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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화원의 비밀 (2/14)

2장. 화원의 비밀

탁, 탁, 옥으로 만든 주판알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크지 않은 주판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도란의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분화구 화원에 심을 가을 씨앗을 잔뜩 구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얼마나 구했는지 제대로 기록하고 싶어서 책자까지 펼친 그녀는 곧 주판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었다. 긴 소매를 잡고 먹에 붓을 살짝 담갔다 뺀 후, 책자의 빈 종이에 세로로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

기록을 마친 그녀는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책자를 덮었다. 그런 다음 손때 묻은 책자를 책장에 잘 꽂아 두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시작한 화원에 대한 기록이 어느새 책장 하나를 꽉 채웠다.

“하아…….”

그동안 열심히 했다는 증거이니 기뻐야 하는데 어째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분화구 화원을 살려 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온갖 꽃과 풀, 채소의 씨앗을 구해 뿌려 보고 정성 들여 가꿔 보았지만 전부 헛일이었다. 심지어 머나먼 서천꽃밭까지 가서 받아 온 씨앗도 싹을 틔우지 못했다. 여전히 분화구 화원에는 벌레 한 마리 없었다.

그러니 도란의 기록은 전부 실패의 기록이었다. 소야나 가신들은 도란이 속상해할 때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며 격려했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신령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도란은 자신의 큰절을 보고 깜짝 놀라던 진사해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이제 더는 열다섯 살이 아니었다. 길쭉한 체경에 비치는 모습은 어엿한 스물. 검은 머리카락은 소야가 매일 빗질해 준 덕에 보드라운 물살과 같고, 쪽 빤 듯 홀쭉하던 뺨에도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 손톱은 배나무 꽃잎처럼 뽀얗고 손등은 봉선화로 물들인 듯 발그레하니, 이전의 볼품없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구박데기 계집애에서 사랑을 담뿍 받은 여인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고는, 만년설산 신령님인 백청요마저 입을 벌렸다. 그녀가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구나.’라며 직접 여자들이 하는 큰절을 알려 줄 때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물론 절을 다 알려 준 백청요가 그래도 애는 애라고 고개를 저었을 때는 조금 섭섭했지만, 몇천 년을 살아온 백청요 앞에서는 누구든 애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그래도 도란은 이제 다 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누구보다도 신령님이 그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이제는 날 여인으로 봐 주셨으면.’

다 자랐는데도 신령님의 턱에 닿을까 말까 한 키는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그의 눈에 여인으로 비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긴장하여 돌부리도 없는 바닥에서 넘어지거나 굶주린 들개처럼 밥상에 코를 박던 모습도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책자 하나를 꽂다가 별생각을 다 한다고, 도란은 괜히 얼굴에 대고 손부채질을 했다. 여름도 다 갔는데 왜 이렇게 열이 안 식는지, 참.

아무래도 분화구 화원에라도 나가 얼굴을 식혀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짙푸른 장의를 어깨에 걸치고 앞에서 매듭을 지었다. 예전에는 이런 것 하나 하지 못해 소야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제법 야무지게 된 매듭을 보니 뿌듯했다. 모양새가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이만하면 잘한 거지. 스스로를 칭찬한 도란은 마루로 가 샛노란 당혜를 꿰신었다.

옷자락을 팔랑팔랑 날리며 가볍게 걸으니 금세 분화구 화원에 다다랐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곳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지려 했지만, 도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누가 뭐래도 어른이니 이런 일로 실망해선 안 된다.

도란은 옷자락이 끌리는 줄도 모르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땅을 다독거렸다.

“너는 왜 씨앗을 품지를 않니? 모름지기 땅은 다 씨앗을 품고 싶어 하는 법인데 말이야. 만년설산 신령님이 네가 모나고 모질어서 그렇다 하시더라.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하니까 그럴 리 없다고 말씀드려도 계속 놀리시지 뭐야. 넌 그런 말 듣는 게 억울하지도 않아? 으응?”

땅바닥에 대고 말을 거는 이 이상한 일이 도란에게는 자연스러웠다. 인세에 살 때도 지독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만물에 말을 걸곤 했으니까. 아주 가끔, 환청처럼 대답을 들은 적도 있다고 상상하며 어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곤 했었다. 이 넓은 땅도 분명 마음을 지니고 있을 테니, 꾸준히 말을 걸고 달래 주면 언젠가는 씨앗을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몇 가닥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추풍에 마음이 흐트러진 것일까, 도란의 입에서 화원과 그다지 관계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만년설산 신령님이 이제는 나도 씨앗을 품을 수 있는 땅과 같다 하셨어. 아마…… 아마 아이를 말씀하신 걸 거야. 애가 무슨 애 타령이냐고 하셨지만 그래도 나한테 이제 여인이 다 되었다는 말씀도 하셨는걸. 가끔 보면 만년설산 신령님은 참 이상하셔. 나한테 다 컸다고 하셨다가 갑자기 고개를 저으며 핏덩이라고 하셨다가.”

친구에게 재잘거릴 때처럼 말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세월을 함께한 이 화원이 친구나 다름없어서인지도 몰랐다.

가끔은 환청처럼 대답이 들린 적도 있다고, 도란은 남몰래 믿었다.

“난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절대 아이보다 먼저 죽지 않을 거야. 엄청나게 오래 살아서 아이를 끝까지 지켜 줄 거야. 그리고…….”

도란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절대,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우리 신령님의 아이를…….”

“도란아, 잠이 안 와 나왔느냐?”

“꺄악!”

쪼그려 앉았던 도란이 그대로 엎어졌다.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손이 쑥 내밀어졌다.

“어찌 그리 놀라.”

얼른 고개를 들자 그녀가 방금까지 입에 담았던 존재가 보였다. 진사해,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의 신이 그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불어온 온화한 바람이 도란을 쓸고 지나가자 신의 체향이 그대로 전해졌다.

“드, 들으셨어요?”

“무얼?”

못 들으셨구나. 도란이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를 완전히 일으켜 세운 진사해가 빈 땅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왠지 화원이 이날 이때까지 그대로인 걸 책망하는 것 같아 도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노력은…… 하고 있는데요…….”

“안다. 가금산에 너만큼 애쓰는 가신도 없지. 그저 네가 너무 여기 매인 것 같아 걱정이 되어 그런다.”

진사해의 음성은 꼭 민들레 홀씨 같았다. 하얗고 보드라운 것이 도란의 뺨을 간지럽혔다.

언제부터였을까, 한없이 고맙기만 하던 신령님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된 것이. 그의 눈길이 닿으면 이유도 없이 심장이 콩닥거리고 가슴이 간질거렸다.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얼굴이나 몸가짐이 몹시 의식되어 바보 같은 실수를 하기도 여러 번. 처음에는 막연히 동경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도란은, 언제부터인가 정말로 연정을 아는 어른이 된 것이다.

도란에게는 이 마음이 당연했다. 그녀는 살면서 신령님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사내를 본 일이 없었다. 신령님은 과묵했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애정이 가득했다. 우뚝 선 가금산처럼 평화롭고도 단호하게 버티고 서 모두를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절로 가슴이 설레었다.

그렇지만 도란은 한 번도 이 마음을 털어놓은 일이 없다.

그녀의 연모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했으나, 신령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홀릴 듯 아름답고 위대한 신령님이 도란 같은 인간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혼자 좋아하는 건 괜찮잖아. 그저 조용히 바라기만 할 뿐인데…….’

“도란아, 듣고 있느냐?”

“네? 네, 네!”

“못 들은 것 같은데.”

당황한 도란을 보는 진사해의 미소가 짓궂었다.

“좀 더 자유롭게 다녀도 좋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야와 함께라면 위험한 일도 없을 테니, 너무 화원에 매달리지 말고 유람도 다녀 보고. 너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어른이요?”

“그래, 여인이 되었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아직 도란이 아이로만 보이는 탓에 마지막 말은 반쯤 농담조였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어른으로 인정해 주는 듯한 말이 도란에게 용기를 주었다.

“저, 신령님. 예전에 했던 말씀 기억하세요?”

“무슨 말?”

“……제가 다 자라기만 하면 시, 신령님뿐 아니라 누구의 신부든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었는데.”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지.”

진사해는 새삼스럽게 도란을 바라보았다.

몇 마디 말을 오해하여 서럽게 눈물을 쏟던 열다섯 살 소녀가 떠올랐다. 그때의 도란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제 그녀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별빛 아래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이 아이가 더는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실감 나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찌, 눈여겨본 사내라도 있느냐?”

“아, 아, 아, 아아니요!”

도란은 몰랐지만 방금 그녀는 바닥에서 한 뼘쯤 펄쩍 뛰어올랐다. 진사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짓궂은 빛을 띠었다.

“그래? 만년설산에서 또래 사내와 옷깃이라도 스친 게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저한테는 신령님뿐인데요!”

당황해서 말을 뱉어 놓고 도란은 자기 혀를 씹을 뻔했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제정신인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사해는 도란의 외침을 전혀 ‘그런’ 방향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네가 어른이 되자마자 가금산을 떠나면 다들 헛헛할 테지. 계수는 벌써 너를 사내 집으로 보내지 말고 데릴사위를 들이자고 성화더구나.”

도란은 어릴 때부터 말랑말랑 인절미를 보내 주며 자신을 살뜰히 챙긴 계수를 생각했다. 그녀가 신령님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니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때 진사해의 손이 도란의 어깨로 올라왔다. 다독이는 손길에 어떤 성애적 의미도 없음을 알면서도 숨이 멎었다.

“그러니 좀 더 가금산의 애기 신부님으로 있어 주어라.”

“……네, 신령님…….”

얼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도란은 손등을 뺨에 대 얼굴을 식히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빨개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는데, 갑자기 턱 아래로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매듭이 엉켰구나. 네가 직접 묶었느냐?”

대답할 틈도 없이 장의의 매듭이 풀어졌다. 아까 서툴게 묶은 것이 떠올라 도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러나 진사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매듭을 다시 제대로 묶어 주었다.

단단하고 단정한 손이 얇은 끈을 쥐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양새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도란은 숨까지 참으며 달빛이 쏟아지는 손을, 모양 좋은 손톱을, 그 사이로 오가는 흰 끈을 바라보았다. 힐끗 훔쳐본 그의 눈은, 기묘한 밤기운 때문인지 이상하게 그윽하고 요요하며 또한 야릇하기까지 했다.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열기가 목덜미까지 번져 마치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

“차차 익숙해질 테지. 자, 다 됐구나.”

진사해의 큰 손은 단 한 번도 도란의 맨살에 닿지 않았다. 의식한 것일지 그저 우연일지 도란은 몰랐다.

얼굴은 더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뒤였다.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 그녀는 꾸벅 허리를 굽혔다.

“저, 그럼 이만 자러 들어갈게요.”

“그래.”

달아나듯 사라지는 도란의 뒷모습이 달빛 아래 이리저리 흔들렸다.

진사해는 그녀의 움직임을 오래 지켜보았다.

확실히 요즘 도란의 기색이 전과 달랐다. 정확히 짚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소녀에서 여인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신부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또 마음에 둔 사내가 있느냐는 물음에 몹시 당황하는 걸 보니, 아이도 사내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더 가금산의 애기 신부님으로 있어 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교제나 혼인을 억지로 미룰 수는 없을 것이다.

‘벌써 혼처를 알아볼 때가 되었나.’

수줍게 눈을 내리뜨던 도란을 떠올리니 그녀를 보낼 일이 벌써 아쉬웠다.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나중에 꼭 데릴사위를 들이자고 목청을 높이는 계수를 보며 참으로 유난스러운 인사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혼례야 머나먼 일이라도 괜찮은 사내들을 보는 건 언제든 좋은 일이지. 자리를 물색해 보아야겠다. 도란의 마음을 영 잘못 해석한 진사해의 생각은 어느새 그렇게 멀리까지 뻗어 가고 있었다.

* * *

“어, 이건…….”

도란은 방에 놓인 커다란 궤짝을 보고 주춤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분화구 화원에 다녀온 참인데, 침방에 난데없이 궤짝이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궤짝 위에 연분홍빛 한지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조심조심 봉투를 여는 도란의 뺨으로 머리카락 한 가닥이 흘러내렸다.

[애기 신부님, 해범입니다. 우담화 잔치에 입고 갈 옷 한 벌을 준비해 봤습니다. 잠시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편지를 잘 치워 놓고 궤짝을 열자, 금색 실로 포도 넝쿨을 수놓은 흰 저고리와 붉은 치마가 보였다. 팔 부분은 반투명하여 더욱 하늘하늘했다. 장식이 화려한데도 요란하지 않고 오히려 단아한 멋이 있었다. 소문난 애처가라 부인의 옷을 매번 골라 준다는 해범의 안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옷은 예뻤지만 도란은 어리둥절하여 편지를 거듭 읽어 보았다.

‘우담화 잔치?’

그때, 호들갑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가금산에서 이렇게 뛰듯이 걸어 다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애기 신부님!”

여전히 일곱 살 아이 모습인 소야.

“어머, 어머, 해범 님이 벌써 보내셨네. 우담화 잔치 때문이죠? 나도 지금 막 소식을 알았는데 해범 님은 엄청나게 빠르시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 그녀가 도란 앞에 풀썩 앉았다.

“우담화라고, 삼천 년에 한 번씩 피는 꽃이 있어요. 말이 좋아 삼천 년이지 사실 제멋대로 피는 꽃인데, 워낙 귀한 꽃이라 찾아가도 아무에게나 보여 주지 않아요.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만 갈 수 있지요. 우리 신령님도 초대를 받으셨으니 애기 신부님을 데려가실 거예요!”

“삼천 년에 한 번씩 피는 꽃이요?”

분화구 화원 때문에 몇 년째 속을 썩고 있는지라 그런 얘기에만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러나 소야의 관심은 영 다른 곳에 있었다.

“권세 있는 신들만 모일 테고 다들 한껏 단장하고 올 테니, 가기만 하면 눈 호강일 거예요. 애기 신부님도 나이 든 가신들 말고 또래 사내들도 보시고 해야죠.”

나이 든 가신들이라 해도 다들 젊은 외양을 하고 있어 겉보기에는 또래 같았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소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해범 님이 그래도 참 재빠르시네요. 잔치에 가는데 아무렇게나 입을 수는 없죠. 이 옷 제가 입혀 드릴까요?”

“자, 잠깐만요. 아직 신령님이 절 데려간다고 하신 것도 아닌걸요. 모든 사람을 데려갈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저를 남겨 두실 수도 있잖아요.”

“어휴, 애기 신부님도. 아직 우리 신령님을 몰라요?”

소야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도란을 일으켰다. 저고리와 치마를 벗기고 해범의 선물을 입혀 주는 손길이 날래고 야무졌다. 순식간에 도란을 변신시킨 후 체경 앞에 세우는 소야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포동포동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버들잎 같은 애기 신부님이 됐어.’

소야의 생각은 자만이 아니었다. 길쭉한 체경에 비친 도란은 누가 보아도 산뜻한 미인이었다. 해범이 선물한 밝은 저고리는 하얀 얼굴을 더욱 화사하게 밝혀 주었고, 금장을 입힌 다홍치마는 꼭 가을 들판의 나비 날개 같았다. 수줍으면서도 해맑게 피어난 애기 신부님의 모습이 소야를 몹시 뿌듯하게 해 주었다.

“우담화가 몇천 년에 한 번 피든, 우리 애기 신부님이 훨씬 예쁠 거예요.”

“선녀님도 참…….”

과분한 칭찬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밖에서 다른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소야가 먼저 반응하여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령님이 보내셨다고요? 한발 늦으셨다고 전해 줘요, 해범 님이 더 빨랐거든요!”

진사해가 보낸 선물임을 깨달은 도란의 가슴이 요란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소야는 커다란 궤짝을 끙끙거리며 가지고 들어와 쿵 내려놓았다.

“애기 신부님, 이것도 입어 보세요. 한 사나흘 가 있을 건데 전부 어울리는지 봐야죠.”

진사해가 보낸 옷은 해범의 것과 아주 달랐다. 속이 비치지 않는 짙은 남색 저고리에 밝은 파란색 꽃무늬가 불규칙하게 수놓인 채였고, 옷고름은 저고리와 대비되는 어두운 적갈색이었다. 엷은 미색 치마는 자유로이 노니는 새들의 날개처럼 풍성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띈 것은 비녀였다. 매화를 형상화한 장식이 부착된 짧은 갈색 비녀는 막 꺾은 꽃가지 같았다.

“어쩜, 우리 신령님한테 이런 재주도 있었네.”

소야는 도란의 머리를 솜씨 좋게 둘둘 말아 올려 비녀를 먼저 꽂아 주었다. 혼인하지 않았으니 부인네들처럼 완전히 틀어 올리지는 않았고, 옆머리를 비스듬히 흘러내리게 하여 맵시를 더했다. 꼭 맞는 옷까지 위아래로 갖춰 입힌 후 소야가 야심만만하게 웃었다.

“거기서 우리 애기 신부님이 제일 예쁠 거예요.”

도란은 체경에 비친 제 낯선 얼굴을 공연히 몇 번 문질러 보았다. 해범이 보낸 옷을 입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설렘이 밀려와 마음이 조각배처럼 울렁거렸다.

“신령님이 보시기에도 예쁠까요?”

“당연하죠.”

꼭 그랬으면 좋겠다. 도란은 삼천 년에 한 번 핀다는 귀중한 꽃보다, 자신을 본 신령님의 표정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어여쁘다고 한 번만 말해 준다면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 * *

우담화 잔치가 열리는 바리원(原)으로 가는 날, 도란은 해범이 선물한 옷을 입었다. 진사해가 선물한 옷을 마지막 날 입어 그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혹 신령님이 왜 자신이 보낸 옷을 입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어쩌나 했는데, 진사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얼굴에 가볍게 분을 올리고 입술을 연지로 물들인 도란을 보고 빙긋 웃었을 뿐이다.

“이렇게 단장한 모습은 처음 보는구나.”

“네, 저, 이상한가요?”

“아니.”

“…….”

“잘 어울려.”

흰 분으로도 가리지 못할 홍조가 도란의 뺨을 물들였다.

바리원으로 가는 이는 총 네 명이었다. 진사해와 해범, 도란과 소야. 소야는 애기 신부님 덕분에 자신도 귀한 자리에 따라가게 되었다며 고맙다고 속닥거렸다.

그들은 모두 학이 끄는 가마에 올랐다. 금빛이 도는 보료를 깔아 놓은 가마는 네 사람이 함께 타도 넉넉했다. 소야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가금산과 가온산맥의 선경에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진사해로부터 단장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내내 수줍어하던 도란도 그때만큼은 소야와 함께 감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온산맥의 전경을 보던 도란의 마음에 한 가지 궁금증이 싹텄다. 그녀는 나란히 앉은 진사해와 해범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바리원은 어떤 신령님이 다스리시나요?”

“대무신령님이 다스립니다.”

해범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선물한 옷이 도란에게 잘 어울려 뿌듯한지 내내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대무신령님?”

“말 그대로 굉장한 무신(武神)이지요. 무뚝뚝하고 말이 없긴 하지만 바리원을 무척 사랑하신다고 하더군요. 신령님은 실제로 만난 적이 있으시지요?”

모두의 시선이 진사해에게 꽂혔다. 그의 대답은 짧고 덤덤했다.

“그래. 소문보다 훨씬 더 말이 없는 신이지. 내내 같이 있어도 목소리 듣기가 힘들 정도다.”

“아들들도 많다던데.”

“자식들 성질이 조금 거침없기는 하나 마음은 따뜻하고, 도란이 또래도 많으니 심심할 일은 없을 거다.”

진사해의 시선이 정확히 도란에게 닿았다. 도란 대신 소야가 대답했다.

“애기 신부님 친구 만들어 주시려고요?”

“또래를 만날 일이라곤 만년설산에 갈 때뿐이니, 이렇게라도 어울릴 일이 있어야지. 게다가 대무신의 아들들은 전부 이름난 미남이다.”

소야가 세상에, 세상에, 하고 감탄하며 도란의 팔뚝을 두드렸다. 그러나 도란은 신령님 같은 미남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말을 꼭꼭 감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진사해가 엷게 웃으며 농을 덧붙였다.

“도란아, 바리원에 가면 함께 단풍놀이 갈 만한 사내가 있는지 한번 보아라.”

소야가 손뼉까지 치며 꺄르르 자지러지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해범까지 빙긋 웃었다. 도란은 경직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연신 감탄했던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령님이 묶어 준 장의의 매듭도 차마 풀지 못하였는데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온당치 못한 마음인 줄 알면서도 몹시 섭섭했다. 차라리 빨리 바리원에 도착했으면 싶었다.

* * *

가마에서 내리자 코끝에 기이한 향내가 감돌았다. 그 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기도 전에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가금산의 신궁과 비슷한 고대광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바리원은 정말 널따랗고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벽도, 지붕도, 심지어 정자조차 없었다. 넓은 동산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우담화 나무만 아니었다면 주인 없는 빈 땅으로 보였을 것이다.

온 동산의 주인인 양 가지를 뻗은 우담화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신과 영물이 모여 있었다. 색색의 화려한 옷을 걸친 이들이 흙바닥에 비단을 깔고 앉아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모습이 생경했다. 모두 지고한 존재이니 높은 의자에 앉아 점잔을 빼며 시를 읊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리 소풍 나온 애들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니.

심지어 막 도착한 진사해 일행을 마중하는 종복조차 없었다. 바리원에 와 본 적이 없는 도란과 소야는 무척 당황했지만, 진사해와 해범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했다. 진사해는 아무렇게나 흩어져 앉은 이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 빈 곳을 찾아냈고, 해범이 미리 챙겨 온 비단 자리를 깔았다. 딱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어리둥절하게 선 도란을 향해 진사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우담화 나무가 워낙 귀하여 바리원에는 인공적인 건축을 하지 않는다. 꽃이 피어도 의자조차 놓지 않는 건 다 땅의 힘을 보존하기 위함이지.”

“그럼 다들 여기서 밤을 지새우나요?”

“멀지 않은 곳에 대무신의 궁이 있으니 나중에 함께 이동하면 될 것이다. 나는 대무신에게 인사를 하고 올 테니, 도란이 너는 소야와 주변을 둘러보거라.”

“애기 신부님, 어서 가요!”

소야는 도란의 손을 잡고 신나게 달려 나갔다. 도란은 해범을 자리에 남겨 두고 떠나는 진사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겨우 고개를 돌렸다.

“우담화는 귀한 꽃이지만, 한 번 피면 얼마든지 꺾어도 괜찮아요. 꺾어도 꺾어도 계속 피어나거든요. 고아한 도(道)를 상징하는 꽃이라,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품에 간직해도 된대요. 신기하죠?”

“저도 꺾어도 괜찮을까요? 저는 도를 닦진 않는데…….”

“살아가는 일이 도 닦는 일인데요, 뭐!”

일곱 살 어린애 모습이면서, 소야는 가끔 진짜 신선 같은 말을 했다. 도란이 도를 깨친 양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소야가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우담화 나무 가까이 가자 향기가 진동했다.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맡은 향기가 바로 이것인가 싶었다. 박하 향처럼 시원하면서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 듯 달콤했다. 꽃의 생김은 의외로 평범하고 소박했다. 작고 둥근, 은청색 구슬 같은 꽃은 언뜻 보아서는 꽃인지 알기도 어려웠다. 지나치며 보면 가지에 은청색 열매가 매달린 줄 알았을 것이다.

은은하게 빛을 내는 꽃들이 꼭 지상에 떨어진 별님들 같았다. 꽃을 꺾으려 바글바글 몰린 사람들 때문에 소란한데도 진귀한 광경을 앞에 둔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향기가 좋네요…….”

한 가지만 꺾어서 신령님 침방에 꽂아 드리고 싶었다. 향기가 날 때마다 자신을 생각하실지도 모르니까.

“향기만 좋은 게 아니에요. 우리 애기 신부님, 제가 좋은 거 알려 줄까요?”

소야는 망설이는 도란을 대신해 꽃가지를 뚝 꺾었다. 탐스러운 꽃들이 동시에 출렁이자 마치 수십 개의 방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소야는 그 가지를 지나가던 남자의 얼굴에 홱 집어 던졌다.

“이렇게 추파를 던질 수도 있다고 해요! 점잖은 자리가 아니니 이런 건 좋지요?”

“소야 누이,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가지에 얼굴을 얻어맞은 남자가 분한 듯 소리쳤다. 그냥 아무 남자에게나 던진 줄 알았는데 소야와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소야는 도란에게 양해를 구하는 눈짓을 보이더니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남자 쪽으로 돌아섰다.

“아청! 죽마고우를 이런 데서 만날 줄 몰랐네.”

“나야말로 이런 데까지 와서 소야 누이한테 얻어맞을 줄 몰랐어!”

도란은 그제야 소야가 자신보다 수백 년은 더 산 존재임을 실감했다. 도란이 아는 사람이라곤 가금산의 가신과 만년설산에서 안면을 튼 몇몇이 전부였지만 소야는 다른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벗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도란은 은은한 미소만 띤 채 없는 것처럼 옆에 서 있었다.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스쳤다. 도란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가 도란의 어깨를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꽃이 짓뭉개질까 싶어, 도란은 서둘러 가지를 주웠다.

“낭자, 어찌 혼자 계세요?”

꽃가지를 들고 몸을 펴자마자 세 사내가 보였다.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헷갈리는, 건장한 장부들이었다. 세 쌍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고정된 상황에 당황한 도란은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혼자 있는 게…….”

인파에 떠밀렸는지 소야도, 그의 벗도 사라지고 없었다.

“일행을 놓치셨구나! 괜찮아요. 이 바리원이 넓기는 해도 느긋하게 놀고 있으면 다 찾게 되어 있어요.”

“같이 갈까요? 바리원의 손님을 혼자 둘 순 없죠!”

“형님들, 어서 우리 자리로 모시자!”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내들이 도란을 에워쌌다. 위협적인 몸짓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남자들에게 둘러싸이니 좀 당황스럽긴 했다. 어어 하는 사이 도란은 빈 비단 자리에 도착했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풀썩 주저앉혀졌다. 이런 상황이 처음인 도란이 주춤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일행이 찾을 거예요. 전 그냥…….”

“낭자,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희랑 있으면 누구든 다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대체 누구신데요?”

도란은 소개도 없이 자신을 소몰이하듯 여기까지 끌고 온 사내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친근하게 눈을 찡긋거리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내내 제멋대로 구는데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 건 이런 허물없는 태도 때문인 것 같았다.

“놀라지 마세요. 저희는 바리원 대무신령님의 아들들이에요!”

도란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들이 정말 대무신의 아들들이란 말인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진사해는 대무신의 아들들에 대해 얘기했다. 전부 이름난 미남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아름다운 외모이기는 했지만 진사해를 보아 온 도란의 눈에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뭐죠? 낭자께서 실망하신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남의 외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생각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치는 서툰 모습이 짓궂은 사내들의 장난기를 자극했다.

“제가 맞혀 볼까요? 대무신의 아들들인데 칼을 안 차고 있어서 놀라셨나?”

“아니면 대무신에게 아들이 있는 줄 모르셨나?”

“아니지,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우락부락해서?”

도란이 어깨를 움찔했다. 마지막으로 말한 남자가 씩 웃었다.

“내가 맞힌 것 같지, 형님들?”

기분이 나빴을 법도 한데 그들이 으하하 파안대소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쩌렁쩌렁한 웃음이었다. 도란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의 항변은 유쾌한 웃음에 먹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도란의 손에는 이미 잔이 들려 있었다. 술을 마셔 본 적 없는 도란은 작은 잔에 콸콸 쏟아지는 맑은 술을 보며 기겁했다.

“낭자, 제가 답을 맞혔으니 벌주를 드셔야지요.”

“막내야, 그만. 낭자께서 아직 어리신 것 같다.”

도란의 반응을 살피던 다른 형제가 막내의 손목을 붙잡아 술병을 거두게 했다.

“자세히 보니 아직 연소한 듯한데, 혹 부모님과 함께 오셨습니까? 손을 놓쳐 헤어진 건가요? 부모님의 함자를 일러 주면 우리가 데려다주겠습니다.”

미아 다루듯 하는 태도가 도란의 마음을 자극했다. 안 그래도 진사해에게 여인으로 보이지 못해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생판 처음 보는 사내들까지 아이 운운하지 않는가. 도란은 오기로 술잔을 입술에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대무신의 아들들이 말릴 틈도 없었다.

“콜록, 콜록!”

뜻밖의 독한 목 넘김에 놀라긴 했지만, 잔을 내려놓고 남자들을 보는 도란의 눈은 또렷했다.

“저는 아이가 아니에요. 부모님 손을 놓친 것도 아니고요.”

“그것 봐, 형님! 꼬마가 아니라잖아!”

막내가 싱글벙글하며 도란의 잔을 또 가득 채워 주었다. 그러더니 불쑥 술병을 내밀었다. 어린애인 도란 앞에서 음주를 자제한 가금산의 가신들 때문에, 그녀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어어, 한 잔 안 주시는 건가요?”

“막내야, 그만해. 낭자, 결례지만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어요.”

아까부터 아이 취급하는 첫째를 쏘아본 도란이 톡 쏘았다. 독한 술 한 잔이 들어간 직후라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기세 그대로 막내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막내는 두 손으로 그녀가 따라 준 술을 받은 다음 잔을 들어 예를 표했다.

“하여튼 형님들은 꼭 사람을 애 취급한다니까요. 그렇죠? 낭자도 저도 이제 다 컸는데 말이에요.”

막내가 먼저 술을 들이켜자 도란도 엉겁결에 술잔을 입에 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마실 만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첫째와 둘째도 도란이 술을 못 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라고 판단한 듯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결례를 범했네요. 제가 모자란 식견에 그러했으니, 용서해 주시고 한 잔 받아 주시겠습니까?”

정말 어른을 대하는 태도에 도란의 표정도 한결 풀어졌다. 사실 가금산에서는 누구도 도란을 이렇게 대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한 잔 주셔요.”

첫째가 두 손으로 잔을 채워 주었다. 머잖아 석 잔째의 술이 도란의 입술을 적셨다.

처음 마시는 독한 술이 도란의 정신을 금세 앗아 갔다. 그녀는 가장 죽이 잘 맞는 막내와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음껏 웃었다.

“낭자께서도 올해 스물이 되신다니 우연이네요. 저도 스물입니다. 저희가 성년이 되는 해에 이리 우담화가 피다뇨, 기막힌 우연 아니겠습니까?”

“그러게요. 꼭 맞춘 듯 올해에 우담화가 핀 게 신기해요.”

잔을 나누다 보니 도란의 얼굴에도 취기가 돌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첫째가 부드럽게 도란의 잔을 잡아 내려놓게 했다.

“낭자, 많이 취하셨으니 일행에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형님, 낭자는 아직 멀쩡하셔. 그렇지요?”

“맞아요. 전 괜찮아요. 보세요!”

도란은 자신의 멀쩡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벅저벅 걸어 보였다. 휘청거리는 걸음걸이에 맞춰 치맛자락이 밤바람에 꽃잎처럼 나부꼈다. 막내가 손뼉을 치며 역시 낭자는 하나도 안 취한 게 분명하다고 편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지각 있는 첫째의 눈에, 도란은 만취 상태였다.

“낭자, 일단 진정하시고…….”

“괜찮다니까요?”

부축하려는 첫째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순간, 도란이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그대로 넘어지나 싶었는데 단단한 팔이 무너지는 몸을 받쳐 주었다.

“도란아.”

뜻밖의 목소리에 도란의 술기운이 약간 달아났다.

도란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쓰러지는 몸을 잡아 준 진사해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을 맞이하여 묘한 빛을 띠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술을 마시고도 멀쩡하던 도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붙은 듯 달아올랐다.

“시, 신령님…….”

진사해는 도란의 흐트러진 모습을 잠시 살폈다. 비녀로 반만 틀어 올린 머리가 느슨해져 붉은 뺨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반쯤 기운 채 선 몸짓도 걱정스러웠다. 진사해는 일단 도란을 제대로 잡은 후 멀뚱멀뚱 선 세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세 사내가 누구인지 아는 듯 자연스러웠다.

“내 가신입니다. 많이 취했으니 이만 데려가지요.”

“저, 혹시 가온산맥의 신령님 되십니까?”

진사해의 금빛 눈을 알아본 첫째가 쩔쩔매며 머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일행에게 모셔다드리려 하였는데 늦었습니다.”

“됐습니다.”

간단히 답한 진사해가 도란을 이끌었다. 도란은 사내들을 한 번 돌아보지도 못하고 진사해에게 의지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비틀거리는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래 봤자 취한 건 취한 거였다.

도란은 민망한 마음에 진사해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어지럽게 모인 사람들 틈을 지나는 신령님의 뺨에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도란아.”

시선을 느낀 진사해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소야와 꼭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다.”

“그게, 선녀님이랑 어쩌다 헤어지게 되어서요.”

“그래. 너를 혼자 두지 말라고 소야에게 단단히 이르마.”

“……네?”

“너는 아직 어리고 세상을 잘 모르니 보호자와 함께 다니는 편이 좋아.”

도란의 발이 우뚝 멎었다.

그녀를 부축하던 진사해의 걸음도 자연스럽게 지체되었다. 떠들썩한 사람들 틈을 겨우 빠져나와 대무신의 궁으로 가려던 진사해가 의아한 낯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늘 수줍게 눈을 내리깔던 도란이 붉어진 눈으로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신령님, 저는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요.”

“…….”

“저도 이제 스무 살입니다. 하나도 어리지 않아요.”

도란은 자기가 아주 단호하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취기 때문에 목소리는 떨렸고 단어도 어눌하게 뭉개졌다. ‘흐아나도 으어리지 아나요오.’ 진사해는 잔뜩 취해 놓고 갑자기 강단 있는 척하는 도란이 귀여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이 도란을 자극했다. 도란은 술기운에 힘입어 진사해의 손을 팩 뿌리쳤다. 이것만큼은 진사해도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만년설산 신령님은 이제 저더러 여인이라 하셨는데, 신령님은 어찌 이리 아이로만 보세요? 저는 이제 신령님 품에 안겨 왔던 그 열다섯 살 꼬마가 아니라고요.”

“그래, 잘 알겠다. 어서 돌아가자.”

“제 말은 하나도 진지하게 안 들어 주시고. 사내를 만나란 말씀이나 하시고!”

마지막 말이 진사해를 참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아니, 신부 이야기를 하기에 관심 가는 사내가 있는지 보라고 한 것인데 그게 이리 취해서 화를 낼 일인가. 그래도 아이와 다투어 무엇 하겠나 싶어 적당히 달래어 데리고 들어가려던 그때.

도란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소리쳤다.

“신령님은 정말 너무하세요!”

그러더니 갑자기 휙 몸을 돌려 멀리 달려가 버리는 게 아닌가?

진사해는 허허벌판으로 달려가는 도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해졌다. 붉은 치맛자락이 달빛 아래 나풀거렸다. 취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도 끝끝내 넘어지지 않고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진사해가 헛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술을 제대로 가르쳐야겠는데.’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도란의 뒤를 따랐다. 신장의 차이가 상당한 데다 한쪽이 취하기까지 한지라 거리는 쉽게 좁혀졌다. 진사해가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던 도란이 점점 느려지더니 불쑥 솟은 바위 옆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사해는 아이를 어찌 달래나 고민하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흐윽……. 흐어엉…….”

아이의 울음이 들리지만 않았다면 진사해의 입가에는 끝까지 미소가 머물렀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한 그가 도란을 이끌어 바위에 앉혀 주었다. 그러고도 맞은편에 서서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도란아.”

난처하여 부르니 그녀가 젖은 눈으로 진사해를 바라보았다. 제 딴에는 노려본다고 보는 것 같은데 무섭다기보다는 가여웠다. 도란은 치마가 흙 때문에 더러워진 줄도 모르고 서럽게 중얼거렸다.

“신령님은 어찌해서 제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세요?”

“……내가 그랬구나.”

“저도 이제 다 컸어요. 만년설산 신령님도 그러셨던 말이에요. 저도 어엿한 여인이라고, 씨앗을 품을 수 있는 땅과 같다고! 그런데 신령님은 지금도 대강 달래려고만 하시고!”

“달래려고만 한 게 아니다. 너를 아이라 한 것이 그리 싫으냐?”

“싫습니다.”

“그래, 앞으로는…….”

“신령님도 저를 여인으로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사해가 멈칫했다. 고개를 번쩍 든 도란과 시선이 얽힌 순간, 그녀의 몸이 기울더니 진사해 쪽으로 무너졌다.

“자꾸 다른 사내들 보라 하지 마세요…….”

마지막 속삭임은 희미하게 스러졌다.

진사해는 울면서 하소연하다가 잠에 빠진 도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뛰는 동안 더욱 느슨해진 머리가 풀리기 직전이기에 아예 비녀를 빼 버리자 풍성한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진사해는 완전히 늘어진 도란의 무릎 뒤에 팔을 넣어 제대로 받쳐 안았다.

대무신의 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도란이 몸을 뒤척거리며 진사해의 품에 뺨을 비볐다.

“신령님…….”

진사해가 보기에는 한없이 작기만 한 손이 그의 가슴팍을 꼭 움켜쥐었다. 진사해는 차마 그 손을 떨쳐 내지 못하고 그녀를 고쳐 안았다. 가까이 안은 도란의 몸에서 짙은 우담화 향이 묻어났다. 달콤한 내음이었다.

* * *

도란은 지독한 갈증에 살며시 얼굴을 찌푸렸다. 폭신폭신 부드러운 이불을 품 안 가득 안았다가 겨우 눈을 떴다. 낯선 방의 풍경이 가물가물 시야에 들어왔지만 그것보다는 시원한 물 한 잔이 더 급했다.

“목말라…….”

희미하게 혼잣말을 하자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차가운 물이 찰랑거리는 옥색 잔이 눈앞에 나타나, 도란은 겨우 상체를 일으켜 물을 마셨다. 그리도 간절하던 물이 들어가자 막힌 목이 뚫리고 몽롱하던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선녀님, 감사해요.”

겨우 인사를 챙긴 순간 나타난 손이 잔을 가져갔다. 잠결에라도 소야의 손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커다란 손이었다. 한계까지 커진 도란의 눈이 단숨에 위로 향했다.

“한 잔으로 되겠느냐?”

도란은 너무 놀라 입만 벌렸다.

잔을 들고 선 진사해를 보자 어제 일이 우르르 떠올랐다. 대무신의 아들들과 술을 마시다가 취한 것부터 갑자기 나타난 진사해에게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며 술주정을 부리다 울어 버린 것, 그리고…….

‘신령님도 저를 여인으로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 대책도 없이 그런 말을 해 버린 것까지도.

당혹이 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도란 앞에 다시 물이 가득 찬 잔이 내밀어졌다. 갈증을 잊을 정도로 당황했지만, 도란은 엉겁결에 그 잔을 받았다. 억지로 잔을 비우는 동안 진사해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침상과 두 걸음 정도 떨어진 나무 의자였다. 푹신한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은 진사해가 어쩔 줄 모르고 잔만 꼭 쥐는 도란을 말없이 응시했다. 백 마디 재촉보다 조용한 시선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저, 그게.”

“…….”

“어제는 제가 술을 마셔서…… 그래서 실수를…….”

진사해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도란을 보고만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금빛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차마 술 핑계를 대기가 민망했던 도란은 목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도란을 응시하는 진사해의 옆얼굴로 햇살이 비꼈다. 해를 받는 부분만 샛노랗게 빛나는 그의 모습이 여지없이 도란을 사로잡았다. 흠모하는 사내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진 그때.

“일단은 좀 더 쉬는 게 좋겠구나.”

진사해의 음성은 평소와 똑같았다.

“네 방에 돌아가 쉬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소야에게 달라고 하면 되겠지. 아마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제 방이요?”

“그래. 여긴 내 방이고.”

“…….”

“네 방은 바로 왼쪽에 있다.”

놀리는 듯한 어조였지만 도란은 깜짝 놀라 그에 반응할 수 없었다.

“제가 왜 신령님 침방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아서.”

간단한 대답에 도란의 얼굴은 그야말로 타는 장작처럼 시뻘게졌다. 어제 잠결에 안긴 품이 참 따뜻하고 부드러워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걸 입 밖에 내어 칭얼거린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아이로 보지 말라고 한 것도 소용없지 않은가. 잠투정하는 어린애처럼 진사해의 품에 매달려 잔뜩 어리광을 부렸으니. 게다가 진사해는 자신에게 침대를 내어 주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지금 앉은 저 자리에서 긴 밤을 꼬박 지새웠으리라.

“죄송해요.”

거듭된 도란의 사죄에 진사해는 물방울 터지듯 조용히 웃었다. 느슨하게 앉은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가금산으로 돌아가면 혼이 나야겠구나.”

“…….”

“이만 가 보아라.”

도란을 허둥지둥 이불을 걷고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달아나듯 방을 벗어나는 내내 진사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낭하를 살펴볼 틈도 없이 왼쪽 방으로 뛰어들었다. 도란의 옷을 손질하던 소야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애기 신부님! 이제 일어나셨어요? 벌써 점심 드실 시간인데.”

“벌써요?”

자신이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일어났단 말인가. 그럼 진사해는 한낮이 될 때까지 거기 앉아 자신을 바라본 것이었다.

“어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그래도 신령님이 애기 신부님을 모셔 왔다고 해서 안심했죠. 점심까지는 각자 먹고 저녁에 손님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한다던데, 그때 신령님이 선물해 준 옷을 입을까요? 제가 이렇게 잘 다려 놨어요!”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소야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이 당황스러워 멍하게 서 있자, 소야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와닿았다.

“애기 신부님, 왜 그래요? 어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지, 그랬으면 신령님이 경을 치셨을 텐데.”

“저, 저 술 마시고 신령님 침방에서 자 버렸어요.”

도란은 엄청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소야의 반응이 싱거웠다.

“알아요. 신령님이 어젯밤에 저 부르셔서 말씀해 주셨거든요.”

“화 많이 나셨겠죠?”

“왜 화가 나시겠어요? 애기 신부님은 술이 처음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도란의 눈이 혼란스럽게 좌우로 오갔다. 확실히 신령님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엉엉 울며 술주정을 부린 데다 옆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떼를 쓰기까지 했으니 누구라도 화가 나지 않을까.

“가금산으로 돌아가면 혼날 거라고 하셨는데…….”

“네에? 신령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요?”

소야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녀는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도란을 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그런 걸로 화낼 분이 아니신데.”

진사해 옆에서 오래 지낸 소야는 그의 너그러운 기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웬만한 일을 가지고서는 가신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누구를 붙잡고 벌을 주는 일도 드물었다. 신령님이 마지막으로 크게 화를 낸 게…… 대체 언제였더라? 생각나는 일이 없어서 소야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냥 농담하신 거겠죠. 우리 애기 신부님 귀여워서.”

“아닌데…….”

“장난일 거예요. 자, 얼른 씻고 해장할까요? 어제 대무신령님 아들들이랑 마셨다면서요? 욕탕에서 그분들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좀 들려주세요.”

대무신의 아들들은 이제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도란은 소야의 성화에 못 이겨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후에도 도저히 진사해와의 일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물 온도는 적당한데 얼굴만 자꾸 새빨개졌다. 앞으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거야. 그녀는 괜한 다짐만 가슴에 거듭거듭 새겼다.

* * *

대무신과 손님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 공간은 사방이 트인 넓은 정원이었다. 상석에 앉은 대무신 뒤로, 은빛을 띠고 빛나는 우담화 나무가 보였다. 꽃 하나하나가 잘 보일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향기는 전해졌다. 도란은 자기 앞에 놓인, 잘 차려진 상을 보며 그 향기를 맡았다. 바로 옆에 앉은 진사해를 보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기도 했다.

다른 손님들이 빈 의자에 착석하기를 기다리느라 주위가 조금 어수선했다. 소야가 도란 옆에서 목을 쭉 빼더니 진사해에게 물었다.

“신령님, 어찌 애기 신부님 옷을 보고도 한 마디도 없으세요?”

도란이 곁눈질로 진사해를 살폈다. 그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오늘 저녁 도란이 입은 옷은 진사해가 선물한 것이었다. 저물어 가는 밤하늘 같은 어두운 남색 저고리와 비단 옷감 위에 피어난 파란 꽃들이 도란의 얼굴을 한결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에 미색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앉은 모습은, 조금 어려 보이는 걸 감안해도 수줍고 꽃다운 봄 각시 같았다. 머리를 반만 틀어 올린 도란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비녀 끝에 달린 매화 장식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신령님이 보내 주신 옷을 입었는데, 어여쁘단 말씀 한마디가 없으셔요.”

소야가 거듭 타박했다. 도란이 내내 진사해를 신경 쓰는 것 같아 분위기를 풀어 보려 한 말인데, 그는 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보다 못한 해범이 나섰다.

“애기 신부님,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감사합니다. 해범 님도 멋지세요.”

진사해 때문에 내내 가슴을 졸이던 도란이 겨우 칭찬을 되돌렸다. 어색한 분위기가 풀어지기도 전에 손님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우담화 나무를 등지고 앉았던 대무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제는 충분히 즐기셨는지, 바리원의 누추함이 폐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일가는 무인이라더니 과연 풍채가 좋고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조금 까맣게 탄 얼굴과 잘 다듬어진 수염도 씩씩해 보였다. 도란은 수염 없는 진사해의 얼굴을 남몰래 훔쳐보았다.

“내일 돌아가시기 전까지 바리원 어느 곳이든지 자유로이 출입하셔도 좋습니다. 마음껏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과묵한 편이라더니, 과연 대무신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들 앞뒤 양옆의 사람과 대화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란은 그들 틈에서 조용히 식사만 이어 갔다. 어릴 때와는 달리 완벽한 젓가락질로.

영 식욕이 없었다. 도란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저, 잠시…….”

떠들썩한 잔치 자리를 떠난 후에도 달리 갈 곳은 없었다. 도란은 소란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걸어 우담화 나무 아래까지 걸어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많은 이들이 자리를 펴고 떠들썩하게 어울렸던 그곳이 이제는 적요에 잠겨 있었다.

모두가 멀리 떠난 지금, 우담화 나무는 깜찍한 방울을 닮은 은청색 꽃을 매달고 홀로 고요했다. 도란은 버들가지처럼 늘어진 꽃가지를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수천 년에 한 번 핀다는 귀중한 꽃이니, 어쩌면 분화구 화원을 되살릴 실마리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곰곰이 고민해 보면 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신령님 생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신령님도 저를 여인으로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자꾸 다른 사내들 보라 하지 마세요…….’

그런 말까지 해 버렸으니 자신을 대하는 진사해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소야가 도란의 차림에 대해 한마디 해 보라 부추기는데도 끝끝내 입을 닫고 있던 그가 떠올라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보처럼. 혼자 보기만 한다고 해 놓고. 나 같은 게 신령님과 어울리겠어? 높은 분이니 나보다 어여쁘고 귀한 아가씨들을 얼마나 많이 보셨겠어. 나는 신령님의 눈에 차지도 않을 거야. 그런데 괜히 그런 말을 해서 어색해지기나 하고, 술주정이나 부리고!

“도란아.”

울적하게 꽃에 파묻혔던 도란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아까 그녀 옆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진사해가 가까이 서 있었다.

“우담화를 보고 있었느냐?”

“네…….”

진사해가 높이 달린, 특별히 만개한 꽃가지를 툭 꺾었다. 방울 같은 꽃들이 소리도 없이 흔들렸다. 고아한 향기가 도란의 콧잔등에 머물렀다.

“자.”

도란은 엉겁결에 그의 선물을 받았다. 그가 선물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그가 꺾어 준 꽃까지 들고 있으니 방금의 울적함마저 잊혔다. 연정은 본래 사람을 이리 변덕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도란은 공연히 꽃에 코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제게 화가 나신 거 아니었나요?”

“네게?”

“아까도 혼난다고 하시고, 식사하실 땐 말씀도 없으시고 하셔서 화가 나신 줄 알았어요.”

진사해가 짧게 웃었다. 나직한 소리였다.

“내가 너를 불편하게 했구나.”

겁을 먹었던 것은 사실이라 도란은 꽃가지만 만지작거렸다.

“화나지 않았다. 식사할 때는 네가 많이 먹지 않기에 어디가 불편한가 걱정한 것이고, 혼낸다는 말은…… 그래, 혼이 나기는 해야지.”

역시 화나신 거면서. 도란은 울상이 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빛깔 고운 우담화만 속도 모르고 달빛 아래 반짝거렸다.

“신들이 마시는 술이라 몸에 해롭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천천히 마셔라.”

“다시는 술 안 마실 거예요.”

기죽은 투로 중얼거리는 도란의 턱에 따뜻한 손끝이 닿았다. 서늘한 밤공기에 식은 얼굴을 달래 주는 다정한 체온이었다. 마주친 금빛 눈 역시 포근했다.

“가끔은 마실 일도 있고 마시고 싶을 때도 있겠지. 절제해서 마시면 즐거울 테니 내 말을 새겨 두어라.”

“네…….”

“취해서 울지 말고. 응?”

어르는 말에 도란의 낯이 붉어졌다. 회초리로 손등을 얻어맞거나 발길질을 당하던 어린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더 부끄러웠다.

“네게 서러운 일이 참으로 많았던 것을 알지만, 그토록 우니 나도 서글프더구나.”

“저 때문에요?”

도란이 입술을 잠시 잘근거렸다. 신령님이 밉다며 울며 뛰어갔던 일은 여전히 창피했지만, 그런 자신을 보고 놀랐을 신령님을 생각하니 무척 죄송스러웠다.

“앞으론 안 그럴게요.”

“그래.”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안온했다. 맨살은 거의 스치지 않는, 조심스럽고 섬세한 동작이었다. 그가 장의의 매듭을 고쳐 주었던 날이 함께 떠올라 도란의 귓불이 발긋해질 때쯤, 손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도란아.”

“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을 해 보았는데.”

부드러운 공기가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꽃가지를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진사해도 마찬가지인 듯, 그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네 말대로 너는 어엿한 여인이 되었고, 또 어떤 누가 보기에도 어여쁘고 맑아 사랑스럽다. 시절이 깊어 인연이 나타나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내가 너와 마음을 합하는 행운을 누리겠지.”

도란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신령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술김에 뱉어 버린 그 엉성한 고백에 이렇게 답하시는 것인가.

“그때 나는 기쁘고 또 조금 서운한 마음으로 네가 이룰 일가를 축복하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선이 그였다. 그저 몇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도란은 그 선을 환히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피부로 느낄 수도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이만 가자. 바람이 차구나.”

도란이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실바람보다 다정한 말로 제 마음을 거절한, 가차 없고 따뜻한 사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도란은 애써 꾸민 밝은 얼굴로 진사해를 마주 대했다.

“저는 꽃을 좀 더 보다가 가겠습니다. 내일이면 돌아가는데, 아쉬워서요.”

진사해는 이런 순간마저 도란을 끌고 들어가려 할 만큼 무딘 성정은 아니었다.

“그래, 너무 늦지는 말아라.”

염려 어린 한마디를 건네 놓고 돌아서는 진사해의 뒷모습을, 도란은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내일도, 모레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볼 수 있는 사람인데 어쩐지 오늘이 마지막인 것만 같아 서글펐다.

어쩌면 거절도 이렇게 꽃처럼 정성껏 하시는가. 우연히 거둔 인간의 지나가는 변덕이라 여기고 무시했어도, 마음을 다 알면서 끝끝내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을 텐데.

도란은 그가 준 꽃가지를 꼭 쥔 채 조금 울었다. 우담화 나무도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가지를 길게 늘어뜨려 눈물에 젖은 얼굴을 가려 주었다. 도란은 거절당한 마음을 이 귀한 꽃들 아래 깊이 묻어 두고 가고 싶었지만, 땅은 씨앗을 품을 뿐 연정까지 품어 주지는 못하였다.

달금한 향기만 밤새 무정하였다.

* * *

가금산으로 돌아오는 가마 안에서 도란은 부러 말을 많이 했다. 옆에 앉은 소야와 풍경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우담화 이야기도 하고, 바리원의 음식은 무엇이 맛있었는지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진사해와 눈을 맞출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거절당했다고 뾰로통하게 굳어 있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어색함은 표가 났다. 해범은 가만가만 도란의 얼굴만 살폈고, 소야도 가끔 도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도란은 가금산에 도착할 때까지 꿋꿋하게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독이 쌓였을 테니 다들 푹 쉬어라.”

진사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평소와 같은 태도로 그렇게 말했을 때도.

소야는 연못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도란의 옷시중을 들어 주었다. 이제는 다 컸으니 되었다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소야의 목적은 옷시중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애기 신부님,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은 어찌 신령님과 눈도 안 마주치시고.”

“선녀님.”

“네?”

“제가 술에 취해서 신령님한테…….”

답답한 마음에 울컥 나오려던 말이 갑자기 흐려졌다.

소야는 이제껏 도란을 가장 살뜰히 챙겨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소야는 도란이 아닌 진사해의 가신이었고, 가온산맥의 신령에게 충성하는 이였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신령님과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에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도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도 눌러 놓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마 술 마시고 실수한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세요?”

“네에, 뭐…….”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예전에 세배하는 자리에서 취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실수를 연발하던 어린 시절을 반추한 소야는 곧 요란한 술자리 무용담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설명하는 몸짓이 크고 목소리가 익살스러워서 듣는 재미는 쏠쏠했지만, 마음 어딘가에 얹힌 듯한 느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목 막힌 느낌을 종일 해소하지 못한 도란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분화구 화원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 대나무 숲도 있기는 했지만 어릴 때부터 자주 갔던 분화구 화원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화원에 도착한 도란은 저번처럼 누가 가까이 오지 않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달밤의 화원에 걸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땅에 쪼그려 앉은 도란이 조잘조잘 마음을 털어놓았다. 신령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자신의 마음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두 말해 주고 나니 그나마 속이 조금 후련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나도 이제 포기해야 할까 봐. 그런데 마음이 뜻대로 되지를 않네.”

손바닥으로 땅을 살살 쓸자 이슬에 젖은 흙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꼭 오래된 친구가 손을 잡아 주는 것 같았다.

“차라리 신령님이 차갑고 나쁘게 거절하셨으면 좀 달랐을까?”

도란은 잠시 손을 멈춘 채 냉정한 신령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면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러면 너무 마음이 아팠을 것 같아. 게다가 신령님은 항상 참 좋은 분이신걸.”

“흥.”

“……응?”

갑자기 들린 새침한 코웃음에 도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지만 검은 흙 위로 흰 달빛만 반짝반짝 부서질 뿐 누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란이 고개를 갸웃하자 동작에 맞춰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잘못 들었나? 누가 콧방귀를 뀐 것 같았는데.”

“그 방귀 내가 뀌었다, 이 모자란 것아.”

소스라치게 놀란 도란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사방을 살폈다. 거센 움직임에 치맛자락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누구세요? 지금 누가 말하는 거예요?”

“여기다, 여기. 어차피 넌 못 보겠지만.”

도란은 발치를 내려다보았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그녀의 심장이 막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아무것도 없던 땅 위로 머리가 불쑥 솟아 있었다. 반투명하고 하얀 머리였다. 이목구비는 분간되었으나 머리카락도, 살빛도 없이 그저 희었다. 귀신의 형상이 이러할까. 도란은 머리만 나와 달랑거리는 여자를 보며 숨을 헐떡거렸다.

“왜, 왜 여기 머리가…….”

“으응?”

여자는 뒷걸음질도 치지 못하는 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땅에서 두 팔이 쑥 나오더니 바닥을 짚었다. 읏차, 힘을 주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나머지 몸이 땅에서 튀어나왔다. 무게가 하나도 없는 듯 가벼운 몸짓이었다.

“아악!”

도란은 밤길에 호랑이라도 마주친 양 나동그라졌다. 그때, 도란 앞에 우뚝 선 여자가 허리를 굽히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반투명하고 오뚝한 코가 도란의 코에 닿을 것만 같았다. 곧 여자의 고운 아미가 일그러졌다.

“너 내가 보여?”

“무, 무, 무슨 소리를……!”

“진정 내가 똑똑히 보이느냔 말이야.”

“다, 당연히 보이죠!”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들이대 놓고 보이냐니, 무섭기보다 황당했다. 도란은 엉덩이를 주춤주춤 뒤로 물리며 여자로부터 멀어지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여자의 하얀 손이 도란의 어깨를 덥석 붙잡자 돌이라도 된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상하네. 내 목소리를 이리 똑똑히 들은 사람도, 내 모습을 이리 명확히 본 사람도 네가 처음이야.”

도란은 도움을 청할 이를 간절히 찾았지만 아까 확인한 바와 같이 사위가 조용했다. 그때 여자가 도란의 얼굴을 쥐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래, 아마 마음이 통하여서…….”

뜻 모를 중얼거림이 실바람처럼 도란의 귓가를 스쳤다. 그때 여자가 도란의 얼굴을 탁 놓아주었다. 도란은 얼얼한 뺨을 어루만졌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면 손이 차가워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온몸이 하얗긴 해도 소복 차림도 아니었고 머리를 산발로 풀어 헤치지도 않았다. 고양이처럼 새침하게 치켜 올라간 눈매와 도도한 코, 고집 있게 다물린 입술이 꼭 대갓집 규수 같았다. 팔짱을 척 끼고 도란을 내려다보는 태도는 쌀쌀맞으면서도 어딘지 정다운 데가 있었다.

“나는 이 화원의 지신(地神)이야. 아무래도 진사해, 그 무정한 사내 때문에 우리 마음이 통한 모양이다. 날 이리 듣고 볼 수 있는 이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어. 영광인 줄 알아.”

“……네?”

“너도 알겠지만 진사해 그놈이 삼백 년 동안 나를 내버려 두었어. 원망이 뼈에 사무치고 한은 골수까지 미쳤으니 내 마음이 너와 비슷할 거야.”

“아, 아니, 저는 원망이 뼈에 사무칠 정도는 아닌데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으면서도 도란은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화원의 지신이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갑자기 신령님을 원망한다며 도끼눈을 뜨다니, 당황스럽고 놀랍고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설마 이제껏 화원에서 주절주절 떠들었던 얘기를, 이 지신이 전부 듣고 있었던 걸까?

“그럼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지신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가 한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이 땅이 이렇게 제구실을 못 하겠니?”

도란의 눈이 커다래졌다. 드디어 분화구 화원이 내내 죽어 있던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귀신을 본 것 같은 두려움이 싹 가시며 체증이 쑥 내려갔다.

“혹시 제 말도 계속 듣고 계셨어요? 제가 이 땅이 어서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간절히 빌었는데.”

“흥, 네 말 몇 마디에 내 원한이 사라지겠어? 그래도 네가 어찌나 수다스럽던지 몇 마디 대꾸도 해 줬었는데 전에는 듣지 못했어.”

도란은 깜짝 놀랐다. 가끔 환청 같은 대답이 들린 적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 아니었다니!

“가끔 들은 적도 있어요! 환청인 줄 알았는데!”

“그래?”

“그럼 우린 진짜 오래된 벗이네요!”

“버, 벗?”

어울리지 않게 더듬거린 지신이 고개를 돌리더니 괜히 몸을 비비 꼬았다. 나이 많은 신일 텐데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또 그 쑥스러움을 표 내지 않으려는 모습이 도란의 눈에 참 정겹고 귀여워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 허공에 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신님이 다 듣고 계셨다니까 신기해요.”

이 말 저 말 늘어놓은 것이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도란은 벗처럼 여겼던 땅에 정말 친구 같은 지신님이 살고 있었다는 생각에 들떴다.

“그럼, 다 듣고 있었지. 그리고 오늘 네가 하는 얘기도 다 들었어. 진사해, 그 나쁜 놈이 네 마음을 거절했다며?”

“네? 나쁜 놈이라뇨?”

도란이 멈칫했다.

그녀는 만년설산 신령인 백청요 앞에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 신령님을 욕하지 말라며 바락 화를 내던, 그 도란이었다. 그래서 지신의 말을 그냥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신령님은 나쁜 분이 아니에요.”

도란의 단호한 얼굴을 본 지신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낯짝이 멋진 놈이긴 하지. 인간 여인이 보기에 그만하면 여기저기 자랑할 수도 있겠고.”

“그렇죠? 멋있죠?”

도란은 반짝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진사해의 가신뿐인 가금산에서는 누구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절친한 벗이 생겨 흉금을 털어놓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입이 풀리며 수다가 흘러나왔다.

“사실 처음 뵈었을 땐 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신령님 눈은 참 침착하고 진지하고 멋진데, 아주 가끔…… 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도란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지신은 알 만하다는 태도로 그녀를 도와주었다.

“야릇하지?”

“네!”

자기 마음에 꼭 맞는 표현이라 반갑게 외쳤던 도란이 황급히 변명했다.

“물론 제가 나쁜 생각을 한 건 아니고요.”

달빛 아래서 장의 매듭을 고쳐 주던 진사해를 보며 느낀,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긴장감과 아득한 열기가 떠올라 양심이 아팠다. 지신은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생각할 수도 있지. 몸을 가진 인간이라면 한번 안겨 보고 싶다 여길 만도 해.”

“그그그, 그런 적 없어요! 으, 으, 음흉한 눈으로 신령님을 본 일은 정말 한 번도…….”

“왜? 너도 이제 운우지락을 알 나이 아니야?”

지신의 물음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투였다. 삼백 살은 더 먹었을 지신의 오묘한 순진함이 도란의 부끄러움을 조금 덜어 주었다.

“저도 이제 어른이긴 하지만…….”

지신은 도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손조차 조막만 하던 소녀가 이제는 입술이 앵두처럼 붉은 여인이 되어 있었다. 지신은 선심 쓰는 투로 칭찬했다.

“뭐, 확실히 키가 좀 큰 것 같기는 하네.”

“그렇죠?”

도란은 더 커 보이고 싶어서 몸을 쭉 폈다. 지신은 그런 그녀를 구석구석 살펴보더니 혀를 찼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작은 아기일 때부터 봐 온 너를 좋다고 홀랑 잡아먹으면 그것도 나쁜 놈이긴 해.”

또 나쁜 놈 타령이다. 그 말을 시작으로 지신은 잠시 사그라졌던 진사해에 대한 분노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로 거절해?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니, 그럼 자기 눈엔 안 예쁘고 안 사랑스럽다 이거야? 내가 밑에서 듣다 듣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기요, 지신님…….”

“하여튼 그 무심한 사내는 이 땅을 삼백 년 동안 거들떠도 안 보더니 이제는 인간 여인을 울리고 말이야. 그런 밍밍하고 무정한 놈은 사내라 할 수도 없어!”

혼자 흥분하여 시작한 말이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게다가 지신은 지금 도란을 위해 화를 낸다기보다 자기 울분을 푸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도란을 보는 그녀의 눈은 날것 그대로의 분노로 활활 타고 있었다.

“네가 날 벗이라 불렀으니 나도 널 위해 복수를 해 줘야지. 안 그래?”

“네? 전 복수 말고 화원에 꽃을 피워 주시는 게 더 좋은데요!”

“아니야. 복수해 줄게. 내가 해 주고 만다.”

“그건 싫다니까요!”

“나도 더는 못 참아. 오늘에야말로 삼백 년 묵은 원한을 풀고 말 거야!”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바락바락 소리친 지신이 하늘로 휙 솟구쳤다. 도란은 날쌘 새처럼 빠르게 멀어져 가는 지신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원한을 푼다고? 복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갓집 아씨 같은 모습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저 지신도 신이 아닌가. 분명 강대한 힘을 지녔을 텐데 복수를 하겠다니? 설마 자고 있는 신령님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것일까?

‘신령님이 위험해!’

도란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신도 도란도 떠난 화원은 달빛만 머금고 잠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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