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연꽃 피는 밤
가온산맥의 주인, 진사해는 꿈을 꾸었다.
그는 맨발로 흙길을 걷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흙이 맨발에 닿는 감촉이 생생하지 않아 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깨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산새들이 나뭇잎 사이에서 깃털을 고르는, 평화로운 숲길이었다. 위험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곳을 걷는데 목덜미가 괜스레 조금 오싹했다.
갑자기 발밑에 물웅덩이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
진사해는 발이 푹 빠지는 느낌에 깜짝 놀랐으나, 물은 고작 그의 복숭아뼈 아래에서 찰랑거릴 뿐이었다. 하다못해 발목까지도 오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위험처럼 나타난 웅덩이치고는 조금 하찮았다.
그는 젖은 발로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런데 머리 위로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본능처럼 고개를 들자 거대한 붉은 공 같은 것이 머리로 날아들고 있었다.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톡!
공은 깃털처럼 가볍게 진사해의 머리에 닿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종이공이었다. 종이를 공 모양으로 접은 후 입김을 불어 넣은 시시한 물건이었다.
‘대체 뭐지?’
진사해는 바닥에 떨어진 공을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가던 길을 마저 갔다.
그가 만난 마지막 시련은 절벽이었다. 깎아지른 듯 가파르지는 않고, 그냥 바닥이 조금 꺾이는 정도였다. 진사해는 그것이 한 칸짜리 계단이라 여기고 가뿐히 내려갔다.
걷는 내내 등 뒤에서 누군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진사해는 짧은 머리를 조금 매만져 보았다. 계절에 맞지 않게 매미라도 달라붙었나, 딱 그 정도 느낌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기는 한데. 약간의 찜찜함과 함께 진사해가 뒤로 돌아선 순간.
“신령님!”
그는 요란한 부름 때문에 꿈에서 깨어났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어두운 방으로 도란이 뛰듯이 들어왔다. 거의 부술 듯 열어젖힌 문은 제대로 닫지도 않은 채였다. 자신의 침방, 깊은 방, 가벼운 차림의 도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진사해는 자기가 또 꿈을 꾸는가 하였다.
“신령님, 괜찮으세요?”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도란이 허겁지겁 진사해의 침상으로 달려왔다. 아무것도 없는 실내를 둘러본 도란이 침상 옆에 서서 정신없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 있다가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숨까지 가빠져 있었다.
“다치지 않으셨어요? 여기 혹시 누가 오지 않았어요? 얼굴도 몸도 하얀 여자분인데요.”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진사해는 조금 웃었다. 편안한 침의가 살짝 벌어지며 그의 판판한 가슴을 드러냈다.
“도란아. 흉몽을 꾼 모양이구나.”
“네?”
도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의심이 덜 가신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에서 불안이 전해졌다. 영락없이 악몽을 꾸고 맨발로 부모의 침방까지 달려온 어린애 같아서 진사해는 미소를 거두지 못했다.
“무서운 꿈을 꿔서 이리 왔느냐?”
“그게 아닌데…….”
도란은 그제야 한밤중에 신의 침방으로 뛰어든 자신의 행동을 자각했다. 심지어 신령님은 새하얗고 느슨한 침의 차림이었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는 탄탄한 가슴팍이 들여다보이고 잠기운이 덜 가신 눈은 웃음을 짓느라 더욱 야릇했다.
‘몸을 가진 인간이라면 한번 안겨 보고 싶다 여길 만도 해.’
지신이 짓궂게 던진 말이 떠올라 도란의 얼굴이 타는 장작처럼 달아올랐다. 한번 의식하여 그런가, 평소와 똑같은 신령님의 눈빛도 잘 익은 과일처럼 농염하게 느껴졌다. 도란은 긴 치맛자락이 제 발목 언저리에서 살랑거리는 감각을 느끼며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저, 전 가 볼게요.”
“도란아.”
휙 몸을 돌리는데 나직한 부름이 그녀의 발목에 감겼다.
“잠시 기다려라.”
진사해가 침상에서 내려올 때, 이불이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그는 물 위를 걷는 듯 부드러운 몸짓으로 바닥을 딛더니 침방 한쪽에 걸려 있던 푸른 두루마기를 꺼내 걸쳤다. 흰 침의가 겉옷 아래로 사라졌다. 옷고름을 묶는 희고 큰 손이 도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언젠가 장의 매듭을 고쳐 주느라 도란의 턱 아래를 스쳤던, 바로 그 손이 옷고름 사이로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뱀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도란을 향해 돌아선 진사해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꿈 때문에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데려다주마.”
그는 도란 쪽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가 자신을 만지려는 줄 알고 숨을 멈춘 순간, 손이 그녀 옆으로 지나갔다. 문가에 걸린 초롱을 든 그가 가볍게 손을 젓자, 붉은 천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노을을 닮은 순홍빛이 진사해와 도란의 얼굴을 동시에 물들였다. 은은한 불빛 속에서 둘의 시선이 얽히듯 맞닿았다.
데려다주지 않으셔도 된다는 사양이 쑥 들어갔다. 엷은 홍색이 어른거리는 미려한 얼굴을 보고 어찌 혼자 가겠다는 말이 나올까.
“감사합니다……. 등은 제가 들게요!”
귀한 손으로 앞을 밝혀 주는 것이 민망하여 재빠르게 팔을 뻗었다. 그러나 진사해가 먼저 손을 멀리 보냈다.
“네 작은 손에는 무거우니 내가 드마.”
저 정도는 들 수 있는데. 도란은 귓가를 발긋하게 물들이고 속입술만 조금 잘근거렸다.
두 사람은 활짝 열린 장지문을 지나 나란히 걸어갔다. 도란은 의식적으로 반 발자국쯤 떨어져 진사해의 뒤를 따랐으나, 그가 걸음을 늦춰 주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사소한 배려가 민들레 홀씨처럼 도란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무슨 꿈을 꾸었느냐?”
나긋한 질문이야말로 꼭 꿈결 같았다. 사실을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편안하고 은근한 목소리가 도란의 입을 열었다.
“꿈을 꾼 게 아니라, 분화구 화원의 지신님을 만났어요.”
“지신을? 화원에는 지신이 없을 텐데.”
“아니에요, 분명 있었어요.”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낭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신의 흰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자, 어쩌면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훑어보던 새초롬한 표정이나 ‘벗’이라는 말에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도저히 꿈이라 여길 수 없었다.
“지신이 네게 무어라 했기에 다급하게 달려왔을까.”
도란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지신이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들은 말을 조합할 수는 있었다.
“신령님이 그동안 무정하셨다면서, 오늘 밤에는 복수를 해야겠다고…….”
진사해가 설핏 웃었다.
도란이 거짓말을 하거나 꿈에서의 일을 헷갈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의 해괴한 꿈은 아무래도 정말 심통 난 지신의 소행인 모양이다. 힘이 미치지 못하여 해코지라 하기도 민망한 짓만 하긴 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사해의 웃음을 어찌 받아들였는지 도란이 조금 시무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진사해는 등을 좀 더 들어 도란의 앞을 밝혀 주었다.
“네 말을 믿는다. 마침 나도 흉몽을 꾸고 있었거든.”
“……네? 정말요?”
“그래. 아주 무시무시한 꿈이었지.”
화들짝 놀라는 도란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아이 취급하지 말라 타박을 들은 것이 얼마 전이니 지나치게 놀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진지한 모습에 장난을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꿈을 꾸게 할 정도면 지신이 나를 심하게 원망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지신이 보이지도 않으니 걱정이구나.”
“제가 설득할게요!”
도란은 주먹까지 꼭 쥐어 보이며 결연하게 외쳤다.
“앞으로 신령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할게요. 저는 지신님을 볼 수도 있고 대화도 나눌 수 있거든요.”
“오늘 처음 만났느냐?”
“네. 갑자기 보였어요.”
“왜 오늘이었을까?”
도란은 가슴이 뜨끔했다. 무정한 사내에게 눈길을 받지 못한 두 여인끼리 마음이 통한 거라는 지신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도란은 고개만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신령님이 좀 더 명확한 대답을 원하는 듯하여, 도란은 두루뭉술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우리 둘이 비슷하다고 했어요.”
환한 낭하로 접어들며 진사해는 잠시 도란을 살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놀린 것과는 별개로, 이는 도란의 능력이었다. 이제껏 가금산을 다스린 진사해는 물론 어떤 가신도 보지 못한 지신을 도란만이 보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 지신과 대화까지 나누었다.
“비슷하다고?”
땅에 거하는 영묘한 혼과 평범한 인간인 도란은 결코 비슷한 존재라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지신이 말한 비슷함은 물질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혼의 파동이 닮았다는 뜻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세상의 크고 작은 신비한 존재들을 감지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도란의 능력일지도 모른다. 저승으로 건너간 혼과 대화하는 무당이나 신을 불러내는 제관처럼. 그러고 보면 도란은 처음에도 나무 비녀 하나로 큰 신인 자신을 불러내지 않았던가.
이 문제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겠구나. 진사해는 그렇게 결론지으며 도란의 팔을 살짝 잡아 주었다.
“조심해야지. 아래로 굴러떨어지겠구나.”
섬돌로 발을 내리다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 도란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마루에 걸터앉아 신을 신은 다음, 이미 가지런하여 딱히 정리할 필요도 없는 진사해의 신도 다시 정리해 신기 편하게 놓아 주었다. 진사해를 기다리며 두 손을 모으고 선 도란의 신코에 달빛이 부서졌다. 진사해의 시선이 언뜻 그리 닿았다.
나란히 걷는 둘 앞에서 빛이 흔들거렸다. 곧이어 연못 별채에 다다르자, 잔잔한 못물에 둘의 모습이 거꾸로 비쳤다.
“다 왔구나.”
도란은 자신과 신령님, 그리고 불그스름한 등이 어른어른 일렁이는 연못을 바라보다가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지신님을 말릴게요. 그리고 지신님에게 부탁해서 분화구에 꽃도 피게 할게요.”
비장한 모습 위로 어린 시절의 도란이 겹쳐졌다. 화원을 맡기겠다고 하자 뼈를 갈아서라도 해내겠다고 다짐하던, 깡마르고 불쌍한 인간 여자애. 그러나 지금의 도란은 그때의 가련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진사해도 더는 그녀를 놀리지 않았다.
“흉몽을 꿨다는 것은 농이다. 가벼운 장난질 정도였으니 너무 염려할 필요 없다.”
“네? 하지만…… 꿈을 꾸시긴 한 거잖아요.”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분화구 화원 일도, 늘 말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 애를 태우면 심신이 상한다.”
과업의 완수보다 도란의 심신을 더 염려하는 말이 다정스러웠다.
“지신과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내게 와 의논하고.”
“…….”
“아니, 작은 신이라 해도 네게는 버거울 테니 내가 맡거나 다른 가신을 보내는 게 낫겠구나.”
“아, 아니에요!”
도란이 서둘러 외쳤다. 유일하게 맡겨진 일을 이런 식으로 쉽게 남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화원을 아름답게 되살려 신령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또한 이 일을 훌륭히 해내 어엿한 가신이자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다고 그가 자신을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보아 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지신님은 저만 볼 수 있잖아요. 제가 할게요. 몸 안 상하게 조심할 테니 저한테 맡겨 주세요.”
강렬한 의지가 진사해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는 엷은 염려가 덧씌워진 눈으로 도란을 응시했다. 강하지는 않다 해도 지신은 신, 인간인 도란이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의욕적인 아이에게 포기를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이 어려워지면 곧바로 나를 청해라.”
도란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저 열심히 할게요!”
“내일부터 바쁠 테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 푹 자야겠구나.”
진사해는 도란의 침방 앞까지 동행했다. 도란은 섬돌 옆에서 머뭇거렸다.
“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어서 들어가야지.”
신령님을 밖에 세워 두고 휙 들어가기가 민망하여 머뭇거리던 도란이 겨우 신발을 벗었다. 도란이 들어가는 것까지 볼 생각인지 진사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신령님.”
자신이 빨리 들어가야 신령님도 돌아가실 것 같아 도란은 조금 서두르는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장지문 창호지에 머물던 붉은 불빛이 조금씩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까지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밖의 동정을 살피던 도란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냥 같이 걸었을 뿐인데 심장이 왜 이렇게 콩닥거리는지. 정작 신령님은 지난 일을 전부 잊으신 듯 태연하신데.
가슴을 쓸어내린 도란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순간.
“왜 방해했어?”
뾰족한 목소리가 도란을 찔렀다. 침상에 올라앉아 무릎을 안은 지신이, 잔뜩 토라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왜 방해했냐고.”
도란은 무서운 흉몽을 꿨다고 말하던 진사해를 떠올렸다.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정말 신령님을 괴롭힌 거예요?”
“그래, 괴롭혔다. 어쩔래? 자기 거절한 남자가 걱정돼서 머리까지 산발을 하고 쫓아오다니, 너도 진짜 속없다.”
도란은 민망한 얼굴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정신없이 달려가느라 머리가 흐트러진 줄도 몰랐다.
“대신 복수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는 못할망정.”
아까도 복수 운운하더니 또 그 얘기였다. 도란은 제자리에 선 채 발끈했다.
“저 대신 복수한 거 아니잖아요. 그냥 지신님 마음대로 한 거잖아요.”
“뭐, 뭐? 이 맹랑한 게! 너 따위가 뭘 알아?”
“어떻게 신령님을 그렇게 무섭게 괴롭힐 수 있어요? 신령님이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그놈이 놀라긴 뭘……!”
울컥하여 소리치던 지신이 뚝 입을 다물었다. 도란은 정말 무섭고 강력한 신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복수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얄미운 진사해보다 이쪽의 반응이 훨씬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처량하게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 팔짱을 꼈다. 애써 젠체하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졌다.
“그래, 내가 꿈에서 겁을 줬더니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데 얼마나 우습던지! 홍수에 휘말려서 허우적거리는 꼴은 또 어떻고?”
“네? 홍수요?”
더 커질 수도 없을 것 같던 도란의 눈이 더욱 확장되었다. 지신은 흥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외로 돌렸다.
“그래. 그뿐인 줄 알아? 산꼭대기에 있는 암석을 들어 그놈 머리에 내던졌더니 줄행랑을 놓다가 절벽에서 굴렀지. 너도 그 꼴사나운 모습을 봐야 했는데!”
“그런 무서운 꿈을 꾸게 하다니…….”
뱀말에 살던 시절 도란도 자주 악몽을 꿨다.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뱀말 사람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자신을 잡으러 다니는 꿈이었다. 뭘 잘못한 줄도 모른 채 그저 잡히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변소까지 기어가면, 갑자기 한 다리 없는 귀신이 튀어나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채곤 했다. 그 귀신을 피해 도망가다가 뱀말 사람들과 맞닥뜨리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매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인 줄도 모르고 손바닥이 닳도록 싹싹 빌면서 깨어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고 나면 등이 식은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악몽인데, 지신님이 신령님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했다니.
도란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지신을 쏘아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나쁜 꿈을 꾸면 얼마나 힘든데요! 사람을 꿈으로 괴롭히다니, 그건 사악한 짓이잖아요!”
진사해를 힘들게 하기는커녕 뒤통수에 달라붙은 매미 취급이나 받았던 지신은 졸지에 사악한 원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진사해를 그리 괴롭히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싫었던 지신은 보란 듯 더욱 강짜를 부렸다.
“그놈은 당해도 싸. 삼백 년 넘게 꽃이 안 피면 와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치성도 올리고 그래야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맡기기만 하고 제삿밥 한 번을 안 올렸어. 밥 한술 못 얻어먹은 지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줄 거야.”
제삿밥이라니. 도란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신들의 세계에 대해 잘 몰랐다면 지신에게 동정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도 소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 알 것은 다 알았다.
“가금산에는 신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제삿밥 얻어먹는 신은 아무도 없어요. 게다가 지신님은 잡귀나 조상신도 아니잖아요? 다들 혼자 잘만 사는데요!”
순간 지신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도란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약해도 신은 신이라 속도와 기세가 엄청났다. 용감하게 대거리하던 도란이 찔끔 목을 움츠릴 정도였다. 가까이서 본 지신의 눈동자는 아까와 달리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밥 못 먹어서 이래? 진사해 그놈이 날 내팽개쳐 둔 게 기가 막혀서 이러지!”
“내, 내팽개친 건 아니…….”
“시끄러워!”
지신이 쾅 발을 굴렀다.
“땅을 돌보라고 대강 사람만 보내면 다가 아니야. 자기가 직접 품을 들이고 애정을 쏟아야 풀도 자라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거야. 그런데 그놈은 삼백 년을 무관심했어. 좌정한 신에게 한 톨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된 땅의 심정을 네가 알아?”
도란이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냥 어리광이 많고 투덜대기 좋아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얘기가 진지해지자 당황스러웠다.
“너라면 내 마음을 알 것 같았어. 몇 년간 나를 찾아와 줬고, 벗이라 불러 줬고, 또 나와 처지가 다르긴 하지만 그놈에게 거절당한 건 똑같으니까. 그런데 너는 매양 그놈 편만 드는구나. 매일같이 찾아와서 귀가 따갑도록 수다를 떨 때는 언제고!”
“…….”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놈에게 철저히 복수할 거야. 매일 신발에 돌멩이를 넣어 놓고, 앉으려고 할 때마다 의자를 빼서 나동그라지게 할 거야!”
뭔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기세가 워낙 불같아서 유치한 말도 무섭게 들렸다. 도란이 지신의 팔에 와락 매달려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려는 순간, 그녀가 허공으로 훌쩍 몸을 날리더니 지붕을 통과해 사라져 버렸다.
“지신님! 지신님!”
애타게 불러도 지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성난 바람만 괜히 문을 덜컹덜컹 흔들고 지나갔다.
* * *
“그래서.”
진사해는 날이 밝자마자 머리만 빗고 허방지방 뛰어온 도란을 보며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왜 왔다고?”
진사해의 의아함을 읽었을 텐데 도란의 태도는 아까와 다름없이 단호했다.
“제가 신령님을 지켜 드리려고요!”
“…….”
진사해는 괜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잠시 자신과 도란을 비교해 보았다.
진사해. 그는 삼백 년 동안 넓은 가온산맥을 다스린 신이었다. 성장을 마치고 가금산에 좌정하여 너른 산맥의 주인이 된 날부터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불필요하게 힘을 쓰지 않을 뿐, 그는 날씨를 자유자재로 바꾸거나 눈 깜빡할 사이에 수백 리를 불사를 수도 있는 강력한 존재였다. 그러니 도란이 ‘정말 무서운 신’이라고 한 지신이 어금니가 깨지도록 애써도 진사해의 머리카락 한 올 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도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있다. 신들의 음식을 먹고 마셨으니 늙지도 아프지도 않은 채 오래도록 생을 누리겠지만 그녀와 다른 인간의 차이는 딱 그것뿐이었다. 남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능력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설령 그런 능력을 지닌 게 확실하다 해도 자기 방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곧 진사해가 탄식하듯 웃었다.
“도란아.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내가 너를 지켜야 옳지 않겠느냐?”
“아니에요. 지신님은 신령님한테 무섭게 복수한다고 했어요. 어제도 끔찍한 흉몽에 시달리셨다면서요.”
진사해 앞에 꿇어앉아 두 손을 꼭 쥔 도란이 발간 입술마저 살짝 깨물었다.
“홍수에 휘말리고 돌에 머리를 맞았다고, 그러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셨다고 들었어요.”
“……응?”
“다 꿈이라 해도 얼마나 힘든데요. 신령님이 강하신 건 알지만, 그렇다 해도 보이지 않는 존재와 무슨 수로 싸우겠어요?”
사실 보이고 안 보이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진사해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그 지신을 개미처럼 눌러 죽일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잔뜩 뿔이 난 지신 역시 이 땅의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란 눈에는 분노한 지신이 무서운 재앙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이제껏 가금산에서만 살아온 그녀는 ‘화가 난 신’ 자체를 본 적이 없을 테니, 지나친 두려움을 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전 지신님을 볼 수도 있고 그분을 만질 수도 있어요. 제가 보호해 드릴게요.”
진사해는 진지하게 앉은 도란의 얼굴을 한 번, 엉성하게 묶인 옷고름을 한 번 바라보았다. 지난번 장의 매듭도 그렇고 지금 옷고름도 그렇고, 매무시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기 입으로는 어른이라 하나 여태 아이 같은 면이 없잖은 도란을 지신 앞에 세우는 일은 꺼려졌다.
“차라리 지신이 내게 마음껏 화풀이를 하게 두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네?”
“내가 돌아보지 않아 화가 났다면 쫓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풀어 주어야지. 그게 맞지 않겠느냐?”
치마 위에 놓인 도란의 손이 말렸다.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리 분주하게 하는지. 진사해가 소리 없이 웃은 그때.
“아니에요. 화가 났어도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되는 거잖아요.”
도란은 뜻밖의 다부진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까지는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어서 신령님께 호소하지 못했다면, 이젠 제가 있으니 저를 통해 말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지신님은 그냥 화가 났다면서 신령님을 괴롭히려고 해요. 그건…… 그런 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진사해는 도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금 도란은 타인의 분노를 자신의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있을까. 말로 가르치기보다는 주먹으로 쥐어 잡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을까. 힘없는 아이에게 화풀이를 해 대던 이들이 기억나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고 눈을 맑게 뜬 도란은 겁에 질린 소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하고자 하는 가신으로 보였다.
“그래, 네 말이 옳구나.”
어설픈 면이 남아 있다 해도 도란은 지난번 그녀가 주장한 바와 같이 어엿한 어른이었다. 열심히 하겠다고 나섰는데 괜한 말로 타는 의욕을 꺾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또 도란이 지신을 달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네게 청하마.”
진사해의 눈매가 유려하게 접혔다.
“대신 옆에 꼭 붙어 있어라. 그래야 나를 지켜 줄 수 있을 테니.”
혹 지신을 혼자 상대하다가 위험한 일을 당할까 염려되어 건넨 당부였는데 도란이 얼굴을 붉혔다.
신령님이 특별한 뜻을 두고 한 말이 아님을 알아도 뺨이 뜨거워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당차게 의견을 주장하던 그녀는, 속절없이 설레는 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네, 신령님.”
“앞으로는 상도 함께 받아야겠구나. 네가 불편하다면 식사는 소야와 해도 좋고.”
“아, 아니요. 하나도 안 불편해요!”
서둘러 손사래를 친 도란이 살그머니 진사해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신령님이 불편하시면…….”
여인으로 봐 달라는 말을 거절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신령님도 불편할지 몰랐다. 그러나 진사해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나도 하나도 안 불편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
부러 흉내 내어 하는 말에 도란은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없이 멀다가도 장난을 칠 때는 또 이렇게 한없이 가까워지는 신령님이,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나 좋았다. 평생 뒤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해도 포기하기 싫을 정도로.
* * *
톡.
덜 익은 초록빛 도토리 하나가 진사해의 머리에 부딪혔다. 진사해와 도란의 시선이 동시에 도토리가 날아온 곳으로 돌아갔다. 진사해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도란은 분노를 장전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톡.
도토리 하나가 또 진사해의 머리를 때리고 연못가로 데굴데굴 굴렀다. 발정기를 맞이한 진사해가 곧잘 들어가 있곤 하는 연못까지 걸어온 두 사람의 고개가 이번에는 또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톡.
세 번째 도토리가 날아온 후에야 도란은 연못가의 바위 뒤에 숨은 지신을 발견했다. 왼손에 도토리를 한 움큼 든 그녀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진사해를 쏘아보며 네 번째 도토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지신님!”
도란이 냉큼 그리로 뛰어갔다. 지신은 도토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왼손을 쥐더니 몸을 홱 틀었다. 누가 봐도 성이 났음을 알리는 태도였다. 도란은 고집불통 아이를 대하듯 허리에 두 손을 척 얹고 지신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바로 오늘 새벽에 제사도 드렸잖아요!”
제삿밥 운운한 지신의 말을 진사해에게 전하자, 그는 곧장 제사 준비를 하게 했다. 인간 세상을 떠도는 잡귀들처럼 제삿밥을 흠향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풀어 줄 수 있다면 뭐라도 못 하겠느냐는 거였다.
심지어 진사해는 분화구 화원 앞에 정성껏 차린 상에 대고 절까지 했다. 많은 말은 없었으나, 방치당했다 느껴 서러웠을 지신을 달래 주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도란도 잽싸게 그의 뒤에서 절을 올렸다.
그런 일까지 했는데 지신은 작은 도토리나 던져 대며 신령님을 괴롭히고 있었다! 도란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신은 눈을 치뜬 그녀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 콧방귀만 뀌었다.
“내가 신들이 주물럭거리는 하찮은 잡귀인 줄 알아? 제사는 왜 지내?”
“전에는 제삿밥 한 번 못 얻어먹었다고 화를 내시고선.”
“정성을 다하라는 뜻이었지. 진짜 제사를 지내라는 거였겠어?”
하여간 변덕은! 도란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래서 신령님이 정성껏 절도 올리셨잖아요. 솔직히 지신님도 여기 살면 신령님 가신인데 절까지 받고 싶으세요?”
“내가 그놈 가신이라고? 난 자유로운 영혼이야!”
“아무튼 여긴 신령님이 좌정한 땅이잖아요!”
“도란아.”
어느새 가까이 온 진사해가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도란과 지신은 나름대로 심각하고 진지한데,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평온했다.
“원하는 것을 물어보아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고 해.”
도란은 이거 보라는 듯 지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음 순간, 지신은 손에 들고 있던 도토리를 진사해의 얼굴에 확 뿌렸다. 스무 개는 될 법한 도토리가 그의 얼굴을 치기 전에 도란이 작은 손을 펼쳐 가로막았다. 도토리 몇 개가 도란의 손등에 막혀 바닥으로 굴렀다.
“그걸 꼭 내가 말해야 알아? 옆구리 찔러 절 받기도 아니고, 됐다, 됐어!”
“아니, 그러지 말고 말을 해 주셔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지신이 도란의 침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도란은 순식간에 멀어져 작은 점처럼 변했다가 사라지는 지신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갔어요. 뭘 원하는지 말 안 하겠대요.”
“마음이 단단히 상했구나.”
도란은 마음이 급한데 진사해는 이상하리만치 태평했다. 그는 도란을 이끌고 연못 난간 가까이 가면서 사소한 잡담까지 건넸다.
“그러고 보니 이 연못에 빠진 적이 있었지. 무섭지는 않으냐?”
“…….”
도란은 대답 없이 진사해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눈을 맞췄다.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듯 넉넉한 표정이 도란의 망설임을 지워 주었다.
“신령님은 화원에 꽃이 피지 않아도 괜찮으세요?”
“글쎄.”
“지신님이 무섭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지신님 마음을 풀지 못하면 분화구 화원은 계속 저 상태일 거예요.”
“네 눈에도 내 간절함이 부족해 보인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지만…….”
진사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도란이 언제까지고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니 기분이 새로웠다. 성큼 찾아온 초가을 풍경을 담은 연못 둘레를 천천히 따라 걸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 가금산에 좌정했을 때 이곳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도란은 새삼 가금산 풍경을 동그란 눈에 담았다. 정겹게 어깨를 기대 나뭇잎을 흔드는 키 큰 나무들과 온 땅을 소담하게 덮은 풀꽃들, 곳곳에 조화롭게 지어진 가신들의 거처, 솔가지에 앉아 깃털을 다듬는 멧새 가족, 나무와 나무 사이로 가벼운 발굽을 구르며 사라지는 흰사슴 무리. 이런 땅이 불모지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몇 안 되는 가신들을 이끌고 나무를 심고 씨를 뿌리고 궁을 지었지. 거친 잠자리에서 자며 하늘을 지붕 삼았지만 가꿔 나갈 땅과 미래가 있어서 매일 새로웠다.”
대강 깐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청하는 진사해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늘 깔끔하게 손질한 옷만 입고 누군가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온 줄 알았는데. 만년설산 신령님의 아들로 태어나 도련님처럼 귀하게만 지낸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아주 오래 걸렸어. 묘목을 구해 심고 씨를 뿌려도 기다림은 필요하니 말이다. 마음이 맞지 않는 가신도 있었고 분화구 화원의 지신처럼 나와 대적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기다렸다. 말보다 시간이 강하다 믿었고, 또 공연한 재촉도 존중은 아니라 여겼으니까.”
“…….”
“그 방식이 무성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너와 지신이 깨닫게 하는구나.”
진사해가 걸음을 멈추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란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어른거리는 감정을, 도란은 정확히 읽어 낼 수 없었다.
“네가 자라는 동안에도 너를 자주 들여다보거나 부르지 못했지. 책망한 일도 없었지만 격려한 일도 없었어. 그것이 너를 서운케 하지는 않았을지 이제야 걱정이 되는구나.”
음식에 달려드는 습관이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는 서투름이나 덤벙거리는 태도를 꾸짖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리니까 당연하다고 여겼고 또 크게 눈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분화구 화원의 일도,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 부러 몇 번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도란에게는 무심함으로 여겨졌을까.
“저는…….”
진사해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도란이 머리를 저었다.
“신령님이 저를 그냥 저로 받아 주셔서 좋았어요. 안심이 됐어요.”
아무 때나 꽈당꽈당 넘어지거나 음식을 먹다가 앞섶이나 치마를 더럽혀도 진사해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처음 세배하는 자리에서 절하는 법도 잊을 정도로 당황하여 허리만 꾸벅 숙이고 도망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다치지 않았는지 챙겨 물어 주고 소야에게 살뜰하게 돌보라고 당부하는 게 전부였다. 때로 그는 넘어진 도란을 직접 일으키기도 했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었다. 진득한 인내였고 또 한 사람 자체에 대한 애정이었다. 도란은 늘 그것을 느꼈다.
“한 번도 서운한 적 없어요.”
단단한 대답이 진사해를 어루만졌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말간 눈과 마주 대하여 설핏 웃었다.
“너그럽구나, 도란아.”
도란은 고개를 젓고 싶었다. 진짜 너그러운 건 신령님이라고, 믿겠다는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지켜 준 당신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보는 진사해의 눈빛이 평소와 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귀여운 막냇동생을 대하는 듯하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안도와 고마움과 생경함이 그의 눈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제는 나를 조금쯤 어른으로 보아 주시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인데…….
도란은 꽃물 든 듯 발간 손등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그를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 * *
가금산에 수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진사해를 보는 가금산 가신들의 눈빛을 바꾸어 놓았다. 전보다 조금은 불손한 방향으로.
그 불손한 마음을 가장 먼저 드러낸 건 소야였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땅을 돌아보기 위해 산책을 나온 진사해의 옆에 살짝 따라붙었다. 진사해는 어려운 말이라도 꺼내려는 듯 목을 가다듬는 그녀를 가만 지켜봐 주었다.
“신령님, 가을 풍경이 참 좋지요?”
“그래.”
“이따 낮에 애기 신부님이랑 같이 나오실 건가요?”
“소야, 떠보지 마라.”
진사해는 더 어울려 주지 않고 딱 잘랐다.
“도란이 요즘 내 곁에 머무는 건 분화구 화원의 일 때문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소문에는…… 막 침방에까지…….”
“뭐?”
진사해는 기가 차서 걸음까지 멈추고 소야를 돌아보았다.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끝까지 하는 소야가 찔끔한 기색으로 소문을 읊었다.
“애기 신부님이 다 크자마자 신령님이 침방으로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막 돌던걸요.”
기가 찼다. 발정기가 와도 얌전히 연못 바닥에 웅크려 시간을 보내는 신을 두고 무슨 소리를 해 댄 것인가. 누구를 불한당으로 알고. 진사해의 눈가가 살며시 구겨졌다.
“내 가신들이 언제부터 이리 말 만들기를 좋아했지.”
“저, 저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아니다.”
단호하게 답한 진사해는 다시 걸음을 옮겨 시원한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공기가 소란하여 나무들을 조금 살펴볼 계획이었다.
“네가 바리원에서 만난 아청과 어울리느라 도란을 혼자 두지 않았다면 그게 전부 낭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혼자 두지 않았습니다!”
소야는 억울했다. 우담화 나무 아래에서 재회한 죽마고우 아청과 연락을 주고받는 중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도란에게 소홀한 적은 없었다. 요즘 정신이 다른 데 팔린 건 사실 소야보다는 도란 쪽이었다. 가끔 허공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는데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해 주지도 않고.
그래도 괜한 소문 이야기로 신령님의 심기를 한 번 건드려 놓았으니 이 이상 투덜댈 수는 없었다. 진사해가 드물게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선을 지켜야 할 때였다.
“저는 그럼, 어, 식사를 좀 하러 가야겠네요! 신령님은 안 드세요?”
“생각 없으니 먼저 가거라.”
“그럼 가 보겠습니다!”
달아나듯 사라지는 소야의 뒷모습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진사해는 천천히 걸어갔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개울이 졸졸 흘렀다. 벌써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바닥에 갈색 융단이 깔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개울의 돌 틈에서 헤엄치는 송사리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랗고 빨간 단풍이 비단처럼 머리 위를 덮은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렇게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무한한 시간을 사는 그에게 한 해 한 해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해가 다르게 자라나고 피어나는 도란을 보고 있으면, 두려워한 적 없던 시간이 조금 무겁게 다가오기도 하고…….
“신령님.”
등 뒤에서 갑자기 다가온 기척에도 진사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해범아. 오랜만에 왔구나.”
“애기 신부님은 함께 안 계십니까?”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시간이 아니냐. 그 아이는 지금쯤 잠들어 있겠지.”
“……신령님의 침방에서 말입니까?”
“뭐?”
가까이 선 참나무에 손을 대고 병이 들지는 않았나 살피던 진사해가 툭 되물었다. 침방 운운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짧은 간격으로 두 번이나 들었더니 기가 막혀서 달리 질책할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진사해는 대답 없는 해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도대체 이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일까. 너는 아느냐?”
“……요즘 애기 신부님을 가까이 두신다기에.”
“해범아,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을 누가 알겠는가.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바람 속에서 태어나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해범은 진사해가 진정으로 노여워하기 시작했음을 알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가 요즘 한가하여 아침부터 이리 다니는 모양이지. 처음 이 말을 입 밖에 낸 사람을 찾아 내 앞에 데려와라.”
“……죄송합니다.”
불가능한 일인 걸 뻔히 알기에 진사해도 그 이상은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맨땅에 엎드릴 기세로 거듭 사죄하는 해범을 보던 진사해가 나직하게 당부했다.
“도란을 위해서라도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지 마라.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다들 애기 신부님을 아끼는 마음이 커서 그러지 않겠습니까.”
진사해는 대답 대신 긴 숨을 내쉬었다. 청량한 가을 공기 속으로 그의 염려가 섞여 들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 단속하겠습니다.”
“같이 휘둘리지 말고.”
“네, 신령님.”
고작해야 며칠 함께 다녔을 뿐인데 이런 소문까지 돌다니. 아무래도 지신의 일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모두에게 좋을 게 없을 듯했다. 기다림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구나. 진사해는 새삼 그것을 다시 느꼈다.
* * *
그날 밤, 진사해는 자신의 침방 앞에서 소문 속 인물과 마주쳤다.
“도란아.”
낮 내내 진사해 옆을 지킨 도란이 연못 별채로 돌아간 게 벌써 반 시진 전이었다. 잠을 잘 시간이라 돌려보냈는데 그새 또 여기 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람이 유난히 소란하여 조금 진정시키고 오자마자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줄이야.
“어찌 여기 있느냐? 자러 가지 않고.”
“오늘은 제가 문밖을 지킬게요.”
“……뭐?”
여기 서서 밤을 지새우겠다는 소리였다. 진사해가 듣기에는 참으로 뜬금없는 소식이었지만 도란은 진지했다.
아까 잘 준비를 하는데 지신이 찾아왔었다. 그녀에게 기다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령님의 진심을 전하려고 몇 마디 했다가 괜히 더 화나게 하고 말았다. 지신은 오늘 밤 진사해의 꿈에 들어가 그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다. 침의로 환복했던 도란이 허겁지겁 옷을 갖추고 여기까지 달려온 건 다 그래서였다.
진사해는 상황 설명을 들은 후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인간이라 이렇게 밤을 보내면 몸을 망친다. 지신은 나를 해칠 수 없으니 돌아가거라.”
“하지만…….”
“어서.”
“…….”
“말을 들어야지, 도란아.”
드물게 엄한 목소리였다.
도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진사해는 터덜터덜 멀어지는 도란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다가 침방으로 돌아갔다. 지신의 알맹이 없는 위협에 여기까지 달려온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어쨌든 무사히 돌려보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진사해는 생각했다.
그러나 도란이 누구인가. 하늘님이라 해도 신령님을 욕해서는 안 된다고 바락바락 소리치고, 같잖은 악몽 좀 꾸게 했다고 귀신 같은 지신과 앙칼지게 대거리를 한 그녀였다. 지신이 진사해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신령님은 모르실 거야.’
모퉁이에 숨어 진사해가 침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도란은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굳게 닫힌 침방 앞에 선 그녀는 팔짱까지 척 끼고 짐짓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러다가 침방 문에 가만히 귀를 대 보기도 했다. 진사해가 무사히 잠들었는지 확인하려는 동작이었다.
혼자 고요한 낭하를 지키고 서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다음에 지신을 만나면, 흥분해서 싸우지 말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진사해 옆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은 좋았다. 지신의 심술도 그리 밉지만은 않을 만큼. 또 지신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하고……. 그래도 신령님이 무관심하다는 건 정말 오해인데…….
꾸벅, 도란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무릎도 확 꺾이며 몸이 크게 휘청했다. 퍼뜩 정신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도란은 다시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연신 비벼야 했다.
‘앉아 있을까?’
벽에 등을 기대고 앉자 한결 편안했다. 그 편안함이 자신을 잠으로 인도할 줄 모르는 도란은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눈꺼풀이 배는 무거워졌고, 하품할 틈도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잠들면 안 되는데…….’
세워서 끌어안은 무릎이 베개 대신이었다. 잠깐만 쉬자고 다짐했는데 몸과 정신이 동시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도란의 숨이 밤과 함께 깊어졌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침방 문이 스르르 열렸다.
밖을 향하던 걸음이 멈추었다. 한 발은 낭하에, 한 발은 침방에 둔 진사해가 탄식처럼 웃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 나온 것인데 다른 곳도 아닌 자기 침방 앞에서 도란을 발견할 줄은 몰랐다.
벌써 축시(오전 한 시부터 세 시)였다.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아 가을바람을 맞으며 보초를 서기엔 너무 늦은 시간. 도란은 말 안 듣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이럴 때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정말 진정으로 지신이 두려워 이러는 걸까, 그게 아니면…….
‘신령님도 저를 여인으로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사해는 작게 웅크린 도란을 응시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새하얀 뺨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살짝 옆으로 돌린 고개를 무릎에 기대고 색색 곤한 숨을 내쉬는 모습은 천진하면서도 만개한 꽃처럼 발그레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도 단풍 같았고 입 안쪽 살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곧고 긴 목과 그 아래로 이어진 둥글고 연약한 어깨까지 찬찬히 보던 진사해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깊이 잠든 도란은 안아 올리는 손길에도 깨지 않았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희고 가는 발목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도란은 언젠가 술에 취했을 때 그랬듯 진사해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뒤척거리지도 않는 움직임이, 꼭 제 둥지를 찾아 잠든 산새 같았다.
진사해는 누웠다 일어나 조금 흐트러진 침상에 도란을 눕혔다. 몸을 굽히며 천천히 도란을 내려놓자 서로의 숨결이 뺨에 부딪혔다.
쌀쌀한 낭하에 있었던 탓인지, 그녀가 멀어진 온기를 찾아 더듬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진사해가 결국 자기 손을 내주었다. 어릴 때 못 먹고 자란 도란의 손은 아직도 작았다. 진사해의 커다란 손 위에 있으니 꼭 단풍잎처럼 보였다. 그것이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워, 그는 도란의 손을 잠깐 쥐었다 놓았다. 체온이 반가웠는지 도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진사해는 곧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나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호롱불이 어른거리는 침방에서 도란은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잡을 손이 사라졌는데도 한 손은 이불 밖으로 내민 모습이 진사해의 마음 언저리를 저리게 두드렸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정리해 주었다.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도란아.”
부르는 소리에 도란이 잠투정을 부리듯 으응, 하며 뺨을 비볐다. 아닌 척했지만 낮 내내 가금산을 돌보는 진사해를 따라다녀 피곤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지신의 용서를 받을까. 나보다 네 몸이 먼저 상하겠구나.”
눈에 보인다면 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뭐든 들어줄 텐데. 밤낮으로 분화구 화원을 찾고 있지만 지신은 마음을 풀 기미조차 없었다.
“제라도 다시 올려야 할까?”
“……아니요……. 싫대요…….”
잠에서 깬 걸까.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잠결에도 대답을 내놓으며 고개까지 살살 젓는 모습에, 진사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몄다.
이제 자게 두어야 할 듯했다.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별과 달이 유순한 빛을 내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시각이 너무나 야심했다.
‘이래서야 소야나 해범을 꾸짖을 수도 없겠구나.’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깊어 가는 밤 풍경 앞에 자리를 잡고 창문을 살짝 열자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앞에는 그가 다스리는 땅의 가을 풍경. 뒤에는 둥지로 돌아온 것처럼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도란.
예정에 없던 일이기는 하지만, 잠시 앉아 이 정취를 즐겨도 좋을 듯했다.
* * *
동트는 새벽녘.
소야를 불러 도란을 맡긴 진사해는 곧장 분화구 화원으로 향했다. 도란은 그때까지도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너른 보폭으로 여전히 풀 한 포기 없는 화원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예전에 도란이 했던 것처럼 무릎을 굽혀 땅에 손을 댔다. 밤이슬에 촉촉하게 젖은 흙을 살살 쓸다가 한 움큼 쥐어 보자, 흙과 작은 돌 조각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갔다.
손이 지저분해졌지만 진사해는 개의치 않고 땅을 다독이듯 몇 번이고 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맨손으로 땅을 조금 파 보기도 했다.
오래 죽어 있던 땅이지만 속까지 말라비틀어지지는 않았다. 맑은 물을 담뿍 머금은 흙을 좀 더 살피던 진사해는 뜻밖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돌 조각처럼 작았지만 진짜 돌 조각은 아니었다.
‘씨앗…….’
까맣고 동글동글한 씨앗이었다. 진사해는 그것을 엄지와 검지로 살살 굴려 보았다가 제자리에 두고 흙 이불을 덮어 주었다.
‘도란이가 심은 씨앗이구나.’
도란은 가금산에 온 첫해부터 이곳저곳에서 갖은 씨앗을 구해다 화원에 뿌렸다. 어떤 씨앗을 몇 개나 뿌렸는지 꼼꼼히 적어 두기도 했다. 처음에는 셈을 어려워하기에 옆에 붙어 몇 번 도와주었는데, 나중에는 혼자 곧잘 하여 손이 가지 않았다. 진사해는 지등을 켜 놓고 셈법을 보아주던 날을 떠올리다가 손을 털었다.
아직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땅 곳곳에 도란의 수고가 녹아 있다. 작고 여린 손으로 넓은 화원을 돌아다니며 구슬땀을 흘렸을 도란을 생각하니 참 기분이 묘했다. 화원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고 일부러 소야와 놀러 나가게 해도 하루 한 번은 꼭 이곳을 찾던 아이. 만년설산에 다녀온 뒤에도 여독에 지친 몸을 이끌고 꼭 자박자박 흙 위를 걸어 다니던 아이.
“그 아이가 이제 어른이 되었는데, 그간의 정성과 수고를 보아서라도 마음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지신의 신격이 낮기는 하나 진사해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도란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마음이 많이 상한 듯하고 또 외로움을 곧잘 타는 듯하니 부드럽게 달래고 싶었다.
“이 땅에 좌정한 신으로서 부족한 점은 시간을 두고, 또 여러 가신과 뜻을 합해 채워 나가겠습니다.”
좌정한 신 홀로 넓은 산맥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천상에 해와 달과 별과 구름이 모두 있고, 지상에 길짐승과 날짐승과 흙 밑에 사는 벌레가 모두 있는 것은 다 조화를 위함이다. 다스림 역시 그러해서 진사해에게도, 또 수많은 가신에게도 다 역할이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채우며 사는 것이다.
“너그럽게 땅을 열어 주시면 가금산 모두의 기쁨일 겁니다.”
특히 도란이 많이 기뻐할 것이다.
진사해는 환하게 웃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 잠잠했다. 재촉해서 될 일은 아니고 또 사과를 받으라 강요하는 것도 못 할 짓이라 진사해는 그만 걸음을 옮겼다.
꽤 오래 이러고 있었는지 어느새 해가 뜨기 시작했다. 새벽녘 안개가 자욱한 등성이를 타고 빛이 쏟아졌다. 여전히 조용한 분화구 화원을 한 번 돌아보는 진사해의 금빛 눈도 막 떠오르는 태양만큼이나 또렷했다.
* * *
도란은 구름처럼 폭신한 이불에서 겨우 눈을 떴다. 환한 햇살이 얼굴로 쏟아져 자연스럽게 잠이 달아났다. 가을 아침 특유의 개운하고 서늘한 기운이 발끝으로 밀려와, 도란은 두 다리를 살짝 접어 맨발을 이불 안으로 감추었다.
코를 묻은 이불에서 잘 마른 나무껍질 냄새가 났다. 햇볕에 오래 널어 말린 듯 기분 좋은 냄새였다. 좋기는 하지만 어째 평소와는 느낌이 조금 다른…….
“아!”
도란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마자 발치에 있던 소야가 화들짝 놀랐다.
“애기 신부님!”
도란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못 별채가 아니었다. 그럼 설마. 도란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기도 전에 소야가 수선을 떨며 다가왔다.
“신령님한테 들었어요. 분화구 화원 지신 때문에 이 앞에서 잠드셨다면서요? 차가운 데 앉아 잠들면 입 돌아가는데, 아휴, 신령님이 발견 못 하셨으면 어쩔 뻔했어요.”
“여기…… 그럼…….”
“신령님 침방이죠.”
도란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키겠다고 요란을 떨어 놓고 혼자 잠들었다가 신령님의 품에 안겨 침상까지 들어오다니. 그의 침상을 차지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바리원에서야 술 때문이었다 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핑계도 없었다.
도란의 생각을 모르는 소야는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아들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마른 풀 내음이 물결치듯 쏟아져 들어왔다.
“신령님이 아까 새벽에 저 불러서 여기 두고 나가셨어요. 우리 애기 신부님 돌봐 드리라고요. 자, 소세하셔야죠?”
소야는 물이 찰랑거리는 대야를 도란 앞에 내어 주었다. 도란은 서둘러 이불을 걷고 얼굴부터 닦았다. 마른 천을 옆에 놓아 주던 소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세요? 천천히 하고 아침 먹어도 되는데.”
“신령님한테 가 보려고요.”
소야는 흐뭇함을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다.
오늘 아침, 진사해는 소야에게 앞뒤 상황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도란이 화원에서 한 품은 지신을 발견한 일이며, 그 지신의 위협에 겁을 먹고 진사해를 지키려 애쓰고 있다는 것까지, 전부. 그 설명을 들은 후에야 소야는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하던 요즘의 애기 신부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신은 진사해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맡은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느라 분주한 도란의 모습은 소야를 무척 뿌듯하게 했다. 신과 가신들 앞에서 긴장하여 덜덜 떨다가 무릎을 쿵쿵 찧으며 넘어지던 어린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진사해가 도란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그저 달고 다닌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의욕적인데 어떻게 낙담시키겠느냔 말이다.
“그럼 어서 옷 입혀 드릴게요.”
도란은 뒤늦게 자기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분명 평상복을 입고 낭하를 지켰는데 지금은 침의 차림이었다.
“시, 신령님이 옷 갈아입히신 거예요?”
“네? 그럴 리가요. 제가 아까 새벽에 갈아입혔죠.”
“아…….”
괜한 상상을 한 것이 부끄러워, 도란은 옷을 갈아입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야는 조용해진 애기 신부님의 머리를 곱게 닦고 빗은 후 머리에 댕기까지 묶어 주었다. 어릴 때의 도란은 소야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제는 얌전히 머리를 맡긴 채 오늘의 할 일에 골몰한 한 사람의 어른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따라 아쉽고 서운하고 대견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포동포동한 여인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두 손을 포갠 모습은 영락없는 요조숙녀였다.
“다 됐죠? 저 얼른 갈게요!”
“다녀오세요!”
우당탕 문을 열고 분홍빛 치맛자락을 날리며 버선이 다 보이도록 허겁지겁 뛰어가는 모습은…… 요조숙녀와 좀 거리가 먼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소야는 도란을 배웅하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에라도 우리 애기 신부님 잘 큰 것 좀 보라며 자랑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아무래도 죽마고우 아청에게 보낼 편지에라도 이 얘기를 꼭 적어야겠다 싶었다.
한편, 소야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 편지에 적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도란은 숨이 턱에 닿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지나가는 가신들로부터 진사해가 바위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마음이 급했다. 깎아지른 듯 높은 바위산에서 지신이 신령님의 등을 확 떠밀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벌써 아찔했다. 물론 신령님은 하늘을 날 수 있지만 놀라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신령님!”
도란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자잘한 모래가 손바닥을 스치며 아래로 흘러갔다.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붙잡고 헐떡거리며 경사를 오르자 마침내 바위산으로 통하는 길이 나타났다.
군데군데 억센 풀이 돋아난 바윗길은 단단하고 무서웠다. 인위적인 난간이 없는지라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도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오른쪽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히 먼 바닥에 비죽비죽 솟아난 침엽수들이 꼭 말뚝 같았다. 저기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저절로 오금이 저려 도란은 억지로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
돌로 막힌 왼쪽에 손을 대고 조심히 나아갔다. 신령님은 이 높은 곳까지 왜 가신 걸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긴장한 중에도 그런 염려가 들었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걷긴 했지만 위험할 정도로 좁은 길은 아니었다. 전에 소야와 몇 번 와 본 적 있는 곳이라 크게 낯설지도 않았다. 허둥거리지만 않으면 무사히 정상에 올라 진사해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호랑이 우짖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아!”
막 오른발을 뻗던 도란이 놀라서 균형을 잃었다. 발이 쑥 빠지며 몸이 우편으로 기울었다. 허공을 밟고 넘어진 도란의 몸이 그대로 추락했다. 꽃잎 같은 분홍 치마가 펄럭거리며 시야를 가렸다. 이대로 죽나 싶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마등 따위도 없었다.
그때 크고 단단한 손이 나타났다. 뺨과 귀를 날카롭게 스치는 바람을 가른 손이 도란의 등을 받쳤다. 다른 팔이 무릎 뒤로 들어오자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마치 구름에라도 안긴 듯 편안했다. 아픔도 하나도 없었다. 맹렬한 바람 소리도 멎었다.
“……신령님.”
도란은 자신을 받쳐 안은 이를 보고 겨우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무 놀라서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도란을 고쳐 안은 진사해는 그대로 정상까지 날아올랐다. 떨어진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 상승하자, 바람이 도란의 머리카락을 반대 방향으로 흐트러뜨렸다. 도란은 마구 나부끼는 옷자락과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진사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갑자기 들은 호랑이 울음소리 때문인지 낙하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신령님에게 안긴 자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진사해의 두 발이 곧 정상에 닿았다. 단단한 바닥을 딛고 선 그가 제 품의 도란을 내려다보았다. 도란은 자신을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 들고 얼굴을 가까이 하는 그의 금빛 눈에 그대로 홀리고 말았다. 가까운 산의 낙엽 냄새가 전해졌다. 아니, 진사해의 체향인 듯도 했다. 그리고 세상을 발밑에 둔 듯 높은 곳까지 들려오는, 짝지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
“다친 곳은?”
“…….”
“도란아, 다쳤느냐?”
“아, 아니요!”
얼른 정신을 차린 도란이 급한 몸짓으로 땅을 밟았다. 그러나 아직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곧바로 휘청거렸다. 진사해가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조금 앉아야겠구나. 많이 놀랐을 테니.”
진사해는 직접 도란을 바위에 앉혀 주었다. 도란은 붉어진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고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선선한 공기가 도란의 뺨을 식혀 주었다. 놀란 심장도 조금 진정되었고 몸의 떨림도 천천히 가셨다. 진사해는 도란의 옆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며 기다려 주었다.
“저, 신령님……. 감사합니다.”
비명을 듣고 와 준 것일까. 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몸을 감싸던 팔은 너무나 의지가 되었다. 도란은 자신의 등을 받쳤던 그의 커다란 손을 몇 번이나 흘끔거렸다.
“위험한 곳이니 꼭 소야와 함께 와야 한다.”
“네……. 오늘은, 신령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왔어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진사해는 타박하지 않았다. 먼 곳에 있던 그의 시선이 다시 도란에게 닿았다.
“그랬구나.”
“지신님은 안 계시네요. 혹시 신령님을 밀어 버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는데.”
“도란아, 네 걱정을 해야지.”
따뜻한 손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사라졌다. 어깨를 다독거린 적은 있어도 머리를 만져 준 건 처음이라 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막상 진사해는 자기가 뭘 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그저 다정하고 깊은 눈으로 대답을 채근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다니거라.”
“……네, 신령님.”
“이만 내려가자.”
“어, 할 일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닌가요? 제가 방해했으면 저쪽에서 조용히 기다릴게요.”
걱정 어린 말에 진사해가 빙긋 웃었다.
“일은 이미 끝났다. 서한을 하나 받으려고 기다렸을 뿐이니까.”
“아, 편지…….”
도란은 그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뒤늦게 발견했다. 볼일은 정말 끝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하산할 텐데, 방금 떨어질 뻔해서 그런지 선뜻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고 부탁드려도 될까 고민하는 도란에게로 뜻밖의 제안이 전해졌다.
“안아서 데려가 주마.”
“……네?”
“아까처럼, 안아서.”
특별한 말도 아니었는데 도란의 귓불이 새빨개졌다.
진사해의 넓고 탄탄한 가슴팍과 따뜻한 손, 가까웠던 숨결이 동시에 떠올랐다.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 넋을 잃었던 것까지도. 그 바보 같은 얼굴을 신령님이 코앞에서 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뒤늦게 쥐구멍이라도 파고 싶었다. 그러나 진사해는 그리 꺼리지도 않는 기색으로 도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제가 혼자 내려갈게요.”
“또 떨어지면 어찌하려고.”
“조심하면 되죠.”
방금 위험한 일을 겪은지라 별로 자신이 없어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녀가 왜 망설이는지 알아차린 진사해가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바리원에서 술을 마셨을 때나 어제 잠들었을 때는 내게 편히 안기더니.”
도란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소리쳤다.
“그, 그건!”
“그건?”
차가운 바람도 부끄러움을 식혀 주지는 못했다. 도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만 연신 귀 뒤로 넘기며 부산을 떨었다. 신코만 내려다보던 그녀가 겨우 한 마디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과할 필요 없다.”
“…….”
“다 자란 네게 해 줄 일이 남아 있어서 나도 기쁘니까.”
“…….”
“자, 어서.”
도란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진사해에게 다가갔다. 도란의 무릎 아래로 팔이 들어오더니 몸이 번쩍 들렸다. 그녀는 작은 비명과 함께 진사해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잠들어 있을 때는 잘도 안겼다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몸이 뻣뻣하고 어색한지 모르겠다. 이제는 얼굴에 뭐가 묻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긴장하지 말고.”
온몸에 힘이 들어간 걸 느낀 것일까. 달래는 음성이 다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는다고 정말 긴장을 풀 수는 없어서 도란의 목은 더욱 빳빳해졌다.
곧 둘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따스한 손이 도란의 눈을 덮어 무서운 풍경을 가려 주었다. 도란은 그 아래에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길고 빽빽한 속눈썹이 진사해의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도란은 신령님도 자신의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걸 느낄 수 있을지, 애가 타도록 궁금했다.
진사해는 그녀를 안전한 평지에 내려 줄 때까지 말이 없었다. 푹신한 흙바닥에 두 발이 닿음과 동시에 눈을 가렸던 손이 사라져, 도란은 조금 눈이 부셨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이 시야를 흐린지라 진사해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이만 돌아갈까?”
“아, 네.”
도란과 나란히 걸으면서, 진사해는 그녀의 눈을 덮었던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손바닥을 간지럽힐 때의 감각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작은 나비를 손에 앉힌 듯 조심스럽고 저절로 숨소리가 낮아지던, 다디단 긴장과도 같은 무언가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지신님이 안 보이네요. 매일 보다가 안 보니 괜히 조금 궁금하기도 해요.”
“…….”
“신령님?”
낯선 감각에 휘말려 놓쳤던 맑은 음성이 귓전에 부서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거진 나무 사이로 스민 햇살이 도란의 얼굴에 얇은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보얀 뺨이 발그레했다.
“그래, 그렇구나.”
진사해는 적당한 답을 건네며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손을 한 번 더 쥐었다 펴 보았지만 맨살에 스민 따스한 느낌은 끝내 가시지 않았다.
* * *
날이 저물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도란은 흙이 묻은 옷자락을 털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신령님이 왜 그러셨을까?’
원래 과묵한 편이기는 했지만 그는 오늘따라 말이 적었다. 눈이 마주치는 일도 평소보다 적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바위산에서 자신을 안고 내려올 때의 신령님은 평소와 같이 다정했는데.
‘편지에 안 좋은 말이 적혀 있었던 걸까…….’
도란은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손을 움직였다. 책장에 꽂힌 책자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건 그저 가벼운 소일이었는데, 비죽비죽 흐트러진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자 어쩐지 제대로 정돈하고 싶어졌다. 도란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잠시 밀어 두고 본격적으로 책장에 달라붙었다.
“이게, 잘 안 빠지네…….”
자리가 모자라 꽉꽉 밀어 넣은 탓에 책자가 제대로 빠지질 않았다. 도란은 종잇장을 엮은 실에 검지를 걸고 잡아당기며 힘을 주었다. 소야가 있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마침 그녀도 일찍 자러 간 뒤였다.
될 것 같은데. 어금니까지 물고 힘을 주던 도란이 다른 손으로 책장 가장자리를 잡으며 거의 눕다시피 몸을 뒤로 젖혔다.
“아!”
책자가 쑥 빠져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렸던 몸이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설상가상 실이 끊어졌는지 얇은 종잇장이 팔랑팔랑 공중에 날렸다. 주저앉은 도란은 공중에서 춤추듯 나부끼는 종이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어.”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종이 때문에 엉망이 된 바닥에 선 지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무식하게 힘으로 빼려고 하니까 그러지. 모름지기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어야 돼.”
“지신님, 오셨네요?”
타박이 들리지도 않는지 도란이 명랑하게 일어났다. 반가움마저 묻어나는 음성에 지신이 코웃음을 쳤다.
“오늘은 안 나타나서 기뻐할 줄 알았더니.”
도란이 배시시 웃었다. 신령님을 괴롭히는 건 밉지만 그래도 지신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화원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얘기를 들어 준 이이기도 하고, 또 심술을 부릴 때만 빼면 제법 정답기도 하니까. 매일 보다가 갑자기 안 보이니 궁금하다고, 진사해에게 건넸던 말은 진심이었다.
“신령님한테 나쁜 짓만 안 하면 오시는 게 좋죠.”
“흥.”
또 신령님 타령. 지신은 흩어진 종이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놈이 새벽부터 시끄럽게 굴어서 하루 쉬었을 뿐이야.”
“신령님이 화원에 가셨어요? 뭐라고 하셨어요?”
지신은 괜히 우물쭈물하다가 팩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도란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풀어 달라고, 부족한 점은 앞으로도 차차 채워 나가겠다고 호소하던 신은 진심이었다. 신격이나 힘으로 찍어 눌러도 될 자신 앞에 몸을 낮추고 잔잔하게 사과하는 게 당황스러워서 잠시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도란을 힐끗 본 그녀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딴청을 피웠다. 종이 한 장을 쓱 들어 올리는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글자들은 다 뭐야? 뭘 이렇게 직직 그었어?”
“어릴 때 셈을 잘 못해서…… 고치느라고 그래요.”
도란은 민망한 듯 지신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그래 봤자 바닥에 흩어진 게 훨씬 많아, 지신처럼 쪼그려 앉아 주섬주섬 종이를 주워 모아야 했지만. 지신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무슨 보물처럼 모으는 도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셈? 셈은 왜 했는데?”
“그야 화원에 뿌린 씨가 몇 개인지 알아 두려고 그랬죠. 계절 따라, 또 종류별로 많이 심었으니까 헷갈리면 안 되잖아요.”
“……그걸 이렇게까지 기록했었어?”
“네에.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요.”
수고도 몰라주고 땅을 열어 주지 않는 지신을 보는 도란의 눈에 투정 같은 서운함이 맺혀 있었다. 지신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종이를 모으는 일에 손을 보탰다.
“여긴 서체가 다르네?”
“그건 신령님이 쓰신 거예요.”
종이를 넘겨다본 도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제가 셈을 어려워해서 알려 주셨거든요. 처음에는 소야 선녀님한테 부탁드렸는데, 선녀님이 자기도 셈은 싫어한다고 하셔서…….”
“그래서 신이 널 가르쳤다고? 직접?”
“네.”
짧지만 확실한 대답에 지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종이를 거의 다 주운 도란은 그것을 가지런히 하며 지신의 표정을 살폈다.
“신령님은 화원을 내팽개치신 게 아니에요. 절 계속 도와주신 것처럼, 화원에도 분명 마음을 기울이고 계셨을 거예요.”
“말은 번지르르하지.”
퉁명스러운 대꾸였지만 심통은 많이 빠져 있었다.
지신은 한동안 글씨가 가득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셈을 했다면서 숫자만 적힌 건 아니었다. 도란의 서체로, 또 진사해의 서체로 다양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날씨에 대한 기록도 있고 날마다 다른 흙의 상태에 대한 기록도 보였다.
“뭐, 날 아주 내버리지 않았던 건 사실인 것 같네.”
선심 쓰듯 인정해 주자 도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의 작은 손이 잘 포갠 종이 위를 쓸고 지나갔다.
“저도 이렇게 오랫동안 애썼고, 신령님도 많이 도와주셨는데…….”
“…….”
“이제 용서해 주시면 안 돼요?”
도란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지신의 눈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잘 준비를 하느라 풀어 내린 머리카락이 사르르 쏟아졌다. 종이 뭉치를 들고 나란히 쪼그려 앉은 도란을 보던 지신이 돌연 얼굴을 돌리며 그녀의 어깨를 툭 밀었다.
“아!”
가볍게 미는 손길에 금세 균형을 잃은 도란이 살짝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신은 그새 벌떡 일어난 뒤였다.
“앙큼하게 굴면 봐줄 줄 알고?”
“봐주실 것 같은데…….”
“뭐?”
지신은 바닥에 주저앉은 주제에 맹랑한 소리를 하는 도란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왠지 용서해 주실 것 같아요.”
“…….”
“아닌가?”
지신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공연히 얼굴을 붉혔다.
새벽부터 찾아와 이해를 구한 진사해 때문에 속이 좀 풀어졌던 건 사실이다. 게다가 도란과 그가 함께 씨앗을 셈하고 땅을 관찰한 기록이 결정적으로 마음을 흔들었다. 도란이 민들레 같은 손으로 붓을 들고 셈법을 배우느라 끙끙거렸을 걸 생각하면, 이만 고집을 꺾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란은 달라진 지신의 분위기를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렸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래된 벗처럼 그녀를 포옹했다.
“지신니임…….”
누구에게 이렇게 안긴 건 처음이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너무 쑥스러워서 지신은 괜히 뒤척거렸다.
“갑자기 왜 이래? 떨어져.”
“꽃 좀 피워 주세요. 네? 정말 안 돼요?”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서 도란은 지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뺨을 비볐다. 그러나 잠깐 굳었던 지신은 홱 도란을 떨쳐 냈다. 엉거주춤하게 밀려난 도란은 이게 아닌가 싶어 지신을 살폈다. 소야 선녀님은 이러면 참 좋아하던데, 아무래도 지신님은 좀 다른 모양…….
“너, 너 꼭 전해!”
아예 등을 돌려 버린 지신의 목소리가 어쩐지 떨리고 있었다.
“내가 꽃을 피워 주는 건 네 잘난 신령님 때문이 아니야. 그냥 몇 년 내내 이걸 쓴 네 손이 불쌍해서 그래!”
도란은 천천히 지신의 말을 이해했다. 만개하는 반가운 마음에 손에 든 종이 뭉치도 잊고 펄쩍 뛰어 다가갔는데, 지신은 짐짓 성질 나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왜 대답이 없어? 진사해 예뻐서 해 주는 거 아니야!”
“네, 알았어요! 그럼 이제 꽃 피는 거죠?”
“그럼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겠어?”
“너무 기뻐요!”
도란은 정말 기쁜 듯 지신을 꽉 끌어안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지신은 괜히 싫은 듯 인상을 쓴 채로도 못 이기는 척 그녀에게 안겨 있었다. 힘이 약하다 해도 인간 여자쯤이야 언제든 팽개칠 수 있는데도.
“제가 매일 가서 물도 주고 흙도 돋워 주고 잡초도 뽑아 줄게요. 정말 매일매일 열심히 할게요!”
“가끔 수다나 떨러 와.”
“매일 갈게요!”
“매일은 됐어. 네 수다를 매일 듣다가 귀에서 피 날 일 있어?”
가시가 하나도 없는 공연한 타박에 도란이 웃었다. 지신은 도란을 밀어 내며 먼저 한 발을 옮겼다.
“천천히 따라와.”
“네?”
“너 내가 작은 신인 줄 알지? 자랑할 건 아니지만, 오늘은 내 땅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보여 줄게.”
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해도 없는 밤에 무언가 피워 내려는 걸까. 숨을 들이켜며 감탄하자 지신이 으쓱한 표정으로 뱉었다.
“이따 보면 아주 기절하겠다, 기절하겠어.”
지신은 그 말만 남기고 문을 통해 휙 사라졌다.
도란은 잠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행복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놓고 후다닥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품으로 밀려오며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도란은 머리를 묶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신부터 신었다. 그리고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연못을 지나 너른 하늘 아래를 가로지를 때 나무들이 일제히 이파리를 흔들었다. 잔디가 모두 한 방향으로, 도란이 달리는 방향으로 누워 춤을 추었다.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길을 달음박질쳐 화원으로 가던 그녀가 중간쯤에서 우뚝 멈추었다. 풀벌레 노래와 바람 소리만 그녀를 휘감았다.
곧 그녀가 방향을 바꾸었다. 별빛이 밝혀 준 길을 따라가 도착한 곳은 신령님, 진사해의 방이었다.
“신령님!”
기별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지 않은 것만이 도란의 최선이었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그녀의 뺨은 이미 발갛게 물들었고, 숨이 차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달뜬 부름에 밖으로 나온 진사해가 깜짝 놀란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도란은 개의치 않고 그의 긴 소매를 잡았다. 그녀는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맑게 외쳤다.
“신령님, 꽃이 필 거래요. 지금 저랑 보러 가요!”
“꽃이?”
“빨리요!”
그래서 진사해도 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도란의 걸음에 맞춰 움직임을 빨리했다. 한 번도 진사해를 뒤에 두고 앞서간 적 없던 그녀는, 세상 모든 것을 잊은 듯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진사해는 처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긴 머리카락이 환상처럼 흔들려 시야를 어지럽혔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언덕을 지나 마침내 분화구 화원에 다다랐을 때.
“어.”
도란은 빠르게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여전히 황량한 땅을 바라봐야 했다.
“이게…….”
이게 아닌데. 분명 지신님이 꽃을 피워 준다고 했는데.
믿을 수가 없어서 도란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녀의 한쪽 발이 부드럽게 젖은 흙을 밟은 순간.
땅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도란의 발치에서, 연녹색 새싹들이 생생하게 숨 쉬는 흙을 뚫고 고개를 내밀었다. 순식간에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난 새싹들이 앙증맞은 잎사귀를 펼쳤다. 크기도 빛깔도 다양한 식물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듯 보였다.
“신령님, 보세요!”
숨죽여 속삭이는 도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기적을 목도하는 이처럼 조심스럽게 다른 한 발도 화원에 들여놓았다. 그러자 발 닿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른 점은, 이번에 자라난 풀들이 더욱 싱싱하고 크다는 것.
“땅이 살아났어요.”
이 순간이 오면 그동안의 수고가 떠올라 엉엉 울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쁨으로 빠듯하게 부풀어 오르며 세상의 빛깔이 일시에 변했다. 별들이 비처럼 그녀 위로 쏟아졌다.
진사해는 여린 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별빛에 물든 채, 그녀는 꽉 쥐고 있던 진사해의 소매를 놓았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원 중앙으로 달려갔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도란은 있는 힘껏 달리며 제 발밑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벅차 더는 달릴 수 없을 것만 같은데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두 팔을 양옆으로 활짝 펼치자 그대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땅은 점점 더 맹렬히 살아나 움츠렸던 초록들을 힘차게 밀어 올렸다.
발아래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풀이 무성해지고 꽃이 만개하며 식물들의 키가 점점 커졌다. 결국 도란의 키를 넘긴 그것들은 달리는 그녀의 모습을 감췄다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진사해는 꽃과 풀 사이로 언뜻 보였다 사라지는 도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작은 참새가 풀숲을 헤치고 다닐 때처럼,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꽃대가 흔들렸다. 그녀의 움직임이 멎더니 곧 경의에 찬 감탄이 노래처럼 솟았다.
“전에 심었던 씨앗이 전부 싹을 틔웠어요. 이건…… 이건 소야 선녀님이랑 심은 방울꽃이에요! 참싸리도, 금낭화도 있어요! 땅 밑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도란은 화원 곳곳을 달리며 자신이 심은 꽃과 풀을 찾았다. 피어나기를 소망하며 어찌나 공부했는지 이파리의 생김이나 줄기가 갈라진 모양만 보고도 식물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나도 죽지 않았어요. 심지어 전에 심은 배추도요!”
진사해에게 하는 말인데 그렇게 들리지가 않았다. 도란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이 수고하여 가꾼 땅에, 또 그 땅을 내내 비춰 주고 적셔 준 하늘에, 이 화원을 한 번이라도 스쳤던 구름과 빗방울과 안개의 작은 입자들에, 벅찬 가슴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전부 피었어요, 신령님!”
도란은 주저 없이 화원 중앙으로 달렸다. 도란의 키를 넘겨 자라난 이파리들이 뺨을 간지럽히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마음은 뜨겁게 달아오르는데 하나도 덥지 않았다. 오히려 기류를 타 멀리 비행하는 새처럼 상쾌하고 자유로웠다.
화원 가운데 빈 땅에 도착하자 아래서 무언가 굼실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란은 세계의 탄생을 지켜보는 듯 숨을 죽이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흙이 갈라지고 싹이 트더니 순식간에 몸이 붕 떠올랐다.
“어어!”
진사해는 무성한 화초 너머로 들리는 외침에 귀를 기울였다. 급하게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했을까. 안으로 들어가 일으켜 세우려고 발을 떼자마자 지저귐 같은 웃음이 화원 가운데서 터져 나왔다.
“하지 마세요, 지신님. 너무 높으면 무섭단 말이에요!”
무슨 일인지 알기도 전에 커다란 분홍빛 봉오리가 화원 가운데서 솟아올랐다. 봉오리를 중심으로 치맛자락처럼 넓게 펼쳐진 잎이 꽃의 정체를 짐작하게 했다.
연꽃, 물 없는 땅에서 기적처럼 솟아난 연꽃이었다.
도란의 웃음이 꼭 방울 소리 같았다. 진사해는 그 소리가 어디서 울려오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꽃봉오리 안에 있었다.
순백의 달빛을 담뿍 머금고, 봉오리가 열렸다.
소녀의 손톱처럼 순한 연분홍빛 꽃잎이 한 장 한 장 마법처럼 펼쳐졌다. 가장 낮은 곳에서 줄기를 뻗어 가장 높은 곳까지 다다르는 향기로운 꽃 안에, 도란이 꽃말처럼 앉아 웃고 있었다.
달이 그녀만을 위한 등처럼 더욱 환해졌다. 멍하게 선 진사해의 등 뒤에서 바람이 밀려왔다. 빛 조각과 작은 꽃잎이 날개 단 듯 날아올랐고, 넓게 펼쳐진 연잎이 뒤집혔다. 눈부신 초록빛 바다가 파도치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신령님!”
그 바다 한가운데 연꽃 배를 타고 떠오른 도란은, 무서움도 잊고 환해졌다.
“너무 예쁘죠?”
진사해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도란의 머리카락이 찬란하게 나부꼈다. 그녀의 뒤편으로 치맛자락이 꽃잎처럼 펼쳐졌다. 자신을 보며 웃는 얼굴이, 꾸밈없는 명랑함이, 만개하듯 앉은 자태가…….
꼭 신부 같았다.
“그래, 예쁘구나.”
이상하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오늘의 달과 별을 전부 가슴에 간직하려는 듯 하늘로 눈을 돌린 도란은 진사해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 가금산에는 두 송이의 연꽃이 피었다. 하나는 분화구 화원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진사해의 심장 언저리에.