘애기 신부님’의 혈색이 좋아졌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소야는 주인의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느라 바빴다.
그래, 차라리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 정확히 말해야겠다. 결정을 내린 진사해가 금빛 눈으로 소야를 지그시 응시했다. 웃음기 없는 시선에 소야와 도란은 물론이고 자기들끼리 농을 하며 즐겁던 가신들까지 조용해졌다.
“저, 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 사죄를 위해 모든 용기를 쥐어짠 도란에겐 미안하지만, 진사해는 둘의 늦은 걸음을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소야.”
“네, 신령님.”
곧잘 농을 걸고 겁 없이 재잘거리던 소야도 지금만큼은 눈을 내리깔았다. 주인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알아차린 그녀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네가 다른 이들까지 충동질했구나.”
“네?”
“이 아이는 내 신부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이런 아이가 어찌 내 신부가 될 수 있겠어.”
‘이런 아이.’ 도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진사해는 그녀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끼리야 농이지만 말이 가금산 너머로, 가온산맥 너머로 번지면 어쩌려고 경솔하게 입을 놀리느냐.”
진사해로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 도란은 아직 작고 어리지만 세월이 지나면 혼인할 나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신의 신부라는 호칭이 굳어지면 이후의 혼사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제는 가금산의 가신인 도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공연한 언행은 삼가는 편이 좋았다.
게다가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를 나이 많은 신에게 갖다 붙이다니 제정신인가. 아무리 농담이라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란은 혼사 같은 건 몰랐다. 진사해의 걱정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그가 차가운 얼굴로 툭 뱉어 놓은, ‘이런 아이’라는 말만이 가슴에 박혀 괴로웠다. 무릎에 얹힌 손에 저절로 식은땀이 찼다.
마을 사람들을 다 죽여 달라는 발칙한 소원을 빈 일과 신 앞에서 굶주린 개처럼 밥상에 달려든 일이 떠올랐다. 게다가 얼굴은 오죽 못났나. 자기 같아도 이렇게 볼품없고 초라한 계집애와 엮이기는 싫을 것 같았다. 농담으로라도, 장난으로라도 듣기 거슬리시겠지.
그래도.
‘너를 믿겠다.’
조금쯤은 인정받고 싶었는데.
과분한 대접을 받아 마음이 연약해졌는지, 막을 틈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죄송해요. 저 같은 게…… 저 같은 게 감히…….”
안 그래도 차갑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도란이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이유를 전혀 모르는 진사해는 오랜만에 말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다. 그로서는 도란을 생각해서 한 말인데 의도와는 달리 아이가 상처받은 얼굴로 울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란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가신들의 뾰족한 눈빛이 그의 뺨에 박혔다.
“울렸어…….”
“세상에, 저 어리고 약한 걸…….”
진사해는 거느린 가신은 물론이고 가온산맥 전체로부터 존경받는 신이었지만, 섬세하지 못한 말로 약한 인간 여자애를 울린 잘못은 막중했다. 아이를 다뤄 본 적이 없는 그가 진땀만 빼고 있을 때, 소야가 도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애기 신부님, 울지 마세요. 우리 신부님 하면 되지. 가금산 전체의 곱고 어여쁜 새색시 하면 되지요. 네?”
달래는 말이 어처구니없어 진사해는 헛웃음을 칠 뻔했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자기가 저 어린애에게 너 같은 건 내 신부가 될 수 없다며 모질게 군 줄 알겠다. 어른으로서의 양심과 가신을 이끄는 신으로서의 책임감에 한 소리인데 갑자기 냉혈한 취급을 받고 있으니 기가 찼다.
그러나 이 정도 말에도 마음을 다칠 수밖에 없는 도란의 가여운 처지가 또한 안타까워, 그만두라고 성을 낼 수도 없었다.
아이란 이토록 어려운 것이구나. 진사해는 남몰래 탄식하고 어조를 부드럽게 가다듬었다.
“도란아.”
도란이 훌쩍거리며 겨우 시선을 맞췄다.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구슬 같은 눈물은 속절없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진사해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네가 부족하여 한 말이 아니다. 다 자라기만 하면 너는 나뿐 아니라 누구의 신부라도 될 수 있어.”
뜻밖의 말이었는지 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저 앞으로의 네 혼사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혼사란 말이다…….”
신의 신부로 점찍히면 나중의 혼인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하고 싶은데, 이건 정말 복잡한 문제라 어린애에게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겨우 눈물을 그치려던 도란은 다시 울상을 짓지, 가신들은 자신을 심술궂은 악신 보듯 흘겨 대지, 맹세컨대 이렇게 난처한 적은 없었다.
“……되었다. 아이도 커 가면서 알게 될 테니, 너희 편한 대로 불러라.”
결국 항복한 것은 진사해였다. 일이 여기까지 오자 ‘애기 신부님’이라는 애정 어린 호칭을 굳이 바꿀 필요 있겠느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중에 도란의 혼사가 복잡해지면 직접 나서서 해결해 주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쉽게 설움을 그치지 못하는 도란을 달래 주는 게 먼저였다.
“다시 말하는데, 도란아. 너는 너 자체로 온전하니 누구의 신부든 될 수 있다. 일가를 이루어 다스릴 수도 있고.”
“…….”
“그러니 눈물을 거두고 식사를 하자.”
“…….”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마지막 물음은 노랫말처럼 다정했다.
도란은 신령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성가시게 운다고 혼내지 않고, 도리어 누구의 신부든 될 수 있다고 거듭 말해 주니 가슴이 벅차도록 고마웠다. 차가운 어조로 ‘이런 아이’라 칭한 것은 여전히 속상했지만, 또 혼사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신령님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전해졌다.
“네, 신령님…….”
진사해는 안도한 듯 또 기특한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란은 그 미소가 비 갠 하늘의 무지개인가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어귀에 이리 색색으로 떠오르는가 하였다.
어색하지만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도란의 눈물 때문에 적잖이 놀란 진사해는 가신들에게 전할 소식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고 말았다. 그래도 예측할 수 없는 아이와 함께하는 새로운 일상이, 그리 싫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 * *
그 뒤로 도란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사실 일이라고 해도 별다를 건 없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분화구 화원을 이리저리 살피고, 다른 정원에 물을 주고, 그러다가 마주친 가신들에게 살가운 인사를 듣는 게 전부였다. 하루라도 빨리 분화구 화원을 제대로 가꾸고 싶어 마음이 급했지만, 신들의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도란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켜보는 소야는 그녀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진사해도 오래 죽어 있던 땅이니 조급해할 필요 없다고 조언했는데, 도란은 그저 쓸모를 보이고 싶어 전전긍긍이었다. 조금쯤은 마음을 놓고 쉬어도 될 텐데 말이다. 오늘도 새벽부터 나와 종종거리느라 비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애기 신부님, 잠깐만 계세요. 물 좀 떠다 드릴게요.”
말은 안 해도 목이 마를 걸 알기에 소야는 잰걸음으로 잠시 도란 곁을 떠났다.
혼자 남은 도란은 검은 흙 위에 쪼그리고 앉아 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자그마한 손으로 이슬 머금은 촉촉한 흙을 조금 헤집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두 손으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때 스윽, 그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이야, 무엇을 하느냐?”
미간까지 찡그리고 하던 일에 집중한 도란은 낯선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하고 술술 대답했다.
“참말 이상합니다. 꽃과 풀은 자라지 못해도 작은 벌레라도 살 만한데, 여기는 벌레도 없는 것 같아요. 혹 지렁이라도 기어 다니지 않나 파 보고 있었어요.”
“저런. 수고해도 소용없을 텐데.”
“아니에요. 신령님이 맡기신 일이니, 꼭 해내서 신령님을 기쁘게 해 드릴 거예요.”
“조그만 아이에게 이 큰 화원을 살려 내라 명령하다니, 뱀신의 심보가 고약하구나.”
“……네?”
도란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쪼그려 앉은 채로 홱 고개를 쳐들자, 첫눈처럼 새하얀 옷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가 보였다. 분칠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눈가가 붉고 입술이 도톰하고 얼굴이 깨끗하니, 가히 말을 잊게 할 만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도란을 압도한 것은 선녀와도 같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 냉엄하게 도란을 내려다보는, 신비스러운 설조(雪鳥)도 아니었다.
세상을 가르며 우뚝 솟은 산처럼 씩씩한 위엄이 도란을 짓눌렀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녀는 화려한 옷으로 단장했는데도 무서운 장수 같았다. 눈빛이 형형하고 기세가 태산과도 같으니 저절로 기가 죽었다.
“저…… 누구세요?”
도란은 감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해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왕을 만난 천민처럼 움츠린 도란을 보던 여인이 빙긋 웃었다.
“네가 누구인지 먼저 말해 보아라.”
“저, 저는 도란입니다. 신령님의 가신……이에요.”
가신이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확신이 없어 저절로 말끝이 떨렸다. 그때 여인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반문했다.
“가금산의 가신이라고? 네가?”
“……네. 분화구 화원을 맡으라고 하셨어요.”
“농인 줄 알았건만, 정말 너 같은 꼬마에게 이런 일을 맡겼다니. 가금산의 주인도 진정 정신이 나갔구나.”
도란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까도 뱀신이 고약하다는 말을 하더니, 이번에는 정신이 나갔다고 했다. 고마우신 신령님을 두고 나쁜 말을 하는 여인이 미웠다. 보기만 해도 높으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정신이 나갔다는 말까지는 너무한 거 아닌가.
도란은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뭐라?”
여인의 입꼬리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겁먹은 도란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신령님은 좋은 분이세요. 마, 마음씨도 고우시고요. 다들 신령님을 좋아하고 또, 또 저한테는 은인이나 다름없으신데, 그리고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횡설수설하면서나마 겨우 말을 끝낸 도란의 얼굴이 새빨갰다. 맹랑한 말에도 여인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아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아니?”
“……누, 누구시든, 설령 하늘님이셔도 신령님을 욕하면 안 되죠!”
없는 용기까지 쥐어짜느라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각오만은 대단해 보였지만 그래 봤자 작은 새끼 고양이가 컁컁거리는 모양새였다.
다음 순간, 여인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던 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며 대들고 나중에는 버럭 소리까지 질렀는데도 여인은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어깨에 앉은 설조의 표정마저도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마침내 웃음을 멈춘 그녀가 도란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도란은 고개를 움츠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과연 가금산의 가신이로구나. 내 어린아이라 놀린 것을 사과하마.”
갑자기 칭찬받은 건가? 도란은 어리둥절했다.
“네가 이리 똘똘하고 야무지니 하나 묻겠다.”
“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솔직히 자신도 아는 게 별로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가금산의 가신답다는 칭찬까지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하기는 너무 민망했다. 도란은 간절하기까지 한 눈으로 여인을 보며 기도했다. 제발 내가 아는 걸 물어봐 주세요. 제발 내가 아는 걸…….
“어딜 가야 애기 신부님을 볼 수 있느냐?”
다른 것보다, 자기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사실이 제일 기뻤다. 도란은 가슴을 쫙 펴고 자신 있게 외쳤다.
“그건 바로 저예요!”
“……뭐라?”
여인의 표정이 다시 한번 돌변했다.
그녀는 도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아무리 많이 쳐줘도 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단이야 좀 있어 뵈지만 그래 봤자 진사해가 눈만 부라려도 앙앙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꼬마였다. 솔직히 매일 밤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 해도 놀랍지 않을 성싶었다.
그런데 이게 ‘애기 신부님’이라고? 귀여워서 애기라 하는 줄 알았더니 진짜 애기를 신부랍시고 데려왔을 줄이야!
기막힌 헛웃음이 터졌다.
“이놈이 진정 돌았구나!”
“……네?”
“내 당장 그놈을 봐야겠다.”
여인은 더 말하지 않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돌아섰다.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쳐 눈을 꼭 감았다가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멍하니 보는 도란의 콧잔등으로, 때아닌 눈송이 하나가 톡 떨어졌다.
* * *
진사해는 곧 손님맞이를 하게 될 줄도 모르고 서안 앞에 정좌하여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단정히 내리뜬 눈은 깊고 짙었다.
“아들아, 네가 정녕 어미보다 먼저 노망이 났느냐?”
얇은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칫했다.
진사해의 눈에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보름달처럼 눈부신 백의를 걸치고 설조를 어깨에 앉힌 그녀는, 태곳적부터 머나먼 만년설산을 다스려 온 뱀신이었다.
“늘 마중 나갈 틈을 안 주십니다.”
진사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맞이했다. 그녀는 아들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상석을 차지했다. 늠름하게 성장하여 가신을 여럿 거느린, 다 큰 아들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내 여기 오는 길에 소문의 ‘애기 신부님’을 보았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인간 어린애를 잡아먹으려 들다니, 진정 금수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어머니. 오해하신 겁니다.”
진사해는 얼마 전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구구절절한 사연일 뿐 아니라, 서럽게 울던 아이의 모습을 굳이 제 입으로 묘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어린 애가 어떻게 제 신부가 됩니까. 소야와 가신들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신부라 부를 뿐 제 신부는 아닙니다.”
아들의 천인공노할 변태 짓에 얼굴까지 붉어졌던 여인이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진사해가 지나가는 투로 툭 덧붙였다.
“설마 제가 열다섯 살 난 아이에게 음심이라도 품겠습니까?”
“열다섯 살이라고?”
만년설산의 신, 백청요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사해는 그녀에게 도란의 곡절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백청요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못 먹어 그리 작은 게로구나.”
“소야가 포동포동하게 만들겠다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연약한 아이에게 어찌 밭일을 시켜. 분화구 화원에서 보았다.”
“아무 일도 맡기지 않으면 스스로 객식구 같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다만.”
백청요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혼이 맑고 성정이 여리더구나.”
“강인한 면도 있습니다.”
진사해는 침방 서랍장에 잘 넣어 둔 나무 비녀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백청요가 조용히 웃었다.
“그래, 내게 눈을 치뜬 아이도 오랜만이기는 하지.”
“그 아이가요?”
“하늘님이라도 네 욕을 하면 안 된다고 바락바락 대들던데. 어미가 벌써 며느리 눈치를 보게 생겼구나.”
“어머니.”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진사해가 곧장 끊어 냈다. 백청요도 더 이어 갈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소문 자자한 애기 신부님을 만나러 왔는데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어. 그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
“발정기엔 어찌할 것이냐.”
신격을 가졌다 하나 뱀은 뱀. 진사해도 백청요도, 또한 다른 신들도 짐승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짐승의 것과 사뭇 다르기는 하나 어쨌든 진사해에게도 발정기가 있기는 했다.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발정기라 하여 진정 짐승이 되어 교접의 기쁨만 좇는 것도 아닌데.”
자손을 만들기 좋은 시기인 것뿐, 길에서 흘레붙는 짐승으로 추락하는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수신(修身)한 진사해 같은 신들은 더욱 그랬다. 사흘 정도, 용모가 색기를 띠고 유혹적으로 피어나며 기운이 평소와 조금 달라지는 게 전부였다. 불편한 점은 몸에 열이 쌓인다는 것 정도.
어머니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진사해를 보던 백청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금산 가신들이야 전부 작은 신이고 영물이니 네 발정기에 영향을 받지 않겠지. 그러나 그 애는 인간이다. 게다가 열다섯 살이면 달거리도 할 터인데,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진사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도 어머니도 인간을 이렇게 가까이 둬 본 경험이 없었다. 신의 기운이 강대해지는 발정기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 일단 조심해야 한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문제가 될 것 같으면 그 시기에는 잠시 어머니께 아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일단은 상황을 보자. 그 애도 쉽게 네 곁을 떠나려 들진 않을 것 같으니.”
때마침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거세게 흔들었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조용해진 모자를 한 바퀴 휘돌고 지나갔다. 미지근한 바람에서는 늦여름 냄새가 났다.
긴 계절이 가고 신의 발정기가 다가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염려에 대한 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 *
도란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소야는 괜찮다고 했지만 며칠 내내 심장이 두근거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분이 신령님 어머니셨다니…….’
분화구 화원으로 돌아온 소야는 넋이 나간 도란에게 사연을 캐물었다. 도란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금세 녹은 콧잔등을 문지르며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의 생김새를 설명하자마자 소야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야의 말에 따르면 도란 앞에 나타난 여인의 이름은 백청요로, 순결한 만년설산을 다스리는 위대한 신이었다. 게다가 신령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신령님을 욕하지 말라며 대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발바닥에까지 식은땀이 찼다.
당장 끌려가 매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가슴을 졸였지만, 신령님도 신령님의 어머니도 도란을 부르지 않았다. 누가 와서 대신 혼을 내는 일도 없었다. 그저 백청요의 설조만이 이따금 가금산 하늘을 휘돌았다.
차라리 모질게 혼이 났다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그분이 신령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쁘게 했으면 어쩌나, 그래서 신령님이 실망했으면 어쩌나 몹시도 신경이 쓰였다.
‘잠이 안 와.’
본래 사나운 걱정은 오던 잠도 쫓아내는 법이라, 도란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간에 혼자 깨어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피피 우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의 노랫소리만 들려서 세상에 혼자 남은 것만 같았다. 창문을 열자 반짝반짝 반딧불이 몇 마리가 지상에 방문한 별처럼 노닐고 있었다. 도란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그때, 어디선가 그윽한 꽃향기가 흘러왔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향기는 도란의 앙증맞은 코끝에 살짝 머물렀다가 금세 멀어졌다. 태어나 처음 맡아 보는, 음식 냄새보다 더 좋은 향기였다. 무슨 꽃이 이렇게 황홀한 향기를 발할까. 이 향기를 쫓아가면 꽃을 발견할 수 있을 듯했다. 그 꽃을 꺾어 신령님의 어머니께 드리고 용서를 빌면 노여움을 푸실지도…….
도란은 홀린 듯 맨발로 방을 나섰다.
해가 저물어 마루가 시원하게 식은 줄도 몰랐다. 흙이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혔지만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자꾸만 멀어진 향기를 쫓아 비틀비틀 나아갔다. 침의 차림인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아니, 자기가 침의를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풀잎 냄새, 이슬 맞은 흙 내음, 바뀌어 가는 계절을 증명하듯 서늘한 바람, 발목 언저리에서 살랑거리는 옷자락, 하나로 땋지 않고 풀어 내려 하늘하늘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향기.
도란은 서늘한 돌난간을 두 손으로 잡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커다란 연못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머무는 별채에 딸린 작은 연못과는 아주 다른 큰물이었다. 한참 그렇게 자기 얼굴을 보고 있어도 여기까지 온 길이 기억나지 않았다. 구름이 둥둥 떠가는 하늘이 연못에 고스란히 비쳤다. 놀랍게도 향기는 이 연못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듯했다.
넋을 빼앗긴 도란이 수면을 향해 손을 뻗으며 발돋움을 했다. 긴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어.”
몸이 앞으로 휙 기울며 발이 붕 떴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도란은 연못으로 고꾸라졌다.
체구가 작아서일까, 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눈과 코, 입으로 물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코가 맵고 눈이 따갑고 숨이 막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잠깐 사이에 물을 몇 모금이나 꼴깍꼴깍 들이켰다. 물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심장이 멎을 정도로 추워서 정신마저 어찔했다.
연못 아래로, 아래로 빨려 들며 도란은 속절없이 바동거렸다. 연못이 본래 이렇게 깊은가. 연못이 아니라 늪이었던가. 애초에 왜 한밤중에 혼자 여기까지 왔을까.
자책이 족쇄처럼 도란을 끌어 내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의식마저 희미해졌다. 이미 폐까지 물이 찬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사지가 축 늘어진 그때.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금빛 눈을 본 것 같았다.
신령님의 눈과 꼭 닮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도란은 의식을 잃었다.
* * *
누가 눈꺼풀에 추라도 매달아 놓은 걸까?
도란은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눈꺼풀만 파르르 떨릴 뿐 도저히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눈만 딱 뜰 수 있다면 정말로 개운하고 좋을 텐데. 지금 도란에게는 그 생각뿐이었다.
“아이가 깨어나려는구나.”
들어 본 적 있는 음성에 도란의 눈이 드디어 번쩍 뜨였다. 힘없이 늘어졌던 상체도 동시에 벌떡 일으켜졌다.
“세상에, 애기 신부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소야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그러나 도란은 그녀가 아닌 다른 이를 보고 있었다. 소야 옆에 우아하게 앉은 백청요였다.
“일어났니?”
백청요는 그리 놀란 기색도 아니었다. 방금 깨어났으면서 몇 리는 달린 양 숨을 헐떡이는 도란을 가만히 바라보는 얼굴이 더없이 침착했다. 그녀에게 버릇없이 군 후 내내 마음을 졸였던 도란은 얼른 머리부터 조아렸다.
“아, 아, 안녕하세요.”
“그래, 그런데 너는 안녕하지 못하구나.”
“……네?”
“일단 준비가 먼저니 나중에 차차 설명해 주마. 소야, 아이에게 물과 미음을 먹이고 떠날 준비를 마쳐라. 나는 밖에서 기다리겠다.”
백청요는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비단옷이 스르르 끌렸다. 도란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휴, 애기 신부님이 고생하셨네. 많이 놀랐는지 밤새도록 헛소리를 하면서 앓았어요.”
도란은 소야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불현듯 어둠 속에서 빛나던 금빛 눈동자가 떠올랐던 것이다.
“선녀님, 신령님은 괜찮으세요? 물속에서 신령님을 본 것 같았는데…….”
급한 물음에 소야가 멈칫했다.
어젯밤, 신의 발정기가 시작되었다. 가온산맥의 주인 진사해는 몸에 차오르는 열을 식히고자 깊은 연못 바닥에 똬리를 틀었다. 극대화된 양기에 영향을 받은 도란은 넋을 빼앗긴 채 그 연못으로 나아갔고, 죽음의 문턱에서 진사해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렇다 해도 도란이 진사해의 뱀 모습을 알아볼 줄이야. 도란이 눈만 보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소야의 어조가 조심스러워졌다.
“신령님은 당연히 괜찮으시죠. 지금 바로 옆방에 계세요. 애기 신부님이 걱정되시나 봐요.”
“아…….”
신령님이 날 걱정하셔서 바로 옆방에 계신다니. 좋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해서 도란은 애꿎은 입술만 괴롭혔다.
이따가 옷을 갖춰 입고 신령님께 가서 꼭 인사를 올려야지. 혹시 어머니에게도 대들고 사고까지 친 나 때문에 화가 나셨으면 어쩌나?
걱정이 도란의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소야는 그녀가 커다란 뱀을 보고 무섬을 탄다 여겨 달래 주었다.
“애기 신부님, 많이 놀라서 그렇게 밤새 앓았구나. 무시무시한 뱀 모습이어도 신령님은 신령님이에요. 그래도 얼마나 무서웠을까. 물에서 뱀을 봤으니.”
“……네? 아, 아뇨, 저는 그냥 신령님 눈을 본 것 같아서…….”
소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대한 뱀을 봐서 놀란 게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물에서 눈만 마주쳤는데 그게 신령님인 걸 알아본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 도란은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 애기 신부님은 생각보다 더 신령님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 어디 가나요?”
점점 심각해지는 소야를 보던 도란이 조심조심 입을 뗐다. 백청요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인데 소야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만년설산 신령님이 떠날 채비 하라고 하셨는데!”
“……떠나요?”
“우리 애기 신부님은 만년설산으로 갈 거예요. 그 산 설경이 얼마나 멋진지 모르죠? 거기서 조금 지내다가……. 어어, 넘어져요!”
얼굴이 점점 새파래지던 도란이 벌떡 일어나 침상에서 내려갔다. 말릴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뛰쳐나간 그녀를 아침 햇살이 맞아 주었다. 도란은 어느새 날이 밝았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옆방으로 달려갔다.
장지문을 열려고 했는데 풀이라도 발린 양 문이 열리지 않았다. 도란은 조심하는 것조차 잊고 와락 소리쳤다.
“신령님! 신령님, 잘못했어요!”
차갑고 딱딱한 마루에 무릎을 꿇은 도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얼굴이 금세 눈물로 엉망이 되었다.
“제발 저 쫓아내지 마세요.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요. 얌전히 있을게요, 일도 더 열심히 할게요!”
뛰어나온 소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때아닌 난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란은 대답 없는 문만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다른 데 보내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신령님…….”
“애기 신부님!”
허겁지겁 달려온 소야가 탈진할 지경으로 우는 도란의 어깨를 감쌌다. 도란은 열리지 않는 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에게 매달렸다.
“선녀님, 선녀님이 말해 주세요. 저 앞으로 밥도 천천히 먹고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않을게요. 다시는, 정말 다시는…….”
“도란아.”
나직한 부름이 도란의 애원을 끊었다. 도란은 숨까지 멈춘 채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부릅뜬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쫓아내는 게 아니다. 지금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위험해 잠시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는 것뿐이니, 이만 진정해라.”
한 마디라도 놓칠까 잔뜩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지만, 도란은 신령님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흘만 어머니께 가 있으면 된다.”
백청요 역시 곧 발정기를 맞는다. 그러나 여자인 도란에게는 진사해의 양기보다 백청요의 음기가 더 안전했다. 만년설산에서라면 어제처럼 양기에 홀려 연못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도란에게는 한 가지만이 중요했다. 그녀는 작은 손을 꼭 맞잡았다.
“정말, 정말 쫓아내시는 게 아니지요? 딱 사흘 후면 저 가금산으로 돌아오는 거지요?”
“그래. 소야도 같이 갈 거다.”
도란은 크게 안심하여 가쁜 숨만 할딱였다.
“만년설산의 경치는 무척 아름답다. 인간이 아니기는 하지만 네 또래 아이들도 조금 있으니 여기보다 덜 무료할지도 모르지. 혹시 거기서 계속 지내고 싶어지면 소야에게 얘기하거라.”
“아니에요. 전 여기가 제일 좋아요!”
다른 곳에서 살아도 좋다는 이야기에 도란이 붕붕 고개를 저었다. 진사해는 문 너머에 있으니 그런 아이를 볼 수 없었을 텐데, 문틈으로 낮은 웃음이 흘러왔다.
“그래? 가금산이 제일 좋으냐?”
“네. 신령님 옆이 제일 좋습니다!”
울음기도 덜 가셨으면서 그 말만은 또박또박했다. 문 저편에서 어제 맡은 꽃향기보다 더 향기로운 음성이 건너왔다.
“이곳이 네게 모질지 않다니 다행이구나.”
모질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가금산은 도란의 낙원이었다.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이 꼭 고향 같았다. 그만큼 도란은 이 땅을 사랑했다.
“네가 원한다면 앞으로도 이곳이 네 집이다. 잘 다녀오너라, 도란아.”
도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신령님이 보지 못할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울고불고 못난 꼴을 보인 것이 뒤늦게 창피했지만, 지금이라도 씩씩하고 싶었다.
“네, 신령님. 저 잘 다녀올게요!”
소야가 얼른 도란을 부축해 안으로 데려갔다. 물론 쫓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 힘이 난 도란은 부축도 필요 없는 상태였다. 소야는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 도란을 다시 침상에 앉힌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너무 서럽게 울어 놀랐네요. 애기 신부님, 진짜 쫓겨날 줄 안 거예요?”
“네에…….”
“아휴, 마음 아파라. 누가 그런 일로 우리 애기 신부님을 쫓아내요. 내가 진작 설명을 해 줄걸.”
“아니에요. 제가 부족해서…….”
부끄러운 듯 손만 꼼지락거리는 도란의 귓가가 발긋했다. 많이 놀랐을 테니 이대로 조금 쉬게 해 주고 싶었지만, 진사해가 간신히 양기를 누르고 있으니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소야의 손이 바빠졌다.
“곧 다른 사람이 음식을 가져올 거예요. 제가 짐 챙기는 동안 맛있게 먹고 얼른 출발해요. 여기 온 후 처음으로 여행 가는 건데, 신나죠?”
“네.”
도란이 작게 덧붙였다.
“돌아올 곳이 있어서 참 좋아요.”
서둘러 짐을 챙기느라 너무 분주했을까, 소야는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도란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이곳이 집이라고 말해 준 신령님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집.
처음 가져 본, 내 집.
가슴이 한없이 벅차올랐다. 기쁜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사흘 후, 진사해의 발정기가 끝났다.
열기가 깨끗하게 빠져나가고 한 겹 새로워진 몸을 입은 듯한 개운함이 그를 감쌌다. 허물을 벗은 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온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발정기가 끝난 그는 체경(전신 거울) 앞에 서서 의관을 단정하게 갖추었다. 부드러운 백의 위에 금사로 수놓은 검은 비단 표의를 걸치고 옷깃을 가지런하게 가다듬자 어느새 해가 질 시간이었다.
“신령님, 애기 신부님과 소야가 거의 도착한 모양입니다.”
문밖에 대기하던 가신이 잔잔히 고했다.
진사해는 체경을 등지고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처음 도란을 안고 들어섰던 신궁의 너른 앞마당에 섰다. 붉게 물든 하늘이 산수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떠가는 구름은 목화솜을 떼다 얹어 놓은 듯하고, 가깝고 먼 바위산은 저무는 땅을 지키는 장수처럼 우뚝하고, 대열을 갖춘 새들이 세상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날아가며 금을 그었다.
더하고 뺄 것 없이 완벽한 풍경 속에 가금산의 애기 신부님이 나타났다.
순한 학의 목을 끌어안고 날아오는, 길든 짐승보다 더 순한 애기 신부님. 하나로 땋은 머리가 바람 따라 흔들리고 동백처럼 고운 다홍치마가 경쾌하게 펄럭거렸다. 진사해가 도란을 발견한 것처럼 도란도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해맑은 아이의 모습에 진사해는 자기도 모르게 마주 손을 흔들 뻔했다.
학의 길고 날씬한 다리가 바닥을 딛자마자 도란이 폴짝 뛰어내렸다.
“신령님!”
만년설산에서도 잘 먹고 잘 잤는지 혈색이 좋았다. 그러나 그녀의 뺨이 발그레한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을 때문만은 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가금산과 신령님이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고작 며칠 떠나 있었을 뿐인데도.
새끼 강아지처럼 달려오던 도란은, 진사해가 환영 인사를 하기도 전에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러나 넘어진 게 아니었다.
“신령님, 그동안 강녕하시었어요?”
“…….”
이런 인사는 대체 누가 가르친 것일까?
두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바닥에 대며 납작 엎드리는, 남자애들이나 할 법한 큰절이었다. 오는 내내 이걸 할 생각에 마음이 급했는지 거의 넘어지다시피 해 깜짝 놀랐다. 어머니인 백청요가 가르쳤다면 이렇게 어설프게 가르치지 않았을 테니, 만년설산 또래들에게 뭔가 배운 모양이었다.
“그래, 너도 편안하였느냐?”
진사해의 커다란 손이 도란의 팔을 아프지 않게 쥐어 일으켰다. 벌떡 일어난 그녀의 뺨이 아까보다 더욱 상기되어 있었다. 이 엉망진창인 큰절을 해낸 것이 진실로 뿌듯한 모양이어서, 진사해는 굳이 이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네! 절 보러 나와 주신 건가요?”
“그럼.”
마중을 나와 주었다는 말에 도란의 목덜미가 화르르 붉어졌다. 진사해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도란을 놓아 주었다.
“이제 함께 돌아가자. 소야, 너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아이들을 이끌고 돌아가는데 아주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마중한 건 처음이어서일까. 만년설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살던 시절부터 온다 간다 말씀이 없는 분들이었고, 그 탓인지 손님들도 기별 없이 자유롭게 오가곤 했다. 그러니 진사해의 마중을 받은 이는 도란이 유일한 셈이다.
쫓아내지 말라고 빌면서 목이 쉬도록 대성통곡하던 것이 마음에 걸려 나왔는데, 큰 선물을 받은 듯 기뻐하는 아이를 보니 앞으로 매번 마중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 * *
비슷하고 또 다른 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흘러갔다.
진사해의 발정기가 찾아오는 늦여름과 늦겨울에, 도란은 사흘씩 만년설산으로 떠났다. 돌아올 때는 꼭 저처럼 순하고 하얀 학을 타고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날아왔다. 아이가 돌아오는 날이면 포근한 노을이 맑은 안료처럼 하늘을 물들여 아름다웠다.
아이는 돌아올 때마다 맨땅에 엎드려 진사해에게 절했다. 처음에 잘못 배운 탓인지 늘 풀썩풀썩 넘어지듯 절하여 진사해도 소야도 내심 아이의 무릎을 걱정했다. 그러나 절을 마치고 고개를 든 아이는 늘 해처럼 웃고 있었다.
마냥 서툴고 어리기만 할 것 같던 아이에게도 시간은 공평했다. 껑충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키가 자라 옷을 새로 맞춰야 했고, 뱀말에서 회초리질을 당해 생긴 손등의 흉터가 점점 옅어졌으며, 피부는 박속처럼 하얗고 보드라워졌다. 잠시 머물다 갈 손님의 거처처럼 휑하던 연못 별채도 도란만의 물건으로 채워져 정겨웠다. 이제 진사해는 아침마다 침방의 창문을 열어 분화구 화원을 거니는 도란을 보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신령님!”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 만년설산에서 돌아온 도란이 학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마중을 나와 있던 진사해의 얼굴에도 물결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상에 발을 디딘 도란이 신 앞에 섰다. 또 서투르게 넘어질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빛깔 고운 색동저고리를 입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찬찬히 공수했다. 나긋하게 포개진 두 손이 위로 올라감과 동시에 고개가 내려와, 손등과 이마가 살짝 붙었다. 무릎을 굽혀 자리에 앉자 도란의 몸이 낮아졌다. 그녀는 비틀거리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상체를 비스듬히 숙여 절했다.
달이 기우는 듯 은근하고 미려한 큰절이었다.
“…….”
진사해는 그대로 말을 잃었다. 올해 설에 세배할 때까지만 해도 쓰러지듯 절해 가신들을 미소 짓게 했던 아이가 갑자기 변하자 얼떨떨했다.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일어난 도란이 진사해의 놀란 낯을 보고 살포시 웃었다.
“생일이 지났다 하니 만년설산 신령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저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요.”
진사해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도란의 얼굴이 흐려졌다.
“많이 이상한가요?”
“아니.”
“…….”
“네가 진정 다 컸구나 싶어서.”
도란의 성장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강렬하게 실감한 건 처음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가만히 보고 있으니 도란이 고개를 조금 떨어뜨렸다. 만개한 꽃가지 같았다.
“저도 이제 여인이에요, 신령님.”
도란은 떨리는 가슴으로 진사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마우신 신령님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시는지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 이제 애기 신부님이 아니구나.”
대단한 칭찬이라도 받은 듯 도란의 낯이 해사해졌다.
“이만 돌아가자.”
먼저 등을 돌리는 진사해의 그림자를 피해 걷는 도란의 귓불이 남몰래 붉어졌다.
소녀가 여인이 되어 돌아온 날, 가금산에 새 계절이 찾아왔다. 청명하고 다디단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